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음악춘추

지휘자 겸 작곡가 우종억 / 음악춘추 2014년 1월호

언제나 푸른바다~ 2014. 3. 14. 2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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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 스토리
지휘자 겸 작곡가 우종억
보은성덕(報恩成德)을 여생의 좌우명으로 삼아 실천

 

모든 인간에게는 저마다의 재능이 있다. 다만 그 재능이 무엇인지, 그리고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알기가 어려울 뿐이다. “우물을 파도 한 우물을 파라”는 속담이 있고, 슈바이처 박사는 “우물을 파되 샘물이 날 때까지 파라”고도 했다. 하지만 오늘날 사회는 개개인에게 다양한 재능을 요구한다. 우리 음악계에도 하나의 전공이 아닌 여러 전공에서 뛰어난 재능을 발휘한 음악가가 있다. 바로 우종억 선생이다. 그 시작은 트럼펫 연주자였으나 지휘, 작곡, 그리고 교육 등 다양한 분야에서 재능을 발휘했고, 그 결과들은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할 수 없는 큰 결실들을 맺었다.
12월 초, 우종억 선생을 만나기 위해 대구를 방문했다. 선생은 오랫동안 후학을 양성했던 계명대에서 1997년 정년을 맞이하고 현재 팔공산 자락 조용한 곳에서 자연을 벗삼아 작곡가로서 제3의 음악 인생을 누리고 있는 중이다.
우종억 선생은 지난 해 한국음악가협회에서 선정한 한국음악상을 수상했으며, 지난 8월에는 제주국제관악제에서 미국의 체스트넛 브라스 컴퍼니에 의해 그의 금관5중주곡이 연주되었고, 9월에는 이스탄불-경북도향의 합동 연주회에서 한국 대표 작품으로 그의 「교향곡 ‘아리랑’」이 발표되어 호평받았다. 그리고 10월에는 한·중·일, 세 나라가 매년 개최하는 동아시아 국제현대음악제에서 자신의 관현악 작품들로 특강을 가졌으며, 11월에는 문인이었던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문집을 출간, 출판 기념회를 열기도 했다.
“하루하루가 모여 인생이 된다”고 했다. 오늘의 우종억 선생이 있기까지 살아온 하루하루를 되짚어 보았다.

 

트럼펫으로 음악의 문을 열다
1931년 경북 달성군 월배면, 한학자의 집안에서 태어난 선생은 음악과는 상당히 거리가 먼 유년기를 보냈다. 하지만 열 살 때, 대구 계성중학교의 악대부에서 트럼펫을 다루던 5살 위 형의 악기를 보고 한 눈에 반하게 된다.
“형님이 집에서 트럼펫을 불다가 할아버님의 눈에 띄어 야단을 맞고, 할아버님께서 악기를 부수려고 하시는 걸 보기도 했어요. 하지만 형님이 트럼펫 부는 것을 보고 반한 저는 그런 악기가 있다는 것에 놀라며 ‘나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당시에는 악기가 매우 귀할 때라 함부로 만지면 안 됐는데, 형님이 외출한 사이에 몰래 악기를 꺼내서 불어보다가 형님에게 들키고 말았지요. 그런데 형님은 혼을 내지 않고 악기를 배우고 싶냐며 가르쳐 주더라고요.”
그 일을 계기로 선생 역시 고등학교 악대부에서 트럼펫을 잡았지만 사실은 고등학교 때 국어 선생님으로부터 서울대 국문학과에 진학하라는 권유를 받을 만큼 문학적 재능을 인정받았다. 하지만 고등학교 3학년 때 발발한 6·25전쟁은 선생을 음악의 길로 이끌었다. 당시 부산에 있었던 육군군악학교 군악대에 들어가 5년간 트럼펫 연주자로 활약했다.
군악대를 나온 후 선생은 1956년 대구대학 상과에 진학했고, 1957년에는 대구시향의 전신인 대구교향악단의 창단 멤버가 되어 활동하는 한편, 생계를 위해 경음악 재즈밴드 연주자로 미군 부대를 다니며 연주했다.
상과가 적성에 맞지 않았던 선생은 계명대 종교음악과가 신설되고 이듬해인 1962년, 2학년으로 편입해 본격적으로 작곡을 공부하게 된다. 그리고 1964년 지방 최초의 시향인 대구시향이 창단되자 우종억 선생은 창단 단원으로 활동, 트럼펫 수석을 지냈다. 선생은 당시 대구시향의 정기 연주회에서 하이든의 「트럼펫 협주곡」을 대구 최초로 협연할 정도로 트럼피터로서 그 실력을 인정받았다. 그리고 1970년에는 대구시향의 부지휘자가 되었고, 대구실내합주단의 상임지휘자로 활동하기도 했으며, 1979년부터는 대구시향의 제2대 상임지휘자에 오른다.

제2의 전성기, 지휘자로 무대를 이끌다 
선생이 지휘봉을 잡게 된 것은 자신의 의지라기보다는 주어진 환경이 이끈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1956년부터 대구 및 경북 도내 유명 고등학교의 악대를 지도했고, 1956년 계성고등학교 개교 60주년 기념 음악회에서 계성학교 악대를 지휘하기도 했다. 당시 약 60인조의 단원들과 베토벤의 「에그몬트」 등을 연주했는데, 이는 대구에서 처음으로 개최된 관악합주 정규 음악회라고 할 수 있었다.
“그저 지휘를 하고 싶어 지휘 공부를 한 것이 아니라 필요에 의해서 였습니다. 1950년대에 활성화된 학교의 악대부를 지도하기 위해서 지휘가 필요했고, 이러한 활동들이 대구시향의 부지휘자 자리로도 이어진 것이거든요.”
부지휘자로 활동하던 선생은 본격적인 지휘 공부의 필요성을 느껴 1977년 일본 유학길에 올라 센조구가구엥 음대에서 작곡을, 도호가구엥 음대에서 지휘를 수학하고 1979년 대구시향의 제2대 상임지휘자가 되어 지휘자로 새로운 음악인생을 시작했다. 부지휘자로 시작해 상임지휘자까지 16년간 대구시향의 지휘자 생활을 한 셈이다.
그리고 선생은 지휘만 한 것이 아니라 ‘지휘 교육’에도 뜻을 품었다. 일본 유학 시절 지휘를 제대로 배워 오케스트라를 잘 지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음악성이 뛰어난 우리나라의 젊은이들을 지휘자로 만드는 교육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그래서 귀국 후 국내 최초의 지휘전공을 계명대에 개설했으며, 계명대 음대 교수 및 학장을 역임했다.
1975년부터 트럼펫은 놓고 본격적으로 지휘의 길을 걸은 선생은 “명쾌한 바톤 테크닉과 관현악법의 정통함, 그리고 건축하듯 구성이 뛰어난 지휘자”라는 평을 들었으며, 한국 현대음악 및 한국지휘계의 발전에 큰 업적을 끼친 지휘자로 인정받고 있다.

 

글_배주영 기자 / 사진_김문기 부장

- 기사의 일부만 수록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음악춘추 2014년 1월호의 기사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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