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춘추 기획대담 | 인물탐구 10월호
피아니스트 윤연 선생
서울 구로동에서 태어난 피아니스트 윤연(1930년 5월 16일~1974년 10월 8일) 선생은 서울사범대학 부속 중학교(5년제)를 졸업하였다. 그 후 서울대 음대 피아노과에 진학한 선생은 동대학원을 졸업한 후 서울대학교 강사로 활동하였으며, 경희대학교 음악과가 신설된 후 전임교수로 발령 받아 경희대 피아노과의 발전에 헌신하였으며, 후학 양성에 힘썼다.
일시: 2012년 9월 10일(월)
장소: (주)코스모스악기
진행: 이용일(한국음악교육협회 명예회장)
패널: 김인화(전 이화여대, 호서대, 한세대 강사)
황선(경희대 음대 전 학장, 명예교수)
문초자(과천 장미음악학원 원장, 전 경희대, 상명대, 단국대, 서울예고, 덕원예고 강사)
김도실(경희대 음대 교수 역임, 현재 나사렛대 겸임교수)
손동연(전 세종대, 경희대 강사)
윤연 선생의 성장 과정 및 음악의 출발
이용일_ 2007년 10월에 시작되어 이 달로 5주년을 맞이한 음악춘추 기획대담 난은 돌아가신 선대 음악가 분들의 업적을 기록으로 남김으로써 후에 우리나라 음악사에 중요한 기초자료로 쓰여질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번 10월 호에서는 피아니스트 윤연 선생님에 대한 인물탐구를 갖도록 하겠습니다. 윤연 선생님께서 돌아가신 지도 어느덧 40년 가깝게 흘렀습니다. 그러다 보니 선생님에 관한 자료를 찾는 것조차도 쉽지 않았는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어렵게 여러 선생님들을 모시고 좌담회를 진행하고자 한 것은 윤연 선생님 또한 한국 근대음악사에 반드시 이름이 올라야 하는 중요한 선대 음악가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젊었을 때, 윤연 선생님께서는 소위 말하는 잘 나가던 피아니스트이셨지요(웃음). 연주, 교육활동을 활발히 하시던 중 뜻을 다 펴지 못하시고 일찍 세상을 떠나셨기 때문에 아마 젊은 음악가들은 선생님의 존함조차 모를 것입니다. 그러나 역사를 배우듯 음악의 성장과정에 중요한 역할을 하신 윤연 선생님의 일대기를 되새겨보는 것은 음악계의 발전에 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이번 좌담회를 통해 선생님께서 후학들에게 남겨주신 희망들을 되새겨보고, 못 다 이루신 부분들에 대해서도 이야기해 보는 자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먼저 사모님께서 선생님의 성장과정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해 주시지요.
김인화_ 남편은 서울의 구로동에서 태어나셔서 서울사범대학 부속 중학교에서 공부하셨습니다. 그 당시에는 학제가 달라서 중학교, 고등학교로 나뉘지 않고, 중학교가 5학년제였지요. 사범부속 중학교에는 브라스 밴드의 활약에 대단했습니다. 그곳에서 활약하시던 여러분들이 후에 경희대 음대에 많이 재직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또한 피아노 전공으로 서울대 음대와 동대학원을 졸업하셨고, 김원복 선생님과 로신옥 선생님에게 사사하셨으며, 그 후 서울대에 출강하며 후학을 양성하시다가 경희대에 교수로 발령 받아 재직하게 되셨습니다.
황선_ 1956년에 경희대 설립자이신 조영식 박사님께서 김생려 선생님께 음악과를 만들자는 제안을 하셨고, 그렇게 학부장이신 김생려 선생님을 주축으로 경희대 음악과가 만들어지게 되었습니다. 음악과가 개설된 후 윤연 선생님이 전임교수로 발령을 받으셨고, 선생님께서 직접 독일로 유학을 다녀오신 김혜경 선생님이나 프랑스에서 유학하신 유태열 선생님 등으로 교수진을 구축하셔서 음악대학의 모체를 만드셨지요. 또한 경희대에서 교수로 지내시면서 서울대 강사로도 계속 활동하셨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용일_ 네. 당시에는 전임교수도 타 대학에서 강사로 활동할 수 있었기 때문에 선생님께서도 그렇게 하신 것이군요. 경제적으로는 부유한 편이셨나요?
김인화_ 아니오. 그 당시는 사변 후라 집에 피아노가 있는 학생이 드물었습니다. 그래서 항상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밤늦게까지 학교에서 촛불을 켜놓고 연습하시곤 했지요. 그러다 보니 촛불을 놓았던 왼쪽 눈의 시력이 많이 나빠지셨어요. 그 정도로 피아노에 대한 열정이 대단하셨습니다. 그리고 당시 황응연(이화여대 심리학과 명예교수) 선생님과 피아노를 같이 연습하셨는데요. 황 선생님도 로신옥 선생님께 가르침을 받으셨을 겁니다. 남편과 황 선생님은 중·고등학교 동창이셨습니다. 원래 같이 피아노를 전공하려고 했는데, 황응연 선생님께서 남편과 항상 비교가 되다 보니까 “나는 윤연이보다 피아노를 못 치기 때문에 피아노를 전공하면 안 되겠다”고 생각하여 피아노를 그만두셨다고 말씀하기도 하셨습니다(웃음).
윤연 선생과의 첫 만남
이용일_ 재미있는 일화네요. 그럼 다음으로 어떻게 윤연 선생님과 처음 만나게 되셨는지 한 분씩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황선_ 저는 광주여고 1학년 재학시절 서울대에 콩쿠르가 생겨서 출전했다가 예선에서 떨어졌습니다. 그리고 2학년 때 다시 나갔는데, 또 예선에서 떨어졌어요. 그럼 안 나가야 되는데, 저는 고등학교 3학년 때 또 나갔단 말이지요(웃음). 게다가 그 때 당시에는 황선이라는 이름이 쉽게 찾을 수 있는 이름이 아니었고, 지방에서 올라온 학생이 부산에서 2명, 광주에서 2명, 대구에서 1명밖에 안 되다 보니 아마 윤연 선생님의 기억에 남으셨던가봐요. 콩쿠르 후에 경희대학교의 입학 허가서가 광주여고로 왔더라고요. 거기에 소나무와 아주 큰 석조건물이 그려져 있었는데, 먼저 그 그림을 보고 반하기도 했고, 등록금이 반액이라는 이야기에 경희대로 진학해야겠다는 결정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경희대 음악과에 입학하고 보니까 음악과가 만들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지원을 하는 사람을 무조건 합격시키셨더라고요. 그러다 보니 입학한 학생들은 대부분 바이엘, 체르니 초급 정도를 치는 수준이었지요(웃음). 이 학생들 가운데 피아노를 잘 친다는 학생이 피아니스트 백연희 선생과 저였기 때문에 윤연 선생님과 인연이 더 가까워질 수 있었습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다시피 제가 포기하고 절망할 줄을 모르고 끊임없이 도전하는 성격이다 보니까 선생님의 눈에 들어서 겨울 방학 때는 경희대 설립자이신 조영식 박사님 댁의 가정교사로 추천해 주시기도 하실 만큼 아껴주셨어요. 윤연 선생님에 대한 좌담회를 앞두고 몇 십 년의 세월을 거슬러 생각해 본 것이다 보니 아마 일부 제 짐작도 포함되었음을 양해 부탁드립니다.
문초자_ 저는 고등학교 때 숙명여대 콩쿠르에 출전해 3등에 입상하여 그 시절에 숙명여대에는 시험 보지 않고 입학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화여대를 나오신 선배님께서 숙명여대를 가지 말고 경희대에서 윤연 선생님께 배우라고 적극 추천하셨지요. 그래서 고민 끝에 경희대에 입학하여 선생님과 인연을 맺게 되었습니다.
손동연_ 저는 중학교 3학년 이전까지 한양대를 가기 위해 권기택 선생님께 배우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경희대 음악과에서 개최한 음악회를 보게 되었는데, 윤연 선생님의 제자 분들이 피아노를 너무나 잘 치시더라고요. 그 모습을 보고 중학교 3학년 때 선생님을 찾아가서 처음으로 레슨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 때 선생님께서 가르쳐주신 터치법이 저에게 상당히 큰 변화를 가져다주었고, 그후로 대학원 1학년 때까지 선생님께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김인화_ 아시는 분도 계실 듯한데요. 손동연 선생은 유명한 순교자이신 손양원 목사님의 막내 따님입니다. 어린 시절 아버지를 여의고 어려운 집안 사정 때문에 정말 힘들게 피아노를 공부하였지요.
손동연_ 네. 늘 레슨이 끝나면 윤연 선생님과 사모님께서 항상 밥을 챙겨 주시는 등, 너무나 따뜻하게 대해 주셨지요. 저는 어린 시절 너무 외로웠기 때문에 두 분은 저를 지탱하게 해주는 버팀목이셨습니다. 지금까지도 사모님 곁에서 많은 위안을 받고 있습니다.
이용일_ 그러한 인연이 있으시군요. 손 선생님의 아버지께서 봉사하시던 애양원은 기독교의 성지가 되었고, 손양원 목사님은 현재 세계의 순교자로 추대되셨지요. 그럼 김도실 선생님께서는 언제 처음 윤연 선생님을 뵙게 되셨나요?
김도실_ 저는 중학교 1학년 때 처음 뵈었어요. 피아노에 대한 기초를 가장 잘 가르치시는 분이라는 교장 선생님의 추천으로 처음 선생님을 찾아 뵙게 되었고, 그 후 6년간 레슨을 받았습니다. 제가 서울예고 3학년에 재학 중이던 1974년 10월에 선생님께서 돌아가셨는데, 여름까지 레슨을 받았으니 마지막 레슨도 제가 받지 않았나 합니다. 제가 너무 선생님을 어렵게 생각해서 레슨이 끝나면 수줍게 인사만 드리고 곧 바로 집에 가곤 했는데, 지금도 안암동 선생님 댁을 생각하면 행복한 추억이 있는 곳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용일_ 당시 일찍부터 윤연 선생님을 알고 선생님께 가르침을 받았다는 것은 굉장한 축복을 받은 것이라 할 수 있겠네요. 사모님은 윤연 선생님과 연애로 결혼하셨나요?
김인화_ 네. 이화여대 성악과 재학 시절 신인 음악회에 나갔을 때 남편을 만났습니다. 당시 서울대, 이화여대, 숙명여대 이렇게 세 학교에서 10명인가, 11명 정도가 출연하였는데, 그 때 마음이 잘 맞아서 계속해서 만남을 가지게 되었지요(웃음).
손동연_ 사모님은 당시 굉장한 미인에 이화여고, 이화여대에서 1등을 놓친 적이 없으셨고, 부친께서도 오리온의 부사장님으로 계셨기 때문에 집도 부유하셨어요.
이용일_ 그러면 부모님의 반대도 있으셨을 것 같은데요.
김인화_ 좋아하지는 않으셨지요. 제가 음악을 전공하는 것조차도 아버지께서는 반대하셨으니까요. 아무래도 여자아이라 시집가면 그만 두게 될 테니까 그냥 좋아하는 거 하라고 허락하셨던 것이었지요.
윤연 선생의 음악세계
이용일_ 그럼 이어서 윤연 선생님의 음악세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어 보겠습니다. 선생님께서 독주회는 많이 가지셨나요?
문초자_ 당시에는 독주회를 개최하는 것이 쉽지 않던 시대였습니다. 세종문화회관, 예술의전당이 개관되기 전이었으니까요.
김인화_ 네 지금은 어느 오케스트라였는지 생각이 잘 나지 않습니다만, 베토벤의 「교향곡 5번 ‘황제’」를 협연하신 바 있으시고, 그 외엔 다른 연주자분들과 함께 하는 무대가 많았습니다. 특히 반주를 많이 하셨고, 한 동안은 실내악4중주단을 만드셔서 저희 집에서 연습하곤 하셨지요.
손동연_ 네. 그리고 제가 기억하는 바로, 윤연 선생님께서는 고뇌가 많으신 분이라 느꼈었어요. 고민도 많이 하시고 방황도 하시고요. 그리고 선생님 손에 혹 같은 것이 있으셨는데, “이것 때문에 연주하기가 힘들다”라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김인화_ 그 당시는 6·25사변 후라 교통편이 없어서, 학생들이 통학하기가 매우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남학생들은 흔히 많았던 지나가는 군 트럭에 뛰어올라 타고 내리곤 했지요. 남편도 그러다가 손목을 다치신 적이 있었대요. 후에 피아노를 치시면서 그 때 영향으로 넷째와 다섯째 손가락에 지장이 와서 고민을 많이 하셨어요. 한 번은 홍진표 선생님과 같이 유럽과 미국을 투어하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 때 미국에 가시면서 손목을 수술할 계획을 가지고 나가셨는데, 피아니스트에게는 워낙 섬세한 부분이라 함부로 수술하기가 어렵고, 섬세한 검사로 시간이 많이 걸리므로 수술을 받지 못하게 되셨어요. 실망을 많이 하셨지요. 그래서 그 이후로는 제자 양육에 더 열심히 임하셨던 것 같아요.
이용일_ 아주 중요한 말씀이시네요. 앞서 손동연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고뇌의 이유가 될 수도 있겠고요. 이렇게 활발하게 음악 활동을 하지 못하신 이유가 있는데, 음악사를 정리하는 사람들은 연주기록이 적힌 예술연감을 보고 정리를 하기 때문에 윤연 선생님에 대한 언급이 누락되었을 수 있다는 것이지요.
김인화_ 네. 또한 6·25전쟁 이후에 음악대학이 새로 만들어지는 등 음악계의 활성화가 이루어 졌고, 게다가 기록을 하기 시작한 것도 우리 이후 세대부터 활발해졌기 때문에 연주가로서 큰 명성을 떨친 분들이 아닌 이상 기록이 남기가 쉽지 않습니다. 유족이 남아서 고인의 업적을 알리고, 기록으로 남기고 했어야 하는데, 저도 어려서 자식들을 키우며 힘든 시간을 보내다 보니 그럴 여력이 없었던 것이 지금으로서는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이용일_ 한 가지 더 고려해 보아야 할 것은 윤연 선생님께서 그 시대에는 엘리트였지만, 바로 밑의 후배들이 재빠르게 치고 올라왔단 말이지요. 급변하는 문화현상의 시대였으니까요. 초창기 음악가들이 정말 어렵게 음악을 공부했는데, 그분들이 공부한 것들을 후학들에게 쉽게 잘 가르쳐 주시니 후배들은 더욱 빠르게 성장할 수밖에 없지요. 초창기 음악가들이 거기서 받는 스트레스도 만만치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김인화_ 네. 남편은 유학을 다녀오지 않으셨는데, 후배 음악가들이 타국으로 유학을 가서 신교육을 받을 수 있는 여건도 갖추어지는 등, 아마 그런 데에서 받는 스트레스도 있으셨을 거라 생각합니다.
윤연 선생의 교육관
이용일_ 그럼 윤연 선생님은 학생들을 지도할 때 어떠한 점을 주로 강조하셨나요?
황선_ 선생님은 기초를 너무나 중요시 여기셨습니다. 손가락 하나하나의 타법을 철저하게 교육하셨지요. 우리가 집을 짓던지, 춤을 추고 노래를 하던지 간에 모든 일에는 기초를 튼튼히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냉엄하고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정이지요. 선생님께서 그렇게 기초훈련을 철저히 해주셨기 때문에 그것으로 인한 자양분이 축적되고 확산되어 우리에게 대단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이것은 아마 여기 계신 모든 선생님들께서 동의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어린 나이에는 너무 싫었어요(웃음). 이러한 레슨법은 윤연 선생님께서 로신옥 선생님의 수제자이셨고, 로신옥 선생님의 가르침이 당신에게도 큰 도움이 되었다는 것을 느끼셨기 때문에 그러한 교육법을 따라 기초만큼은 언제나 원칙을 지키셨습니다.
문초자_ 맞습니다. 저도 그 때 인내심을 배운 것 같아요(웃음). 또한 선생님은 레퍼토리가 다양하셔서 각자 개인의 성향에 맞는 곡으로 레슨을 하셨습니다. 현대음악은 당시에는 나타나지 않던 시기였지,만 당시로 치자면 현대음악이었던 드뷔시, 라벨까지는 섭렵을 시키셨어요.
김도실_ 이제 저 또한 가르치는 입장이 되고 나니 은사님들의 가르침이 더욱 기억이 나더라고요. 특히 윤연 선생님은 체취까지도 기억이 날 정도로 마음 깊숙이 자리잡고 계신데요. 문초자 선생님의 말씀대로 윤연 선생님께서는 곡뿐만 아니라 학생의 성격에 따라 지도법까지도 달리 하셨습니다. 레슨 받기 전에 다른 학생의 레슨을 참관해 보면, 선생님께서는 그 학생에게 악보를 던지시는 등 아주 무섭게 가르치셨어요. 그러나 제가 선생님의 따님과 한두 살밖에 차이가 안 나다 보니 저를 딸처럼 생각하셨는지 언제나 제 오른편에 서셔서 흐뭇하게 웃으시면서 레슨해 주셨지요. 그리고 저 또한 어린 나이라서 손가락 힘이 고르지 못하여 2년 정도 철저하게 기초 훈련을 받았는데요. 기초가 어느 정도 자리잡히고 나니까 곡에 대한 흥미를 유도하시기 위해서 감히 제가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제14번 ‘월광’」의 3악장을 칠 수 없는 테크닉임에도 불구하고 그 곡을 가르쳐 주셨어요. 너무 기초만 훈련받다 보니 나도 좋은 곡을 치고 싶은데… 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런 시기에 좋은 곡을 주시면서 음악적인 것을 유도해 주시더라고요.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를 공부한 후에는 갑자기 리스트의 「타란텔라」를 가르치시는 등 레퍼토리의 수준을 한층 높이셨습니다.
이용일_ 이러한 교육법을 교육용어로 과중학습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면 그 많은 피아노 곡을 단계별로 밟고 올라가려면 어림도 없기 때문에 한 단계를 과중하게 학습시킨 후 그것이 완벽히 숙지가 되면 여러 단계를 뛰어 넘는 것이지요.
김도실_ 네. 또한 대학 진학을 앞두고는 저에게 선택권을 주셨습니다. 당시에도 경희대에 교수로 재직하시면서 서울대에서 강의를 하셨기 때문에 “서울대에 와도 네가 내 제자이지만, 대학 교수도 하고 그러려면 용의 꼬리가 되기보다 뱀의 머리가 되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고 말씀하셨어요. 그래서 선생님께 “저는 용의 꼬리가 아니라 머리가 될 건데요?”라고 대답했지요(웃음). 선생님께서 교육자적으로 멋진 모습을 보여주시니까 교수가 되고 싶다는 욕심도 가지고 있었지만, 어린 마음에 경희대 보다 서울대에 가고 싶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일단 경희대 콩쿠르에 출전을 하기도 했는데, 선생님께서는 결국 콩쿠르 심사를 못하시고 바로 직전에 돌아가셨습니다. 선생님께서 돌아가시기 며칠 전에 찾아뵈었는데, 꼭 경희대에 가라는 말씀을 마치 유언과 같이 남기셨지요.
황선_ 또한 선생님은 애정에 대한 배분을 공평하게 하셨어요. 한번은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5개를 가지고 정동 예술극장에서 제자 발표회가 있었습니다. 우정일 선생님, 문초자 선생님이 연주를 하게 되어서 선생님께 “왜 저는 안 시켜 주시냐”고 했더니, “너는 조금 있으면 더 큰 기회가 있을 것이다”고 말씀하시더라고요. 그후 서울시립교향악단의 정기 연주회 때 저를 협연자로 세워주시면서 “봐라. 더 큰 것이 왔지 않느냐”라고 하셨지요(웃음). 그만큼 제자에 대한 애정을 골고루 나누어 주셨습니다.
김도실_ 저 또한 손동연 선생님께서 대학원 협연을 앞두고 계실 때 연습반주를 고등학생인 저에게 맡겨주시는 등, 다양한 기회를 주셔서 후에 반주를 하거나 반주 강의를 하는 데에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윤연 선생이 한국 음악계에 끼친 영향
이용일_ 그럼 이어서 윤연 선생님께서 우리나라 음악계에 끼친 영향이라고 생각하시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시지요.
황선_ 반복적인 얘기일지 모르나 피아노, 테크닉에 대한 기초 완성이지요. 그것은 어떤 누구도 따라가지 못하는 부분이라 생각합니다. 이에 대한 자부심으로 제가 수 십 년간 학생들을 지도하면서 얼마나 큰 자양분이 되었는지 모릅니다.
문초자_ 당시 경희대 음악과 입학생들은 사실 2차 대학으로서 본인이 원하지 않은 대학에 온 학생들임에도 불구하고 선생님께서는 피아노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학구적인 분위기를 조성하여 주셨던 것 또한 큰 역할을 하신 거라 생각합니다.
이용일_ 저는 우리나라에서 피아노를 전공했다면 어느 학교 출신이 되었든지 머리가 좋고 똑똑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피아노를 공부하기 위해서는 손가락 10개를 잘 컨트롤할 수 있어야 하고, 인내심이 강해야 하는 등, 많은 어려움을 극복해야 합니다. 이러한 어려움이 있는 가운데서도 얼마나 즐기면서 그 과정을 잘 갈 수 있게 하느냐가 피아노 페다고지인 것입니다.
김인화_ 어느 날 남편은 드뷔시 곡을 치면서 음색 하나 하나에 고민을 많이 하곤 하셨어요. 이렇게도 쳐 보고, 저렇게도 쳐 보시면서 그냥 손가락으로 누르는 것이 아니라, 건반을 누른 손가락을 살짝 흔들어주기도 하고, 그 곡의 특별한 음색을 찾느라고 깊이 연구하시는 모습이었지요. 그렇게 많은 연구를 거친 후에 학생들을 지도하셨고요. 저 또한 남편이 연습해 나가는 과정을 보면서 터치에 따라서 음색이 변한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같은 곡인데 다른 사람이 연주하는 것을 들으면, 때론 전혀 다른 곡같이 들릴 정도였으니까요.
이용일_ 우리나라에서 피아노 음색을 따지기 시작한 것이 1960년대 후반인 것으로 알고 있는데, 윤연 선생님께서는 음색에 대한 인식도 매우 앞서 가셨네요.
김인화_ 네. 또한 로신옥 선생님께서 상해에서 외국 선생님에게 피아노를 배우셔서 타법이 새로운 면이 있으셨고, 남편은 그러한 타법을 후배음악가들에게 전달하는 역할도 하셨지만 교육법에 대해서도 연구를 많이 하셨어요.
황선_ 당시 윤 선생님께서도 말씀하신 것이 “자신 또한 로신옥 선생님에게 배운 것을 변화시키고 보완하여서 가르치는 것이니 너도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이었지요.
이용일_ 우리나라는 음악을 일본에서 배웠고, 일본은 독일이나 그 외 외국인들에게서 서양음악을 배웠지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나라와 일본의 차이를 보면, 일본은 기초가 아주 튼튼하다는 것입니다. 일본은 합창단이나 브라스 밴드가 없는 학교가 없지요. 하지만 그렇게 틀이 정형화되어 있기 때문에 색다른 변화를 추구하기가 어렵고, 그로 인해 세계적인 연주자가 나오기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반면 우리나라는 교육을 제대로 못한 것이 오히려 윤연 선생님처럼 새로운 교수법도 개발하고 창의력을 기를 수 있는 배경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문초자_ 뿐만 아니라 선생님께서는 음악성에 대해서도 노래를 통해서 알기 쉽게 설명해 주셨어요. 저 또한 지금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음악성이 부족하거나 이해력이 부족한 학생들에게 윤연 선생님께서 가르쳐 주신 교육법을 적용하고 있지요.
김도실_ 선생님께서는 저에게 바흐 인벤션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가르치셨습니다. 한 프레이즈마다 정확하게 해석하도록 시키셨어요. 그러한 교육을 통해 악곡을 정확하게 분석할 수 있는 능력과 초견력을 길러주셨고, 후에 어떠한 현대곡을 대하더라도 곡을 한눈에 해석할 수 있는 기본적인 해석력을 갖추는데 큰 도움이 되었지요.
이용일_ 이 외에도 기억나는 일화가 있으신 분들은 말씀해 주시지요.
문초자_ 저는 집이 제주도였기 때문에 레슨이 끝나면 선생님과 같이 식사도 하곤 했습니다. 어느 날은 사모님과 영화를 보러 가시기로 되어 있으셨나봐요. 선생님께서 워낙 마음이 따뜻하신 분이시라 사모님께 저를 데리고 가자고 말씀하시더라고요. 저는 철없이 두 분의 오붓한 시간을 방해했는데, 당시 사모님께서는 제가 얼마나 미웠을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웃음).
황선_ 그러고 보니 저도 윤연 선생님과 같은 동네에 살아서 영화관에 몇 번을 따라간 기억이 납니다. 당시에 왜 이렇게 한국영화를 많이 봤나 했더니 이제야 생각이 나네요(웃음).
손동연_ 당시에 선생님의 제자들이 너무 예뻐서 사모님은 어떻게 견디시나 하는 걱정도 했었어요(웃음).
이용일_ 그럼 선생님의 제자 분들 중에는 또 어떤 분들이 계신가요?
김도실_ 전남대 명예교수 정은순 교수님, 군산대 임옥희 교수님과 이탈리아 밀라노 도니제티 아카데미의 디렉터이신 김정민(클라라 김) 선생님, 계명대 교수이셨던 고 우정일 선생님, 피아니스트 임옥희, 이경자 선생님 등이 계십니다.
김인화_ 그 외에 호서대에 계셨던 안은희 선생님, 또 이화여대를 졸업하신 이강순 선생님도 기억납니다.
이용일_ 네. 윤연 선생님께서 일찍 돌아가시지 않으셨다면 더 많은 훌륭한 제자들을 배출해 내셨을 텐데, 아쉬움이 큽니다. 비록 짧은 생을 살다 가셨지만 선생님께서 보여주신 음악에 대한 사랑과 열정이 후배, 제자들을 통해 계속해서 이어져 가기를 바랍니다. 바쁘신 와중에 참석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리_ 박진하 기자 / 사진_ 김문기 부장
김인화(전 이화여대, 호서대, 한세대 강사)
황선(경희대 음대 전 학장, 명예교수)
문초자(과천 장미음악학원 원장, 전 경희대, 상명대, 단국대, 서울예고, 덕원예고 강사)
손동연(전 세종대, 경희대 강사)
김도실(경희대 음대 교수 역임, 현재 나사렛대 겸임교수)
이용일(한국음악교육협회 명예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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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서울남산오페라단 가을 연주회 / 음악춘추 2012년 10월호 (0) | 2012.10.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