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음악춘추

커버스토리. 작곡가 진규영 / 음악춘추 2017년 1월호

언제나 푸른바다~ 2017. 5. 22. 20:39

커버스토리 / 작곡가 진규영
어느덧 고희를 맞은 작곡가, 그가 꾸고 있는 꿈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작곡가로 48년간 꾸준히 활동해온 작곡가 진규영을 만났다. 진규영은 한국적 소재를 작품에 활용하여 현대화 시키는 작곡가로, 민속음악 색채가 짙은 그의 가곡과 합창곡은 청중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1991년 대구국제음악제를 창단하여 젊은 음악인들의 활발한 활동을 이끌어 낸 그는 올해로 고희를 맞았다. 올해에도 변함없이 통영국제음악제를 비롯한 다양한 계획을 가지고 있는 그를 만나 인생과 음악이야기를 들어 보았다.


***작곡의 시작
교회 오르간을 치면서 음악을 시작했다는 작곡가 진규영은 거제도와 통영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당시에는 음악을 시작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진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목회를 하시는 아버지 덕분에 교회에서 많은 음악을 접할 수 있었고 교회 오르간을 자유롭게 칠 수 있었다.

“중학교 때, 제가 피아노 치는 모습을 보고 김동진 선생님과 동기이셨던 정관호 선생님께서 작곡을 시작해보라고 권유하셔서 본격적으로 작곡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분에게 배우면서 서울대학교 작곡과를 진학하게 되었으니, 이 기회를 통해서 감사한 마음을 전하고 싶습니다. 좋은 선생님을 만나 음악을 자연스럽게 접할 수 있었고 작곡 공부를 시작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_작곡가 진규영

진규영이 자랐던 통영은 윤이상 선생이 활동하였던 곳이다. 또한 그의 아버지가 목회하였던 교회는 윤이상 선생이 다녔던 바로 그 교회(통영교회-지금의 충무교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영이라는 지방에서 음악을 한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매우 특별한 경우였다.
진규영은 대학 입학시험 치르던 때를 회상하면서 전국 각 지역에서 작곡과를 지원하고 있어서 마치 각 지역의 대표들이 온 것 같았으며 자신은 경남의 대표였다고 말하며 웃는다. 각자의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음악을 좋아하여 열심히 공부한 학생들이 모였기에 입시는 당시에도 치열했다고 회상한다.


***학창시절과 유학시절
진규영의 아버지는 그가 고등학교재학 시절 은퇴 했다. 그렇다보니 그는 대학내내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동료들의 집을 전전하면서 지내기도 하고 대학교 2학년 때는 동료였던 이종구(한양대 음대교수역임) 3학년 때는 김철수(현재 브뤼셀거주) 4학년 때는 친한 후배이자 동료인 임헌정 선생 집에서 신세를 지기도 했다.
이러한 어려운 상황에서도 음악에 대한 꿈을 놓치지 않고 대학원을 졸업하고 조교와 교사로 생활하다가 대구 효성여대에서 교수로 근무하게 된다.

“효성여대 재직 중, 지금의 아내를 만나게 되고 3년가량 근무하다가 성악가인 아내와 함께 다른 동료들에 비해 비교적 늦게 유학을 떠났습니다. 물론 당시에 자리를 이미 잡은 상태에서 유학을 가는 것이란 쉽지 않았지만 그래도 공부를 더 하고 싶다는 마음이 있어서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유학생활에서도 경제적인 어려움은 이어졌지만 음악에 대한 마음을 놓지 않았기에 그 시간들을 지나 올 수 있었습니다.” _작곡가 진규영
 
그는 서울대학교에서 김성태 선생과 대학원에서 백병동 선생에게 작곡을 배웠다. 또한 독일 칼스루에 대학에서는 E.펠테와 M.스팔링거 두 선생에게 음악을 배웠다. 진규영은 정말 좋은 선생님께 음악을 배울 수 있었다고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학창 시절의 이야기를 해달라고 하자 겸손하게 웃으면서 콩쿠르에 입상한 이야기와 동료들과의 관계를 이야기 해주었다. 진규영이 대학교 4학년 때, 10회 동아콩쿠르를 나가게 되었다. 당시 국내 콩쿠르는 동아가 유일했는데, 그가 참가한 10회차는 주최한 이래로 유일하게 주제를 주고 현장에서 바로 작곡하게 했던 해였다. 당시에 그는 1등과 2등이 없는 3등을 했다. 그의 필력이 콩쿠르를 통해서 인정받은 것이다. 콩쿠르에 입상 한 후에도 그는 후배들이 콩쿠르를 나갈 때 직접 봐주기도 하면서 도움을 주었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서로 존중하면서 친분을 유지하고 있다.


***영남대에서
진규영은 유학이후 다시 정착한 영남대에서 1985년부터 2014년까지 만 29년간 재직했다.

“영남대에서 재직한 것은 저에게 정말 커다란 복이었습니다. 교수라는 자리에 있으면서도 작곡가로써의 음악 활동에 제한을 두지 않고 격려해주었던 학교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당시에 군사정권이라는 정치적인 환경으로 인해 음악인들이 서명을 하였습니다. 저도 이건용, 이만방, 황성호, 유병은 선생님과 함께 ‘제3세대’의 멤버로 활동을 했었는데, 당시 정치계에 반하는 서명을 했으니까요... 아마 정치계의 블랙리스트에 올라갔다고 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교 쪽에서 불이익이 없도록 어느 정도 저를 보호 해준 게 아니었나 싶습니다. 학교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교수 생활을 했었습니다.” _작곡가 진규영

진규영은 통영에서 성장하고 서울에서 공부를 했으며 대구에서 교수 생활을 했다. 그렇기 때문에 지난 30년간 서울에서 그리고 대구에서 다양한 활동을 할 수 있었다. 지방에서 활동하는 음악인의 장단점과 서울에서 활동하는 음악인들의 장단점을 모두 이해하면서 살아온 것이다.
이러한 특별한 활동이력은 ‘대구 국제 현대음악제’를 만드는 원동력이 된다. 그는 1991년 ‘대구 국제 현대음악제’를 만들었다. 처음 만들 당시 그의 나이는 40대 초반이었다. 기성인 중심으로 흘러가는 음악계에서, 젊은 음악인들이 설자리를 만들기 위해서 또한 지방의 준비되어 있는 좋은 음악인들이 국제적인 정보를 얻고 타 지역과의 음악적 교류를 위해서 ‘젊은 음악인의 모임’을 만들게 되었다고 이야기 했다.
모임은 성공적이었다. 전국의 작곡 전공자들이 모여들기 시작했고, 30개 대학의 학생들이 현대음악제에 참가하기 위해 대구를 찾았다. 3일 동안 진행되는 이 캠프에 250명에서 300명가량 되는 학생들이 모였으며, 서로간의 음악적인 교류도 활발하게 일어나서 음악인들의 축제의 장이 되었다. 작년에 26회를 맞은 ‘대구 국제 현대음악제는’ 현재 대구를 대표하는 음악제로 알려져 있으며 대구 지역 전체의 음악 수준을 향상 시켰다.
이를 계기로 작곡가 진규영은 강석희 선생의 뒤를 이어 국제현대음악협회(ISCM) 2대 한국 대표가 된다. 국제적인 활동을 꾸준히 하면서 작곡가로서의 활동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ISCM 세계음악제는 1997년에 서울에서 개최되었지요.(당시 한국대표는 강석희 교수) 그런데 2016년 통영에서 두 번째로 세계음악제가 개최되었어요. 이제는 실지업무에서 벗어난 명예회원이지만 세계음악제가 열리는 모습을 보면서 뿌듯함을 참을 수 없었지요.” _작곡가 진규영

 통영은 지금 유네스코에 유럽의 오랜 역사를 가진 도시들과 나란히 ‘음악창의 도시’로 지정되어있다. 통영에서 이러한 국제적인 행사들이 개최되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으며  그가 일조를 했다는 것에 가슴 뿌듯해 한다.

그의 응접실에는 포토모자이크 액자가 있다. 가까이 사진을 들여다보니 수많은 제자사진이 모여서 진규영 교수의 모습이 만들어진다. 대구의 제자들이 작업해서 준 선물이라는 그 작품을 보면서, 진규영 교수에게 제자들과의 관계를 묻는다. 그는 제자들과 자신의 관계를 식구라고 표현하며 서로 사랑하는 관계라고 말했다. 제자들 이야기를 할하며 그의 얼굴에 가느다란 미소가 보인다.

“저는 지금까지 제가 만난 전국의 모든 학생들을 제자라고 생각합니다. 제자는 마음으로 맺어지는 게 아닐까요? 제가 어릴 때 어렵고 외로웠던 시간을 보냈기에 제자들을 정말 아끼고 좋아합니다. 지방 아이들이 서울의 콩쿠르에서 입상하는 기쁨도 함께 누리기도 하고 힘든 일이 있으면 같이 울기도 했습니다. 당시에 레슨비도 잘 받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런 상황들을 뛰어 넘어 아이들과 함께 공부하는 것이 나에게는 큰 기쁨이었습니다. 저는 한번 인연을 맺은 제자들과 오랫동안 함께 가게 됩니다. 요즘 제가 대구 문화재단 일을 도우면서 대구의 음악계를 돌아보게 되는데 각자의 자리에서 감사하면서 음악의 끈을 놓지 않고 활동하는 제자들을 만납니다. 정말 예쁘고 자랑스럽습니다.” _진규영 작곡가


***작곡가 진규영의 작품세계
작곡가 진규영의 작품세계는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한국적’이다. 그가 독일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선배인 이건용은 “너는 유학 다녀왔는데도 한국적 색채를 버리지 않았네?”라는 말을 하였다. 진규영은 그 말이 지금까지도 잊혀지지 않는다고 했다. 전통적인 음악과 민속음악을 좋아해서 민속 합창곡 편?작곡도 많이 하였으며, 그의 가곡에서도 민속적인 선율을 느낄 수 있다.
또한, 군사정권을 지나온 그는 현실 고발적 메시지를 작품에 담았다. 국제정세가 불안해질 때에도 위안을 찾을 수 있도록 작곡하기도하였다. 
 그의 작품 중 합창곡 「예언」과 가곡 「새」, 「귀에는 세상 것들이」등이 이러한 메시지를 담은 작품이다. 
 
“합창곡 「예언」은 걸프전이 일어났을 당시에 쓴 곡입니다. 미래의 이야기를 성서에서 찾으며 예상해보자하는 뜻으로 작곡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가곡 「새」는 정치적으로 암울했던 시기에 쓴 곡인데 내 자신을 새에 빗대어 밖에서는 지저귀며 울지만 실상은 즐길 수 없는 모습을 표현하였습니다. 세일 콩쿠르의 지정곡인 「귀에는 세상 것들이」라는 가곡은 세상에 잡음이 너무 많으니 예쁜 새소리가 들리지 않는 다는 뜻입니다.” _작곡가 진규영

작곡가 진규영의 작품에는 성악곡이 많다. 귀국 후, 1986년도에 대구 MBC에서 가곡 「남해금산」을 발표하였다. 이 작품이 좋은 평을 받으면서 서울 KBS 신작가곡코너에서 곡을 위촉 받았다. 기회들이 점점 많아지면서 가곡과 합창곡은 그를 대표하는 장르가 되었다.

“가곡과 합창곡은 작곡가들이 대중을 만날 수 있는 좋은 창구 역할을 해오고 있습니다. 가곡을 통해 청중을 만날 때 나는 새로운 것들을 많이 깨달을 수 있었고, 소통하는 즐거움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저에게는 가곡과 합창곡 위촉이 많이 들어왔고 지금까지 가곡만 100여곡 합창곡은 20여곡 작곡하였습니다.
요즘 세대는 가곡을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물론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IMF 이후 경제적으로 어려워지면서 가곡을 TV에서 접하기 힘들어지고 교과서에서 가곡이 냉대받기 시작하면서 젊은 세대들이 가곡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하게 된 듯합니다. 저는 가곡이 청중을 만나는 제3의 창구라고 생각하며 그 중요성에 대해서 인식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가곡을 조금 더 쉽게 작곡하고 싶습니다. 더욱 많은 청중들과 만나기 위해서요.” _작곡가 진규영 


***통영국제음악제와 나
통영은 진규영이 어린 시절을 보낸 마음의 고향이다. 진규영의 아버지가 목회하셨던 통영교회는 윤이상 현악 4중주단이 시작되었던 교회이기도하다. 역사적으로 매우 의미 있는 곳에서 그는 자랐으며 음악적인 영향을 받았다.
4년 전, 통영문화재단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국제음악당을 만든 후 본격적으로 재단이 활동하기 위해서 CEO를 선출하는 일을 부탁받은 것이다. 현재 극장장으로 활동하고 있는 플로리안 림(독일)이 그때 뽑힌 CEO이다. 그리고 진규영은 통영국제음악제의 부이사장이 되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통영국제음악제의 성공적인 개최를 위해 뒤에서 돕고 있다.

“통영국제음악제를 통해서 많은 음악들이 소개되고 연주되었지만, 저는 윤이상 선생님의 음악이 우리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올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정치사회적인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우리는 아직도 윤이상 선생님의 음악을 자유롭게 연주하고 받아들이고 있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윤이상 선생님의 제자들 중 일본과 대만의 제자들은 윤 이상의 제자였다는 것을 자유롭게 표현하면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데, 이에 반해 한국에서는 그렇지 못한 것도 그 이유 중 하나가 되겠습니다. 음악외적인 이유들로 인해서 순수한 내용의 음악들이 곡해되는 듯하여 아쉬운 마음입니다.” _작곡가 진규영

올해의 통영국제음악제는 윤이상 선생 100주년을 기념해서 열린다. 진규영은 윤이상의 작품을 연주하는 여러 가지 계획을 말하였다. 올해 열릴 통영국제음악제야 말로 통영의 음악을 온전히 느낄 수 있는 음악제가 되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음악인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
진규영은 대구시립교향악단의 ‘뉴사운드 오브 대구’라는 기획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있다. 2회까지 성공적으로 마친 이 연주를 통해서 그동안 작곡가와 연주자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고 한국 음악계에 하나로 모이는 구심점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지금 한국 음악계가 너무나 흩어져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구축력이 없다는 것이죠. 좋은 작곡가들이 많이 배출되면서 좋은 곡을 작곡하고 있고, 국제적인 명성을 가진 연주자들로 인해 청중들이 많이 모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만 되면 사라지고 없습니다. 체계화 되어있지 않고 서로 흩어져 있기 때문에 악보도 역사적인 자료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음악인들이 서로 힘을 합하여 좋은 작품들을 남기고 연주하면서 정리하는 활동들도 필요합니다. 전체가 하나의 힘으로 모일 수 있는 구축력이 음악계에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_작곡가 진규영


***앞으로의 계획
올해는 작곡가 진규영이 고희가 되는 해이다. 고희를 맞아 그의 가곡으로만 프로그램이 구성된 가곡 연주회를 계획하고 있다. 또한, 가곡집과 합창곡 집을 출간하면서 이것이 상품이 되어 판매가 되는 모습까지 기대하면서 곡들을 정리하고 있다. 그가 작곡한 곡이 상품화 되면서 연주자들과 청중이 소통하는 통로가 되길 원하고 있다.
 
“대구에서는 mbc교향악단과 함께하는 작품 합창과 관현악을 위한 ‘70 KOREA’를 준비 중입니다. 한국 정부 탄생과 나의 탄생연도가 1948년으로 같아요. 한국정부도 고희인 셈이지요. 건국시기의 시들을 모아서 칸타타 형식으로 쓰려고 합니다.” _작곡가 진규영         

또한 자신의 고향인 통영을 위하여 음악인으로서 그가 할 일들을 시작하려고 한다.

“고향을 위해서 제가 음악인으로 할 수 있는 일들을 계획 중에 있습니다. 아마 그 출발점은 내 생가를 복원하는 일이 될 것인데요. 통영은 음악창의 도시로 지정되어있지만 체계적인 음악 교육기관이 없습니다. 음악에 대해 순수한 마음을 가진 청중들이 있는 곳이기 때문에, 제가 가지고 있는 자료를 옮겨 도서관화 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통영의 음악인들이 튼튼한 뿌리를 내릴 수 있게끔 제가 할 수 있는 일들을 하려고 합니다.” _작곡가 진규영


작곡가 진규영
작곡가 진규영은 통영시 출생으로 서울대학교 음악대학(B.A.)과 대학원(M.A.)의 작곡과를 졸업했으며 독일 칼스루에 국립음대를 졸업(KA과정)했다. 1970년에 동아 콩쿠르 작곡부문에 입상했고 1990년에는 대한민국 작곡상, 2005년에는 한국음악상을 받았다.
그의 작품들은 세계음악제(2001년 일본 개최)와 아시아 음악제(2000년 일본 개최) Sound Celebration 2 (1992년 미국 개최), 센다이 현대 음악제(1992년 일본)에서 입선했다. 그의 음악에서는 논리적인 서구음악의 이론을 바탕으로 한국 민속음악의 정서를 표현하고 있으며, 국제적인 음악제를 통하여 꾸준히 작품을 소개하고 있다. 참가한 음악제들은 미니 페스티발(헝가리 1991), 세계음악제(독일 1995, 일본 2001), 모자이코 음악제(폴란드 1995), 대만-한국 교류음악제(대만 2001), 미국-한국 교류음악제(뉴욕 2000), Two Days and Two Nights(우크라이나 2001), 범음악제(한국 1989,1993,1994,1995,1996,1997,2001,2003,2005) 등을 들 수 있다. 1991년 그는 대구 국제 현대음악제를 창단했으며 7년간 음악감독 직을 맡았다.
작곡가 진규영은 한국 작곡가협회(사) 이사장역임, 국제현대음악협회 한국지부 명예위원장, 범 음악제 명예회원, 한국음악협회(사) 작곡이사, 대구 국제 현대음악제 고문 그리고 통영 국제문화재단 부 이사장, 우리시 우리노래 이사, 영남대학교 명예교수로 활동 중이다.


글_김진실기자. 사진_김문기 부장.


기사의 일부만 수록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음악춘추 2017년 1월호의 기사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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