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음악춘추

'한국의 슈베르트' 음악가 이흥렬 전시 / 음악춘추 2015년 8월호

언제나 푸른바다~ 2016. 1. 5. 1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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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현장
'한국의 슈베르트' 음악가 이흥렬 전시
암울했던 그 시절, 모두에게 등불이 되었던 작곡가

 

7월 1일부터 9월 30일까지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에 위치한 프라움 악기 박물관에서 평일, 오전 11시부터 오후 6시까지, 주말에는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한국의 슈베르트' 음악가 이흥렬> 의 이름으로 특별기획전이 개최되었다.
올해로 35주기를 맞이한 이흥렬 박사는 '섬집 아기', '어머니의 마음', '바위고개', '자장가' 등 총 400여개의 곡을 작곡하였다. 작곡가 이흥렬의 집은 국내 작곡가 이영조, 이영수 등 3대째 내려오는 음악인 집안이다. 그들이 프라움 악기 박물관에 기증한 선친의 야마하피아노와 친필원고, 친필악보, 작곡노트는 물론 안경, 수첩, 문패, 수저 등 일상생활 유품 20여점과 작품집, 공연 팸플릿, 포스터, 잡지기사 등 진귀한 자료들이 함께 전시되었다.
이번 특별기획전은 4가지 전시개요로 이루어져 있다. 먼저 ‘음악가 이흥렬의 음악과 삶 에세이’에서는 사진으로 이흥렬의 인생사를 읽을 수 있으며 ‘음악가 이흥렬의 창작예술세계’ 에서는 이흥렬이 남긴 생활물건과 친필악보, 원고, 작곡집, 음반, 작곡노트 등 음악관료 자료와 언론 기사 등을 보며 이흥렬을 회고해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 또한 ‘음악가족의 이흥렬 가계도 읽기’에서는 선친 이흥렬의 성품과 창작세계를 쏙 닮은 작곡가 이영조(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이사장), 이영수(영남대음대 교수) 그리고 며느리 김정희(메조소프라노), 손자 이철주(첼로, 지휘자), 이현주(피아노) 등 10여명의 음악 예술가의 집안을 조명해 보며, 마지막으로 ‘살아있는 이흥렬 애창곡을 추억하다’ 에서는 평론가, 연주자, 직업군인, 전업주부, 교사, 초등생, 종이공예가, 화가 등 각계각층의 남아있는 우리들이 기억하고 추억하는 이흥렬의 대중가곡에 얽힌 사연을 그들의 글과 그림으로 나누어 본다.
관람자와 함께 참여하는 체험이벤트로 진행되었다. 전시기간 내내 노래강사와 이흥렬의 가곡 ‘섬집 아기’, ‘바위고개’ 등을 따라 부르고, 전시장 축음기에서 흘러나오는 이흥렬의 가곡을 감상하며 글도 쓰고 그림을 그려 자신의 빛바랜 동심을 일으켜주는 이흥렬 노래에 대한 추억을 회상해볼 수 있다.

 

작곡가 이흥렬의 삶과 음악세계
북한 원산이 고향으로 1909년도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난 이흥렬은 원산 광명 보통학교를 거쳐 송도 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전도사인 어머니 김자선 여사의 영향으로 일찍이 음악을 시작한 작곡가 이흥렬은 일본 동경으로 떠나 동양음악학교에 입학하여 피아노를 전공하였다. 귀국 후 이흥렬은 모교인 원산 광명학교에서 교편을 잡다 서울에 올라와 경성보육학교와 배제중학교 교사로 활동하였다. 해방 직후, 풍문여자 중·고등학교 교사로 생활한 그는 생방이후인 1948년, 숙명여자 중·고등학교 강사와 서울대 음대 강사, 이화여대 음대 강사, 고려대학교 교수 등을 역임하는 등 음악교육에 크게 공헌하였다.
그해 이흥렬은 예술원 회원으로 피선되었고, 계속해서 서라벌예술대학 음악과장, 숙명여자대학교 음악대학장 등 여러 음악대학과 음악단체 등 교육기관과 사회단체의 행정책임을 맡아 수행하였다. 또한 음악교육행정에도 힘을 기울이기도한 그는 한국작곡협회 부위원장, 한국작곡가회 회장 등 음악계의 요직을 역임하는 등 악단 발전에도 많은 기여를 해 온 예술가이다.
대한민국 문화상, 서울시 문화상, 대한민국 문화훈장, 대한민국 대통령상, 예술원상 등을 수상한 작곡가 이흥렬은 대중적인 가곡으로 국민에게 애창되고 있는 ‘고향 그리워’, ‘바위고개’, ‘봄이 오면’, ‘부끄러움’, ‘코스모스를 노래함’, ‘꽃구름 속에’, ‘어머니의 마음’, 군가 ‘진짜사나이’ 등 예술가곡 52곡, 국민가요 68곡, 동요 65곡, 교가 138곡, 단체가 64곡, 기념가 24곡, 단가 2곡, 합창곡 4곡, 성가 4곡, 기타 3곡 등 모두 373곡을 작곡하였다. 또한 아직 미발표의 유작으로 성가 시편 150곡이 남아있다. 여기에서 주목되는 것은 순수한 창작의욕을 충족시키는 그의 작곡분야보다는 사회의 외적인 연관성에서 이루어지는 국민가요와 교가, 단체가 또는 기념가 등이 의외로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또 우리가 즐겨 부르는 명곡은 광복과 전쟁시기였던 그의 인생 전반기에 집중적으로 모여 있다.
우리나라 음악사에서 서양음악을 우리의 것으로 정착시키는데 선구적 작업을 한 선각자 이흥렬의 발자취는 우리 근대 음악사에 남아있다.
1980년 11월 17일 오후 5시, 서울시 서대문구 북아현동 3의 103번지에서 71세에 세상을 떠난 그는 올해로 탄생 106년, 사후 35년을 맞는다.

지금도 그의 노래 속에서 꿈과 희망을 기억하는 추억이 아련하게 남아있다. 관객들은 전시회에 와서 이야기처럼 전해 내려오는 작곡가 이흥렬의 향수를 만끽하고 있었다.


이용일(KSME명예회장)

사진_김문기 부장 <김문기의 포토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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