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우가 만난 이 달의 아티스트
작곡가 이종구
총체 뮤지컬 세 개의 독도이야기 ‘그레이트 커플’ 공연
박경우_ 먼저 이 교수님의 출생 및 성장과정에 대해 말씀해 주시지요.
이종구_ 충남 당진군에서 1947년에 태어나 중학교 때까지 그 곳에서 성장하고 교육을 받았습니다. 1963년 공주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유학생활을 시작하였는데, 그 때까지 저 스스로 음악가가 되리라곤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다만, 소설가가 되면 어떨까, 화가는 어떨까 등 뚜렷하게 방향을 정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남 몰래 『소설 작법』이라는 책을 사다가 탐독하였고, 미술반에 들어가 그림을 그렸습니다. 특히 중학교 시절에 한국화를 전공하신 선생님의 영향을 받아 여러 가지 모사(模寫)를 잘 하였었는데, 고등학교에 와서는 한국화 전공의 선생님이 아니셔서 더 배울 기회가 없었습니다. 그래도 미술의 끈을 놓지 못하여 미술실에서 기숙하다시피 3년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나는 적록색약이라는 핸디캡이 있어 미술대학에는 갈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대안으로 소설을 쓰려 하였고 많은 작품을 탐독하였습니다. 기억으로 고교 2학년이었던 1965년, 그 날도 그림재료를 사러 서울에 왔었습니다. 서울에 오면 당시 홍익대 미대에 재학 중이던 공주고 선배들을 만나 그들의 공부 과정이나 그림의 사상 등에 대하여 열띤 토론을 즐기며 밤새는 줄 모르고 지날 때가 많았습니다. 그 때 내가 살던 공주에는 그림재료를 파는 이른바 화방(畵房)이라는 곳이 없었습니다.
하루는 그림재료가 떨어져 서울에 왔었지만, 그 날은 선배들과 연락이 두절되어 어쩔 수 없이 명동 거리를 헤맸었습니다. 그 때 운명처럼 당시 명동에 있었던 국립극장 앞을 지나칠 때 우연히 페인트로 그린 오페라 간판을 보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그 간판이 손으로 그려진 그림이었기에 내 눈에 잘 띄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림에 매료되어 그 날 저는 처음으로 오페라를 보게 되었고, 소설과 미술과 음악 등이 함께 하는 요즘 말로 종합예술을 전공해야겠다는 생각이 전광석화처럼 스쳐 지나갔습니다. 무언가 미래에 대해 안개같이 불투명하던 저의 미래가 보이는 듯하였고, 잠재되었던 능력이 오페라라는 장르 하나로 귀결되는 듯한 흥분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그야말로 벼락을 맞은 듯하였던 그 사건(?) 이후 한두 달 뒤쯤, 저는 드디어 오페라 작곡가가 되겠다는 결심을 하고 오페라 대본을 쓰기 시작하였습니다. 현진건의 『무영탑』이라는 소설을 각색하였었지요. 그리고 작곡을 시작하였는데, 그 배경이 신라이고 신라의 정서를 쫓기 위해서는 불교음악을 이해하는 것이 필수적 관건이란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다행히 공주시내 근처 공산성 내에 영은사와 마곡사라는 절을 전전하면서 불교음악에 심취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오페라 작곡을 계속하는 와중에 어느덧 대학진학을 고심해야 할 시기가 다가왔습니다. 서울대학교 음악대학을 지원하였다가 재수생의 처지가 되었음에도 오페라 작곡은 멈추지 않았고, 재수생 시절 여름에 피아노 리덕션으로 완성된 첫 오페라에 겹세로줄을 긋는 감격스러움을 만끽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난 후 입시에 주력하여 서울대학교에 입학하게 되었지요.
박경우_ 오늘이 있기까지 어떤 분들의 영향이 컸다고 생각합니까.
이종구_ 입학 후 한 학기도 채 마치기 전 군에 입대하였고, 제대 후 백병동 교수님을 비롯하여 훌륭한 여러 선생님들을 만날 수 있는 행운이 찾아 왔습니다. 판소리 명창이시었던 고 박동진(朴東鎭, 1916∼2003) 선생님께 소리와 고법(鼓法)을, 피리 명인이셨던 고 화정 김태섭 선생님께 정악 장단을, 김정자, 조위민 선생님께 가야금과 거문고를 배웠습니다. 더욱이 제 평생 동안 인연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는 역사학자 고 박시인 교수님의 가르침이었습니다. 지금 제 삶의 근간이라 할 수 있는 역사를 통한 철학관은 사실 그분으로부터 비롯되기 시작하였습니다. 특히 그분을 따르면서 알게 된 역사학자 고 문정창 선생님과 초대 문교부장관을 지내신 안호상 선생님의 가르침은 저의 예술가로서의 기반과 학자로서 기틀을 조성하여 주신 분들입니다.
박경우_ 그야말로 각 분야 명사들과의 운명적 만남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렇다면 이 같은 인연이 개인적 작품 활동에 어떻게 작용하고 어떠한 결과를 드러내게 되었는지요?
이종구_ 그분들의 가르침으로 오페라 「구드래」, 「미마지」, 「알타이에서 시인을 만나다」(미발표 오페라) 등과 2004년 전주세계소리축제 개막공연 작품 「백제 물길의 천음야화」, 2010년 전주세계소리축제 개막 공연 작품 「천년의 사랑 여행」, 칸타타 「백제」(1992년) 등의 작품을 쓸 수 있었고, 「백제 금동대항로 주악조소상 악기 명칭에 대한 연구」(2007, 음악논단 21집), 「백제 악기연구 I 」(2007, 음악논단 24집), 「부여 능산리 출토 백제 금동대향로-주악조소상 오른쪽 1악사의 악기에 대한 연구」(2009 국악원 논문집 제20집, 국립국악원), 「백제 현악기 연구」((2012, 음악논단 27집) 등의 논문을 쓸 수 있었습니다.
박경우_ 독일에서 유학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어려웠던 지난 시절을 어떻게 지냈고, 어떤 활동을 펼쳤습니까?
이종구_ 저는 독일 서남부에 있는 칼스루에라는 도시에서 공부를 했습니다. 많은 추억거리가 있습니다만, 그 곳 국립극장의 국립오페라단에서 편곡사로 활동했습니다. 그 때 저는 학생 신분이었기 때문에 아르바이트 개념으로 일을 했었지만, 실제로는 정규 예술가만큼의 대우를 받으며 많은 일을 했습니다. 저의 일은 주로 유명 오페라 작곡가들의 신작 오페라를 피아노 반주 악보, 이른바 보컬 스코어로 편곡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분들은 최종 오케스트라 반주 스코어를 보내오는데, 하나같이 빽빽한 무조성 음악에 주선율 하나 찾기 힘든 20세기의 전형적인 악보들이었어요. 이를 연습하기 위해서는 피아노 리덕션 악보가 필요했는데, 그것이 바로 제 몫이었지요. 어쨌든 적지 않은 수입을 올림과 동시에 저의 관심사였던 현대 오페라를 다각적으로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갖는 행운을 누렸는데, 그 시기에 만났던 모든 분들이 저의 스승님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박경우_ 귀국 후의 활동상을 소개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종구_ 귀국 후 합창단을 위한 오페라를 작곡하였는데, 제목은 「환향녀(還鄕女)」였습니다. 개인이나 특수 집단의 이야기가 아닌 민중의 다각적인 목소리를 한 무대에 담으려는 목적에서 만든 작품으로 역시 제가 직접 대본을 썼던 작품입니다. 당시 국립합창단 단장이셨던 나영수 선생님이 이 작품에 관심을 갖고 위촉 형태로 공연을 할 수 있게 해 주셨고, 당신께서 직접 지휘하여 초연하셨습니다. 이 작품은 좋은 반향을 불러 일으켜 다음 해에 대규모로 재연하였으며, 그 후 국립극장 개관 30주년 기념공연 작품으로도 선정되어 공연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지금은 고인이 된 유봉헌 교수가 세종문화회관, 독일 칼스루에, 루드빅스부르크, 부산시민회관 등 여러 곳에서 공연했던 작품입니다. 어느 시대 어느 국가에서나 있을 수 있는 전쟁의 보편적 이야기를 통해 무고한 여인들의 희생을 고발하는 내용을 담고 있어, 평화를 지향하는 인간의 심성을 표방한 작품으로, 한편으로 우리 시대 사람들이 공통으로 갖고 있는 전쟁 공포증을 자극하는 일면도 있다고 하겠습니다. 이 작품이 독일에 알려져 초청을 받았는데, 그 공연의 주체인 국립합창단은 계획과 예산이 갖춰져 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해외로부터 초청을 받은 저는 할 수 없이 저와 뜻을 같이하는 동료들과 한국창작오페라단을 조직하여 이에 응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한국창작오페라단이 결성된 것이지요. 1991년의 일이니까 벌써 20년이 넘었군요.
박경우_ 작곡가로서 작품을 쓰는 것과 공연을 제작하는 것은 전혀 역할이 다른데, 그야말로 무수한 난관에 봉착하셨을 것이란 짐작이 드는데 실제로 어떠셨습니까?
이종구_ 잘 아시네요. 맞습니다(웃음). 작곡가를 넘어서 오페라 제작자로 변신하게 되었는데, 흔한 표현으로 “제작은 아무나 하나?”입니다(웃음). 지난 20년간 7-8회의 크고 작은 오페라를 제작하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신세를 지고, 결례를 하였고, 상처를 준 기억 이외에 크게 회고할 것이 없습니다. 특히 나의 가족들이 가장 큰 희생자들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반면 내가 어려서부터 생각해 왔던 종합예술로써의 여러 소재들은 두루 다뤄왔다고 생각합니다. 웅혼했던 백제, 한반도와 일본열도, 그리고 중국을 호령하며 지배하였던 동아시아 고대문화국가 백제의 이야기 오페라 「구드래」, 「미마지」를 비롯하여 숭고한 동학정신을 찾으려 하였던 「하늘에 묻어버린 노래」, 우리 칼의 전통을 추적하였던 「사랑을 위한 협주곡」, 우리 춤의 원류를 찾으려 했던 「한울춤」, 동양의 영웅들을 한 자리에 모아 역사적 가상 시뮬레이션을 펼쳐보려 하였던 「알타이에서 시인을 만나다」 등을 써왔기 때문입니다.
박경우_ 실로 커다란 난관을 겪으면서도 굴하지 않은 제작자로서 ‘인간승리’의 한 면이 엿보입니다. 아울러 각양각색의 소재를 바탕으로 작품성을 실현하셨다는 생각인데, 이번에 국내 및 해외 무대에 선보이는 총체뮤지컬 세 개의 독도이야기 「그레이트 커플」은 어떻게 탄생하게 되었습니까?
이종구_ 제겐 한 15년 전부터 다루고자 하였던 소재가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독도」 이야기입니다. 이제 제 나이 65세. 더는 미룰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여 이미 3년 전부터 본격적으로 작품을 만들기 시작하였습니다. 오랜 동안 삭혀온 이야기들이기에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숨어 있던 소재들을 많이 발굴할 수 있었습니다. 저 자신도 처음에는 독도에 무슨 이야깃거리가 있겠는가 하고 생각했었습니다. 다른 분들도 거의 “독도는 우리 땅이라는 이야기겠지” 라는 선입견을 굳이 감추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저는 독도와 관련하여 주변에서 6개의 단편적 에피소드를 찾아 만들 수 있었습니다. 신화에서부터 역사, 전설, 생태환경 등으로 유추할 수 있는 사실들입니다. 그러기에 70퍼센트는 사실적 근거를 바탕으로 하였고, 나머지 30퍼센트는 흥미를 위하여 픽션화한 단편들입니다. 시기와 내용도 다양하여, 연대를 제시하기 어려운 신화적 태고에서부터, 삼국사기에 존재하는 우산국 역사, 그리고 고려시대의 매향(埋香)을 둘러 싼 울릉도와 독도의 감동적 사랑의 이야기 등이 있습니다. 또 국토 관리가 어려워 울릉도와 독도에서 국민들을 뭍으로 철수시키던 15세기의 조선 판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 20세기 초 일본에서 비싸게 거래되었던 조선의 독도산 물개와 전복 채취권을 놓고 독도를 그들의 영토로 귀속시키려는 음모와 이에 대한 통쾌한 복수 등의 이야기가 바로 그것입니다. 이렇게 시기적으로 다양하고 내용상 연관성이 없는 작품들을 널리 알리고자 하는 뜻에서 생각해 낸 것이 옴니버스입니다. 독도라는 큰 주제 안에 서로 다른 단편들을 다룰 수 있는 양식이니까요. 금년 9월 21부터 23일까지 성남아트센터에서, 그리고 10월 26일과 27일 스위스 스칼라 바젤 극장에서, 10월 30일에는 독일 슈투트가르트의 팔라디움 테아터에서 공연하는 옴니버스 총체 뮤지컬 「3개의 독도이야기」는 이 6개의 에피소드 중에서 3개를 선발하여 공연하는 것으로, 나머지 3개의 에피소드는 제 인생의 또 다른 숙제로 남겨 놓게 되었습니다.
이 3개의 단편들을 오늘날 대표적이고 흥행하는 공연 양식으로, 그 이야기를 효과적으로 표현하는 차원에서, 이의 특성을 배가시키기 위해 각기 다른 양식을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제1화 「신들의 정원」이라는 한반도는 물론 울릉도, 독도, 제주도, 이어도 등의 도서까지 연결되는 신화 의 역동성을 시각화하는데 적절한 양식을 ‘댄스컬’로 보았습니다. 음악 위주의 극을 뮤지컬이라 하는 것에 대입시켜 20세기 후반에 나타나기 시작한 댄스컬이 가장 어울린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제2화는 “우산국 최후의 날”에 벌어지는 우해왕과 그의 죽은 왕비와의 사랑이야기입니다. 신라의 침공으로 나라의 패망과 죽음을 예견하면서도, 그 삶의 보람을 오로지 이미 죽은 왕비와의 사랑에 두는 인간미를 부각시킨 로맨스로 그 제목은 「마지막 세레나데」입니다.
제3화는 19세기와 20세기가 교차하던 그 어느 날, 일본의 각료 대신(大臣)의 집에서 벌어지는 이야기입니다. 대신은 나카이라는 수산업자를 기다리며 그의 애첩인 나에코에게 자신의 정력을 자랑하며 우쭐하는 장면에서부터 출발합니다. 특히 대한제국 황제나 쉽게 구할 수 있는 해구신을 자신의 지위로서 쉽게 얻을 수 있음을 뽐내며 그 효험에 대하여 장황설을 늘어놓고, 그 애첩도 갖은 교태를 부리며 대신의 사랑을 독차지하려는 천박스럽고 과장된 아부가 코믹하게 그려집니다. 어쨌든 그들은 본처의 복수로 모든 것을 잃게 되는데, 여기에는 나카이라는 실명의 역사적 인물이 등장합니다. 그는 독도에 있던 40,000마리의 물개를 멸종시킨 인물로 우리 생태계를 파괴시킨 장본인이기도 하지만, 그가 일본정부에 제출하여 아직도 남아 있는 독도에서의 어업권의 허가를 위한 청원서를 근거로 오늘날 일본인들은 독도가 그들의 땅이라는 주장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의외로 이것은 우리나라의 여타 물증보다도 국제법상의 효력을 발생하게 하여 우리를 긴장시키고 있습니다. 이 코믹오페라는 그와 같은 문서의 제작과정부터가 코믹이고, 이것을 근거로 억지 주장을 하는 것 또한 코믹이라는 생각에서 코믹오페라의 양식을 실현하게 되었습니다. 사족을 덧붙인다면, 우리에겐 국제법상 더 큰 효력을 가진 문건들이 있습니다. 바로 나카이 이전에 일본인들이 울릉도 독도에 와서 조업을 하고 세금을 조선에 냈다는 기록인데, 조선에 세금을 냈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움직일 수 없는 실 지배 영토의 증거가 됩니다.
박경우_최근 한일 양국이 독도문제로 첨예한 대립각을 세우는 양상입니다. 우리 정부 역시 과거와는 다른 차원에서 일본에 대응하고 있습니다. 이런 현실에서 단지 과거처럼 “독도는 우리 땅”이라 외치는 것이 아니라, 문화예술을 통한 독도의 실 지배를 전세계에 알리는 것은 또다른 차원의 선진 한국의 위상을 떨치는 것이란 확신이 듭니다. 이번 공연의 성공을 기원합니다.
이종구_감사합니다.
대담.글_ 박경우(음악평론가) 사진_ 김문기부장
작곡가 이종구
박경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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