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음악춘추

피아니스트 유영욱 / 음악춘추 2013년 6월호

언제나 푸른바다~ 2013. 6. 20. 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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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우가 만난 이 달의 아티스트

피아니스트 유영욱
최고의 예술적 가치 실현 위해 끊임없이 탐구

 

  대담·구성_박경우(음악평론가, 지휘자, 피아니스트)

  사진_김문기 부장

 

세계를 무대로 활동하는 연주자들이 부지기수다. 세계적으로 소위 잘 나가는 피아니스트가 되기 위해서는 청중을 압도할 출중한 음악적 연출력과 이를 뒷받침할 연주력이 기본이다. 또한 기획사는 한 사람의 연주자를 상품화(?)하고 포장하여 도처에 소개함으로써 점차 상품성의 가치를 높이게 된다. 이로써 수많은 연주회 개최 및 음반출반의 기회와 경험을 통해 점차 음악적으로 성장하게 되면서 가히 자타가 공인할 세계적인 솔리스트 대열에 우뚝 설 수 있게 된다. 필자가 이 달의 아티스트로 선정한 피아니스트 유영욱은 그처럼 치열한 상황을 헤쳐 나감으로써 자신의 입지를 성공적으로 다져나갈 충분한 역량을 겸비한 인물로 간주함에 있어 일말의 주저함이 없다. 그런 유영욱이 돌아왔다. 세계무대를 석권할 만한 자질을 갖췄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한편 아쉬운 생각이 들었었다. 그러나 유영욱과의 대화를 통해 그의 귀환 결정이 단순하거나 맹목적이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즉, 연주자와 교육자의 길을 겸하려는 그의 분명한 신념과 목표를 파악하게 된 것이다. “피아니스트로서 연주를 잘하는 것은 청중의 하룻저녁을 즐겁게 해주는 것이지만, 교육자로서 학생을 제대로 안내하고 교육하는 것은 한 사람의 인생을 바꿔놓을 수 있는 길입니다.”라고 그의 확신을 피력한다. 조용하고 차분한 성격의 유영욱이 피아노에 입문할 때만 하더라도 자신이 느끼기에 지진아(?)였다고 솔직히 토로한다. 그렇기 때문에 소위 특출하지 않거나 잠재 가능성을 살리지 못한 학생들의 상황도 공감하고 이해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흔히 바보처럼 취급되는 학생들의 상황에 대해서 자신은 이해할 수 있지만, 그것은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만성적 맨붕(맨탈붕괴)’ 상태가 아닌가 생각 들기도 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요즘 그의 레슨의 목표는 멘붕퇴치에 주력한다며 해맑게 웃는다. 이런 면들이 유영욱이 교육자(교수)로서 적합한 또다른 품성을 갖추고 실현할 수 있는 관건이란 생각이 들었다. 과거에 유영욱의 연주를 접했던 사람들은 추호도 그렇게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필자 역시 처음 그의 생각을 전해 들었을 때 의외란 생각이 들었다. 유영욱은 이미 10세 무렵 자신의 작품을 가지고 연주회를 개최함으로써 그 당시 음악계에서 주목을 받았다. 필자도 ‘별난 어린 학생이 있구나’라고 생각했었다. 그 나이에 작곡의 어떤 면에 마음이 이끌렸는지 묻자, “곡을 써 나가는 것보다 저의 생각을 오선지에 기보해 나가는 것에 매료되었습니다. 때로 신비로운 학문처럼 느껴지기도 했고요. 무엇보다 수학문제를 풀어 나가듯 이야기를 논리적으로 전개해 나가는 것이 흥미로웠고 한편, 이는 마치 특정한 소수 엘리트들만이 구사할 수 있는 그들만의 특정한 언어처럼 느껴져 그 매력에 이끌렸던 것 같습니다.”라고 말한다. 작곡을 병행하다 보니 독보(讀譜)가 더욱 편해졌다며 다른 연주자들도 작곡을 시도해 볼 것을 권면하기도 하였다.
그를 지칭하여 ‘한국의 베토벤’이란 별명이 생긴 것도 그 시기였다. 그랬던 유영욱이 재차 살아 있는 베토벤으로 인정된 계기는, 독일 본에서 개최된 국제 베토벤 콩쿠르 심사위원단으로부터 “베토벤이 살아서 피아노를 친다면 유영욱처럼 연주했을 것이다”라는 평가에서 비롯된다. 물론 그의 역량을 한 작곡가에 한정시킬 필요도 그래서도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가 연주하는 각 작품에선 제각기 다른 차원의 음상(音像)의 실현과 예술가 정신이 상대적으로 폭넓게 내재하기 때문이다.
2008년 6월,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은 유영욱이 유학을 마친 후 세계 도처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치다 국내 공연장에 섰던 특별한 날이다. 국내는 물론 해외 솔리스트들에게도 쉽게 개방하지 않는 대공연장이 그가 금의환향하여 자신의 예술적 전모를 선보인 바로 그 장소였던 것이다. 공연장의 크고 작음이 그 곳에서 연주하는 연주자의 역량을 평가하는 잣대가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나 한편 귀국 독주회 무대를 수없이 지켜본 필자의 입장에서 볼 때 유영욱에게도 마찬가지로 귀국 독주회(?)처럼 첫선을 보이는 무대인데 그 큰 객석을 염두에 두었다는 점에서 청중 및 음악계의 전반적인 평가가 이를 뒷받침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갖게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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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우_ 오늘날 촉망받는 피아니스트 겸 교수 유영욱을 탄생시킨 산실인 가정환경이 궁금한데.


유영욱_ 아버지는 어려운 환경에서 성장하셨지만 큰 뜻을 갖고 각고의 노력 끝에 서울대 공대에 입학하신 흔히 말하듯 ‘개천에서 용이 난’격과 같은 분이셨습니다. 반면 어머니는 유복한 가정에서 성장하여 후일 홍대 미대를 졸업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오래 전부터 많은 음악 테이프를 모으실 정도로 마니아셨지만, 제가 어린 시절 워낙 조용한 성격이었고 당시엔 음악을 시작하기 전이라 저의 가능성을 탐탁하게 여기진 않으셨던 것 같습니다. 제가 어릴 때 아버지께서 세상을 떠나셨지만, 만일 지금까지 생존해 계셨다면 음악적으로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둘도 없는 상대였을 것이란 아쉬움이 있습니다. 어머니는 좋은 환경에서 성장하면서 다양한 음악을 접하셔서 제가 어릴 때부터 유익한 도움을 주실 정도셨지만 전공하신 분은 없습니다.(웃음) 어머니의 권유로 초등학교 2학년쯤 피아노를 시작해서 2년여 지난 후 작곡에 관심을 갖게 되어 음악을 전공하겠다고 마음먹었던 것 같습니다.

 

박경우_ 10세에 이미 작곡 발표회를 가져 언론 및 음악계에서 크게 주목된 바 있는데, 당시 작곡했던 곡들의 작품 구성 및 성향을 대략적으로 소개한다면? 그리고 물론 어린 시절의 작품이긴 하지만, 중견 피아니스트로서 자리매김한 이 시점에 돌이켜, 그 작품들의 창작적 아이디어, 예술적 가치를 객관적 견지에서 어떻게 평가하고 싶은지?


유영욱_ 피아노 솔로 곡, 실내악곡 등이었습니다. 슬픈 노래, 소용돌이 등 현실에서의 영감과 모티브를 주제로 한 곡들도 섞여있었습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어린 나이 치고 제법 참신한 아이디어도 있다고 생각하지만 아무래도 미숙한 면이 많겠죠(웃음).
 
박경우_ 일찍이 예원학교 재학 중 줄리어드 예비학교로 유학하였고, 이후 맨해튼 음악대학 대학원에서 석사 및 박사학위를 취득했는데, 어떤 교수님들을 사사했으며, 자신의 음악적 성장에 어떤 면에서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하는지?


유영욱_ 마틴 캐닌, 제롬 로웬탈, 솔로몬 미코프스키 선생님 등을 사사했습니다. 시간관계상 세부적으로 말씀드리기엔 한계가 있지만, 대별할 때 앞의 두 선생님은 제가 피아니스트로서 전반적인 체계를 정립하고 성장할 수 있는 주요 관건들을 폭넓게 교육하고 습득할 수 있도록 이끄셨다면, 미코프스키 선생님은 관객과의 교감을 강조하셔서 제가 연주자로서 갖춰야할 실질적인 영향을 받았던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박경우_ 국내 및 해외의 여러 권위 있는 콩쿠르에 상위 입상하였는데, 자신의 가능성을 확인할 특별한 기회로 기억되는 콩쿠르는? 그리고 자신의 오늘이 있도록 결정적으로 작용한 콩쿠르는 어떤 것인지?


유영욱_ 1998년에 우승한 산탄데르 국제 콩쿠르가 처음으로 제게 연주자로서 무대를 열어주었다면, 2007년의 베토벤 콩쿠르는 전업 연주자 생활을 접고 교육활동의 병행을 갈망하던 저에게 마지막으로 의미 있는 무대를 만들어 줬다고 생각합니다.

 

박경우_ 그간 해외의 여러 공연장에서 수많은 독주와 협연 무대를 가졌는데, 피아니스트로서 각각의 무대를 통해 어떤 생각과 인상하게 실감하게 되었는지?


유영욱_ 물론 여러 무대를 통해 청중과 교감하며 황홀하고 행복했던 순간들이 많았었습니다. 저의 음악적 사고와 감성이 전혀 다른 외국인들에게도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음을 매 공연을 통해 재확인하면서 연주자로서 저 자신에 대한 확신을 굳히는 계기가 된 것이 마음에 깊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홀로 해외 이곳 저곳을 전전(?)하며 생활해야 하고, 매번 낯선 환경으로 이동하여 그 곳의 성향이나 취향이 제각기인 청중 앞에서 연주한다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던 것이 당시 느꼈던 솔직한 제 심정이었습니다. 그래서 전문 연주자로서 활동하는 것이 싱글인 제게 그렇게 만만하게 다가서지는 않더군요(웃음).

 

 

- 기사의 일부만 수록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음악춘추 2013년 6월호의 기사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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