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음악춘추

인물탐구. 독창적인 작품세계와 이디엄을 보여준 음악평론가 유신 / 음악춘추 2017년 1월호

언제나 푸른바다~ 2017. 5. 22. 20:45

음악춘추 기획대담 | 인물탐구
독창적인 작품세계와 이디엄을 보여준 음악평론가 유신 


음악평론가 故(고) 유신 선생(1918~1994)은 1918년 전남 해남에서 태어났고, 동경도의 동경음악대학을 졸업하였다. 동래중, 경남고, 부산상고, 부산한성여대(음악과장) 등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부산대, 동아대, 부산여대, 중앙대, 건국대 대학원 수도여사대 대학원에 출강하였다.
1968년 11월과 1973년 2월, 각각 작곡 발표회(부산 대청홀, 명동 예술극장)를 가졌고 1970년 제 13회 부산시 문화상(창작상 부문)을 수상하였다. 1968년에는 제1예술 가곡집 「보리피리」(18곡 수록)를, 1977년에는 제2꽃노래 연가집 「모란이 피기까지는」(23곡 수록)을 출간하였고, 1975년 5월에는 동요곡집 「꽃댕기」를 출간하였다. 1980년에는 14곡의 예술 가곡이 수록된 디스크를 아세아 레코드사에서 출반하였고, 1986년 10월 20일에는 제18회 대한민국 문화예술상(음악 부문)을 수상하였다. 1972년에는 한국작곡가협회 이사직을 맡았으며, 한국 예술평론가협의회와 한국음악평론가협회의 회장직을 역임 했다.
주요 작품으로는 「현악 4중주를 위한 산조」(1968년),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즉흥곡」(1970년), 「플루트와 피아노를 위한 소묘」(1974년), 「목관 5중주를 위한 이미지」(1981년) 등이 있으며, 저서로는 <국악통론>, <한국 풍요의 주제에 의한 변주적 합창곡>, 음악논문집 <음예술의 새로운 체험>, 음악감상론 <음예술의 의지와 더불어>, 음악연주론 <무대와 객석사이에서> 등이 있다.


일시 : 2016년 12월 8일 오전11시
장소 : 코스모스 악기사 7층
진행 : 이용일(한국음악교육협회 명예회장)
패널 : 김형주(한국원로음악가협회 회장)
이상만(음악평론가, 국제델픽위원회 명예회원)
김영숙(프라움악기박물관 학예사)

1. 유신 선생의 성장과정과 음악의 출발
2. 유신 선생과의 첫 만남
3. 유신 선생의 음악세계
4. 유신 선생의 교육관
5. 유신 선생이 국내 음악계에 끼친 영향


이용일: 오늘은 음악평론가와 작곡가로 음악계에서 폭넓게 활동하셨던 유신 선생님의 삶을 조명하게 됩니다. 선생님은 개성이 참 강하시고 하고 싶은 말씀을 다 하시던 분이셨습니다. 우리 음악계에 많은 도움을 주신 분인 유신 선생님에 대해서 생각해보고 업적을 남겨주십시오. 먼저 김형주 선생님, 유신 선생님을 언제 처음 만나셨나요?


김형주: 유신 선생님은 음악활동의 시작을 부산에서 시작하였습니다. 부산에서 먼저 글을 쓰시기 시작했었죠. 그전에도 익히 이야기를 들어 알고 있었지만, 첫 만남은 유신 선생님이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와서 저를 찾아왔을 때 시작되었습니다. 당시에 제가 관계하고 있었던 월간음악을 소개해주면서 본격적으로 서울에서 활동하게 되었고 저와의 인연도 이어나갔습니다. 유신 선생은 인생의 전반은 부산에서 활동하였고 후반은 서울에서 활동하신 분입니다. 그러한 뜻에서 우리 평론계에서는 상당히 업적을 남기신 분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용일: 이상만 선생님은 언제 처음 만나셨나요?


이상만: 저도 유신 선생님을 부산에서 올라오신 다음 서울에서 알았습니다. 그분은 굉장히 개성이 강하신 분이신데, 사람들을 대할 때에도 굉장히 골라가면서 대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아무하고나 친하게 지내지 않고 좋아하는 사람들과 어울렸습니다. 제가 듣기로는 유신 선생은 전남 해남 출신인데, 부산에서 두루두루 학교를 거쳤다고 들었습니다. 동내고, 경남중학교, 부산상업학교가 부산의 명문학교인데 이 학교들을 골고루 거치는 학교생활을 했고 후에는 한성여자대학에서 강사를 역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분이 부산에서는 기여한 바가ㆍ 크다고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학교는 일본의 동양음악학교(현 동경음악대학)를 나왔다고 하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용일: 김영숙 선생은 유신 선생님을 언제 처음 만났나요?


김영숙: 저는 월간음악 잡지사 기자로 있을 때인 1985년 혹은 1986년에 처음 뵈었습니다. 유신 선생님 하면 베레모, 키가 자그마하시고 목소리가 카랑카랑 하셨던 모습이 생각이 납니다. 저는 그분을 평론가나 작곡가로 알고 있었는데 자료를 다시 찾아봤더니 원래 성악을 전공하신 분이셨습니다. 처음에 성악을 공부하셨다가 나중에 작곡활동과 평론활동을 하신 것이죠. 그래서인지 유독 목소리가 카랑카랑하시고 높았던 것 같습니다. 저는 선생님께 원고 청탁도 부탁 드렸었지만 당시에 음악회가 끝난 후 뒤풀이 자리에서도 자주 뵈었습니다. 그때 농담도 잘하시고 매우 인간적인 모습을 많이 보아서 재미있으신 분으로 기억이 됩니다.


이용일: 해방 후 대구에는 일본에서 들어온 분들이 활동하지 않았지만 부산은 일본에서 귀국하신 분들이 제대로 조직을 만들어서 활동을 하셨던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이 활동이 이어지기가 힘들었던 그분들의 뒤를 이어 활동하는 세력이 없었기 때문인데요. 이는 부산이 학생들을 길러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하실 말씀 없으신가요?


김형주: 유신 선생은 표면에 나타나는 활동 보다는 주로 제야에서 활동을 했던 성격으로 봐야 합니다. 부산에서 대학에 나가 강의를 했지만 전임 교수로 활동을 한것은 아닙니다. 그분의 성격적인 면을 보더라도, 리더나 지도자적인 역할과 힘을 가지고 있는 분은 아닙니다. 서울에 온 뒤, 제가 한국작곡가회 만들 때도 임원으로 함께 활동 했지만 어떤 단체를 리드한다던가 하는 역할을 하지는 않으셨습니다. 작품 활동도 서울에 올라온 뒤에 활발하게 했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본인도 리더로서의 활동을 원하지 않았고 제야에서 순수하게 평론과 작품 활동을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다보니까 음악계 내에서도 대인관계 면에서 표면에 나타나는 리더 역할은 안하셨습니다. 순수하게 제야에서 활동을 하신 분입니다.


이용일: 이상만 선생님은 어떻게 보셨어요?


이상만: 사실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부산은 문화적으로 일본의 영향력 아래 있었습니다. 일본의 것을 그대로 수용하는 지역이었습니다. 6.25전쟁 당시 서울에서  피난 내려간 사람들이 섞이면서 부산이 조금씩 개화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시대적, 지역적 배경으로 인해서인지 거기 활동하던 사람들이 일종의 독불장군 같은 행동을 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금수현, 이상근, 한병한, 제갈삼 선생들이 거의 이 지역에서 많이 활동했고 이 시대의 방법으로 활동 했다고 생각이 됩니다.
유신 선생은 굉장히 재주가 많은 사람입니다. 글도 재미있게 쓰고 작품은 나름대로 독특한 성격을 가지고 중심은 아니고 변방에서 활동을 하신 분입니다. 또한 굉장히 부지런하신 분이었죠. 이 자리에 계시지만 당시에 음악회에 제일 많이 가신 분은 김형주 선생님이시고 1970년도 후반부터는 유신선생, 김원구 선생 같은 분들이 부지런하게 많이 가셨습니다.


이용일: 김영숙 선생은 어떻게 생각하나요?


김영숙: 제가 모셨던 금수현 선생님이 1919년생이신데 유신 선생님이 1918년생이시고, 금수현 선생님하고 고향 동인으로 보입니다. 당시 제가 회사 업무가 끝나면 선생님들 소주 심부름을 많이 했는데...(웃음) 저희 사무실에 정윤주 선생님과 유신선생님이 오셔서 금수현 선생님 방에서 호탕하게 웃기도 하고 사회 이야기, 음악 이야기를 나누셨습니다. 당시에 저희가 기악 독주 평론은 김원구 선생님께 부탁했었고 유신 선생님은 작곡발표회나 오케스트라, 챔버 평론을 많이 부탁 드렸었습니다.


이용일: 제가 유신 선생님을 처음 만났을 때, 경상도 사투리를 쓰시기에 “고향이 부산이십니까?”라고 물으니 “내가 이 선생이랑 같은 고향이야!” 이러면서 화를 내셨습니다. 전라도 출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아닌 것은 확실하게 이야기 하는 성격이니까 아마 주위에서 조심해서 접근을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김형주 선생님은 어떠셨나요?


김형주: 그분이 처음으로 부산에서 올라오면서 나한테 먼저 찾아와서 서울에서 자리를 옮기고 싶다고 부탁했습니다. 그래서 1945년쯤에 월간음악에서 글을 쓰라고 소개 해주면서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제가 편집 위원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해서 같이 편집위원으로 활동 하였습니다. 작곡가회 있을 때도 임원으로 있으면서 단체 활동을 하면서 작품도 발표하고 했지만 그분은 사실 작품 활동 보다는 글을 많이 쓴 분입니다. 음악계에서도 유신 선생은 일반적으로는 평론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용일: 저는 오늘 김영숙 선생이 말한대로 성악 전공이었다는 것은 처음 알았습니다. 사실 당시에 일본에서 학교를 나오신 분들이 훌륭한 분들도 계시기만 등록금만 내고 다니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상만: 그 당시에 동양음악학교는 일본에서 치면 조금 낮은 학교였습니다. 한국 유학생들이 거의 다 들어갔었죠. 하지만 학교 가지고 얘기할 것이 아닌 것이, 사람에 따라서는 거기 나오면서 훌륭하게 된 분도 있으니 경우에 따라서 다를 것이죠.
그분이 이렇게 보면 한학에도 조예가 있는 분입니다. 그래서 글을 쓰는 재주는 타고나지 않았는가 하고 생각을 합니다. 작곡을 해서 그런지 수사력도 굉장히 독특한 부분이 있었습니다. 저는 그분의 사위하고 조금 가까이 지냈습니다. 사위는 뿌리깊은나무의 편집장 을 하신 분인데, 그 인연으로 유신씨가 그러한 분이구나 하고 깨달았습니다.


이용일: 가족관계는 어떻게 되셨나요?


김형주: 서울에 올라온 뒤에는 독신으로 사셨던 것 같습니다.


김영숙: 제가 가지고 온 자료에 의하면 본명이 유신종이고 어릴 적에는 바이올린을 공부하셨고 오사카 음악학교로 진학해 세계적 테너를 꿈꾸었습니다. 오쿠다 로죠 교수의 건의로 도쿄음악대학에 진학하여 작곡과로 옮겼습니다. 힘든 유학 생활을 1944에 졸업하여 동시에 귀국 하였다고 적혀 있습니다.


김형주: 이분은 우리나라 역사 과정에서 일제 말기부터 활동하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일제 강점기와 해발 후의 과도기에서 활동하며 음악적 흐름을 이어온 사람입니다. 일제 강점기는 우리가 주동적으로 활동할 수 없는 시기입니다. 그런 과정에서 제한을 받으면서 음악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학교 다니면서 음악을 했고, 선구자적인 과정을 과도기에 이어준 사람입니다. 현제명, 김성태 혹은 홍난파 선생도 일제 강점기에 교육을 받아 말엽부터 활동하면서 그 과도기에 우리나라 음악을 이어준 사람들입니다. 그런 뜻에서는 그 나름대로 가치 있었지 않냐 생각이 됩니다.


이용일: 김영숙 선생 말을 듣고 추측하기를, 아마 유신 선생의 해남 집이 여유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 당시 바이올린은 매우 특이하고 대단한 악기였습니다. 그래서 아마 유복하게 자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김형주: 글쎄요. 제가 보기에 유신 선생의 생활은 밝은 생활이 아니었습니다. 언제나 그림자가 있는 인상이었습니다. 그런 분위기를 볼때, 가정적으로는 불행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음악에 자신의 정열을 쏟고, 가정적인 환경은 무시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용일: 소위 배려 할수 있는 마음이 있으면 가정을 이루는데 배려심이 없으면 가정을 꾸릴 수 없다고 우리들이 말합니다. 제가 볼때 그분은 남을 배려 안하시는 분 같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타협 하지 않고 좋은 글을 쓰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기 때문에 억울한 분도 계실 수 있지만 그분이 편협하게 쓰지 않았을 거라 믿고 싶습니다.


이상만: 아까 작품에 대해서 주류를 형성하지 않았다고 말씀 하셨는데, 저는 1968년에 그분이 쓰신 「현악사중주를 위한 산조」를 듣고, 그때만 해도 한국적인 이디엄을 구사를 해서 작품을 쓰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래서 양악하시는 분이지만 특히 국악에 대해서 상당하게 관심을 가지고 자기 음악을 만들려고 애쓰신 것이 작곡가로서 하나의 선각자 적인 면모 이었다고 생각 합니다. 사실 정윤주씨가 1959년에 쓴 작품인 「까치의 죽음」을 스트라빈스키에 견주 했었는데, 유신 선생은 어느 작곡가의 모델을 가지지 않고 나름대로 자기의 독창적인 세계를 가지려 했던 점은 그의 작품이나 평론에 문장에도 드러냈습니다.


이용일: 당시 부산은 일본문화의 영향을 바로 받았습니다. 일본 방송을 통해서 일본 작곡가들이 일본 전통음악을 이용해 작품을 썼던 것을 보고, 유신 선생이 영향을 받아서 자신의 작품에 응용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아마 이러한 부분 때문에 당시에 부산 사람들이 음악적으로 앞서가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유신 선생님이 우리에게 새로운 음악을 들려준 점, 새로운 이디엄에 의해 평론을 하면서 독창적으로 글 쓰신 것이 후학에게 도움이 되지 않나 싶습니다.


김형주: 결론적으로 봐서 그분은 그분대로 하나의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생활은 불행했지만 작품에서는 오히려 더 활기 넘치는 작품을 작곡하기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상만: 유신 선생의 작품집 중에 〈동요곡집〉이 있습니다. 당시에 동요계에서는 평가가 상당히 좋았습니다. 어떻게 보면 유신씨가 아이들 같은 면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동요계쪽에 상당히 평가를 한다면 그 작품이 상당히 유신씨에게 잘 맞는 작품이 아닌가 싶습니다.


김영숙: 저는 선생님과 같이 음악회를 다니고 편한 시간에 만나면서 재미있던 분으로 기억이 됩니다. 기억이 남는 모습이... 저희 편집실에 오실 때도 과자를 하나 들고 와서 먹으라고 던지시는 등 굉장히 정이 있으신 분이었습니다(웃음). 또한 제가 첫 아이를 출산하고 왔을 때, 100일에 축하한다고 봉투를 주셨습니다. 그때 돈으로 3만원을 주셨으니 꽤 큰돈이었습니다. 굉장히 거리낌 없이 친구처럼 많이 활동하셨습니다. 


정리_김진실 기자. 사진_김문기 부장.


기사의 일부만 수록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음악춘추 2017년 1월호의 기사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

<김문기의 포토랜드>



김형주(한국원로음악가협회 회장)

진행 : 이용일(한국음악교육협회 명예회장)

이상만(음악평론가, 국제델픽위원회 명예회원)

김영숙(프라움악기박물관 학예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