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음악춘추

인물탐구 피아니스트 윤기선 선생 / 음악춘추 2014년 1월호

언제나 푸른바다~ 2014. 3. 14. 2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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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춘추 기획대담 |

인물탐구 피아니스트 윤기선 선생
준열한 예술정신을 바탕으로 한국 피아노 음악의 발전에 공헌

 

한국 피아노 음악의 개척자 중 최고의 한 사람으로 평가받고 있는 피아니스트 윤기선 선생(1922. 10. 22∼2013. 7. 27)은 경기중·고교, 동경예술대학과 동대학원을 졸업한 후 귀국하여 잠시 이화여대에서 교편을 잡다 다시 유학길에 올라 세계적인 명성의 마담 레빈에게 사사하며 한국인 최초로 줄리어드 음대 및 동대학원을 졸업하였다.
유년 시절 안양자, 유수만 선생 등에게 음악의 기초를 배운 윤기선 선생은 조선일보사 전국고교콩쿠르에서 1∼4회 연속으로 피아노 부문 1위를 차지한 후, 전국남녀중등학교 음악경연대회에서 1위를 거머쥐면서 세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황제'」를 비롯해 리스트, 그리그,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협주곡을 국내 초연한 윤기선 선생은 미국 하트포드 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하다 1970년 귀국하였다.  예원학교와 서울예고에서 어린 영재들을 지도한 후 연세대 음대 교수로 재직하며 후학을 양성했으며, 1977년 도미해 재미 피아니스트로 활동하였다.
이 밖에 선생은 일본 동경예술대학상, 아다카상, 붐버그 장학상, 모리스 로에브 기념상을 수상한 바 있고, 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 최우수예술인(1996)으로 선정된 바 있다.

 

일시: 2013년 12월 12일(목) 오후 3시
장소: (주)코스모스악기 10층
진행: 이용일(한국음악교육협회 명예회장)
패널: 박은성(전 코리아심포니 음악감독)
     김금봉(연세대 음대 교수)
     한영란(연세대 음대 교수)
     손정애(숙명여대 음대 교수)
     정완규(중앙대 음대 교수)

 

윤기선 선생의 성장 과정 및 음악의 출발

이용일_ 2014년을 새로이 시작하는 1월의 음악춘추 인물탐구 난에서는 교육자로서뿐 만 아니라 탁월한 기량의 연주자로서 쉼 없는 연주활동을 이어가신 피아니스트 윤기선 선생님에 대한 추모의 말씀을 나누어볼까 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선생님의 업적 중에서도 주요 피아노 협주곡을 국내 최초로 협연하여 선보인 것을 가장 으뜸으로 꼽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그럼 이러한 윤기선 선생님의 성장배경과 더불어 음악의 출발에 대해 정완규 선생님께서 말씀해 주시지요.

 

정완규_ 네. 제가 알고 있는 바를 전해 드리자면, 윤기선 선생님께서는 구한말의 독립운동가 겸 개화파 정치인이신 윤치호 선생님의 다섯 째 아드님으로 태어나셨습니다.
그리고 윤 선생님의 댁은 1930년대 당시 남북한을 다 합쳐서도 몇 안 되는 그랜드 피아노를 보유한 가정이었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덕분에 선생님께서는 피아노를 마음껏 치실 수 있으셨다고 하고요.

 

이용일_ 그 시절에 그랜드 피아노가 한 가정집에 있었다니 놀랍네요.

 

정완규_ 개화사상을 선도했던 집안의 자제로 태어나셔서 피아노를 비롯한 서양 음악을 빨리 접하실 수 있게 되셨다고 보여집니다. 그리고 유년시절 안양자, 유수만 선생님을 찾아가 음악의 기초를 사사 받으셨고요.

 

이용일_ 아무래도 윤기선 선생님께서는 독립투사의 자녀로 태어나셔서 애국심이 남다르셨을 것으로 여겨지는데요.

 

박은성_ 사실 이전부터 우리나라 애국가의 작사가에 대해서 여러 의견들이 있었는데요. 윤기선 선생님께서는 당신의 부친께서 애국가의 작사가가 맞으시다며 강력하게 주장하셨습니다. 저 또한 윤치호 선생님께서 직접 애국가를 친필로 쓰신 악보를 보았으니, 그 의견에 힘을 실어드릴 수 있겠네요. 다행이도 불과 얼마 전에 정부에서 윤치호 선생님을 애국가의 작사가로 인정해 주셨습니다.

 

손정애_ 사실 윤기선 선생님을 두고 애국심을 따로 논할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과거 황무지 같았던 고국의 음악 발전을 위해 선진국인 미국에서의 활동을 뒤로하고 한국으로 발걸음을 옮기신 자체가 개척자 정신으로 대단한 애국심을 보여주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윤기선 선생과의 첫 만남

 

이용일_ 이번에는 김금봉 선생님부터 스승과의 첫 만남을 전해 주시겠습니까?

 

김금봉_ 제가 서울예고 2학년 때인 1970년 가을 즈음, 처음 윤기선 선생님을 뵙게 되었습니다. 사실 저는 석 달여 정도를 이경숙 선생님께 레슨을 받았었는데, 저를 윤기선 선생님께 보내주셔서 제자가 되었지요. 처음에는 어린 마음에 윤 선생님이 그저 낯설게만 느껴졌었지만, 항상 레슨을 해주실 때면 손수건으로 가리고 조용조용 말씀하시는 것을 비롯해 여러 면에서 제자들을 배려해 주셔서 감사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한영란_ 인천이 고향이었던 저는 처음에는 김중석 선생님께 가르침을 받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미국에서 훌륭한 한국인 피아니스트가 귀국을 하게 되셨다며 지금으로서는 그분께 가서 피아노를 배우는 것이 최상의 길이라고 김종석 선생님께서 먼저 말씀해 주셔서 중학교 3학년 때 윤기선 선생님께 오디션을 보러 갔었습니다.
그 때 처음 윤 선생님을 뵙게 되었는데, 문을 여는 순간 한국 분이 맞으셨는지 의심이 될 정도로 키가 훤칠하시고 눈도 부리부리하게 크신 그 모습에 압도당했었습니다. 그 전까지는 여느 무대에서도 그렇게 떨어 본 적이 없었던 것 같은데 어찌나 긴장을 했었던지 다리가 후들거려서 페달도 제대로 밟지 못할 정도였지요.
그 후 저를 제자로 받아주셨고, 선생님의 은혜 덕분에 지금까지 음악인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용일_ 한영란 선생님께서는 어떻게 보면 김중석 선생님(단국대 명예교수)께 큰 은혜를 입었다고 할 수 있겠네요. 제자의 미래를 위해서 다른 선생님께 보내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은 결정인데, 결과적으로는 한 선생님을 지금의 자리에 있게 한 장본인이 되시겠네요. 그럼 계속해서 손정애 선생님께서 윤기선 선생님과의 첫 만남을 말씀해 주시지요.

 

손정애_ 제가 예원학교에서 피아노를 연습을 하고 있던 날이었습니다. 갑자기 임원식 선생님께서 어떤 남자 분과 함께 오셔서는 제게 피아노를 한 번 쳐 보라고 하셔서 열심히 연주를 선 보여드렸는데, 왼손의 쉼표를 왜 지키지 않고 연주했느냐는 등 여러 차례 지적을 하시더라고요. 사실 잘 모르는 분이 제게 지적을 하시니 괜스레 기분이 상했었지요(웃음). 그런 후 갑자기 임원식 선생님께서 앞으로는 윤기선 선생님께 레슨을 받으라고 하셨고, 그렇게 저는 정진우 선생님의 제자에서 윤 선생님의 제자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인지 레슨 때면 반항심에서 말대꾸도 하기도 하여 한 번은 윤 선생님께서 당신을 안 좋아하는 제자는 못 가르치겠다고 하시더라고요. 돌이켜보면 죄송스럽지만 그 때는 여러 번 선생님의 속을 상하게 해드려서 저를 힘들었던 제자로 기

억하실 것입니다.

 

정완규_ 1973년, 제가 서울예고에 들어가면서부터 윤기선 선생님께 가르침을 받았었는데요. 이미 그 전부터 아버지(고 정희석 선생)와 돈독하게 지내 오셨기 때문에 저희 집에서 자주 뵙곤 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제가 예원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예고에 입학하게 되자 아버지께서 앞으로는 윤기선 선생님 밑에서 피아노를 배우라고 하셔서 본격적으로 선생님과 저와의 인연이 이어지게 되었지요.
그렇게 다른 제자 분들과 마찬가지로 가까이에서 선생님을 뵙고 보니까 굉장히 점잖으신 분이셨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느꼈습니다.
상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평소 담배를 즐겨하셔서인지 항상 은단을 드셨었는데, 이는 어린 학생들이지만 피해를 주지 않고자 하셨던 뜻이 있으셨던 것 같고, 몸에 배인 검소함으로 지난 달력 한 장까지도 허투루 버리지 않고 잘라서 메모지로 사용하셨습니다. 시계는 아주 저렴한 미국제 Timex를 차고 계셨는데 오래된 거지만 시간만 잘 맞는다고, 시계는 시간만 잘 맞으면 좋은 거라고 하셨지요. 롤렉스, 오메가와 같은 고가의 시계는 사치일 뿐이라고 하시면서요.

 

손정애_ 네, 맞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먹을 것도 정말 많이 사주셨지요.

 

정완규_ 한 번은 갑자기 예원학교 1학년부터 서울예고 3학년까지 모든 제자들을 연구실로 부르셔서 (그 당시는 예원과 예고가 지금의 예원학교 건물을 함께 사용) 저희는 영문도 모른 채 윤 선생님을 찾아뵈었습니다. 그 때 선생님께서는 저희에게 한 학부형께서 바나나 한 다발을 가져오셨다며, 그 당시 매우 귀한 과일이었던 바나나를 한 개씩 전부에게 나누어

주시더라고요.

 

박은성_ 저는 윤기선 선생님을 처음 뵙게 된 것을 대략 1960년대 후반쯤으로 기억하는데요. 그 때가 윤 선생님께서 KBS 오케스트라와의 협연을 위해 한국을 방문하셨던 해였습니다. 선생님께서는 그 날 차이코프스키의 피아노 협주곡을 연주하셨고, 그분의 그러한 멋진 연주력에 저는 말 한 마디조차도 건네지 못할 정도로 압도당했었습니다. 당시 한국 사람이 그렇게 차이코프스키 전 악장을 협연하는 것은 처음 보았기에 혼잣말로 “와, 이런 대단한 분도 있구나”라고 감탄했었지요.
그런데 사실 제 나름대로는 윤 선생님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습니다. 제가 중학생이었을 때, 학생들의 피아노 연습을 위해 제작된 체르니 30번 전체를 녹음한 음반이 판매된 적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듣기 전에는“이렇게 쉬운 곡을 왜 녹음까지 해서 판매하지?”라는 생각이 내심 있었는데, 그 음반을 듣는 순간 제 생각이 완전히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지요.
예를 들어 저희 친구들은 보통 체르니 30번 중 제1번을 메트로놈 80에 맞춰 했다면 그 음반 속 연주는 180 이상의 속도를 구사하였던 것입니다. 그 음반 대단한 음악을 소화하였던 연주자가 바로 윤기선 선생님이었던 것이지요.
그렇게 처음 윤 선생님에 대해 알게 된 후, 시간이 지나 저는 임원식 선생님의 부탁으로 서울예고의 오케스트라 지도를 맡게 되었고, 당시 오케스트라 연습실이던 강당이 윤기선 선생님의 방과 같은 5층에 위치하고 있어서 선생님과 자주 마주치게 되면서 친분을 쌓았습니다.
저희 둘은 어딘지 모르게 잘 맞았던 부분이 많아서 퇴근하여 집에 가기 전 함께 맥주 한 잔을 기울이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더욱 사이가 각별해지게 되었고요.

 

윤기선 선생의 교육관

이용일_ 우리나라 사정만이 아니라 외국의 경우를 보아도 레슨 선생님을 옮기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그렇기에 여기 계신 분들은 그러한 어려운 관문을 뜻이 있는 분들로 인해 수월하게 통과했다고 여겨지는데요.

 

정완규_ 네. 물론 지금도 그러하지만 선생님을 옮긴다는 것 자체가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희 아버지께서도 그러한 부분을 많이 신경 쓰셨고, 아마 학생을 받는 입장에서도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윤기선 선생님께서 평소 말씀하시기를, 당신에게 앞에 나와서 배운 학생들보다 뒤에 숨어서 배운 학생들이 더 많다고 하셨습니다.
심지어는 학부모님께서 새벽에 찾아와 우편함에 우리 아이를 봐달라며 편지를 쓰고 간 적도 있었고, 윤 선생님께서 아침에 출근하려 나오시면 기다렸다가 제자로 받아달라는 사람들도 있었다고 하니 말도 다 못하지요.

 

손정애_ 어린 시절, 저는‘리타르단도’라 하면 제 마음대로 느려지는 것인 줄 알았어요. 그런 제게 윤기선 선생님께서는 단계적으로 느려져야하는 원리를 설명해 주셨고, 스케일을 칠 때에 어떻게 연주하면 고른 소리가 나는지, 페달은 어떻게 밟아야 하는지 등을 상세하면서도 체계적으로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전체적으로 음악을 해석하는 법에 대한 것을 위주로 배움을 주셨는데, 그 때의 선생님의 말씀이 이렇게 제가 교수가 된 지금까지도 수업할 때에 가장 많이 생각이 나고, 저희 제자들에게 스승으로서 바른 표본이 되어 주셔서 현재까지도 많은 도움이 되어 주십니다.

 

정완규_ 저에게도 윤기선 선생님께서는 여러 번 스케일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기본적인 것들을 놓치게 된다면 좋은 피아니스트가 될 수 없다”고 말씀하시면서 모든 것에 앞서 스케일, 아르페지오부터 공부해야 한다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러한 일화 중 기억에 남는 일이 레슨 받던 초기에 윤기선 선생님께서 제게 다음 시간에는 바흐의 「인벤션」1번을 준비해 오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초등학교 때 이미 친 곡이라고 말씀을 드렸더니, 이와 상관없이 무조건 준비해 오라고 하시면서 레슨 시 이 곡에 대해서 한 번 설명을 해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흐가 왜 이 작품을 이러한 방식으로 썼는지, 오른손과 왼손은 왜 이렇게 움직이는지, 그래서 어떠한 관계 속에서 어떻게 연주를 해야하는지…’
이 곡은 작곡가가 무대에서의 연주를 목적으로 만든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 작품에서 작곡가의 의도를 파악하고 이해한 후 해석하는 방법을 익히는 것이 중요하며, 이를 바탕으로 피아노를 쳐야 된다고 하셨지요.
그리고 윤 선생님께서는 제게 언젠가 “지성과 감성 중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라는 물음을 던지셨고, 그에 대한 답을 지성이라고 하시면서“감성(음악성)도 물론 중요하지만, 지성이 받쳐주지 않는 감성은 제멋대로 되기 마련이다. 음악은 이성과 지성이라는 틀이 잡혀 있어야 비로소 정확한 연주가 청중에게 전달될 수 있다.”고 하시며 줄리어드 음대 마담 레빈께서 알려준 말씀이라고 하셨습니다.

 

이용일_ 흔히 머리에 있는 생각들을 사고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가슴까지 내려와서 정리가 되어야 한다고들 말하는데, 마음이 앞서는 학생들에게는 그럴수록 좋은 선생님이 필요한 것이지요.
그러한 의미에서 윤기선 선생님께서는 제자들이 이지적으로 판단하고, 전체를 내다볼 수 있게 한 후에 감성적으로 풀어나갈 수 있도록 안내해 주셨습니다. 개인적으로 훌륭한 교육 방법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손정애_ 네, 맞습니다. 제자들에게 늘 머리를 쓰면서 연습을 하라고 하셨지요. 제게도 처음 바흐의「인벤션 제8번」을 준비하라 하셔서 내심 속상하였는데, 여기에 그 동안 알고 있던 것과 다르게 양 손의 커지고 작아지는 다이내믹을 반대로 연주하라고 말씀하셔서 처음에는 혼란이 왔었습니다. 사실 혼잣말로 ‘어떻게 사람이 양 손을 다르게 칠 수 있지?’라고 생각하기도 했었지요(웃음).
하지만 그러한 선생님의 교육을 통해 이 때까지 모르고 있었던 새로운 피아노의 세계를 알 수 있었고, 양 손을 분리하는 것을 비롯해 실질적으로 피아니스트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여러 가지 방법들을 전수해 주셨습니다.

 

정완규_ 네, 레슨의 내용이 보통의 수업과는 조금 달랐지요. 바흐의「인벤션 제8번」의 경우“여러 대위법 형식 중 캐논이라고 하시면서, 그래서 이런 식으로 크레센도와 디크레센도가 교차되어야 하고, 우리는 그 형식에 맞는 해석을 통해 그러한 음악을 만들 수 있는 테크닉도 연마해야 하는 것이란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한손이 커질 때 동시에 다른 한손은 작아지는 테크닉을 요구하시고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 악보를 보며 설명해 주셨던거지요.

 

김금봉_ 윤기선 선생님께서는 바흐의 테마를 강조하는 이야기를 많이 해주셨지요. 그래서 저희 제자들이 바흐의 인벤션을 나눠서 녹음하기도 했습니다.

 

이용일_ 과거 우리가 무심코 지나친 기본적인 부분들을 간과하지 않으셨던 한 분의 노력으로 이렇게 깨우쳐지면서 점차 음악계 전체적으로 변화를 가져오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되네요.

 

김금봉_ 그뿐 아니라 원래 모든 분야에서 기초가 중요한 것임에도 어린 시절에는 이를 강조하셨던 것들을 받아들이기 어려웠었는데, 순수하게 선생님의 말씀을 믿고 배워나가다 보니 그것이 오늘날 이렇게 제게 큰 자산이 될 줄은 몰랐습니다.
세월이 흘러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뒤늦게 느껴지게 된 그 감사의 마음은 정말 말로는 다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선생님을 따라 가려면 아직도 한참 남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 저희들이 1시간 30분 동안 학생들에게 가르쳐 줄 분량을 윤 선생님께서는 50분이면 정리가 끝나셨을 정도로 포인트를 잘 잡아주셨습니다.

 

한영란_ 윤기선 선생님께 레슨을 받았던 시절의 악보를 지금 다시 펼쳐 보더라도 그 가르침이 한 눈에 들어올 정도로 요점정리를 잘해 주셨더라고요.

 

김금봉_ 그리고 제 기억으로는 윤기선 선생님께서 그런 말씀을 하셨던 적이 있었던 것 같아요. 선생의 역할은 곧 경찰관과 같은 것으로, 주관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에게 음악의 질서를 잡아주기만 하면서 포인트만 일러주면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한영란_ 당시 저희 제자들도 윤기선 선생님 클래스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었어요. 들어오지 못하는 친구들의 부러움을 사기도 했고요.

 

윤기선 선생의 음악세계

이용일_ 그렇다면 제자로서 느끼시는 윤 선생님의 음악세계를 어떻게 보시나요?

 

김금봉_ 일단 윤기선 선생님께서는 악보에 충실하셨습니다. 그리고 저희가 나름의 음악성으로 표현을 한다고 하였지만, 선생님께서는 그것을 보다 간결하면서도 체계적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해주셨지요.

 

이용일_ 한국에서 윤 선생님께 배운 곡을 외국에 나가서 다시 공부하셨을 때 어떠한 차이를 느끼셨나요?

 

김금봉_ 아무래도 윤기선 선생님을 통해 기초를 잘 닦아서인지 덕분에 외국에 나가서도 많은 지적을 피할 수 있었고, 그것에 더해져서 음색이나 톤에 대한 부분들을 배워나갈 수 있었습니다.

 

손정애_ 이 전에 스케일에 대해서도 언급이 되긴 하였지만,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 예중·예고의 입학시험에 포함된 스케일 시험은 사실 윤기선 선생님께서 스케일의 중요성을 강조하셔서 처음으로 시작되게 된 것입니다. 

 

정완규_ 윤기선 선생님께서는 한국에서 비록 짧은 기간 동안 머무시면서 제자들을 양성하셨지만 레슨과 콩쿨 등에서의 비합리적이고 불공정한 한국 사회만의 독특한 관행을 매섭게 지적하곤 하셨습니다.  그러한 답답함을 저희 아버지와 약주를 한 잔씩 기울이시면서 이야기 나누심으로 해소하셨던 것 같고요.
그 예로 연습을 시켜 주는 선생님 따로, 전체적인 음악을 만들어 주는 선생님이 따로 있는 것은 아마 한국밖에 없는 현상일 것이라며, 선생이라면 음악의 무엇이든 기초부터 시작해 전부를 가르칠 수 있어야 함과 더불어 레슨 시간 또한 정해진 만큼 성실하게 이행해 주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당시는 아무도 이야기 못했던 매우 신선한 지적이셨지요.

 

박은성_ 이어서 말씀드리자면 윤기선 선생님께서 줄리어드 음대에 재학하셨을 당시 마담 레빈 교수님을 사사하셨는데, 그 때 큰 충격을 받으셨다고 하시더라고요.
당신께서는 3도 스케일도 너무나 어려운데 그분은 쉽고도 고르게 6도 스케일을 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시면서 6도 스케일 훈련을 마치고 나면 어떠한 테크닉도 고르게 연주할 수 있다고 하시더라고요.

 

정완규_ 네, 맞습니다. 쇼팽의 에튀드를 보더라도 보통은 화려한 「겨울바람」과 같은 작품을 많이 선택하게 되기 마련인데, 제가 예고에 다니던 시절, 윤 선생님께서는 쇼팽의 에튀드 중 6도를 공부하라고 하시면서 그래야만이 건반의 소리가 고르게 나면서 4, 5번째의 약한 손가락들이 강화되어 1, 2번째 손가락들과 함께 균형이 잡힌다고 하셨습니다.
또한 여기에 윗 음 4, 5번째 손가락은 크고 레가토를 크게 치면서 밑에 음 1, 2번째 손가락을 작게 스타카토로 천천히 연습하는게 중요하다고 강조하셨는데, 이것이 이 곡을 통해 배워야하는 테크닉이라 하시더라고요. 그러니까 바흐의 인벤션 또는 쇼팽의 에튜드이던 무조건 잘 치려하기 이전에 그 곡에서 배워야할 음악과 테크닉을 정확히 알고 공부해야한다고 강조하셨지요.

 

박은성_ 윤기선 선생님께서는 여러 방면에서 자신의 프라이드에 대해 강한 자부심을 가지고 계셨던 분이었습니다. 
그 중에서 대표적으로 말씀드릴 수 있는 것들이 집안과 학교인데요. 약주 한 잔을 하신 후 기분이 좋아지실 때면 동경예술대학이나 줄리어드 음대 같이 세계에서 인정해 주는 대학을 졸업하신 것에 대해서 자랑스럽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학교에서 가르침을 받을 수 있었던 모토나리 이구치 교수님과 마담 레빈 교수님에 관련된 이야기를 많이 해주셨지요. 마담 레빈 교수님에 대한 이야기에서는 미국의 유명 피아니스트 반 클라이번에 관한 일화를 항상 빼놓지 않으셨습니다.
반 클라이번이 모스크바에서 열린 제1회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에서 1등을 거머쥐었을 때가 1957년이었는데, 당시 줄리어드 음대에서 미국 대표로 차이코프스키 콩쿠르를 출전시킬 연주자를 가르는 오디션이 있었다고 해요.
그 때 최종 결선에 단 두 사람이 올라갔고, 그 한 명이 미국에서 전설적인 피아니스트로 기록되고 있는 반 클라이번, 또 한 명이 바로 윤기선 선생님이었던 것입니다.
윤 선생님께서는 이에 대해서 “당시 내가 그분의 기술을 어떻게 따라가겠느냐. 하지만 마담 레빈 교수님은 내 음악을 좀 더 좋아하셨지.”라고 조심스러워 하셨지만 스승에게 인정 받으셨다는 사실을 자랑스러워하셨습니다.
만약 윤기선 선생님께서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에 출전하게 되셔서 혹시라도 1등을 하셨더라면 저는 현재 우리나라의 상황이 많이 바뀌었을 것이라고 봅니다. 그 때의 콩쿠르는 단순한 대회가 아닌 정치적으로도 복잡하게 얽혀 있었고, 물론 반 클라이번의 실력도 뛰어났지만 그에 못지않은 실력자들이 모스크바에 많았다고 해요. 그런데 왜 그가 우승을 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해답은 그로부터 일주일 후에 소련이 헝가리를 침공한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렇듯 음악이라는 것과 정치적인 부분들이 계속해서 상충되고 있다는 에피소드들을 제게도 가끔씩 말씀해 주셔서 흥미롭게 경청하였던 기억이 떠오르네요.

 

정리_이은정 기자 / 사진_김문기 부장

- 기사의 일부만 수록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음악춘추 2014년 1월호의 기사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

 

 

진행: 이용일(한국음악교육협회 명예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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