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음악춘추

인물탐구 - 지휘자 정두영 선생 / 음악춘추 2015년 8월호

언제나 푸른바다~ 2016. 1. 5. 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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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춘추 기획대담 / 인자한 성품과 음악성으로 지휘계에 열정을 쏟은 지휘자 정두영 선생

 

일시: 2015년 7월 7일(화) 오전 10시 30분
장소: 코스모스 악기사 7층
진행: 이용일(한국음악교육협회 명예회장)
패널: 한정강(부인, 전 침신대 교수)
         정나라(삼남, 경기필하모닉 부지휘자)
         김창수(군산시립교향악단 플룻티스트)
         김창재(계명대 명예교수)

 

지휘자 정두영 선생(1939∼2005)은 서울에서 출생하여 서울중학교, 서울고등학교를 거쳐 서울대 문리대 불문과 재학 중 공군교향악단, 서울시립교향악단에서 플루티스트로 활동하였다. 1959년 도미하여 미 교향악단 지휘자협회 지휘 워크샵을 연수했으며 맨해튼 음대를 졸업하였다. 1965년 KBS교향악단 전임지휘자와 서울예원학교, 서울예술고등학교, 연세대학교 강사로 역임하였으며 1968년에는 로체스터 혹슈타인 교향악단의 상임지휘자로 활동하였다. 1969년 이스트만 음악대학원을 졸업한 그는 피바디음악원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하여 동대학 교향악단 부 지휘자, UC데이비스 음악과에 한국인 최초로 종신교수로 재직하여 강의를 하였으며 1977년 리치몬드 한인 침례교회를 세우고 목회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1983년 목원대학교 음악대학 교수로 초청받아 귀국, 1984년에는 대전시립교향악단을 창설, 초대 상임지휘자로 지냈으며 1985년에 침례신학대학교 교회음악과 교수로 부임하였다. 특히 그는 노인과 교도소, 빈곤지역 등을 위해 자원봉사단체 개미예(開美藝) 공부방을 개설, 운영하는 등 어려운 이웃들 위한 봉사에 적극 노력하였다. 2004년 침례신학대학교에서 정년퇴임을 했으며 널리 애창되고 있는 ‘사랑은 언제나’ 등 복음성가 50여곡을 작곡했다.

        
1. 정두영 선생의 성장 과정 및 음악의 출발
2. 정두영 선생과의 첫 만남
3. 정두영 선생의 음악세계
4. 정두영 선생의 교육관
5. 정두영 선생이 국내음악계에 끼친 영향

 

이용일_이번 8월호 음악춘추에서는 복음성가 ‘사랑은 언제나’를 작곡하여 널리 알려져 있으신 정두영 선생님을 재조명해 보고자 합니다. 우리나라 근대 음악사에 귀중한 자료로 남게되니 가능하면 문헌에 없는 내용이나 후학들에게 알려줄 사항 등을 말씀해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먼저 정두영 선생님의 성장과정 이야기로 시작해보겠습니다.

 

한정강_남편은 서울에서 4형제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남편의 부모님은 소아과 의사셨습니다. 어머님은 신실한 가톨릭 신자셨고요.

 

이용일_다른 형제들도 음악에 조예가 깊었나요.

 

한정강_남편의 큰 형님이 미국에 가서 소아과 의사로 지내셨는데 바이올린을 잠시 취미로 하셨고, 셋째형님은 건축가셨는데 어렸을 때부터 미성이 타고나셔서 성악으로 콩쿠르에서 대통령상도 받으셨습니다. 음악을 전공한 사람은 제 남편 한사람입니다.

 

이용일_정 선생님이 어떤 연유로 플루트를 시작했다고 말씀해주셨나요. 

 

한정강_노래를 잘하시니까 고등학교 때 밴드부에 들었는데 그때 플루트를 처음 접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플루트를 불었는데 소리가 쉽게 나더랍니다. 그래서 흥미가 생기셨고요. 그렇게 전공을 하게 되셨습니다. 김몽필 선생님이 스승이셨습니다. 

 

이용일_제가 공군교향악단에 있을 때 정 선생님과 같이 있었습니다. 공군교향악단에 처음 들어왔을 때만 해도 아주 뛰어날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치고 나가는데 다른 연주자들보다도 습득이 빨랐습니다. 서울대 문리대에서 온 사람들이 연습방법도 달랐습니다. 우리는 습관적으로 하는데 정 선생님은 과학적으로 했던 것 같습니다. 아버지와 있었던 이야기 중에 재미있는 일화가 있나요?

 

정나라_제가 6살 때 아버지가 수원시립교향악단 상임지휘자로 계셨는데 그 때 지휘하시는 모습을 처음 보았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지휘자가 되겠다는 꿈을 갖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지휘를 하려면 우선 피아노를 쳐야 한다. 오케스트라 음악을 하려면 귀가 좋아야하고 모든 것을 음악적으로 터득하려면 피아노에서 기본기를 다져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지휘자가 될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제가 피아노를 쳤습니다.

 

김창재_제가 서울예고시절 일주일에 한 번 있는 채플을 가끔 지휘했는데 정 선생님께서 칭찬을 해주셨습니다. 얼마 후 정 선생님 집에서 지휘와 바흐 코랄 분석과 청음테스트를 하시고, 정 선생님께서 집에 들어와 살라고 하셔서 들어가서 지휘를 배웠습니다. 개인 장학금을 받은 셈이죠. 정말로 제자를 사랑하는 마음이 남 다르셨다는 생각을 합니다. 음악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스코어를 쉽게 암기할 수 방법이라던지 그러한 점도 가르쳐 주셨습니다. 지휘자는 이론적으로 탄탄해야 한다며 이론과 지휘법을 가르쳐주시고 지휘의 많은 부분을 정두영 선생님께 배울 수 있었습니다.

 

이용일_김창수 선생님은 정 선생님과의 첫 만남이 언제이신가요.

 

김창수_제가 대학교 3학년 때 미국에서 정두영 선생님과 한정강 선생님이 목원대학교로 같이 처음 오셨습니다. 그때 처음 뵈었고 제대로 플루트를 배우게 되었습니다.

 

김창재_처음 뵙게 된 것은 정 선생님이 미국에서 귀국하시고 KBS교향악단 전임지휘자가 되시면서 서울예술고등학교에서 시창청음과 음악이론들을 가르치실 때였습니다. 그 때 제가 서울예술고등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이었죠.

 

이용일_정 선생님의 음악세계에 대해 김창수 선생님이 말씀해주세요.

 

김창수_우리는 악보를 피면 전체적으로 보지 않고 부분적으로 봅니다. 그런데 정두영 선생님은 악보를 멀리서 보면 전체적인 라인이 다 보인다며 악보 처음부터 끝까지 음악의 전체적인 흐름을 볼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이용일_김창재 선생님은 서울예고에서 정 선생님께 배울 때 새로운 점이나 특이한 점이 있었나요.

 

김창재_화성을 구성하는 요소들을 머릿속으로 생각하면서 빨리 하는 훈련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지금도 우리나라에서 그렇게 가르치는 선생님이 없을 것 같습니다. 또한 음악을 모두 연결시켜 통합 이론적으로 가르쳐주셨습니다. 그 때의 가르침이 저의 평생 음악생활에 도움이 되었습니다. 대학교수로 학생들을 30년 가르칠 때도 그때 선생님이 가르쳐 주셨던 많은 교수법들과 음악이론과 화성법의 여러 교수방법들이 저의 교수법에 참으로 많은 영향을 주셨습니다. 

 

이용일_한 선생님은 남편이 아닌 동료 음악가로서 어떻게 보셨나요.

 

한정강_저는 글자가 중요하고 외우는게 중요했는데 남편은 작곡가가 표현하고자 하는 점을 추구하고 저에게 가르쳐주었습니다. 처음에는 싫었지만 나중에는 다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이용일_아버지의 음악이 어땠다고 생각하나요. 지금 지휘자가 되었으니까 그때의 생각을 해보면요.

 

정나라_한번은 제가 아버지께 레슨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저에게 지휘봉을 주시며 브람스 교향곡 1번을 지휘해보라 하셨습니다. 저는 땀 흘리면서 뭘 자꾸 하려하는데 아버지는 물 흐르듯, 붓으로 그림을 그리듯이 브람스 교향곡 1번을 지휘하시는데 그 모습이 아직까지 기억에 남습니다. 모든 악기의 선율이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듯이 지휘하셨습니다.

 

이용일_한국 사람이 외국에 가서 음악을 배우면 잘 못 받아들인다고 합니다. 한국에서 배운 것이 편하고 틀이 있으니까요. 그런데 정 선생님은 우리나라에서 음악을 배우지 않고 미국에서 음악을 공부하셨으니 잘 받아들이고 자기것화 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정 선생님이 하셨던 교육관에 대해 더 자세하게 말씀해주실 수 있나요.

 

김창수_플루트를 불 때에는 긴장과 힘을 풀고 불어야지 천사의 소리가 난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마우스피스를 붙잡고 힘 푸는 연습부터 시작했던 기억이 납니다. 이전에는 그런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는데 듣게 된 이후에는 “아! 플루트는 이렇게 부는 거구나”라고 터득하게 되었습니다.  

 

김창재_정 선생님께 배우기전까지는 우리는 늘 책상에서 화성을 썼는데 화성을 머리로 쓰는 방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정 선생님의 지도 방법은 다른 선생님들로부터 받았던 지도 방법과는 달랐습니다.

 

한정강_남편이 재능이 많았습니다. 글을 쓴다던가 그림을 그린다던가 어디서 배운 적이 없는데 잘하셨습니다. 또한 미국학교에 지휘교수로 있다가 사표를 내시고 목사가 되기도 하셨죠. 하여튼 별난 분이셨습니다. 보통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살면서 지루하지가 않았습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저희 남편을 좋아했습니다.

 

이용일_정 선생님이 수원시립교향악단에 계실 때 음악의 폭이 넓었나요? 좁았나요?

 

정나라_음악의 폭이 정말 넓으셨죠. 코플란드, 바르톡, 스트라빈스키의 작품 등 현대음악도 하셨습니다. 제가 4년 정도 한국에 있었던 적이 있습니다. 하루는 아버지께서 곡 리스트를 가지고 오셨는데 저에게 주시면서 공부하라고 하셨습니다. 항상 베토벤, 브람스, 모차르트의 곡들만 공부했는데 이번에도 너무나도 저의 예상 밖의 곡들을, 제가 듣도 보지도 못한 작곡가들의 곡이었습니다.

 

한정강_애들에게 남편은 격이 없이 친구같이 지내셨죠. 그리고 나라가 절대음감에다가 피아노를 굉장히 잘 쳤습니다. 남편이 제일 갖고 싶어 하던 것을 나라가 갖고 태어났죠. 그러니까 나라에 대한 부러움과 애정이 많았습니다.

 

정나라_아버지는 교수이시다보니 항상 연주하시고 바쁘셨는데도 불구하고 시간 나실 때마다 저희 방에 오셔서 대화를 하려고 노력하셨습니다. 아버지가 계시는 서재에 언제든지 들어와도 된다고 말씀하시기도 하셨습니다.

 

김창재_순수하고 사고가 자유롭고 상상력이 풍부하신 분이셨습니다. 학교에서는 학생과 선생님의 거리가 있잖습니까. 그런데 정 선생님은 마치 동생이나 친구처럼 음악을 가르쳐주셨습니다. 한번은 하교시간에 광화문을 지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 멀리 이상한 모자(영국식 중절모)를 쓰고 영화에서나 볼법한 검정 양복에 영국귀족의 차림으로 지팡이를 저으며 오시는 분이 있었는데 가까이 가서 보니 정두영 선생님이셨습니다. 저를 보시더니 다정하게 이것저것 물어보시고는 근처 호텔 카페에 저를 데려 가셔서 난생 처음으로 쓴 커피란 걸 선생님과 마셔 보았답니다. 고등학생인 저를 데리고 가셨었는데 평생 행복한 추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이용일_정 선생님께 플루트를 배울 때 어떠셨나요.

 

김창수_정두영 선생님께 플루트는 대학교 3학년 때까지 배웠습니다. 대전시립교향악단에 정 선생님께서 지휘자로 계셨는데 10년을 함께 했었습니다. 저도 연주했던 곡 중에 브람스 곡이 제일 기억에 남습니다. 정 선생님처럼 브람스의 곡에서 브람스다운 색채를 나오게 할 수 있는 분이 없지 않나 생각합니다.

 

이용일_다른 사람이 지휘하는 오케스트라 연습방법과 차이가 있었습니까?

 

김창수_일단 굉장히 체계적이셨습니다. 파트 연습도 아주 적은 시간 안에 능률적으로 연습시키시고요. 예를 들면 정 선생님은 처음에 악보를 보면 일단 전체적으로 어떤 구성인지 등 다 이야기 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사이트 리딩(sight-reading)을 하고 현악기파트, 관악기 파트 등 따로 연습시키고 일사천리하게 부족한 부분의 파트만 불러서 연습시키셨습니다. 음악을 만드실 때도 브람스는 브람스 음색이 나오고, 모차르트는 모차르트 음색이 나오도록 하시고 저희가 받아들이기 쉽게 일목요연하게 말씀해주셨습니다.

 

이용일_정 선생님께서 대전시립교향악단에서는 몇 년 지휘하셨죠?

 

김창수_10년 하셨습니다.

 

한정강_남편의 마음은 하나님의 일하는데만 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음악예배를 하시거나 양로원, 교도소 등에 항상 방문을 했습니다. 제자들도 와서 함께 연주하고 저는 항상 반주자로 같이 다녔습니다. 사람을 사랑하고 위로하는 수단으로 음악을 썼던 사람입니다.

 

이용일_풀이하면 정 선생님 삶에는 하나님이 중심이고 지휘나 음악은 수단이 되었다는 거네요.

 

정나라_아버지는 저를 대전시립교향악단 리허설에 데려가 꼭 보게 하셨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오케스트라 리허설의 다른 지휘자는 직설적이고 공격적으로 지휘하는데 아버지는 리허설 때 평안하시고 인자하셨습니다.

 

이용일_평소에 아버지 성격도 그러셨나요.

 

정나라_네, 평소에 성격도 그러셨습니다. 오히려 혼나면 어머니에게 혼났지 아버지는 자유롭게 놔두셨습니다.

 

이용일_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성장기의 성격형성은 가정이 행복하고 넉넉하면 좋은 성격을 유지하기 마련인데 아마 어릴 때부터 당시로써는 여유 있는 집안에서 태어나서 성격이 유순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한정강_집에서 막내아들로 태어나 몸이 약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집에서도 부모님이 자유롭게 키웠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자랐던 대로 아이들을 키웠던 것 같습니다.

 

이용일_열린 집안에서 자랐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정 선생님이 국내음악계에 끼친 영향에 대해서 김창재 선생님부터 말씀해주세요.

 

김창재_리허설 분위기라던지 연주자들을 대하는 마음이라던지 굉장히 편하게 대하셨던 방법. 그것도 국내음악계에 좋은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자존심을 갖고 연주를 할 수 있도록 해주시고 대체로 자유롭게 음악을 표현할 수 있도록 열어놓은 상태에서 지도하신부분이 큰 영향을 끼치셨던 것 같습니다. 또한 레퍼토리는 미국에서 공부하고 오셔서 한국에서 접하지 못했던 곡들을 많이 연주하신 것이 한국교향악단에 끼친 영향이라고 봅니다. 정 선생님께서는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예술가로서 많은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이용일_정두영 선생님이 미국으로 유학가신 것은 플루트를 배우기 위해 간 거죠?

 

한정강_네, 남편이 불문과에 간 이유를 말해준적이 있습니다. 유학을 가서 음악을 하려면 불어를 알아야지 음악에 대한 서적을 읽을 수 있을 줄 알았답니다. 그래서 불문과로 엉뚱하게 가게 된 거죠. 그리고 서울대학교를 1년 다니다가 미국으로 음악을 공부하러 간 겁니다. 플루트를 하면서 지휘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미국에서 아주 좋은 지휘자들한테 칭찬도 받고 나중에는 지휘자로 돌아섰죠. 제가 1년 먼저 한국으로 돌아왔는데 임원식 선생님께서 제 남편이 지휘를 공부한다는 소식을 듣고 한국으로 돌아오면 제 남편과 함께 보자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한국에 왔다고 하니까 KBS교향악단 전임지휘자를 시키신 거예요.

 

이용일_목원대학에 계실 때에는 어떠셨나요.

 

김창수_정두영 선생님은 우상 같은 분이셨죠. 정두영 선생님과 한정강 선생님 두 분이 오셨을 때 학생들이 굉장히 좋아했었습니다. 대전시립교향악단이 창단 된 그때부터 정 선생님이 지휘를 하셨으니까 그동안 대전에 있는 오케스트라를 키워놓으신 거죠.

 

 

정리 _ 김수현. 사진_김문기 부장

기사의 일부만 수록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음악춘추 2015년 8월호의 기사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

 

<김문기의 포토랜드>

 

 

 

진행: 이용일(한국음악교육협회 명예회장)

 

한정강(부인, 전 침신대 교수)

김창수(군산시립교향악단 플룻티스트)

 

김창재(계명대 명예교수)

 

 정나라(삼남, 경기필하모닉 부지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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