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음악춘추

작곡가 김성태 선생(인물탐구) / 음악춘추 2012년 12월호

언제나 푸른바다~ 2012. 12. 15. 1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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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대담 | 인물탐구

작곡가 김성태 선생

 

작곡가 김성태 선생(1910년 11월 9일 ∼ 2012년 4월 21일)은 서울 광희동에서 태어나 경신중학교와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였다. 이 때까지는 독학으로 음악을 공부했으며, 연희전문학교에서 만난 현제명 선생의 영향으로 대학 졸업 후 일본으로 유학하여 도쿄 고등음악학원에서 작곡을 전공하였다.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일본에서 작곡을 공부한 선생은 귀국한 뒤 경성보육학교 음악주임을 시작으로 고려교향악단 지휘자를 맡으면서 우리나라 서양음악 발전에 공헌하였고, 현제명 선생과 서울대 예술대 음악부(서울대 음대의 전신)을 함께 설립한 후 2대 학장을 역임하였다. 1976년까지 서울대 음대 교수로 재직한 선생은 2007년에는 서울대 음대의 발전기금으로 1억 원을 기탁하기도 하였다.
한편 1943년 만주국에서 국책사업 차원에서 조직한 만주신경교향악단에 입단하여 영화  사랑과 원수 의 영화음악을 작곡하기도 했는데, 선생의 영화음악에의 관심은 이후로도 이어져 1960년에는 영화  흙 으로 아시아 영화제 최우수 영화음악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또한 한국방송윤리위원회 위원(1971), 한국문화예술진흥원 이사(1973), 예음문화재단 회장(1984), 대한민국예술원 원장(1993)을 지낸 선생은 문화훈장 모란장과 국민훈장 동백장을 서훈 받았으며, 대한민국예술원상, 3 1문화상, 5 16민족상도 수상한 바 있다. 작품으로는 「즐거운 우리집」을 비롯하여 「산유화」, 「동심초」, 「못잊어」, 「이별의 노래」 등의 가곡이 유명하다.

 

일시: 2012년 11월 15일(월) 오전 10시 30분
장소: 코스모스 악기 10층 
진행: 이용일(한국음악교육협회 명예회장)
패널: 김형주(한국음악평론가협의회 회장)
     이상만(음악평론가, 국제델픽위원회 명예위원)
     김기호(서울대 환경대학원 명예교수)
     정태봉(서울대 음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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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태 선생의 성장과정과 음악의 출발

 

이용일_ 이번 음악춘추 12월 호에서는 우리나라 서양음악이, 태동기에 제대로 뿌리내릴 수 있게 기반을 닦아주시고, 계속해서 작품 활동과 후학지도를 통해 음악계에 큰 공헌을 하신 김성태 선생님에 관한 추모좌담회를 진행하고자 합니다. 김성태 선생님을 생각하면 선생님의 가르침을 받은 제자 음악가로서는 이루 말할 수 없이 감사한 마음뿐인데요. 먼저 선생님의 아드님이신 김기호 교수님께서 부친의 성장과정에 대해서 말씀해 주시지요.

 

김기호_ 저도 사실 아버지의 성장과정에 대해서는 자식으로서 아는 것이 미약합니다. 가족관계에 한해 말씀드리자면, 아버지는 6남 6녀 중 둘째로 태어나셨습니다. 저희 할아버지께서는 매우 현실적인 분이셨기 때문에 아버지가 음악을 하시는 것을 권면(勸勉)하지 않으셨던 것으로 압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일본에서 유학하실 때는 어머니가 가지고 계셨던 패물을 다 팔아서 아버지를 물신양면으로 지원해 주셨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아버지도 그것에 대해 평생 고마워 하셨고요.

 

김형주_ 김성태 선생님의 성장과정은 대부분 많이 알려진 공적인 업적일 텐데요. 특히 성장과정에서는 선생님께서 음악을 처음 접하게 되신 교회와의 관계를 빼놓을 수가 없지요. 종교에 상당히 열성적이고 믿음을 가지고 성장하였지 않나 생각하는데요. 

 

김기호_ 사실 꼭 그렇지 만은 않은 것이 저도 의아했던 점이기도 한데요. 광희동 교회에 다니시면서 음악을 처음으로 시작하시고, 어머니도 만나셨고, 그 곳에서 결혼식도 올리시는 등 하나님의 축복을 많이 받으셨는데 결혼하신 후에는 교회를 다니지 않으셨어요. 그랬기 때문에 저도 대학교 때까지는 신앙생활을 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교회를 다니게 된 것은 제 아내의 집이 독실한 기독교였고, 장인어른께서 “크리스찬이 아니면 결혼을 시킬 수 없다”고 하셔서 미국에서 공부할 때 처음으로 교회를 다니게 되었지요. 그 후에 제가 귀국하여 어머니, 아버지를 모시고 연동교회를 나가기 시작했고, 아버지께서는 마지막 신앙생활을 연동교회에서 마치셨습니다.

 

이상만_ 김성태 선생님의 종교관에 대해 한 말씀드리자면, 저는 지도 교수님으로서 김성태 선생님께 7년을 배웠습니다. 학위도 우연하게 선생님께서 학장을 역임하실 때 취득하였고요. 이렇듯 여러 부분으로 미루어 볼 때 저만큼 철저하게 김성태 선생님의 가르침을 받은 사람은 드물 것이라 생각하는데요. 선생님은 저에게 음악만 가르치지 않으시고, 많은 서적들을 읽으라고 추천해 주시곤 하셨습니다. 예를 들어 음악과 관계된 책 가운데는 독일의 파울 베커라든가, 일본인이 지은 음악사 책을 추천하셨는데, 하루는 “막스 웨버라는 사람 알아?”라고 물으시더라고요. 그래서 잘 모른다고 대답했더니 그 사람이 쓴 『크리스찬의 신앙과 윤리』라는 책을 꼭 읽어보라고 권하셨지요. 이 책은 크리스찬의 본이 되는 명저입니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볼 때 김성태 선생님께서 신앙생활은 착실히 하지 않으셨지만 크리스찬의 윤리관이 그분의 삶 속에 철저하게 녹아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또한 남에게 결코 신세지지 않으시고 베풀기를 좋아하신 선생님의 성품 또한 크리스찬 정신이 몸과 마음에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라는 추측도 해봅니다.

 

정태봉_ 김성태 선생님의 작품 중에 교회와 관계된 작품이 많지 않은데, 만약에 계속해서 교회를 다니셨다면 교회음악도 많이 남기셨을 것이라는 생각도 드네요.

 

김기호_ 그 점에 대해서도 아쉬운 것이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기 5년 전쯤 제가 아버지께 찬송가 작곡을 요청한 적이 있습니다. 이성희 목사님께서 작사를 하셨는데, 읽기에 좋은 시와 음악으로 사용할 수 있는 가사가 다르다 보니 아버지께서 시를 보시고는 이 가사로는 작곡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지요. 그래서 목사님께 가사를 고쳐 주셨으면 한다고 했더니, 이건 하나님께 기도하고 쓴 것이라 고칠 수 없다고 하셔서 안타깝게 성사되지 못한 적이 있습니다.

 

이용일_ 그럼 일단은 음악을 시작한 것은 교회에서부터였고, 중간에 한동안 교회를 떠나있으셨던 것이네요. 그럼 이상만 선생님께서 김성태 선생님의 성장과정에 대해서 아시는 바가 있으시다면 덧붙여서 말씀해 주시지요.

 

이상만_ 네. 제가 추가하여 말씀드리자면, 김성태 선생님께서 태어나신 곳은 서울 중구 광희동 1가 88번지입니다. 태어나신 날이 1910년 11월 9일인데 우연하게도 11월 달에 맞추어서 좌담회를 하게 되었네요. 그리고 몇 살 때인지는 모르지만 선생님께서는 광희동에서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이문리로 이사를 하셔서 그 곳에서 성장하셨습니다. 그 때 이문리에 이문동 교회가 있었는데, 그 교회의 주일학교에 다니시며 음악을 접하셨지요. 또한 초등학교는 동대문 초등학교를 다니셨고, 그 뒤에 경신학교에 입학하셨는데, 아까 김기호 교수님께서 연동교회에서 마지막 신앙생활을 하셨다고 말씀해 주셨는데, 연동교회가 바로 경신학교를 세운 교회입니다. 그 당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학교가 배재학당인데, 그 다음에 세워진 학교가 경신학교였지요. 배재학당과 거의 1, 2년 차이로 생겨난 학교인데, 배재학당은 감리교 계통의 학교이고, 경신학교는 유일한 장로교 계통의 학교였습니다. 또한 경신학교는 우리나라 축구의 명문이었는데, 김성태 선생님께서는 경신학교의 축구 장학생이나 마찬가지이셨지요. 그래서인지 체격도 아주 건장하셨습니다. 어렸을 때 집안 환경도 그리 어렵지 않으셨고요.

 

김기호_ 네. 동대문구 이문동에 있던 교회가 저의 증조할아버지께서 세우신 것이었고, 그만큼 부유하셨지요.

 

이상만_ 또한 1928년 현제명 선생님께서 연희전문학교에 재직하실 때에는 연희 전문학교에 음악과가 없었습니다. 음악 전공이 아니라 평균 80점이 넘는 학생들을 선별하여 음악부에 넣어서 과외활동을 시킨 것이지요. 과외활동으로는 합창, 브라스 밴드, 관현악합주 이 세 가지 활동을 했습니다. 김성태 선생님 또한 이러한 과외활동을 통해 정규 음악대학은 아니었지만 거의 그와 흡사한 음악적인 훈련을 받게 되셨습니다. 연희전문학교에서는 바이올린을 전공을 하여 관현악단의 일원으로 참여를 하셨지요.

 

내가 기억하는 김성태 선생

 

이용일_ 제가 기억하는 김성태 선생님은 언제나 빈틈이 없으신 분이셨는데, 곁에서 지켜본 선생님들께서는 어떠한 분으로 기억하시나요?

 

김형주_ 고지식할 정도로 정직하고 꼼꼼하신 분이셨습니다. 그러한 와중에서도 성격이 원만하고 정의감이 뛰어나 대인관계 또한 좋으셨지요. 마음은 맑고 조금이라도 흐린 대목이 없으셨습니다.

 

이상만_ 김성태 선생님께서 연희전문학교에 다니실 때 상과에 적을 두신 것을 보면 어느 한편으로는 실질적인 면도 갖추신 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선생님께서는 광주학생사건이 일어났을 때 항일운동에 가담하셨습니다. 그로 인해 경신중학교에서 퇴학을 당하셨고요. 그렇다 보니 할 수 없이 일본으로 건너가셔서 경도 양양중학교를 졸업하셨지요. 일제강점기에는 그 누구보다 우리나라 독립에 대한 열망을 마음 가득 가지고 계셨던 분이기도 하셨습니다.

 

김기호_ 저는 잘 모르고 있었던 일인데, 얼마 전 경신중학교의 교장을 지내셨던 고춘섭 장로님께서 아버지가 경신중학교에서 퇴학을 당하셨는데, 1969년에 명예 졸업장을 받으셨다고 설명해 주시더라고요. 경신고등학교의 역사 전시관에, 그 졸업장을 비치하고 싶다고 말씀하셔서 기증하려 합니다.  

 

이상만_ 명예 졸업장을 수여했던 분이 정인용 교장선생님이셨는데, 그분은 저와 경기여고에서 교사생활을 같이 했습니다. 김성태 선생님께 명예 졸업장을 드리는 일도 정인용 교장 선생님과 제가 마음이 통하여 추진하였던 일입니다.

 

이용일_ 저 또한 김성태 선생님께서 경신중학교를 퇴학당하시고 일본으로 건너가셨다는 것은 처음 알게 되었는데요. 선생님께서는 제가 상상하던 것 이상으로 민족을 사랑하시고 하나님께 순종하셨던 것 같습니다. 정태봉 선생님이 본 김성태 선생님은 어떤 분이셨습니까?

 

정태봉_ 저는 김성태 선생님께서 환갑이 지나셨을 때 서울대에 입학을 하여 처음 만나 뵙게 되었습니다. 그 이전에는 선생님을 뵙지 못하였지만 선생님의 젊은 시절을 유추해 볼 수 있었던 것이, 작년 서울대 음대의 역사 자료관을 만드는 과정에서 선생님의 자필악보를 학교에 보관하는 일이 관하여 김기호 교수님과 상의했었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의 많은 자필악보를 직접 보게 되었는데, 그 자필들이 그야말로 인쇄한 것 같이 너무나 정갈하여 깜짝 놀랐습니다. 이를 통해 선생님의 성격이 굉장히 세심하고 꼼꼼하신 분이셨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습니다. 젊으셨을 때 아주 섬세하면서도 강단이 있는 분이셨을 것이라 생각을 했습니다.

 

이상만_ 김성태 선생님께서는 모든 것을 완벽하게 하지 않으면 잠을 못 주무시는 완벽주의자셨습니다. 심지어 걸음까지도 완벽하게 걸으셨고, 젊었을 때는 가르마도 딱 가운데로 타셨지요. 그렇지만 그런 면만 있는 것은 아니고 사교댄스를 또 기가 막히게 잘 추셨습니다(웃음). 건강관리에도 아주 철저하셔서, 선생님의 주머니 속에는 항상 약이 몇 가지씩 들어있었는데, 그것이 아마 장수하신 비결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보게 됩니다.

 

김성태 선생의 음악세계

 

이용일_ 그럼 다음으로는 김성태 선생님의 음악세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어 보고자 합니다. 김형주 선생님께서 먼저 말씀해 주시지요.

 

김형주_ 한마디로 김성태 선생님은 우리나라 서양음악 근대사의 선구자 역할을 하신 분이시지요. 오늘날의 한국 클래식 음악계는 김 선생님이 살아 계실 때 활동했던 분들을 통해 이루어진 것입니다. 김성태 선생님은 도입하는 과정부터 정착시키는 과정까지 과도기의 기초 작업을 하신 분으로서 선구자적이면서도 개척자적인 역할을 하셨다고 봅니다.

 

이상만_ 김성태 선생님의 음악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서양음악을 수용하되 한국적으로 수용했다는 것입니다. 선생님께서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신 후에 발표하신 첫 번째 작품집이 동요집인데, 이 또한 우리나라 민요를 기초로 한 것입니다. 1925년에 개설된 이화여자전문학교 음악부의 선교사들이 우리나라 민요에 대하여 관심을 갖고 학생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하였습니다. 또한 연동교회를 창설하고, 한영사전을 최초로 만든 게일 목사님께서 한국 문화, 한국어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가지고 선교사로서는 최초로 한국 음악가들을 교회로 초청하여 연주를 하게 하였습니다. 그 당시 교회로서는 혁명적인 일이었는데, 이러한 일들과 연관하여 당시 민요를 주제로 작품을 쓴다는 것은 혁신적인 시도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김성태 선생님의 음악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특징은 서양음악의 기법을 도입하되 한국적인 정서를 바탕으로 하는 작품을 본격적으로 쓰셨다는 것입니다.

 

김형주_ 우리나라 음악의 근대사는 단적으로 말하면 가곡의 역사입니다. 서양 음악의 도입이 찬송가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초창기에는 기악분야보다는 가곡이 주도를 해왔는데, 당시 애국가, 학도가 등 신문명을 받아들이는 작품은 많이 나왔지만 형식은 찬송가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후에 김성태 선생님이 예술가곡을 통해 새로운 형식을 도입하고, 우리 정서에 맞는 음악의 방향으로 가곡세계를 만들어 가신 것이지요. 또한 현악 4중주, 현악 합주를 위한 모음곡, 조곡 등을 발표하시면서 가곡 분야를 넘어 새로운 기악 분야까지도 개척하셨고, 광범위하게 작품 세계를 열어 가셨습니다.

 

이상만_ 김형주 선생님의 말씀 가운데 집고 넘어가야 할 것은 예술가곡이라는 용어를 처음 도입하신 분이 김성태 선생님이라는 사실입니다. 1936년에 정지용 시에 의한 바다라는 작품에서 처음으로 예술가곡이라는 말을 사용하셨지요. 상당히 중요한 것입니다.

 

정태봉_ 저는 까마득한 후학의 입장으로 김성태 선생님의 작품을 들여다봅니다. 우리나라의 작곡 1세대의 대표자가 김성태 선생님이신데, 대표자로서의 역할뿐만 아니라 2세대를 끌어내는 역할도 충분히 하셨다고 봅니다. 또한 선생님의 작품, 특히 정서적인 면이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산유화」, 「동심초」, 「꿈길」 등 대표적인 가곡들을 살펴보면 동시대 작곡했던 분들의 것들과는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상만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시피 한국적인 정서가 기본적으로 선생님의 작품 세계에 깊이 깔려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저 역시 그 자체만으로도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 당시에는 가곡이 많이 쏟아져 나올 때인데, 그 많은 가곡들 가운데 김성태 선생님의 것은 무엇인가 다르다는 점이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이용일_ 네. 맞습니다. 쉽게 말해 선생님의 작품을 보면 공부를 아주 많이 하신 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지요.

 

이상만_ 김성태 선생님의 작품세계에 대해 우리 제자들은 한국의 브람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신고전적인 작품이었고, 철저했지요. 그러나 말씀드린 바와 같이 문을 꽉 닫으신 분은 아닙니다. 저는 김성태 선생님과 개인적으로도 가까운 사이였습니다만 7년 동안 저의 전공실기 점수로는 B학점밖에 주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다가 마지막 학기가 되어 나를 닮지 말고 폭넓게 작품을 써봐라.고 말씀하셔서 마지막에는 쇼스타코비치풍으로 작품을 썼습니다. 그 작품을 보시고는 잘 썼어. 공부 많이 했구나.라고 하시면서 A학점을 주시더라고요.

 

정태봉_ 1973년에 김성태 선생님께 강의를 들었는데, 환갑이 지난 선생님께서 현대음악 기법을 강의하셨습니다. 저 역시도 그러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김성태 선생님과 현대음악은 연결이 안 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이후에 생각해 보니 김성태 선생님께서 현대음악을 무조건 싫어하지는 않으셨던 것 같습니다. 선생님께서 그 길로 들어서지 않으신 것은 ‘나의 기질이 무엇인가’, ‘내 음악의 방향이 무엇인가’라는 자기성찰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 강의에서는 힌데미트를 다루셨는데, 힌데미트를 가르칠 수 있는 지식과 정보를 가지고 계시면서도 예술가로서의 신념 때문에 현대음악을 작곡하지 않으셨던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용일_ 제가 생각할 때는 앞에서 언급되었다시피 김성태 선생님의 음악적 기반에는 교회음악이 깔려 있었지요. 선생님께서 표현하지 않으셔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평생 선생님의 마음속에는 찬송가적인 요소가 가득했기 때문에 많은 지식을 갖고 계셨음에도 다른 길로 들어서지 않으셨던 게 아닐까요.

 

김기호_ 저는 조금 다른 측면에서 보는데, 아버지께서 연세가 드신 후에는 대학에서 행정을 맡으셨기 때문에 음악가로서의 집중력이 조금 떨어지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김형주_ 김성태 선생님께서 현대음악에 관심이 없으셨던 것은 아닙니다. 개인 레슨을 하실 때도 현대 기법, 예를 들면 쇤베르크의 12음기법을 예로 들어서 설명해 주시곤 했지요. 저는 선생님께서 현대 음악을 작곡하지 않은 까닭을 언제나 한국 국민들의 정서를 기본으로 그와 동떨어져서는 안 된다는 신념을 바탕에 두셨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이용일_ 중요한 말씀이네요. 「동심초」 같은 곡도 저희가 볼 때는 요즘 말로 컴퓨터 같은 사람에게서 어떻게 이렇게 애처로운 노래가 나왔을까 싶을 정도인데, 언제나 그런 정서를 바탕에 두셨기 때문이겠군요.

 

정태봉_ 김성태 선생님의 모습을 떠올리거나 축구를 하신 경력을 보면 그런 화성이나 멜로디를 기대할 수 없는데, 아름답다고 밖에 표현할 수 없는 선율적, 화성적 영감을 선천적으로도 타고나신 분이라 생각됩니다. 운동을 할지라도 그런 기질은 없어지는 것이 아니니까요.

 

이용일_ 집안에 그런 흐름이 있었습니까?

 

김기호_ 아무래도 가계에 예술가적인 기질이 조금은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저 또한 건축을 하고 있는데, 건축 또한 Frozen Music라 불릴 정도로 음악과 깊은 상관관계를 가지니까요. 그리고 축구도 일종의 리듬적인 요소가 필요한 운동이기 때문에 오히려 더 음악에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김형주_ 김성태 선생님은 한마디로 운동으로 날리셨지요(웃음). 경신중학교 때부터 연희전문학교를 다니실 때까지도 축구를 하셨는데, 제가 볼 때는 축구가 선생님의 정의감과 빈틈없는 정신을 기르고, 직선적이고 솔직한 성격을 형성하는데도 도움이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김기호_ 또한 축구는 다른 선수들과의 호흡이 중요하기 때문에 아버지께서 대인관계를 원만하게 맺으시는 것에도 영향을 끼쳤겠지요.

 

김형주_ 선생님의 음악세계에서 또 한 가지 업적은 해방직후의 영화음악 분야에서입니다. 이전까지는 영화음악을 기존에 있던 클래식 음악을 짜 맞추어 사용했는데, 최초로 영화음악을 창작하여 영화 음악의 새로운 길을 개척하셨습니다.

 

정태봉_ 네. 해방 후에 유명했던 영화들의 음악을 거의 도맡아 하셨고, 일본 동경에서 열린  제7회 아시아영화제에서는 영화 《흙》으로 최우수 영화음악상도 수상하셨지요.

 

김성태 선생의 교육관

 

이용일_ 김성태 선생님이 직접 지도하신 작곡가가 제가 알기로는 정회갑, 김달성, 이성재, 최영섭 선생님 이렇게 네 분이시고, 지휘로 바꾼 분이 홍연택, 이남수, 김만복 선생님이 있으신데요. 제가 정회갑 선생님께 작곡을 배웠는데, 앞에서 정태봉 선생이 김성태 선생님의 자필악보가 마치 인쇄한 것 같다고 말씀하신 것처럼 저 또한 정희갑 선생님에게 연필 깎는 것부터 인쇄판 박듯이 악보를 그리는 것을 배웠거든요. 저는 정희갑 선생님께서 시작한 것이라 생각했었는데, 그것이 김성태 선생님으로부터 내려온 것이었네요(웃음). 선생님의 교육관은 아주 엄격하셨나요? 제 기억으로는 보통 교수님들의 경우 수업 중에 농담 한 두 마디씩은 하시는 데 반해 김성태 선생님의 경우에는 하실 말씀만 딱 하시고 강의를 마치면 곧바로 나가시곤 하셨는데, 어떠셨나요?

 

이상만_ 교육관을 얘기하기 전에 교육자로서의 생활을 먼저 더듬어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김성태 선생님이 학교를 일본에서 졸업하고 귀국하셨을 때에 선생님을 경성보육학교의 교사로 채용한 분이 홍난파 선생님이십니다. 그러면서 우리나라 최초의 음악가인 홍난파 선생님과 인연을 맺게 되셨지요. 그 후에 보성전문학교에 교양과목 강사로 취임하셨고요. 그리고  홍난파 선생님과의 인연으로 경성방송국(KBS 전신) 합창부의 초대 지휘자로 활동하셨고, 해방 후에 현제명 선생님께서 고려교향악단과 경성음악전문학교(서울대 음대 전신)를 만드셨는데, 그 때 경성음악전문학교의 초대 교무과장이 바로 김성태 선생님이십니다. 그렇기에 서울대 음대는 솔직히 말씀 드려서 현제명 선생님과 김성태 선생님의 합작입니다. 또한 고려교향악단도 2대 때에는 김성태 선생님이 지휘를 하셨고, 그 뒤에 고려교향악단이 해산이 되고 만들어진 서울교향악단의 첫 번째 연주도 김성태 선생님이 지휘를 하셨습니다. 이렇게 개척자적인 교육관을 가지고 계셨고, 제자들에게는 포용적이셨지만 작은 과실도 절대로 용납하지 않는 철저함도 지니고 계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선생님의 교육관의 중요한 지표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김형주_ 김성태 선생님의 업적 중에서 작곡 다음으로 가장 영향력이 컸던 것이 교육입니다. 선생님께서 처음 음악 주임으로 부임하신 경성보육학교는 유치원 교사를 양성하는 학교였는데, 당시 음악의 생산지라 할 정도로 해방 전부터 해방 후까지 우리나라 음악계의 중심 역할을 했습니다.

 

김기호_ 저희 어머니께서도 경성보육학교를 다니셨습니다.

 

이용일_ 이상만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철저하면서도 포용적이었다는 말씀에 동의하는 것이, 제가 미국 유학을 가려고 음악대학 학장님의 추천서를 받으려고 교무과에 신청을 하였습니다. 영어 선생님이셨던 박시인 선생님께서 제 추천서를 들고 학장실에 가시더니 얼굴이 벌겋게 되어서 나오셔서는 “자네 군대에서 학교 다녔잖아. 학장님이 자네가 어렵게 학교 다닌 것은 생각하지 않으시고 전공만 생각하신다.”고 하시더라고요. 제가 그래서 학장실에 들어갔어요. 들어가서는 “저 미국유학 안가겠습니다. 안 가고 실력 있다는 것을 보여드리기 위해 공부하겠습니다.”라고 말씀을 드리고 나왔지요. 그리고 열심히 일본어와 국사를 공부하여 얼마 뒤에 있었던 일본 유학 심의에 제가 음대출신으로는 처음으로 합격을 하게 되었습니다. 합격하고 나니까 저를 부르시더라고요. 그 때는 저를 인정해 주시면서 “자네, 학교 다닐 때 공부는 잘했는데 작곡은 못했잖아. 자네 음악교육으로 유학 간다며. 공부 잘하고 와서 우리나라에 음악교육 뿌리 한 번 내려봐.”라는 격려의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일본 유학을 다녀왔는데, 제가 선생님께 대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저를 기억하고 계시다가 “영남대에 가서 함께 학교를 창설할 수 있겠는가?”라고 물으셨지요. 그러한 일이 있은 후에 저는 선생님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을 하나하나 다 기억하셨고, 엄격하고 무관심하신 것 같으면서도 제자들을 모두 포용하는 분이라는 것을 느끼게 되었지요.”  


김성태 선생이 음악계에 미친 영향

 

김형주_ 저 또한 이상만 선생님의 말씀에 덧붙이자면, 해방 직후 음악과는 있었지만 독립된 전문적인 교육기관은 없었습니다. 그 때 최초로 현제명 박사와 힘을 합쳐서 설립한 것이 경성음악학교입니다. 최초의 음악 전문 교육기관이 생긴 것이지요. 저도 경성음악학교 때 학교에 입학하였고요. 그렇게 경성음악학교가 설립되고 난 뒤 마침 서울대가 처음으로 공식적인 국립학교로 전환되면서 각 전문학교들이 모인 종합학교가 되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김성태 선생님과 현제명 박사님이 경성음악학교가 종합대학 속에 포함될 수 있도록 노력하셨지요. 그 과정의 주요 업무를 김성태 선생님이 맡아서 하셨습니다.

 

이용일_ 그렇지요. 현제명 선생님께서는 주로 외무를 담당하시고 내무, 실무는 김성태 선생님이 다 관여하셨지요.

 

이상만_ 경성음악전문학교가 서울대 테두리 안에 들어간 것은 혁명적인 일입니다. 이는 어떻게 보면 시대를 올바르게 보시고 한국음악의 장래를 걱정하셨던 충정이 선구자적인 시각과 안목을 가져다 준 것이라 생각합니다.

 

정태봉_ 저는 서울대 음대의 부학장, 학장직을 여러 해 동안 맡았었는데, 음악대학 초창기부터의 커리큘럼에 대해 자세히 파악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김성태 선생님이 교무과장을 맡으실 때 하나하나 만드신 교육과정이 지금까지 중대한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었지요, 처음부터 교육과정을 주도면실하게 만드셨기 때문에 지금까지 그 줄기가 잘 이어져 올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시대가 바뀌면서 조금씩 보완되고 있지만, 김성태 선생님께서 전체를 뒤엎어야할 경우가 발생하지 않도록 장치를 다 마련해 놓으셨더라고요. 현재 서울대 음대의 커리큘럼이나 여러 제도적 장치들이 우리나라 음악 교육기관들에게 큰 영향을 끼치고 있는데, 이 것들이 대부분 김성태 선생의 손끝에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김형주_ 네. 김성태 선생님이 교무과장을 맡으시면서 학교 운영 정책, 교과과정 모두를 새로 다 만드셨습니다. 또한 이렇게 제정된 것들을 새롭게 생겨나기 시작한 사립대학 대부분이 모방해 갔어요. 결국 우리나라 음악 전문 교육기관의 기초를 만드신 분이 김성태 선생님이라는 것이지요.

 

이상만_ 한양대 음대가 개설된 것도 사실 현제명 선생님과 김성태 선생님의 업적 중 하나입니다. 한양대 설립자인 김연준 선생님은 연희전문학교 시절 같은 음악부에서 활동을 하신 분입니다. 김연준 선생님은 “한양대는 서울대 음대의 분교이다.”라는 말씀도 하셨지요.

 

이용일_ 김성태 선생님은 언제 미국에 다녀오셨지요?

 

김기호_ 1955년도에 가셨고 1956년에 인디애나 주립대학교 대학원을 수료하셨습니다.

 

이용일_ 그 당시에는 우리나라 실정과 맞지 않는 미국의 교과과정을 그대로 따와서 사용하다가 또 바꿔버리곤 했었는데, 김성태 선생님은 미국에서 공부하고 돌아오신 후 우리나라 실정에 맞도록 수정하여 보완하셨지요. 그렇게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정착된 교과과정이 지금까지도 유지될 수 있었다는 것에 음악가들 모두 감사한 마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이상만_ 서울대 음대에 김성태, 현제명 선생님이 안 계셨다면 오늘날 한국음악의 역사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특히 1959년에 국악과가 생긴 것도 서울대 음대로서는 아주 특별한 일입니다. 그 공로자가 이혜구 선생님이지만, 이혜구 선생님과 김성태 선생님은 개인적으로 아주 돈독하셨습니다. 그리고 국악악회가 재건될 적에 초대이사 직을 역임하셨습니다. 그래서 음대 내에 국악과를 탄생시킬 수 있었던 것이고요. 

 

이용일_ 이만큼 서울대 음대가 발전할 수 있게 초석을 닦아 주신 분이 김성태 선생님입니다, 지금도 여기 저기 서울대 음대 출신들이 많이 자리하고 있는데, 그들이 김성태 선생님을 존경하는 것은 욕심 없이 그저 서울대 음대를 발전시키기 위해 헌신해 오신 그 마음을 알기 때문이 아닐까요.

 

김형주_ 다시 한 번 정리해 봅시다. 지금까지 작곡계에 행한 선구자적인 역할, 창작 영화음악 개척, 그리고 교육계에 끼친 영향 등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우리나라 음악 정책에 끼친 영향 역시 크십니다. 해방 후에 특히 미국 군정을 거쳐서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정책의 기초를 꾸리던 시기에 정부에서 김성태 선생님에게 서울시 문화위원, 교육과정 심의위원, 문교부 학술 연구위원, 문교부 교육과정 연구위원 등을 위촉하여 문화부의 정책을 수립하고자 하였습니다.

 

이상만_ 또한 문화예술계의 지도자이셨지요. 국립극장을 세울 때, 예술원을 세울 때, 한국 문화 예술진흥원을 세울 때, 모두 주도적인 역할을 하셨고, 음악가로서는 최초로 예술원 회장을 지내셨습니다. 인품이나 인격적인 면으로 모든 문화예술계를 충분히 아우를 수 있는 큰 지도자라는 사실 또한 높이 평가되어야 합니다.

 

이용일_ 김성태 선생님의 1세대 제자분들이 워낙 똑똑하셨는데, 위에 말씀드린 네 분 이후의 활동하시는 제자 분들은 안 계십니까?

 

이상만_ 윤양석, 김현중, 서경선 등 활발한 활동을 하셨던 분들이 계시지요.

 

이용일_ 네. 오늘날 우리나라의 서양음악이 이만큼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김성태 선생님의 희생과 애정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습니다. 아무쪼록 선생님의 업적이 길이 기억되어지기를 바라며, 그 기억들이 우리나라 음악발전에 기여하기를 소망합니다.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하시어 김성태 선생님의 업적이 헛되지 않고 꽃피울 수 있도록 말씀을 나누어주시고 자료를 제공해 주신 네 분에게 감사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정리_ 박진하 기자 / 사진_ 김문기 부장

 

 

 

  김기호(서울대 환경대학원 명예교수)


 

김형주(한국음악평론가협의회 회장)

 

이상만(음악평론가, 국제델픽위원회 명예위원)


 

정태봉(서울대 음대 교수)

 

진행: 이용일(한국음악교육협회 명예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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