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음악춘추

작곡가 정태봉 서울대 교수 / 음악춘추 2015년 5월호

언제나 푸른바다~ 2015. 11. 30. 15:48
300x250

커버스토리
작곡가 정태봉
‘작곡’이 빠진 삶은 생각하고 싶지 않아...

 

 “작곡은 제 삶의 가장 중요한 의미입니다. 작곡을 빼더라도 제 삶은 가능하겠고 그런대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점들도 있겠지요. 그러나 핵심이 빠진 제 삶은 생각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런 면에서 덧붙이자면 작곡은 제 정신과 육체의 일부이며 저 자신과 분리되는 것은 원하지도 않고 그리 되지도 않을 것입니다.”

 

책과 생각에 잠기는 것을 좋아하던 소년에서 작곡가로
작곡가 정태봉은 어린 시절 음악적 재능을 보이기는 하였으나, 음악가로의 꿈은 꾸지 않았다. 그런데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 음악에 놀라운 열정을 보이기 시작한다. 독학으로 피아노와 기초적 음악이론을 공부하여 서울대 작곡과에 입학, 본격적으로 음악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대학을 졸업한 후 3년가량 음악교사 생활을 했다. 그 후 그는 서울대 대학원에 진학하여 석사과정을 마치고 독일로 건너가 Karlsruhe 국립음대의 Konzertexamen 과정을 졸업하였다.
“어린 시절, 저는 철도의 기술직 공무원이셨던 아버지를 따라 경상도 지방을 여러 곳 옮겨 다니며 살다가 초등학교 6학년 초에 경상남도 진주에 정착하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에 제가 들을 수 있었던 음악이라고는 민요나 학교에서 배우는 동요 그리고 대중가요가 다였습니다. 노래를 한번 들으면 그대로 따라 부른다거나, 선생님이 풍금을 치면 보고 그대로 친다거나 해서 주변 사람들이 신기하게 여기기도 했지요. 그러나 그때까지만 해도 음악을 전공하고 싶다는 생각은 갖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그냥 책 읽는 것을 좋아하고  산이나 언덕에 앉아 생각에 잠기는 것을 즐기는 평범한 아이였습니다.” 라는 말로 소년 정태봉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그런데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제가 음악에 푹 빠지게 되었을 뿐 아니라 작곡에까지 손을 댔던 것이지요. 노래를 작곡하여 친구들에게 들려주기도 하고, 음악선생님으로부터 화성학 책을 빌려 통째로 베끼는 등 독학으로 작곡과 피아노를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그리고 피아노가 있던 학교음악실이나 교회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마침내 작곡가가 되기로 마음을 정하고 그 뜻을 내보였는데, 부모님과 학교 선생님의 반대가 그야말로...” 초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경상남도의 최고 명문 중?고둥학교를 다니고 있었으니 주변의 반대가 심했던 것은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었을까...  “우여곡절 끝에 서울대 작곡과로 진학은 했는데, 그 때부터는 또 극심한 경제적 어려움에 시달리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주변의 반대를 물리치고 스스로 선택한 길이었기에 힘들지 않은 척 견뎌내는 수밖에 없었지요. 대학을 졸업한 후에는 유학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3년가량 고등학교 음악교사를 했습니다. 그 무렵 저는 ‘스스로 선택한 작곡가의 길이니 아무리 힘들어도 견뎌내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이 길의 마지막에 도달했을 때 결코 후회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다짐을 하고 또 했습니다.”
유학길에 오르면서도 그는 ‘유학기간은 가능한 한 짧게, 그러나 그 기간을 가장 효과적으로 보내야한다. 유학을 끝내고 귀국할 즈음엔 나의 작품세계가 확실한 모양을 갖출 수 있어야 한다.’ 라는 다짐을 굳게 했다고 한다.
그가 귀국하자 우리나라 작곡계는 ‘독자적인 작품세계를 지닌 작곡가’, ‘새로운 양식의 작곡가’ 라는 수식어와 함께 그를 주목하였다. 지금도 높아진 명성만큼이나 그의 작품들은 계속해서 연주, 연구되고 있다.

 

무엇을? 어떻게? 누구에게? 왜?
 “지금까지 이런 저런 작품을 적지 않게 썼고 앞으로도 계속 쓰겠지만, 아무리 작은 곡이라도 거기에는 그 당시의 제 생각이 스며있기 때문에 모두 다 소중합니다. 초기의 곡들이나  제 스스로가 보기에도 완성도가 다소 떨어진다 싶은 곡이라도 모두 소중하게 여겨집니다.”
  작곡가 정태봉은 기독교 신앙을 견지하면서도 동양사상을 철학적 바탕으로 하여 감성과 이성이 균형을 이루는 동시에 정신적 깊이를 아울러 지니는 작품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그는 지금까지 관현악곡, 관악합주곡, 현악합주곡, 독주곡 및 실내악곡, 가곡, 합창곡, 한국 전통악기를 위한 곡 등 여러 장르에 걸쳐 100곡에 이르는 크고 작은 작품들을 작곡하였다. 그 작품들 중「플루트, 대금과 가야금을 위한 ‘정관’」,「플루트와 가야금을 위한 ‘학무’」「인성과 대금, 플루트 타악기를 위한 ‘향무’ 」 등 국악기를 포함한 실내악곡이 기자의 눈에 띄었다. 기자가 서양악기와 우리 전통악기를 왜 함께 사용했는지 묻자, 그는 “대학 재학 시절부터 우리 전통악기를 서양악기와 더불어 쓰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악기든 모두 내 음악을  위한 도구일 수 있어야 한다.’ 라는 생각을 했거든요. 악기란 그 자체가 목표일 수는 없지요. 아주 귀하고 중요한 음악수단입니다.” 라고 답하였다.
그는 “자기 작품을 들고 열심히 뛰어다니며 공감을 구하는 작곡가도 좋지만, 품격이 있고 가치가 있는 음악을 진정으로 사랑하여 그것을 열심히 찾는 사람들로부터 자연스레 공감을 얻는 작곡가가 나에게 큰 의미가 있습니다.”라고 말하며 “이 시대에 꼭 필요한 작곡가가 되고 싶다.”는 말을 덧붙인다. “지금은 공감을 얻지 못하더라도, 후일 음악을 제대로 듣고 평가하는 음악학자들과 애호가들이 '작곡가 정태봉은 독특하고도 완성도가 높은 음악을 작곡함으로써 인류의 음악적 자산을 그의 작품 수만큼 더 늘렸다. 그는 한국음악계는 물론 세계 음악계에서 꼭 필요한 존재였다.’ 라는 말을 듣고 싶습니다. 한국음악계에서 필요한 존재라면 세계음악계에서도 꼭 필요한 존재라는 것이 저의 신념입니다.” 그리고 “모든 청중들이 다 중요하지만, 가치 있는 음악을 능동적으로 찾고 적극적으로 이해하려는 청중들이 저에게는 더 소중한 만큼 그런 분들에게 늘 고마워하고 있습니다.” 라는 말로 청중들에게 감사를 전한다.

 

한국작곡계의 발전을 위하여
개인적인 작품 활동 외에도 작곡계의 발전을 위해 헌신한 작곡가 정태봉은 다양한 기관의 집행위원 자문위원, 심사위원을 역임하였다. 특히 1999년부터 2002년까지 범음악제(Pan Music Festival) 운영위원회에서 위원장을, 2007년부터 2010년까지 작곡단체 운지회의 회장을 역임하였고, 2011년부터는 작곡가그룹 미래악회의 회장을 맡아 한국 창작음악계의 발전을 주도해왔다.
작곡가 정태봉은 한국작곡가들의 스펙트럼이 상당히 넓어졌다는 생각이 들어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싶다고 말한다. “작곡계의 발전이란 작곡가들이 스스로 주도적 입장을 취할 때 가능하다고 봅니다. 그리고 현실적인 면을 우선 생각해야 합니다. 뜬 구름 잡는 생각이나 하면서 책임은 다 하지 않는 것, 다른 작곡가나 단체 혹은 기관에 탓을 돌리는 것, 이런 것들은 발전을 가로막는 걸림돌 바로 그 자체입니다. 무책임하게 나서서 이런 저런 말로 작곡계에 누를 끼치는 일은 행정가든, 평론가든, 연주가든, 작곡가든, 누구든 부디 하지 말기를 바랄 뿐입니다. 제 생각에 우리나라 작곡계는 지금도 꾸준히 발전하고 있습니다.”

 

계속되는 그의 이야기
 <현악사중주 “니타나(尼陀那)”>로 대한민국 작곡상(1999)을, <교향시 “백두대간(白頭大幹)”>으로 대한민국 작곡상 최우수상(2002)을 수상하였으며, 2007년에는 한국음악상을 수상한 바 있는 작곡가 정태봉은 현재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작곡과 교수로 재직(2007년-2011년 음악대학 학장 역임)하는 한편 활발한 작품 활동을 펼치고 있다.
“제자들에게 항상 자랑스러운 스승이고 싶습니다. 저로 인해 제자들이 힘을 얻고 또 자극을 받아 훌륭한 작곡가로 성장할 수 있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정년퇴임이라는 제도가 있으니 학교에서 제자들을 가르치는 일은 때가 되면 중단되겠지만, 우리나라에서 좋은 작곡가가 나와 끊임없이 활동할 수 있도록, 후학들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격려하고 그들에게 힘을 실어주는 일은 쉬지 않고 계속 할 예정입니다. 우리나라와 세계의 작곡계를 위한 일이란 바로 이런 일인 것 같습니다.”

 

글_ 구수진 기자 / 사진_ 김문기 부장

기사의 일부만 수록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음악춘추 2015년 5월호의 기사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

 

<김문기의 포토랜드>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