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음악춘추

인물탐구 피아니스트 정은모 / 음악춘추 2016년 12월호

언제나 푸른바다~ 2017. 5. 22. 20:13

음악춘추 기획대담 | 인물탐구 12월호
사랑으로 제자들을 교육한 피아니스트 정은모 


피아니스트 故(고) 정은모 선생(1932~2003)은 1932년 서울에서 출생하여 1951년 경기여자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1955년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피아노과를 졸업하여 그해에 조선일보사 주최의 제5회 신인음악회에 출연하였다. 1971년 미국 Manhattan School of Music 대학원을 수료하였다. 한양대학교 교수와 명예교수를 역임하였다.

1932.  서울출생
1951.  경기여자고등학교 졸업
1955.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피아노과 졸업
1955.  제5회 신인음악회 출연(조선일보사 주최)
1971.  미국 Manhattan School of Music 대학원 수료
한양대학교 교수, 명예교수 역임
2003.7.5. 작고


일시 : 2016년 11월 7일 오후4시
장소 : 코스모스 악기사 7층
진행 : 이용일(한국음악교육협회 명예회장)
패널 : 이상만(음악평론가, 국제델픽위원회 명예회원)
윤소영
김유철(관동대 교수)
조선희(한양대 겸임교수)
이혜전(숙명여대 교수)


***정은모 선생의 성장과정과 음악의 출발
이용일: 오늘은 피아니스트 정은모 선생님을 추모하는 좌담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정이 많으시고 명문가에서 태어난 덕스러운 교수님으로, 우리들에게 항상 포근함을 주신 선생님에 대해서 같이 논하려 합니다. 진즉 이 대담을 하였어야 했는데 따님이신 윤소영 선생님이 윤용석 아버지를 조명해 주셨는데 어머니까지 하는 것을 사양해 지금껏 오다 이혜전교수의 강력한 추천으로 좌담이 성사되게 되었습니다. 후학들에게 도움이 될 말씀을 남겨주시길 바랍니다. 이상만 선생님께서 먼저 말씀해주시겠습니까?


이상만: 정은모 선생은 요즘 말로하면 금수저이지요(웃음). 당시엔 여자가 피아노를 한다는 것이 아주 귀했습니다. 한 클래스에 피아노 치는 여자가 두서넛 있었을까 할 정도이니까요. 그 당시에 제일 유명한 콩쿠르가 서울대학교에서 주최하는 콩쿠르였는데 이분이 2등을 해서 당시로서는 굉장히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이분이 졸업하신 경기여고는 당시에 남학교인 경기고등학교와 더불어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이 평가하는 학교 이었습니다. 또한 정은모 선생님 아버님인 정인하 선생님은 혜화초등학교에서 교장을 오랫동안 하셨습니다. 그분은 특히 학교에 합창단과 학생들에게 음악을 가르치는 선도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당시에 교장 선생님 딸이라고 하면 사람들이 우러러 보는 시절이었습니다. 교육자 집안에서 정말 귀하게 또 엄격하게 자라서 제가 학교 다닐 때 뵈니까 말수가 적고 얌전했습니다. 그래서 굉장히 조심스럽게 접근을 했는데, 나중에 부군 되시는 윤용석씨 부인으로서 다시 만나게 되었습니다. 정은모 선생님의 남동생인 정근모 박사는 과학기술처 장관을 2번 지냈고, 한국과학원(현 한국과학기술원) 설립을 주도하고 2대 부원장도 맡았던 굉장한 과학자 이십니다.  정근모 박사를 만나면 나하고 정은모 선생님을 안다는 것을 매우 높이 평가 했었던 추억이 있습니다.
정은모 선생님은 서울대학교에서는 두 선생님께 배웠는데 김순열, 김원복 선생님께 배웠습니다. 김원복 선생이 특히 정은모 선생을 귀여워해서 아마 후계자로 삼으려고 생각을 하셨던 일이 있는데, 결국 한양대로 가셨습니다.


이용일: 따님이신 윤소영 선생님께 묻겠습니다. 외할아버지에 대해서나 어머니의 성장과정에 대해서 들은 것이 혹시 없나요?


윤소영: 제가 한 살 때 세상을 떠나셨기 때문에 특별히 외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없어요. 제가 알기로는 외할머니께서 특히 큰 딸을 금지옥엽처럼 키우셨고 음악을 좋아하셔서 악기를 배우게 하셨던 것 같아요. 작은 외삼촌도 악기를 조금 배우셨다고 합니다. 외할머니께서 피아노를 전공하라고 배우게 하신 건 아니지만 어머니께서는 스스로가 꾸준히 음악을 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혜전: 그럼 부군이신 윤용석 선생님과는 정은모 선생님이 언제 만나신 건가요?


윤소영: 제가 알기로는 피난시절에 부산에서 만나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어머니의 권유로 서울대 작곡과에 진학해서 공부를 하셨고요. 


이상만: 윤용석 선생님은 강원도 태생인데 과감하고 음악적으로도 끼가 많았습니다. 군악대에서 바순을 배우고 육군교향악단에서 연주활동을 했기 때문에 음악적인 부분이 뛰어났죠.


윤소영: 제가 기억하기로도 아버지는 음악적인 재능이 뛰어나셨던 같습니다.


이용일: 윤용석 선생님의 음악적인 해석은 탁월했습니다. 


이혜전: 저희는 당시에 연습을 하고 완성이 되면 윤용석 선생님께 가서 쳤습니다. 오케스트라에 대한 이해가 높으시니까 협주곡 같은 경우에는 윤 선생님께 마지막 점검을 받았습니다.


윤소영: 아버지는 전체적인 음악을 보는 눈이 있으셨습니다.


***정은모 선생과의 첫 만남
이용일: 정은모 선생님과의 첫 만남에 대해서 말씀 해주세요?


이혜전: 저는 정은모 선생님께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배웠습니다. 제가 혜화초등학교를 다녔는데 학교 길 건너가 선생님 댁이었어요. 1학년 담임선생님께서 제가 풍금으로 애국가와 교가를 치니까 재주가 있다고 생각하셨는지 정은모 선생님께 데려가셨습니다. 엄마랑 담임선생님과 함께 댁에 갔는데, 다과상 앞에서 이야기를 하던 생각이 지금도 납니다. 정은모 선생님이 유학가시기 전인 4학년 때까지 배우고 유학가신 이후 2년간의 공백 기간 동안 쉬다가 6학년 때부터 예고 1학년 때까지 선생님께 다시 공부를 했습니다. 저에게 선생님은 엄마 같은 존재였어요.


윤소영: 엄마가 이혜전 선생님을 너무 예뻐했습니다.


이혜전: 지금 생각하면 죄송하고 감사한 것이 제가 어렸을 때는 연습을 게을리 해서 레슨 받으러 가는 길이 항상 두려웠던 것 같아요. 혜화동 로터리 버스 정류장에서 내려서 10분정도 걸어가야 선생님 댁에 가는데, 그 길이 항상 까맣게 느껴졌으니까요(웃음). 그래도 제가 재주가 없지는 않았는지 선생님께서는 “너는 동아 콩쿠르는 문제없어.”라고 말하면서 격려해주셨어요. 철없는 저를 예뻐해 주시고 당시에 레슨비도 부담이 적게 배려해주셨고요.


윤소영: 어머니께서는 잘하는 아이들은 장학금 주듯이 레슨비를 편하게 해주셨어요. 사랑하면 아낌없이 주시는 성격이신데, 제자도 사랑하면 그 학생에게 폭 빠지는 스타일이셨습니다.


이혜전: 지금도 아쉬운 것은 조금 더 열심히 연습할걸 하는 생각이 들어요. 지금의 KBS교향악단인 국립교향악단에 윤용석 선생님이 계셨는데, 제가 6학년 때 협연을 하라고 하셔서 중학교 1학년 때 윤 선생님께 배웠습니다. 저희가 항상 배웠던 업라이트 피아노에서 배우고 준비가 충분히 되면 야마하 그랜드 피아노에서 연습을 했는데, 레슨 생들에게는 그것이 판타지 이었어요. 윤 선생님께 배울 때 지휘봉으로 박자를 쳐주시는데 선생님께서 평소에 너무나 아껴주심에도 불구하고 정말 무섭더라고요.


윤소영: 어머니가 예뻐했던 학생들은 어머니께서 한양대에서 강의를 하시는데도 어머니만 고집하고 배운 학생들이 있습니다. 서울대를 가도 계속 어머니께 배우기를 고집했었죠.


이용일: 조선희 선생님은 언제 정은모 선생님을 처음 만났나요?


조선희: 저는 대학에 진학하면서 처음 뵙게 뵈었습니다. 저희 큰언니가 한양대에서 정은모 선생님의 제자였는데, 동생이 피아노를 친다고 하니까 그때부터 관심을 가져주셨습니다. 그리고 결국엔 저도 선생님의 제자가 되었죠. 저는 1979년에 대학에 들어가서 선생님께 배웠는데, 당시에도 큰언니가 선생님에 대해서 인자하시고 어머니 같은 푸근한 느낌이 있는 분이라고 말했습니다. 선생님께서 제가 언니의 동생이라고 해서 많이 챙겨주시고 예뻐해 주셔서 행복하게 대학 생활을 잘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엄격하신 면도 있어서 레슨 할 때 연습을 안 해오는 학생들에겐 아주 무섭게 야단치기도 하셨고요. 저에게는 다행히 칭찬과 많은 격려를 해주신 것으로 기억이 납니다.


김유철: 저는 중학교 3학년 때 선생님을 처음 뵈었습니다. 제가 시골에서 중학교 2학년때 서울에 올라와서 혜화동에 있는 이모님 댁에 머물게 되었는데, 시골 피아노 학원에서 피아노를 배우다보니 부족한 부분이 많았습니다. 처음에는 서울대 대학원생에게 피아노를 배웠는데 1년가량 저를 가르쳐주던 대학원생이 유학을 가게 되었습니다. 그 와중에 이모님이 미장원을 가셔서 조카 이야기를 했는데, 마침 그곳에 정은모 선생님이 계셨습니다. 선생님께서 저에게 관심을 가지시면서 중학교 3학년 때 선생님과 연결이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고등학교 3학년 때까지 배웠는데, 제 어려운 형편을 아셔서 레슨비의 부담도 줄여주시고 저의 부족했던 기초들을 다듬어 주셨습니다.


***정은모 선생의 음악세계
이용일: 이번에는 선생님의 장점에 대해서 이야기 해보죠?


이혜전: 당시엔 제가 어려서 어떤 것이 장점인지 잘 몰랐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선생님처럼 학생들에게 기초를 충실히 가르치고 있나?’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저희는 선생님께 레슨을 받을 때 곡을 치기 전에 무조건 스케일, 하논, 체르니, 바하를 기본적으로 한 시간 가량 연습했습니다. 선생님께서 미국을 다녀오신 이후로 손 모양을 많이 잡아주셨는데, 후에 제가 신수정 선생님께 갔을 때 “너는 기초가 잘 되어 있어서 할 것이 없다. 손 모양도 너무 예쁘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선생님 톤(Tone)이 정말 예뻤고 노래도 정말 예쁘게 하셔서, 음악적으로 소리를 가다듬을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그리고 당시엔 레코드가 흔하지 않았는데, 레슨이 끝나면 꼭 레코드를 듣고 가게 해주셨습니다. 악보를 사면 페달마킹도 베껴서 가게 허락해주셨고요. 그때는 감사를 표현하지 못했던 부분들이 제가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생각이 납니다.


김유철: 앞서 이야기가 나왔지만, 선생님께서는 레슨을 가면 바흐의 「평균율」을 많이 시키셨습니다. 3주에 한 번씩 외워오게 하실 정도이니까요. 제가 선생님께 배웠던 중학교 3학년 때부터 고등학교 2학년 때까지 한 번도 빠지지 않고 하논, 스케일, 바흐를 쳤습니다. 당시에는 지겹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저에게 음악적으로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제가 독일로 유학을 갔을 때, 선생님께 배웠던 것이 기초가 되어서 바흐 음악에 대한 이해와 분석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당시에 윤 선생님께서 바흐 성부 분석을 도와주시기도 하셨고 성부 연습도 시켜주셨죠. 그러한 부분들이 저에게 좋은 자양분이 되었습니다.


이용일: 따님이신 윤 선생님은 어머니께 배우셨나요?


윤소영: 저는 어머니께 한 번도 배우지 않았어요. 사실 저는 음악을 전공하고 싶지 않았는데, 아버지께서 음악을 하라고 하셔서 피아노를 치게 되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계속 음악을 들으니까 귀로는 이미 다 알고 있었죠. 저에게 “네가 음악을 안 하면 누가하느냐?”라는 말씀을 하시면서 아버지가 권유하셨습니다. 저는 김원복 선생님, 백낙호 선생님께 피아노를 배웠습니다.


이용일: 당시인 30~40년 전에는 최고로  최우수한 여학생들이  전부 서울대학교 피아노과 진학을 희망했습니다. 공부를 잘하고 피아노를 잘하면 당연히 음악을 하는 줄로 생각했었죠. 서울대 음대 정원이 30명 정도였으니 얼마나 정예 학생들이 모였겠습니까? 지금은 능력 있는 여학생들이 다른 분야로도 진출하면서 분야가 다양해 진 것 같습니다.


윤소영: 제 기억에 저희 어머니께서는 정말 어렵고 재주가 좋은 학생들에게 거의 레슨비를 안 받다시피 하고 가르치셨던 것 같아요. 어머니도 결혼해서는 힘드셨다보니 그 상황을 이해해 주신 것 같습니다. 그분들은 제가 현직에 없다보니까 연락이 쉽게 닿지 않는데, 이 자리에 오셨으면 좋았을 텐데 아쉽습니다.


이혜전: 제가 정은모 선생님께 배우기 시작하던 1학년 때에도, 선생님 음성이 참 멋있다고 생각했었습니다. 제가 레슨 받으러 일요일 아침에 가면 선생님께서 인스턴트커피를 항상 타서 드셨는데, 그 비율을 정확하게 보고 집에 가서 커피를 따라서 타서 마셨습니다. 선생님 목소리를 쫓아간다고요(웃음).


이용일: 참 성품이 온순하시고 학생들을 사랑하신 분입니다.


윤소영: 네, 무서워 보이지만 실제로는 굉장히 무른 성격입니다.


***정은모 선생의 교육관
김유철: 제가 서울대 시험을 봤을 때, 조금 실수를 해서 한양대를 준비를 했습니다. 당시에 공동으로 심사를 하면서 제가 감사하게 합격을 했는데, 당시 정 선생님의 축하해주시던 표정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마치 아들이 합격한 것처럼 아파트에서 먼저 달려 나오시면서 “유철아 너 합격했다!”라고 말씀하셨는데 너무나 기뻐하셨습니다.


윤소영: 어머니께서 남자는 가정을 책임져야 한다며 남학생들을 각별하게 생각하셨습니다. 제가 음대에 진학했을 때도 음악 하는 남자를 만나지 말라고 할 정도이니까요(웃음). 가정을 책임질 사람이라고 남학생들에게 굉장히 많이 이야기 하셨습니다. 


김유철: 저는 이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너는 남학생이니까 인문계 고등학교를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혜전: 저도 중학교를 예원학교를 가지 않았지만 부모님의 권유로 예고를 가게 되었습니다. 예고에 입학해서 공부를 열심히 해서 학과는 물론 실기도 좋은 성적을 낼 수 있었던 것은 다 선생님 덕분입니다. 선생님께서 예고에 계신 선생님과 이야기를 하셔서 제 실기 곡으로 뭘 주면 좋을까를 같이 고민해 주셨어요. 그래서 많이 치는 모차르트와 하이든이 아닌 클레멘티 곡을 주셨습니다. 성적이 잘 나오다보니까 제가 욕심이 더 생겼고 그 덕에 바로 예고에서 적응할 수 있게 되었어요.


이용일: 조선희 선생님은?


조선희: 저는 대학가서 선생님을 만났고, 정은모 선생님께서 늦게 유학을 가셨잖아요? 제가 맨해튼 음대를 나와서 선생님의 후배입니다. 제가 1985년에 유학을 갈 때도 추천서도 써주시고 선생님의 스승인 Goldsand 교수님을 만나서 인사도 하게 하셨습니다. 제가 연습실에 가서 연습할 때도 ‘이 연습실에서 우리 선생님도 연습을 하였겠구나.’하는 생각을 하면서 힘을 얻기도 했었죠.


윤소영: 어머니가 유학을 가신 것이 모험이었죠. 제가 중2, 오빠가 고1인 저희가 사춘기 때 어머니가 유학을 가셨습니다. 어린 시절 어머니가 곁에 계시지 않아 힘들긴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다 잘되었고, 당시 어머니로서는 굉장한 결정이셨죠. 잘 다녀오셨습니다.


이용일: 당시에 유학을 다녀온 사람들이 일을 하고 연주가 달라지니까, 상황 상 도태되니까 가고 싶으셨을 겁니다.


윤소영: 네, 결혼을 대학교 3학년 때 하셨으니 굉장히 일찍 하셨죠. 제가 듣기로는 이미 신인음악회 때 오빠가 돌이 지났다고 합니다. 그래서 유학을 갈 수가 없었지요. 어머니의 남매들은 유학을 가셨는데, 오랫동안 유학에 대한 꿈을 품고 계시다가 용감히 가게 되셨죠. 


조선희: 보통사람 같으면 못 갔겠죠? 그것만 봐도 대단하신 것 같아요.


김유철: 당시 유학이 쉽지 않았습니다.


이용일: 독주회는 몇 번이나 하셨습니까?


윤소영: 독주회도 많이는 못하셨어요. 아마 2~3번 정도 하셨는데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에 전념하시느라고 연습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이혜전: 제가 1973~1974년에 협연하고 선생님이 다음날쯤에 독주회를 가지셨는데, 당시에 예쁜 드레스에 옥색 슈즈를 신으신 기억이 납니다. 선생님이 너무 좋아서 이런 것도 기억하고 있네요(웃음). 제가 진짜 감사한 것은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신수정 선생님께 배우게 되면서 정은모 선생님을 떠난 것이 죄스러운 마음이 많았어요. 그래서 연락도 당연히 못 드렸고요. 그런데 제가 유학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왔을 때, 선생님께서 저를 먼저 찾아주셨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마음에 감동이 되었는지 몰라요. 어린마음에 너무 죄송했는데 저를 먼저 찾아주시고 독주회도 와주시고 손도 먼저 잡아주셨습니다. 한동안은 “난 너랑 여행가면 참 재밌을 것 같아.”라며 친구처럼 대해주셨습니다.


윤소영: 아마도 어머니께서 레슨을 많이 안하시고 연주를 하셨으면 굉장히 열심히 하셨을 스타일인데 여러 가지 사정상 그렇게 못하셨습니다. 그렇다보니 제자들이 커가는 것을 보면서 좋아하시고 아주 잠깐 가르친 제자라도 잘 되면 그 자체로 행복해 하시고 당신이 잘된 것처럼 기뻐하셨어요. 결국 자연스럽게 학생들이 오랫동안 남아있게 되고 서로간의 정이 끈끈해졌습니다.


***정은모 선생이 국내 음악계에 끼친 영향
이상만: 해방직후 우리나라가 혼란기일 때, 우리사회에서 존경의 대상은 교육자이었습니다. 경제적으로 부유하기 힘들었기 때문에 당시의 명사들은 교육자, 작가, 법조계, 정치계 인들이었죠. 그 당시에 우리나라 교육계에서 정인하 교장 선생님이라고 하면 굉장히 존경받는 분이셨습니다. 혜화초등학교가 굉장히 꽃피우는 학교였는데 그분의 딸이 음악을 한다고 하니까 음악을 하는 것이 굉장히 존경의 대상이 되고 품위가 올라갔습니다. 당시 시대적으로 음악을 하고 피아노를 친다는 것은 아주 고귀한 사람들은 다 해야 된다는 분위기가 형성되어서 음악인구가 확산 된 것도 그 시대에서는 중요한 대목입니다. 


이용일: 대단히 선구적인 일입니다. 의식적으로 깨어있는 집안이기에 음악을 하게 했지, 아니면 어림도 없었죠.


이상만: 정인하 교장 선생님은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노래 부르게 하였는데, 이러한 것들이 사회를 굉장히 밝게 해주는 역할을 했습니다. 지금이야 음악을 비교적 쉽게 접하지만 한때는 부잣집이 아니면 음악을 못시켰습니다. 정은모 선생은 교육자 집안에서 커서 하나의 인생을 사는 도덕적 가치와 철학이 몸에 배어 있었습니다. 굉장히 엄격한 집안에서 자랐어도 상상력과 표현력이 풍부했고요. 도덕적으로도 남한테 존경을 받았습니다.


윤소영: 아마 남학생들은 더 힘들었을 것입니다. 앞서 말한 것 같이 남자는 한 가정을 책임져야 한다고 하면서 많이 혼났습니다. 


김유철: 지금 생각해보면 선생님께 죄송스러운 것이 많이 떠오르는데, 제가 서울대를 들어가고 난 후에도 교수님은 제가 계속 배우길 원하셨는데 저는 아무것도 몰라서 선생님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당시에 제가 서울대에 진학하였기에, 서울대에 계신 선생님들께만 배워야 하는 줄 알았던 것이죠.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윤소영: 어머니도 다 이해하셨을 거예요.


조선희: 저는 정은모 선생님께 대학에서 배우기 시작했고, 한양대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유학 가서 박사학위(DMA)를 받아왔습니다. 당시 공부를 할 때에도 많이 격려해주시고 공부를 마치고도 굉장히 기뻐해주셨습니다. 1996년부터 한양대학에 출강하면서부터 가르치는 일을 시작하면서 지금까지 하고 있는데, 선생님의 많은 배려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 같습니다.
또 하나, 제가 이 말을 꼭 하고 싶었는데... 제가 2002년도에 예술의 전당에서 독주회를 했습니다. 선생님께서 건강이 안 좋아지셔서 오시리라고는 생각도 못하고, 독주회 한다고 말씀만 드렸습니다. 연주당일에 연주중임에도 불구하고, 첫 곡을 연주하고 다음 곡으로 넘어가는 쉬는 시간에 선생님께서 홀에 들어오시는 것을 제가 느꼈습니다. 선생님께서 부축을 받으시면서 제 독주회를 들으러 오셨습니다. 나중에 알게 된 건데, 당시에 방석이 있어야만 앉으실 정도로 몸이 불편하셨는데도 제 연주를 꼭 와야 한다며 오셔서 끝까지 관람하신 기억이 납니다. 너무나 감사했고, 그만큼 교수님께서는 제자를 사랑하시는 마음이 각별했던 것 같습니다.


윤소영: 어머니는 간경화로 8년을 앓으셨어요. 어느 해 겨울 입학시험 채점하러 나가시다가 빙판에서 넘어지셨습니다. 6개월간 기브스를 하셨는데, 그것이 나이가 들면서 후유증이 왔어요. 그래서 서서 음식을 드시거나 항상 방석을 가지고 다니면서 앉으셔야 했습니다. 레슨 하시느라 운동도 못하고 하시다보니 무리가 되었던 것 같아요.


이용일: 독주회는 몇 번이나 하셨을까요?


윤소영: 제가 알기로는 몇 번 못하셨어요. 너무 바쁘셔서... 말 그대로 가르치는 선생님이었죠. 실내악 연주는 몇 번 하셨습니다.


이용일: 여러분들이 아시다시피 사실은 실내악 연주가 굉장히 어렵습니다. 


조선희: 제가 대학에 들어가서 처음 갔던 선생님 연주가 바순과 함께하는 실내악 연주였는데, 무대에 올라가셔서 제자에게 돋보기를 받아서 끼시고 연주를 하셨습니다. 그 모습이 너무 멋있게 느껴졌어요(웃음).


정리_김진실 기자. 사진_김문기 부장.


기사의 일부만 수록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음악춘추 2016년 12월호의 기사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

<김문기의 포토랜드>




진행 : 이용일(한국음악교육협회 명예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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