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음악춘추

오보이스트 겸 지휘자 김종덕(표지인물) / 음악춘추 2012년 12월호

언제나 푸른바다~ 2012. 12. 15. 11:27

표지인물 / 오보이스트 겸 지휘자 김종덕


확고한 음악적 신념, 열정적인 시간들

그리스어로 시간을 뜻하는 단어에는 ‘크로노스’와 ‘카이로스’가 있다. 자연적으로 해가 뜨고 지는 시간인 ‘크로노스’는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지는 객관적인 시간을 뜻한다. 그리고 특별한 의미가 부여된 시간인 ‘카이로스’는 각각의 사람들에게 다른 의미로 적용되는 의식적이고 주관적인 시간이다. 크로노스의 시간들 속에서 어떤 카이로스의 시간을 살았느냐, 그것이 현재의 인생을 만드는 것이다. 
예순 일곱 해라는 ‘크로노스’의 시간을 건너온 오보이스트 겸 지휘자 김종덕 선생, 그가 지금의 자리에 있기까지는 수많은 기회와 선택이 만들어 낸 ‘카이로스’의 시간이 있었다.
많은 악보와 음반이 잘 정돈되어 있는 아늑한 공간에서 기자와 마주한 김종덕 선생은 중학교 밴드부로 출발해 오보이스트, 지휘자로 이어진 ‘시간’들을 이야기로 풀어나가기 시작했다.
“내 나이가 그렇게 됐나 봐요. 배 기자를 처음 만났을 때(2007년 봄)만 해도 앞으로 뭘 할지에 대한 이야기를 했는데, 이제는 과거에 어떤 일을 했는지에 대해 이야기하는 나이가 되었네요.”

 

오보에가 선물한 첫 번째 시간
전라북도 전주가 고향인 선생은 중학교 1학년 때 당시 활발했던 밴드 부활동을 통해 음악을 시작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나에게도 음악을 할 수 있는 소양이 있긴 했나 봅니다. 누가 밴드 활동을 같이 하자고 권한 건 아니지만 밴드 음악을 들으니 나도 하고 싶었거든요. 사실 나는 밴드부에서 트럼펫 같은 악기를 하고 싶었는데 알지도 못하는 클라리넷을 맡기더라고요(웃음).”

그렇게 클라리넷으로 음악을 시작해 고등학교 3학년 때 평생 함께 할 오보에를 만나게 된다. 마찬가지로 선생은 당시 오보에라는 악기를 알지 못했지만 학교에 악기가 있어서 학교의 음악 선생을 통해 오보에를 접하며 흥미를 느꼈고, 서울에서 오보에를 배우던 한 고등학교 선배의 어깨 너머로 조금씩 배워 서울대 음대에 진학하게 된다.
“그 때만 해도 오보에를 잘하고 못하고 상관없이 무조건 대학에 합격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내가 10년 만에 서울대 오보에 전공에 지원한 학생이었다고 하니까요(웃음). 선배도 없었고, 제대로 된 음악 자료나 악보가 거의 없는 열악한 환경이었습니다.”
선생은 마치 운이 좋아서 대학에 진학한 듯 겸손하게 말했으나, 당시 서울시향의 수석으로 활동한 권용순 선생을 사사하며 본격적으로 오보이스트로서의 기초를 다져나갔다. 학교 내에서 거의 매년 리사이틀을 가졌고, 친구들과 조인트 리사이틀, 앙상블 연주를 하는 등 오보에에 매진했다. 그 결과 4학년 때 동아 음악 콩쿠르 오보에 부문에서 1등을 차지하며 그 재능을 인정받았고, 1969년 졸업 직후 서울시립교향악단의 수석 오보이스트가 되었다.
“내가 졸업하던 해에 서울시향 수석이셨던 임종명 선생님이 그 자리를 그만 두시고 대구로 내려가셨어요. 그래서 당시 서울시향의 지휘자였던 김만복 선생님께 테스트를 받고 내가 수석이 되었는데, 당시 오케스트라계에서는 파격적인 인사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은 수석 자리가 비면 오디션을 통해 충원하지만, 단원 중에서 수석 자리를 뽑던 그 시절에 대학을 갓 졸업한 내가 그 자리를 꿰찼으니까요. 그런 걸 보면 나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복을 많이 받은 사람이지요.”


그렇게 선생은 서울시향의 오보에 수석으로 10년 간 활동함은 물론 수많은 실내악 연주회와 독주회 등을 갖고, 학교에 출강하며 목관악기계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하지만 그런 생활을 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에는 자신이 하고 있는 음악이 옳은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있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누리던 모든 자리를 과감하게 내려놓고 1980년 유학길에 올라 미국의 템플대학교에서 디플롬을 취득했다.
“미국에서 당시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의 수석인 리차드 우담스 선생님을 사사했는데, 나이는 나보다 네 살 정도 어렸지만 오보에를 정말 기막히게 잘하더라고요. 그 선생님만큼 오보에를 연주할 수 없다면 한국에 돌아가지 않겠다는 마음이었어요. 하지만 3년 정도 배웠어도 그 만큼은 못하겠더라고요(웃음). 워낙 실력이 뛰어난 사람이라 옆에서 보고만 있어도 배울 점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국내에 오보에 관련 악보가 턱없이 부족한 것을 늘 안타깝게 느꼈던 김종덕 선생은 미국 유학 시절 가능한 많은 악보를 모았고, 그렇게 모은 수백 권의 악보들은 그의 귀국과 함께 국내에서 빛을 발하며 오보에 레퍼토리의 보급에 크게 기여했다.
한국 관악계의 간판급 연주자로서 명성을 누려왔던 그에게 있어 가장 기억에 남는 연주는 1999년 12월 오보이스트로서 가졌던 마지막 독주회이다.
“당시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는데, 스스로 오보에를 그만해야겠다, 21세기가 되기 전에 정리하자는 생각으로 독주회를 가졌던 것이 기억에 많이 남습니다. 오보에계를 떠나겠다라기 보다는 개인 독주회를 이제 그만하겠다는 마음이었지요. 당시 후배들이 공부를 많이 하고 상당한 수준에 올라왔기 때문에 내가 자리를 비켜줘야 그들의 활동 범위가 넓어지겠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두 번째 시간, 지휘자가 되다
지금까지 ‘오보이스트 김종덕’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사실 김종덕 선생을 지휘자로 알고 있는 이도 많을 것이다. 선생은 미국 유학 후 귀국해 5∼6년 정도 활동하다가 지휘에도 흥미를 느껴 로테르담 음악원에서 지휘를 공부했고, 1980년대 후반부터 취주악단을 중심으로 지휘 활동을 시작했다. 1993년 서울시립청소년교향악단(현 서울시 유스 오케스트라)의 단장 겸 음악 감독으로 활동했으며, 부천필하모니오케스트라,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 등 수많은 국내 오케스트라를 객원 지휘했고, 2003년부터 7년간 충남교향악단의 상임지휘자로 활동한 바 있다.
“오보에를 하면서 어느 순간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오보에로만 하기에는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참 건방진 생각이었지요(웃음). 이 부족함을 돌파할 수 있는 길이 무엇인지 고민하다가 규모 있는 연주를 하면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을 쉽게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그러던 중 우연히 서울대 관악합주를 지휘할 기회가 주어졌고, ‘이거다!’라는 확신이 들었고요. 그런데 나중에서야 내 이야기를 오케스트라 단원인 남을 통해 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깨달았습니다. 하지만 지휘라는 것이 어려운 만큼 흥미롭고, 매력있는 작업인 것은 사실이지요.”


선생은 서울시립청소년교향악단의 단장 겸 음악 감독으로 활동하던 당시를, 개인적으로는 공부가 많이 되었던 좋은 시절로 기억한다. 기성 교향악단은 악장, 각 파트 수석이 자신들의 역할을 잘 수행해 내지만, 청소년 교향악단은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지휘자인 그가 하나하나 공부해서 지도해야 했던 것이다. 심지어 직접 바이올리니스트 등의 연주자를 찾아가 핑거링, 보잉 등을 배워 오케스트라의 어린 단원들을 가르치는 일을 8∼9년 동안 해왔다. 그래서 선생은 그 때의 경험이 기성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데 큰 재산이 되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청소년들이 클래식 음악과 친해질 수 있을지를 고민, 음악회에 영상을 도입하는 등 획기적인 프로그램을 기획, 개발하여 청소년 관객 확보에 크게 기여했으며, 일본 시즈오카에서 개최된 국제청소년음악제 초청연주회를 성공적으로 이끌기도 했다.
특히 김종덕 선생의 지휘 경력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2003년부터 2010년까지 상임지휘자로 재직한 충남교향악단에서의 활동이다. 선생이 이끌기 시작한 후 충남교향악단은 관악 파트의 기량이 향상되었고, 앙상블도 치밀해졌다는 평을 받는 등, 국내 음악계에 확실한 존재감을 알린 것이다. 선생은 충남교향악단과 함께 했던 많은 연주 중에서도 도립교향악단답게 충청남도의 각 지역을 찾아가 연주했을 때, 그들의 연주를 듣고 즐거워하던 지역민들의 모습을 잊을 수 없다고 이야기했다.

 

교육자로서의 또다른 시간
1998년 한국음악협회 주최의 한국 음악상을 수상하기도 한 김종덕 선생은 이화여대 음대 교수를 역임하고 현재 성신여대 음대 석좌교수로 재직하며 오케스트라 수업을 이끌고 있다. 선생의 음악 철학이자 교육 철학은 ‘기본에 충실하자’이다. 그는 당장의 정기 연주회 등 무대를 위한 수업보다는 역시 기본에 충실하기 위해 학생들에게 꼭 필요한 레퍼토리를 위주로 지도하고 있다.
“오케스트라 중에서도 특히 학생 오케스트라는 지휘자의 역량에 따라 발전하는 것이 다릅니다. 물론 학생 오케스트라를 이끄는 데에도 어려움은 있지만 학생 오케스트라에서는 지휘자의 이야기가 100퍼센트 다 흡수되기 때문에 즐거움이 큽니다.”


그는 이화여대의 교수로 10여 년 간 재직하며 오케스트라 수업을 이끌었고, 당시 지도한 학생 중에는 현재 오케스트라 단원으로 활동하고 이들도 많다. 잘 알다시피 오케스트라 연주는 어느 한 파트라도 제대로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합주가 힘들다. 그래서 그는 매우 엄격하게 수업을 했고, 그런 방식을 힘들어하는 학생들도 많았던 것이 사실이지만 그 학생들이 지금은 그를 찾아와 고마워한다는 말에 기자는 약간 의아한 마음이 들었다. 특히나 전공을 사사한 스승도 아니고 오케스트라 수업에 만난 사제지간에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한지 묻자, 선생도 웃으며 그렇기 때문에 더 반갑다는 말을 했다. 선생이 지금까지 길러낸 오보이스트들, 오케스트라 수업을 함께 한 제자들, 이들 모두 그에게는 소중한 보물과도 같다.


어느덧 인터뷰를 마무리할 시간이 되었고, 선생은 시작 때처럼 이런 이야기를 했다.
“나는 이제 어떤 계획을 세우고 움직이는 그런 나이는 아니에요. 하지만 주어진 일에는 열의를 다해서 임하고, 앞으로 기회가 된다면 마지막으로 좋은 오케스트라를 맡아 오케스트라계 발전에 기여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현재 성신여대에서 지도하고 있는 학생들이 졸업 후 사회 생활을 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고요.”
오보이스트로, 지휘자로, 교육자로 어느 것 하나 소홀함 없이 음악계를 위해 묵묵히 최선을 다해온 김종덕 선생, 음악계는 그와 함께 했던 시간을 오래도록 기억할 것이다.

 

글_배주영 기자/ 사진_김문기 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