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음악춘추

바이올리니스트 김남윤 / 음악춘추 2012년 12월호

언제나 푸른바다~ 2012. 12. 15. 1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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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올리니스트 김남윤
‘가르치는 일은 중요하고 소중한 것’

 

  세상에는 두 타입의 사람이 존재한다. 여러 면을 폭넓게 갖췄지만 겸허한 사람, 또다른 유형은 마치 빈 수레처럼 요란한 사람이다. 평생을 스스로 선택한 길인 바이올린과 더불어 함께 하며 연주와 교육으로 일관된 삶을 살아 온 바이올리니스트 김남윤은 전자에 해당하는 성품을 드러내는 인상을 진솔하고 격의 없는 대화를 통해 느끼게 된다. 요즘 대부분의 음악도들은 솔리스트의 길을 지향한다. 그러나 그 꿈은 음악계에 첫발을 내딛는 순간 현실적으로 넘기 힘든 거대한 장벽에 갇힘을 실감하고 막막함을 느끼게 된다. 이 시대의 그릇된 풍조 가운데 하나가 스타성만을 요구하고 그 점만이 크게 부각되는 것이다. 그래서 단 몇 번의 시도와 도전을 끝으로 소중한 꿈을 접는 젊은이와 청소년들이 많은 세태다. 김남윤은 이런 현상이 ‘인내심’의 부족에서 기인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는 기회 있을 때마다 학생들에게 ‘인내’를 각인시키곤 한다.


  그는 자신을 소개할 때마다 ‘바이올리니스트 김남윤’이 아닌 ‘한예종에서 바이올린을 가르치는 김남윤’이라고 말한다. 그는 일찍이 최상위권의 국내 및 해외 콩쿠르를 석권하고 다양한 연주 활동을 펼쳐 명성을 드러낸 명실공히 바이올리니스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대변할 음악교육자라는 타이틀에 확실한 명분을 갖고 이를 선호한다. 물론 현재도 연주와 교육을 병행하지만, 그의 남다른 바이올린의 교육 철학과 신념을 엿볼 수 있다. 마치 그가 줄리어드에서 사사했던 저명한 바이올린 교육자 이반 갈라미언 교수와 같은 인생을 살려는 의지처럼 보이기도 한다. 물론 전문적인 솔리스트로서 길을 지향하지 않은 것에 대한 회한이 없지는 않다고 하면서도 자신이 선택한 길에 대한 후회는 크게 갖지 않는 확고한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찬바람이 세차게 불어 옷깃을 여미게 하던 지난 19일 한국예술종합학교 3층에 소재한 그의 연구실을 찾았다. 십여 분 전쯤 혹시 레슨이 있을지 몰라 조심스레 노크를 했다. 수업에 방해를 주지 않기 위해서다. 다행히 그 혼자 책을 읽다가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평소처럼 화장기 없는 민얼굴에 소박한 옷차림이었다. 오히려 이에 대해 미안하다고 말하나, 그의 꾸밈없는 자태와 표정이 오히려 친밀감을 드러내 편안한 대화의 장을 마련할 수 있었다.

 

▶먼저 가정환경과 어떻게 바이올린을 전공하게 되었는지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김남윤_ 저의 아버지께서는 금융계에 종사하셨습니다. 어머니는 4명의 자식을 돌보는 가정주부셨습니다. 저는 아버지께서 직업특성상 전근이 잦아 당시 임지였던 전주에서 출생하였고, 형제는 오빠 두 분에 언니 한 분이 계십니다. 막내지만 나이 차가 많은 막내였습니다. 바이올린을 전공하게 된 것은 언니(서울예고 1회 졸업생에 서울대 음대에서 피아노를 전공)랑 함께 우연히 챔버 오케스트라 공연을 관람하게 되었는데, 그 때 바이올린에 대한 인상이 깊었습니다. 그래서 대전에서 재직하셨던 아버지께서 서울로 출장을 가실 때 바이올린을 사달라고 부탁해 제가 7살 되던 해 생일날 선물로 받았습니다. 후일 서울로 이사하고 나서 집에 두었던 바이올린을 배우고 싶다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어머니를 졸라 언니의 친구였던 원희경 선생(당시 서울대 음대 재학)께 배우기 시작했고, 후에 그가 사사했던 당시 서울대 교수 겸 KBS교향악단 악장을 지내셨던 작고하신 최용호 선생님을 사사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원해서 시작했지만 이것이 제 인생을 힘들게 했죠(웃음). 최 선생님께서는 어머니께 제가 진도도 빠르고 재능이 있다고 말씀하셔서 바이올린을 정식으로 시작한 초등학교 4학년부터 1년 만에 이화·경향 콩쿠르에 시험삼아 내 보내셨습니다. 당시 저는 그 세계에 대해 심각한 생각도, 콩쿠르에 대한 개념도, 바이올린에 대해서도 잘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정경화 씨는 유명했었지요. 그런데 제가 정경화 씨의 1등(특상) 다음으로 입상(2등)을 했습니다. 발을 잘못 들여놓았는지 잘 들여놓았는지 모르겠지만, 그 때부터 어머니의 열성이 고조되기 시작하였습니다. 공부도 잘해야 한다는 어머니의 성화 때문에 부담이 가중되어 때로 연습하기 싫어서 바이올린을 왜 선택했던가 회의를 가진 적도 있었습니다(웃음). 그 결과 다음 해에는 특상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 팔자가 이렇게 되었습니다(웃음). 그 후 중 3학년 때 동아 콩쿠르에 나가 1등을 수상하였습니다. 당시 정경화 씨, 김영욱  씨, 그리고 저보다 연하인 강동석 씨는 비교적 일찍 해외 유학길에 올랐지만, 저는 막내여서 어리고 몸이 약했고, 거기에다 부모님이 제 유학길에 보호자로 동행할 수 없는 상황이어서 서울예고를 마치고 줄리어드로 유학하게 되었는데, 마침 언니가 뉴욕에 있어서 6개월 동안은 의지가 되었습니다.
   
▶유학 전까지 국내에서 사사했던 선생님들은 어떤 분들이셨습니까?
김남윤_ 앞서 말씀드린 최용호 선생님을 비롯해 김용윤, 백운창 선생님들께서 자주 봐주셨습니다. 그러나 사춘기 시절인 고등학교 때 최용호 선생님께서 작고하셔서 굉장히 마음의 상처가 컸습니다. 이의 여파로 6개월 가량 바이올린을 중단했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저희 집안에서도 선생님을 잃은 슬픔이 컸습니다. 이후 양해엽 선생님께 1년 6개월 정도 배우다 유학길에 오른 것입니다.

 

▶삶을 살아오며 어떤 때에 자신의 변화를 실감하는지요?
김남윤_ 저는 어려서부터 바이올린에만 주력해 왔습니다. 어머니의 보살핌 속에 성장했기 때문에 그 당시엔 문구점에서 내가 돈을 지불하고 연필을 직접 사보는 것이 소원일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음악계 활동을 펼치는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저에 대해 성격이 화통하고, 카리스마가 있고, 심지어는 남자 같다는 말들을 듣곤 하였습니다. 그러나 저를 잘 아는 지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는 겁이 많은 전형적인 A형 타입의 여성입니다. 그러나 학생들을 오래 가르치다 보니 목소리도 커지고, 특히 남학생들을 가르칠 때는 거친 말도 거침없이 내 뱉는 선생이 되었습니다(웃음).
 
▶유학생활 중 어려움은 어떤 것들이었습니까?
김남윤_ 혼자서 생활해야 하는 것에 두려움이 많았습니다. 컴컴한 아파트에 들어갈 때마다 무서움과 외로움을 많이 느꼈습니다. 그러나 사실상 공부하고, 집안 일하고, 아르바이트하느라 외로움을 느낄 시간조차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유학생활 중 슬럼프도 많았고, 내 정신력이 극도록 약화될 때도 없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어머니 교육관이 좌절감에 절대 오래 사로잡히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셔서 그 때문에 훌훌 털어버리고 다음 것을 생각하고 행동해야 했습니다. 이 점을 학생들에게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일찍부터 교육계에서 활동하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
김남윤_ 제가 만 27세 될 무렵, 저희 부모님을 통해 경희대학교에서 교수로 와 달라는 요청이 들어왔습니다. 부모님께서는 당신들이 점점 나이가 들어가니 귀국해서 함께 살았으면 좋겠다는 말씀이 있으셨고, 저 역시 연주여행 스케줄에 따라 떠돌며 여기 저기 호텔을 전전하는 생활에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렇지만 막상 귀국을 하려니 ‘한국에 들어가면 끝’이란 생각에 속이 많이 상하기도 했었습니다. 그러나 귀국하여 대학에서 가르치면서 큰 가능성이 보였습니다. 가르치는 것에 점점 익숙해지며 흥미가 있었고, 학생들과 지내며 또 다른 행복감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당시 정준수 학생을 1년 동안 거의 혹독하게 준비시켜 경희대학교 역사상 전무후무한 동아 콩쿠르 대상 수상의 성과를 거두기도 했습니다. 그 당시 크게 센세이션을 일으켰으며 저로서는 큰 보람이자 성취였습니다. 그러면서 점점 가르치는데 자신감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가르치는 것이 제 본업이 된 것 같은 생각입니다. 어떤 때는 이점이 아쉬울 적도 있습니다. 만일 연주활동에 전력투구하였다면 지금보다 훨씬 연주를 잘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점입니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가며 연주자의 길보다 가르치는 길을 택한 것이 잘한 선택이란 생각이 듭니다.

 

▶학생들에게 특히 강조하는 것은 무엇인지요?
김남윤_ 저는 ‘인내’하라는 말을 자주 합니다. 요즘 학생들은 조급하게 성공하길 원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즉, 금방 바이올린의 파가니니(피아노에 있어 리스트)와 같은 연주자가 되기를 염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음악은 끝이 없는 길이기에 오래도록 인내하고, 슬럼프도, 가슴 아픈 일도, 때론 눈물을 흘리는 등 많은 것을 겪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이올리니스트가 되기보다 음악가가 되기 위해 도전을 거듭할 것을 당부하곤 합니다.

 

▶저 역시 오랫동안 가르치며 실감하는 부분이지만, 학생들이 대체적으로 연습이나 연주할 때 생각이 없고, 잘 듣지 않는다고 느끼는데, 이점 어떻게 생각하는지요?
김남윤_ 동감입니다. 10명 중 9명은 거의 자신의 음악을 듣질 않습니다. 생각없이 낭비하는 시간들이 많습니다. 잘 듣는 것에 주력하지 않고 맹목적으로 연습하는 사례들이 비일비재합니다. 또한 앙상블(챔버 또는 오케스트라)에서 수십 여 명이 함께 연주할 때, 진정한 자세와 정신은 함께 공감하고 공유하는 것인데, 자기 소리도 안 듣고 기계적으로 연주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많은 연주자 가운데 단 몇 명만이 표정이 살아 있습니다. 연주는 청중에게 감동을 주려고 하는 것인데, 연주자들이 일체화되어 같이 느끼지 못하는데 어떻게 청중이 느낄 수 있겠냐고 말하곤 합니다.

 

▶아까 교수님 방에 들어 올 때 혼자 독서하시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학생들에게도 이의 필요성을 강조하시는지요?
김남윤_ 요즘 학생들이 대체적으로 책을 안 읽습니다. 음악은 경험을 통해 실현되는 부분이  많은데, 직접 경험할 수 있는 것이 많지 않기 때문에 간접경험이라도 해야 할 필요가 있어서 책을 읽으라고 자주 말하곤 합니다. 음악은 시각, 청각 및 온갖 경험을 통해서 보다 풍요로워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양서건 악서건, 심지어 독서에 흥미가 없다면 만화라도 보라고 말합니다. 유치한(?) 것이라도 어느 면에서 하나라도 깨우치고 배울 점이 반드시 있기 때문입니다.

 

▶교육자로서 음악적 삶의 길을 염원하고 실천하시는데, 어떤 선생님의 가르침이 음악과 인생관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합니까?
김남윤_ 나이가 들어가니 선생님 한 분 한 분이 소중하다고 생각됩니다. 제가 젊었을 때는 선생님께 고맙다는 생각을 못했어요 그래서 저 역시 선생의 역할을 제대로 해야겠다는 책임감을 느낍니다. 가르치는 일이 얼마나 진지하고 중요한 역할인지 하는 생각에 두렵게 느낄 때가 있습니다. 지금 이 나이에도 과거 어느 선생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 기억되곤 합니다. 그래서 지금도 가르치는 매시간을 정말 중요하고 소중하게 생각하며 지도하고 있습니다.

 

▶줄리어드 재학 시 어느 선생님의 영향을 받았습니까?
김남윤_ 갈라미언 선생님과 갈리미어 선생님께 배웠습니다. 갈라미언 선생님은 엄하시지만 익히 잘 알려진 대로 보잉(Bowing)과 핑거링(Fingering)을 매우 학구적이고 논리적으로 가르치셔서 음악적 연출이 효과있게 드러날 수 있는 방식의 교육이었습니다. 그분의 기법을 학생들에게 가르치면서 연주가 매우 효과적으로 부각되는 것을 보고 가끔 저 역시 놀라곤 합니다. 어느 잡지에 “나무 테이블에서도 바이올린 소리가 날 수 있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이란 토픽의 글을 읽어 본 적이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연주가 부각될 수 있는지 보여주셨고, 실현될 수 있도록 하신 분입니다.
갈리미어 선생님은 진정한 음악가셨습니다. 직접 노래하고 춤까지 춰 가며 가르치시곤 하셨는데, 너무나 많은 것을 체계적으로 배웠습니다. 제가 그분께 좋은 학생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제게는 참으로 유익했습니다(웃음).
저는 영재원에서 가르칠 때, ‘보잉은 목소리고, 핑거링은 발음’이라고 가르칩니다. 즉, 보잉을 얼마나 효과적으로 하느냐에 따라 성악가들이 다양하고 폭넓게 표현하는 것과 같고, 핑거링은 가수나 성악가의 발음이 명확하지 않으면 답답한데, 이는 또한 우리가 대화할 때 상대의 발음이 분명하지 않으면 무슨 말인지 원활히 의사소통할 수 없는 것에 비유해 설명하곤 합니다.
보잉과 핑거링은 불가분의 관계로 어느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잘못 익숙해진 기법은 고치기 매우 힘듭니다. 어려서 잘못 배워 온 학생들의 경우 인내심을 가지고 고치려고 해야 하는데, 그보다 협주곡을 연주하거나 콩쿠르 입상 욕심 때문에 조급해들 합니다. 이는 분명 잘못이고, 평생토록 바람직하고 효과적인 연주에 장애요인으로 작용하게 됩니다. 어느 분야나 마찬가지겠지만, “세 살 적 버릇이 여든 간다”는 말처럼 고치기 매우 힘든 것입니다.

  대담이 끝날 무렵, 그간 한국음악계에서 김남윤 교수가 생각해 온 몇 가지 문제점에 대해 날카롭고 신랄한 지적을 피력하였다. 필자 역시 절대 공감하고 있던 부분들이다. 첫째는 바이올린 귀국 독주회가 많은데 뭘 공부해서 왔는지 하는 의구심이 드는 연주회가 많은 점, 레퍼토리 선정에서 소나타 일색인 점. 둘째는 규모가 큰 음악제에서 같은 한국인이라도 해외에서 초청된 연주자와 국내에서 활동하는 연주자의 개런티가 현격한 차이의 불공정함. 셋째는 외국의 실정에 반해 우리나라에서 교수의 정년이 정해짐에 따라 한창 가르칠 나이에 퇴출(?)되어야 하는 안타까움, 그러나 김남윤 교수는 개인적으로 오랜 기간 가르쳐 왔기 때문에 정작 자신의 정년에는 아무런 미련은 없다고 함. 넷째는 교수들이 해외와는 달리 개인적으로 가르쳐서는 안 되는 상황. 마지막으로 입시에서 학생의 전모를 파악할 수 없도록 커튼을 치고 실기시험을 치러야 하는 어처구니없는 현실 등이다. 지면 관계로 상세하게 김남윤 교수의 견해를 전하지 못하는 아쉬움이 크다. 이를 통해 김남윤 교수가 자신보다 바이올린 교육과 한국음악계를 우선시하는 진정성과 애정이 깊은 음악가란 확신을 갖게 되었다!

 

대담/글_ 박경우(음악평론가, 지휘자, 피아니스트, 우즈베키스탄 국립 컨서바토리 교수 역임)

사진_ 김문기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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