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음악춘추

피아니스트 이경숙 / 음악춘추 2012년 8월호

언제나 푸른바다~ 2012. 7. 27. 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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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우가 만난 이 달의 아티스트>

 

피아니스트 이경숙
‘연주는 장거리 여행 같은 것’

 

  피아니스트들에게는 수많은 작곡가들이 남긴 파악하기조차 어려울 정도로 많은 음악문헌이 전해지고 있다. 그래서 그렇지 않은 성악 또는 여타 기악 장르에 비해 상대적으로 행복감을 갖게 한다. 그러나 이 같은 문헌의 다양성은 피아니스트가 생애를 통해 정복하려 해도 여전히 도전이 불가할 영역으로 우뚝 서 있다. 마치 알프스나 히말라야의 등정을 시도하는 것처럼 한계를 느끼게 하는 부분이다. 흔히 피아노 연주를 오케스트라의 그것과 연계하여 말하곤 한다. 그처럼 많은 생각과 준비는 물론, 하루도 거르지 않고 끊임없는 연습이 필요한 악기다. 마치 ‘구도자’처럼 자신의 개인적 삶을 바쳐야 하는 길에 비유된다.
  여류 피아니스트에게는 역할상 단지 음악가로서만이 아닌, 가정의 굴레에서 아내이자 어머니로서 역할도 수행해야 하는 심적 정신적 부담이 가중된다. 즉, 가정과 사회(음악계)의 활동을 항상 병행해야 하는 운명적 길을 걸어 나가야만 하는 것이다.
  대학에서 은퇴한 후 또다른 선택적 삶의 길을 지향하고 있는 피아니스트 이경숙과의 대담을 위해 그의 스튜디오를 찾았다. 오피스텔 문 좌측에는 그림이 한 점 걸려 있어 누가 보더라도 이 집의 소유자가 예술가 또는 예술적 취향을 갖고 있는 사람이란 인상을 갖게 하였다.
  피아니스트 이경숙을 지칭할 때, 필자는 한국 피아노계를 대표할 여류 피아니스트라고 간주함에 있어 전혀 손색없는 인물로 생각한다. 이경숙 교수의 음악적 성향, 특성과 지향을 고려할 때, 한국의 마르타 아르헤리치라고 칭해도 좋을 듯싶다.
대담을 진행하면서 이경숙 교수가 과거에 비해 많이 달라져 있음을 내내 느낄 수 있었다. 은퇴 전 과거의 삶(피아니스트 및 교수)이 자신의 발전과 사회적 역할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었다면, 현재 그의 삶은 그 동안 실현하지 못했던 피아노 교육 영역에 대한 새로운 관심으로 나눔을 모색하고 실천하려는 강한 의지가 배어난다. 아니 과거보다 더욱 예술가로서 달관한 경지에 다다른 면모가 물씬 풍겨났다.

  최근 피아니스트인 딸 김규연과 함께 무대를 가진 이경숙 교수는 딸에 대해 말한다.


이경숙_ 저는 규연이를 대를 이을 피아니스트가 되도록 할 생각은 전혀 없었습니다. 어려서 규연이는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피아노를 치는 것으로 알고 있었고, 어느 집을 방문했을 때 피아노가 없는 것을 이상하게 느끼곤 했다고 말하더군요. 집에서 매일 피아노 소리를 듣고 자라왔기 때문이었나 봅니다. 규연이가 피아노를 전공하게 된 것은 음악적 환경에서 성장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렇게 된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엄마 입장에서는, 규연이가 연습을 게을리하지도, 자유롭게 놀지도 못하고 항상 긴장감에서 사는 생활의 연속이다 보니 한편 안됐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박경우_저는 선택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만(웃음).
이경숙_이제는 음악에 완전히 빠져서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자신이 즐겁게 하는 것을 보면 행복해 보이기도 하구요. 어려서는 뭣 모르고 했지만, 이제는 음악의 깊이도 이해하는 모습이 대견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박경우_자식으로서가 아니라, 딸 규연에 대해 객관적으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경숙-저하고는 완전히 다릅니다. 저희 세대와 지금 세대와는 환경적 측면에서 다르기 때문에 음악적 성향의 차이도 크다고 봅니다. 요즘 젊은 학생들은 모든 것이 풍족한 문화 예술적 환경에서 자라 저희 때와는 사뭇 다릅니다. 예전에 저희가 공부할 때는 악보도 구하기 힘들고, 음반 한 장을 구해서 여기저기 돌려가며 들을 때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지금 세대는 한 곡을 듣기 위해 여러 연주자의 음반을 구해서 들을 수 있는 환경입니다. 그리고 유튜브에 들어가면 자기 또래들의 연주도 들을 수 있고, 렉처, 마스터 클래스, 국제 페스티벌 등 다양한 기회들을 자주 접할 수 있지만, 저희 때는 상상도 못할 일들이었지요. 그래선지 규연이뿐만 아니라 요즘 젊은 피아니스트들의 경우 음폭이 넓고 음악도 깊이가 있고 수많은 레퍼토리를 접하고 들을 기회가 많아 이미 익숙해져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여유가 생겨 자신의 개성도 크게 드러낼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과거 저희 때는 “테크닉이 좋으면 음악성이 없고, 음악성이 있으면 테크닉이 부족하다”라는 말로 위안을 삼곤 했는데, 지금은 그런 것이 이해되지 않는 시기인 것 같습니다. 음악성과 테크닉 두 가지가 다 갖춰져야 제대로 피아니스트로 인정받게 됩니다. 그리고 규연이는 어려서부터 책을 많이 읽어 음악적 이해나 사고가 다각적이고 폭넓게 된 것도 큰 도움이 되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규연이의 단점은 성격이 너무 완벽주의자라서 제가 보기에는 그것이 단점이 될 수 있다고 봅니다. 완벽주의자는 우선 자신이 정신적으로 힘들고, 또한 자연스러우면서 폭넓고 시원스럽게 연주하는 성향이 다소 부족하지 않나 생각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연주활동을 지속하면서 스스로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어쨌든 저희가 공부할 때하고 시작부터가 다른 환경이 부럽게 느껴집니다.

 

박 경우_ 저 역시 이 교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공부하기에 여건이 충족하지 못했던 시기였었지요. 하지만 그런 환경 속에서 정서적으로 풍부한 예술성을 갖춰 나갈 수 있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부모님께서는 어떤 분이셨습니까?
이경숙_ 아버지께서는 건축이 전공이셨는데, 정치에 관심이 있으셔서 6·25사변이 발발하던 해에 울산에서 국회의원으로 출마하셨다 낙선하셨습니다. 이후 서울의 이화여전(이화여대의 전신)에서 공부하시던 어머니를 찾아 올라온 이후 전쟁이 발발하였습니다. 인민군들이 당시 청운동에 살던 정치에 입문하려던 저희 아버지를 샅샅이 찾아내었고, 결국 쪽지에 몇 글자 남기고 끌려가시던 것이 제가 본 마지막 모습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이화여전에서 성악을 공부하셨지만 젊은 연세에 사고로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고아가 됐지요.(웃음)

 

박경우_ 마음 아픈 과거시네요. 어머니께서 27년생이시면 지금도 충분히 생존하실 연세이신데 안타깝습니다. 이 교수님 어려서 빨간 피아노와의 사연이 돌아다니는 것 같던데요.(웃음)
이경숙_ 1·4후퇴 때 배를 타고 부산으로 피난을 가서 방을 얻어 살던 시절이었습니다. 빨간색이라고들 하는데 자주색으로 기억합니다. 6세 무렵이었는데, 당시는 스펠링을 몰랐지만 후에 기억을 더듬어 보니 스타인웨이 피아노였습니다. 외국인 선교사께서 소장했던 피아노를 어머니께 주고 갔습니다. 그들도 아마 서울에 왔다가 전쟁 와중에 부산으로 내려오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당시 부산으로 피난 와서 피아노를 갖고 있던 집은 아마도 저희 집뿐이었을 겁니다. 큰 행운이었지만, 어머니께서 저를 가르치려 하셨던 것 같은데 몹시 싫어했습니다. 당시 바로 윗동내에 피아니스트 신수정 교수가 살았는데, 그는 피난을 온 것이 아니고 충청도에서 부산으로 유학을 온 사례입니다. 이애내 선생님께 레슨받기 위해 선생님 댁에서 기거하며 유학생활을 한 케이스입니다. 신 교수님이 저보다 조금 위고, 한동일 교수님은 그보다 조금 위였습니다. 또 한 사람 김덕주(바이올리니스트 김영욱 누나) 씨가 피아노를 잘 쳤는데, 피난시절 부산에서 텐트치고 개최된 제1회 이화·경향 콩쿠르에서 함께 참가해 수상했습니다.

 

박 경우_ 어머니께 어떤 음악적 영향을 받았으며 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어떤 것이 있습니까?
이경숙_ 처음에 피아노를 시작한 것이 아니고 집에 피아노는 있었지만, 부산으로 피난 가기 전부터 어머니께서 집에 오시면 노래 부르시고, 코르위붕겐(발성연습을 위한 교칙본)으로 연습하시면, 저 역시 어머니 곁에서 듣고 따라 부르곤 했었습니다. 그래선지 피아노를 알기 전에 악보를 먼저 접하게 되었습니다. 음악적으로는 슈베르트 연가곡 ‘겨울나그네’를 항상 틀어 놓으셔서 오히려 저는 동요보다 더 친밀감을 느끼곤 하였습니다. 내용은 독일어라 몰랐지만, 멜로디는 이미 익숙해져 있었습니다. 이런 것이 음악적이고 환경적인 영향이 아니었을까 생각됩니다.

 

박 경우_ 피아니스트가 되겠다는 생각은 언제부터 가지셨습니까?
이경숙_ 제가 초등학교 4학년 무렵, 어머니께서 미국유학을 가셨습니다. 피아노를 두고 가셔서 피아노를 쳤지 피아니스트가 되기 위한 목적을 갖고 피아노를 친 것은 아니었습니다. 어느 누구도 제게 연습을 강요하지 않았고, 학교를 다녀와서 또는 놀다 와서 피아노에 마주 않곤 하였습니다.

 

박 경우_ 지난 수십 년간 피아노와 더불어 함께 하셨는데 피아노에 대해 정의하신다면?
이경숙_ 피아노는 제 신체의 한 부분 같이 항상 곁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의 친구이자 동반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박 경우_ 저 역시 변하지 않는 친구라는 말에 공감합니다. 항상 그 자리에서 한 치의 움직임도 없이 내가 다가설 때까지 기다려 주는 불변의 친구지요. 한국음악계의 현실을 어떻게 느끼시고, 미래를 내다보았을 때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경숙_ 여러 측면에서 볼 수 있는 데, 일단 한국음악계가 전반적으로 현격한 발전을 도모하였습니다. 외국에 비해 수준 역시 뒤떨어지지 않고 모든 장르가 뛰어난 상태입니다. 개인적인 기악 등 전공에는 뛰어나나, 뒤처진 부분이 제 생각에는 창작분야여서 여기에 더 신경을 써야 할 듯싶습니다. 그리고 연주자들이 창작곡을 자주 연주를 해 줘야 합니다. 진은숙 등 좋은 작곡가가 많지만 앞으로 더 역량 있는 신인들이 배출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창작과 연주가 균형적으로 안배가 될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교향악단 단원들의 생활이 안정된 상태에서 활동할 수 있도록 재정적 뒷받침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각 지자체마다 거의 교향악단이 있습니다만, 환경적 측면에서 제대로인 교향악단은 불과 몇 단체에 불과한 것 같습니다.

 

박 경우_ 피아노 교육의 문제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이경숙_ 단순히 피아노를 치는 것 이외에 철저한 이론적 배경을 갖출 학습을 병행해야 합니다. 음악 선진국에서는 우리와는 다르게 공부시키고 있습니다. 즉 음계, 리듬, 화성 등의 개념을 어렸을 적부터 접목시켜 학습하게 합니다. 그리고 소리 찾기 등 다양한 학습방법을 도입하여서 흥미를 제고해야 합니다. 대학생들 가운데 상당수는 오직 피아노 실기에만 관심을 갖고 이론을 소홀히 취급하는 사례들이 많습니다. 우리나라는 대학에 입학한 후 이론을 접하는 게 일반적입니다. 피아노 교육은 모두를 전문피아니스트가 되도록 지향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론적 바탕이 확립되어야 비로소 훌륭한 교육자가 될 수 있습니다. 아울러 피아노 연주에서도 빨리 치고 크게 치는 것이 능사가 아닙니다. 연주는 장거리 여행이며 평생을 함께 해 나가는 것입니다. 너무 빨리 성공하려다 보니 기초 정립이 부족한 학생들이 많습니다. 길게 가려면 밑에서부터 차근히 배우고 다져야 합니다.

 

박 경우_ 음악활동을 펼치시며 삶과 음악, 삶과 피아노의 관계에 대해 느끼시는 점은?
이경숙_ 피아노 공부를 할수록 삶에 대한 이해가 더 깊어 가는 것 같습니다. 깊이 연구하고 들어가면 갈수록 인간에 대한 이해력도 깊어 가는 것 같고, 제 자신을 제대로 이해하고 발전시키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생각하고 성찰하고, 많이 참고 견디며 공부해야 하기 때문에 인내심을 증진시킬 수 있습니다. 창의력 상상력 등은 우리 생애에서 절대 필요한 요건인데, 이를 자각하면 인간이 좀 더 성숙해지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제가 요즘 눈이 불편해서 연습을 못하니까 인간적으로 퇴보하는 것 같은 느낌입니다. 공부를 하고 있으면 내가 성장하는 느낌이 들고, 어려운 것을 하면서 어려운 사람들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피아노 학습의 모든 것이 삶에 반영되는 것 같은 생각입니다. 이로써 다른 사람을 이해할 수 있고 마음을 깊이 읽을 수 있습니다.

 

박 경우_ 지금까지 살아오며 자신의 변화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경숙_ 늙어 가는 변화요(웃음). 어렸을 때는 뭣도 모르고 피아노를 시작했고, 어느 단계에 들어선 후에는 이것이 내 전공분야구나 하며 오도가도 못 했습니다. 이후 연세대에 적을 두고 연주활동을 하며 학생과 대중에게 인정을 받아야 하는 스트레스와 부담이 있었습니다.
나의 발전이 있어야 청중이 지속적으로 관심을 갖게 되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학생을 위해, 가족을 위해, 나를 위해 스트레스를 안고 공부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나이가 들고 은퇴하면서 내 자신을 입증 또는 인정받을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이제 와서 안타까운 것은, 정년퇴직하는 순간부터 내가 이제는 훌륭한 선생이 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때는 내가 지금까지 공부하고 연주하고 경험하면서 겪었던 것을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배우고 노하우를 터득해서 이제는 학생들을 보면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 파악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서울챔버오케스트라에서 음악고문으로 활동을 하며 젊은 피아니스트를 위한 바로크 아카데미(Baroque Academy For Young Pianist) 클래스를 부탁받고 9월부터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피아노 클래스를 개설해서 재능 있는 아이들, 비록 영재가 아니더라도 공부하겠다는 아이들, 환경이 그다지 좋지 않은 학생들을 비즈니스적인 차원이 아닌 자선 나눔을 실현하는 베푸는 클래스입니다.

 

이경숙과 그의 클래스는 10년 넘게 회비를 모아 고아들에게 학비와 생활비를 도와줘 왔다. 그의 ‘인생 3장’은 나눔을 본격 실현하려는 숭고한 삶이 본격 전개될 것이란 확신으로 떠나 왔다.

 

대담.글 - 박경우 / 사진 - 김문기 부장

 

 

 

 

 

 

 

음악평론가 박경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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