월간 음악춘추

한국합창총연합회 이사장 겸 안양시립합창단 상임지휘자 이상길 / 음악춘추 2012년 7월호

언제나 푸른바다~ 2012. 7. 1. 2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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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우가 만난 이 달의 아티스트

한국합창총연합회 이사장 겸 안양시립합창단 상임지휘자 이상길
따스한 인간미 흐르는 합창 추구

 

  조물주는 인간에게 성대(聲帶)를 주었다. 그래서 서로 대화할 수 있고, 혼자 또는 여럿이 함께 노래할 수 있게 되었다. 성대는 구매할 필요도, 휴대의 어려움도, 시간과 공간의 제한도 없는 가장 자연적인 악기다. 여러 사람이 혼연일체가 되어 노래하는 합창은 가장 경제적인 예술 활동이다.
  21세기 들어 한국합창계에 전세계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몇 세대를 거치며 현격한 발전상을 도모해 왔다. 이의 중심에 한국합창총연합회가 있으며, 이를 이끄는 이상길 이사장을 만나기 위해 그가 1학기 종강을 앞두고 마지막 합창수업이 있던 한국예술종합학교 연습실을 찾았다.
  지휘자 이상길, 키가 큰 편은 아니지만 다부진 몸매다. 그가 연주하는 합창의 여러 면을 고찰할 때마다 ‘합창계의 작은 거인’이란 강한 인상을 느끼곤 한다. 그의 지휘 동작(Motion)은 불필요한 운동이 배제되고 절제되나, 다변화의 음상(音像)을 폭넓게 펼치고 그려 나간다. 시각적으로 정돈되고 청각적으로 다채로움을 만끽하게 하는 연주 스타일이란 생각이다. 그는 서울에서 출생하였으나 9개월 만에 6·25전쟁을 겪었고, 이후 성장 및 제2의 고향은 수원이다.

 

박경우_ 성장기에 어떤 아이였다고 기억하십니까?


이상길_ 바보 같고 어수룩했던 아이였던 것 같습니다. 지금도 종종 그렇게 생각되곤 합니다.(웃음) 똑똑하지도 야물지도 못했습니다.

  어수룩했던 아이는 성장하여 합창계 및 공연계 중심에 우뚝 섰다. 그의 음악에서 더 이상 어수룩함은 엿볼 수 없다.

 

박경우_ 학창시절 음악관련 학습이나 체험은 어떻게 진행해 왔습니까?


이상길_ 초등학교 시절 누님이 하모니카를 선물해 주셔서 심취했었고 학예회에서 발표도 했습니다. 중학교 때 주변에서 관악부를 권유했지만 키가 크지 못해 입단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다 고등학교 때 관악부에 들어갔는데, 그 당시에는 남학생들 가운데 음대 진학자들이 대부분 그 곳 출신들이었습니다. 트럼펫 전공으로 대학에 입학했지만 2학년 때 작곡으로 전과하였습니다. 어려운 시절이었는데, 다행히 김장환(전 극동방송 이사장) 목사님께서 4년간 장학금을 지급해 주셨습니다.

 

박경우_ 대학 졸업 후 어떤 활동을 하셨습니까?


이상길_ 첫 직장은 공립학교 임용고시에 합격해 9년간 교사로 재직하였고, 향학의지로 연세대학원을 졸업하면서 서울신학대학교에서 합창과 화성학을 강의했습니다. 이를 계기로 중등학교에서 대학교로 진출하고자 대안도 없이 교사 직을 사직했습니다.
  
  그의 나이 31세 때, 미국행을 결정하고 방문하는데, 입국심사 과정에서 불법체류를 위해 오지 않았느냐는 듯 취급해서 몹시 불쾌하였다고 한다. 동행했던 목사님께서도 마찬가지 느낌을 받아 이후 미국에 대해 환멸을 느끼고 1달 후 귀국을 결정한다. 물론 그 때 판단이 잘못이었다는 생각을 토로한다. 대학에서 강의를 담당하던 시기에 수원시립합창단이 창단되고 이상길은 지휘자로 위촉된다. 이후 몇 년이 지나자 자신의 지식과 레퍼토리의 한계를 느끼게 될 무렵, 당시 대학원 지도교수였던 박재열 교수는 “유학을 가는 것은 대학으로 진출하거나 단체를 맡기 위해서인데, 이미 단체를 맡았으니 지식, 정보 및 자료를 수집하기 위해 서머스쿨이나 윈터스쿨을 가는 것이 좋겠다”고 조언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7년간 매해 서머스쿨을 다녔는데, 1∼2개월을 지내는 동안 남들이 1∼2년 유학하며 학습하는 정도 이상 학문적 적립의 성과를 거두리라 결의했다. 이 과정에서 자료수집, 학습, 경험하고 본 것들이 이후 수원시립합창단 발전을 위한 초석이 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다 또 한계에 봉착하게 된다. 그 때 미국에서 테너 옥인걸 선생을 만나게 되고, 그를 통해 박정선 교수, 이동훈 교수 등을 소개받는다. 옥인걸 선생은 이후 수원시립합창단 연주회를 다녀가며 연주가 좋다고 말하고 자신이 조금만 도와주면 더욱 좋아질 것이라고 제안하여 또다른 인연이 시작된다.
  단원들의 레슨, 세미나 등을 통해서 ‘소리를 어떻게 바꿔 나가야 하는지’, ‘어떻게 클리닉 해 나가는 것인지’, ‘어떤 소리가 문제가 있는 소린지’, ‘그 소리를 어떻게 고쳐나가야 하는지’ 등 그 때 많이 깨닫는 계기가 된다. 이후 3년간 매해 여름 옥인걸 선생이 올 때마다 수원시립합창단에 모신다. 이 기회를 통해 이상길은 옥인걸 선생의 영향으로 음악을 만들어 나가는 방법, 성악에서 중요시 생각하는 이슈들, 소리를 어떻게 고쳐나가는지, 어떤 소리가 나쁜 소리고 어떤 소리가 좋은 소린지, 나쁜 소리는 어떻게 고쳐나가는지 파악하였고, 이를 통해 음악적 귀(耳)도 열리게 되었다. 그 때 경험한 것이 지금까지도 굳건한 초석이 되었다고 말한다. 이상길은 비록 해외에서 정규적인 유학생활은 못해 아쉬움도 있지만, 이를 만회하고 보강하기 위해 몸부림쳐 왔다.

 

박경우_ 많은 학생들이 해외유학을 하지만, 그 모든 역량이 실제로 일선에서 활용되지 못하는 사례들이 비일비재하여 안타깝습니다. 그러나 이사장님께서는 수원시립을 담당하고 이끌어 나가는 기회가 주어졌기 때문에 실무를 통해 이론을 재정립하는 기회가 되지 않았는가 생각합니다.


이상길_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실제 합창단을 담당하며 바른 길인지 그릇된 길인지 모호했던 부분들에 대해 파악하고 깨우치는 좋은 기회였습니다. 즉, 과거에 문제 해결이 안 되던 것을 새롭게 알게 되는 기회였습니다. 합창단과 함께 할 기회가 없었다면 그것은 단지 이론에 불과하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종종 저 자신이 운이 좋고 선택받은 사람이란 생각이 듭니다. 지금까지 활동하며 나름대로 즐기고 있고, 남에게 영향력을 줄 수 있는 것에 보람을 갖습니다.

 

  상업에 종사하시던 이상길의 선친께서는 아들이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기를 희망하셨다고 한다. 이상길은 작은 체구지만 태권도 공인 2단, 유도 1단, 복싱을 3년 정도 했고 기계체조에도 관심을 가졌다. 그러나 육사에는 생각이 없고 오직 악기에만 관심을 두었다.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악기연습에 주력하며 우여곡절이 많았다. 이상길이 트럼펫에서 작곡으로 전과한 이유는 그릇된 주법으로 고음이 해결되지 않았고, 한편 지휘에 뜻을 두었기 때문이다. 당시 오케스트라 지휘에 관심이 있었고 한참 고심하다 전공을 바꾸려고 생각한다. 그래서 작곡을 김순재(김순세 선생의 동생) 선생에게서 배우게 된다. 물론 전과를 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후에 한성석 선생을 만나며 현대음악 기법을 배우게 되었다. 1학년 시절 합창시간을 담당했던 선생님의 지휘가 너무 멋있게 느껴져 2년여 동안 그분께 합창지휘를 배웠으며, 지금 자신의 지휘스타일이 그 때 틀이 잡힌 것이라고 말한다. 대학 3학년부터 2년 동안 원경수 선생의 세미나를 통해 관현악 지휘법을 배웠다. 젊어서는 오케스트라 지휘를 많이 못했지만, 옥인걸 선생이 가능하면 벤자민 브리튼의 「전쟁 레퀴엠」을 공부해 놓으라는 조언에 귀 기울인다. 합창지휘자로 활동하다 보면 오케스트라를 만나게 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후 세월이 가다 보니 오케스트라와 함께 자주 연주하게 되었다고 한다.

 

박경우_ 한국합창계의 현 상황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파악하고 있습니까?


이상길_ 양적으로 많이 팽창했습니다. 지휘자도 많고, 합창단도 많이 생겨났고, 정보와 자료도 풍족한 환경이고, 전반적으로 상향 평준화가 되었지만, 정말 합창다운 합창, 인간미가 흐르는 합창이 아쉽습니다. 너무 테크닉적인 지향이 걱정이고요. 또한 과거엔 연합활동이 활발했었습니다. 합창인들의 훈훈한 만남과 교류가 있었는데, 상대적으로 전보다 차가워진 것 같습니다. 누군가 말하길 합창은 온도가 있어야 하는데, 온도를 느낄 만남의 장이 있어도 형식적일 때가 많습니다.

 

박경우_ 합창음악이 갖는 특별한 가치와 사회적 영향력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이상길_ 합창은 음악장르 중 가장 큰 호소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아마추어도 할 수 있는 대중적 장르입니다. 합창이 이렇듯 큰 영향력을 줄 수 있음에도, 대중화되지 못하는 이유는 오늘날 음악교육에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솔로 지향의 음악교육이다 보니 앙상블 교육이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교내에 합창활동이나 관악부활동 등 앙상블 활동이 활발했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예체능을 한 학기에 몰아 교육시킨다는 발상이 문제입니다. 마치 하루 세끼를 아침에 다 먹고 점심과 저녁은 굶는 것과 마찬가지지요. 합창활동을 하거나 적어도 합창음악을 듣는 학생은 비행청소년이 되지 않고 요즘 사회적 문제로 부각되는 청소년 자살 방지에도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 좋은 하모니를 체험한 학생들이 자살의 충동을 느끼지 않게 되기 때문입니다. 최소한 듣기만 해도 영향력을 갖게 됩니다. 소리의 촉촉함을 잃은 삶의 패턴으로 변화되며 인간의 심성이 망가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디지털 시대에 아날로그적인 합창활동이 절실한 시기입니다. 

 

박경우_ 시립합창단들의 현황이 어떻다고 생각하시고, 어떤 마음으로 합창단을 이끌어 가십니까?


이상길_ 시립합창단들이 우선 과거에 비해 많이 발전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개인의 책임을 다하지 못하는 사례들이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개인이 해결해야 할 것을 완수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물론 각 합창단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요. 아직도 개인이 전체 연습에 지장을 주는 사례들이 있습니다. 저는 단체운영에서 훈화를 자주하는 편입니다. 꾸지람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고 동기부여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지휘자들 역시 정신 차리고 끊임없이 연구를 해야 합니다.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환경이 언제까지 이어질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안이한 태도입니다. 항상 긴장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생각하고 활동해야 할 것입니다. 타성에 젖으면 시민들 그리고 행정가들이 외면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일부 단원들이나 지휘자는 특정한 조건이 주어지기만을 바라는데, 조건이 주어지도록 우리가 앞서 본연의 책임감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입니다.

 

박경우_ 합창단을 통해 어떤 예술적 또는 음악적 지향을 이루고자 주력하십니까?


이상길_ 오래 전부터 생각해 온 바지만, 음악 속에 내재된 철학과 진정한 가치가 무엇인가를 파악하는 것은 지극히 어렵습니다. 그러나 합창은 텍스트가 있기 때문에 다른 장르에 비해 비교적 알기가 쉬운 면이 있습니다. 그리고 해석이 과연 올바른가에 대해서 항상 고민하게 되는데, 저는 해석을 위해 작곡가 정신을 텍스트와 가락과 화성에 나타난 의도를 접목합니다. 젊어서는 안 보였는데, 나이가 들어가며 작품과 내가 일치하는 것을 느끼곤 합니다. 솔직히 아직도 부족한 점이 많고, 누구나 끊임없이 발전을 지향하는 것이 예술가의 정신이자 삶이란 생각입니다.

 

박경우_ 합창단과 연습할 때 함께 하는 동안 지휘자로서 추구하는 연습방향을 어떻게 설정하십니까?


이상길_ 목표는 연주할 때까지 가장 정확한 것(음정, 가사 등)을 추구하고자 최선을 다합니다. 정확성 속에는 관객에게 호소력 있게 들리게 하는 것까지 포함하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한정적인 정확성에 머물렀지만, 이제는 기본적 구성을 벗어나는 그 이상의 호소력, 표정, 몸의 움직임까지 좀 더 추구하려고 노력합니다. 전에는 목표를 위해 단원을 다그쳤지만, 그래서 나아지지 않습니다. 다그치면 되는 듯한 착각에 더욱 다그치게 됩니다. 이런 방식으로는 단원들과 일체화된 합창을 이룰 수 없습니다. 자꾸 책임만 강조할 것이 아니라 내가 그들을 사랑하고, 안아주고 가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근래 들어 단원들이 안 되는 것에 대해 이해하고 격려하니까 긍정적 효과가 나타나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박경우_ 삶을 통해 지향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목표와 가치관은?


이상길_ 신앙적 차원에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크기가 커졌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제가 하나님이 나의 삶을 어떻게 인도하시고 이끌어 가시는 것에 대해 전적으로 믿는 믿음의 생활이었으면 합니다. 내게 주어진 하나님의 사명에 충실하면 그것이 바로 신앙적 삶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맡기셨으니, 확실히 믿고, 어떻게 인도해 가실까,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인도와 뜻에 따르는 것일까 하는 믿음을 말합니다.

 

박경우_ 전국의 합창음악인에게(지휘자, 합창단원)에게 전하고 싶은 말은?


이상길_ 항상 초심을 잃지 않고 물론 개개인이 열심히 해야겠지만, 상호 유대 및 협력관계를 통해서 합창계의 힘이 모아져야 합니다. 개인만 잘 한다고 해서 합창이 이뤄지는 것이 아니듯, 전국적인 연합활동이 활발해야 합창계의 그릇이 커지게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 지엽적이거나 이기적인 마음이 아니라 넓은 시야를 가졌으면 합니다.

 

  이상길 이사장의 가족 구성은, 성악을 전공하고 교사로 재직하며 개인적 무대도 가졌던 부인과 사이에 1남 1녀를 두고 있다. 장남 이신희는 미국에서 신학을 전공한 후 로스쿨을 졸업하고 최근 국제변호사 시험에 합격하였으며, 피아노를 전공한 딸 이유희와 사위 손정훈은 작곡 전공으로 안동대에 출강 중이다. 시집간 딸에게서 외손주가 둘이라고 한다. 할아버지가 된 지 어언 8년이 다되어 간다고 한다.
  2014년에 세계합창심포지엄이 유치되어 한국에서 개최될 예정이다. 2천여 명 이상이 참가한다고 한다. 3년마다 개최되는 합창계의 올림픽과 같은 전세계적인 행사다. 한국합창계의 풍부한 인적 인프라와 세계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수많은 연주단체들이 ‘한마음 한뜻’이 되어 합창강국의 면모를 과시했으면 하는 바람을 전한다.


 

글. 박경우 / 사진. 김문기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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