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음악춘추

인물탐구 현대음악출판사 사장 심성태 / 음악춘추 2016년 10월호

언제나 푸른바다~ 2017. 5. 22. 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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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춘추 기획대담 / 인물탐구 10월호

현대음악출판사 사장 심성태


현대음악출판사 사장 심성태 선생은 1924년 함경남도 단천군에서 출생하여
1950년 함흥의대 재학 중에 6.25로 인하여 월남하였다. 1951년에 현대악보출판사 출판등록을 시작으로 출판계에 첫 발을 내딛었다. 1965년에 청계인쇄상가(주) 전무를 역이하였고 고등학교 교과서 발행조합 상임감사, 한국검인정교과서발행인협회 부회장, 한국출판문화협회 이사, (주)검인정교과서 상임이사, 중등학교 교과서 발행인협회(주) 상임감사를 역임하였다.
1973년 한국음악저작권협회 출판부를 인수하여 1987년 현대음악출판사로 상호를 변경하여 1990년에 사옥을 건립하고 1997년에 현대음악신문을 창간하였다. 문화공보부장관상 출판인상 수상(1989), 한국2종 교과서발생조합 운영위원장(1992), 국민훈장 모란장 서훈(2000)을 받았다.
주요 간행 서적에는 <국민애창곡집>, <학생애창곡집>, <세계애창명곡집>, <명곡해설>, <음악용어사전>, <중?고등학교 음악교과서>, <한국가곡대전집 I~IV>, <동요대전집 상, 하>, <대한음악이론(제1판~제3판)>, 피아노교본 다와 클래식기타교본 다수 외 1,300여종이 있다.

일시 : 2016년 9월 6일 오전11시
장소 : 코스모스 악기사
진행 : 이용일(한국음악교육협회 명예회장)
패널 : 김형주(한국원로음악가협회 회장)
         이상만(음악평론가, 국제델픽위원회 명예회원)
         이종구(한양대 명예교수, 남북문화예술원 원장)


***심성태 선생의 성장과정과 음악의 출발

이용일: 오늘은 음악계에 엄청난 지원을 해주신 심성태 사장님을 추모하기 위해서 모였습니다. 오늘 그분의 업적에 대해서 이야기 하면서 대담을 진행하고자 합니다. 다 아시다시피 심성태 사장님은 지식이 많은 분이셔서 음악가들을 만나면 자신이 음악가들보다 많이 안다고 주장하시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분의 담백한 성품, 자신만이 가지고 있는 음악 교육의 방향을 가지고 회사를 운영하셨기 때문에 지금까지 흔들리지 않고 꾸준히 회사를 운영하신 기업인중 한 사람으로 남아 있습니다. 특히, 이따가 이야기가 다시 나오겠지만 당시에 시대적으로 정말 어려운 시기에 <한국가곡대전집>을 출판한 것은 당시로써는 생각도 못할 어려운 일을 하셨습니다. 이를 통해서 작곡가들은 작곡을 할 수 있는 용기, 성악가들에게는 좋은 노래를 부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었습니다. 그 이외에도 음악계에 많은 공헌을 하셨습니다.
대담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심성태 사장님의 고향은 어디신가요?


이상만: 그분의 고향은 함경남도 단천군입니다. 건국대학교를 설립하신 유석창 선생과 한양대학교 이사장이 단천 출신입니다. 그곳이 인물이 많이 나온 고장입니다. 심성태 사장은 비교적 괜찮은 집에서 태어나서 함흥의대에서 공부를 하였습니다. 1950년 함흥의대 재학 중에 6.25로 인하여 월남하셔서 한국에 오게 된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용일: 제가 생각하기에 우리나라 음악 출판계의 계보를 보면, 국민음악연구회가 첫째로 있었고 그곳에 계시던 분들이 노병남, 심성태, 나상신성식 이렇게 세 분이 주된 인물이었습니다. 


김형주: 방금 이야기 하신대로 해방이후에 최초로 음악출판을 시작한 것은 국민음악연구회 이강염씨입니다. 거기에서 많은 출판은 못했지만 제일 역할을 한 것이 교과서입니다. 우리나라 음악 교과서를 만든 곳이 그곳입니다. 당시에는 6.25 전쟁 직후라서 수송도 전혀 안 되는 상황이었습니다. 국민음악연구회에서 중·고등학교 교과서를 만들었고 출판사는 여기 하나였습니다.
심성태씨는 의대를 나와서 6.25전쟁 때 월남하여 국민음악연구회 전무로 있었습니다. 제가 심성태씨를 처음 만난 것도 교과서 때문에 만났습니다. 제가 순천여고에 음악교사로 있었는데 심성태씨가 교과서를 전국으로 배포하려고 미군들이 폐차한 지프차를 끌고 교과서를 싣고 전국으로 돌아다니면서 갖다 줬습니다. 그 분이 전무로 국민음악연구회에 있다가 1951년에 일을 그만두고 단독으로 현대악보출판사로 출판등록을 하며 첫 발을 내딛었습니다.


이용일: 이러한 현대악보출판사에서 책다운 책을 만든 것이 <세계애창명곡집>이 처음이 아닌가 싶습니다.


김형주: 사적인 이야기일지는 몰라도 1969년에 제가 서울에 올라온 지 2년 정도 밖에 안될 때, 하루는 을지로입구에서 명동을 가고 있는데 충무로쪽에서 심사장이 내려왔습니다. 만나서 인사를 하는데 국민음악연구회를 그만두었다고 말하면서 같이 술 한 잔 하자고 하면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당시에 이야기 한 것은 다른 것은 하지 않고 음악출판을 하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때의 만남이 시초가 되어 최초로 현대악보출판사에서 문고판으로 낸 <학생애창곡집>을 제가 다 편집하였습니다. 심성태씨가 음악을 전공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곡을 선곡하는 것도 제가 하였습니다. 당시에 종이집과 인쇄소가 외상이 되지 않았는데 국민음악연구회에 있을 때 이러한 작업을 다 했기 때문에 그분의 친분으로 외상을 받아서 책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책으로 만들어진 후에 엄청 많이 나갔고 그것이 바탕이 되어서 낸 책이 <세계애창명곡집>입니다. 이것도 제가 편집을 다했습니다. 그 책의 표지가 천연 인쇄된 책인데 그 당시로서는 국내에서는 천연색인쇄가 처음

이었습니다.


***심성태 선생과의 첫 만남

이용일: 심성태 사장님은 누구보다 이종구 교수님이 잘 아실 것 같은데요. 그곳에서 일을 했었지요?


이종구: 네 잠깐 그곳에서 같이 일을 했었습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일인데, 교수님이 알고 계시네요(웃음). 제가 문화 운동하는 김지하, 황석영, 김민기씨와 함께 작업을 했습니다. 그렇다보니 중앙정보부의 블랙리스트에 들어가 있어서 정식 취업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잡지사에서 책을 내면서 잠시 일했었는데, 심사장님이 저에게 함께 일하자고 권유하셔서 1977년에 3개월가량 출판사에서 근무를 했었습니다. 그 후에 고려고등학교에 강사로 가게 되면서 출판사를 그만 두어서 짧게 근무를 했었습니다. 당시 회사에 편집부가 있었고 악보를 정사하는 파트가 있어서 어깨너머로 정사 기술도 배울 수 있었습니다. 또한 음악저작권협회가 함께 있었습니다. 지금이야 저작권이라는 것이 워낙 커져서 당시에 개인회사에 있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이지만 김상만 선생님이 책임자로 계셨습니다. 이렇듯, 상당히 다양한 분야를 접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거기서 일하면서 느낀 것은 평소에 악보를 대할 때, 악보는 작곡가와 연주가를 소통시키는 매체라고 생각했었는데, 악보출판이라는 사업적인 차원으로 보게 되면서 악보출판이라는 것이 우리 음악계와 사회를 살릴 수 있는 역할을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즉, 혈액을 공급하는 심장과 같은 역할을 한다는 것이죠. 우리 음악을 공부하는 악보계가 외국에 비해서 뒤쳐졌다고 해서 이를 해결하려고 많이 노력했는데 우리 위의 선생님들께서 힘을 써주셔서 이렇게 커진 원인이 된 것 같습니다. 


이용일: 저는 광주일고에서 교사를 하고 있을 때 심사장님을 처음 만났습니다. 당시에 제가 학생들을 교과서로 가르치려고 하니까 교과서가 너무 재미 없었습니다. 그 무렵에 <학생애창곡집>이 나와서 그걸 가지고 가서 학생들에게 이 책을 부교재로 택하는 게 어떻겠냐고 물어봤는데 학생들이 좋다고 하여서 이 책을 부교재로 선택하고 구입하였습니다. 당시 80명 정도 구입을 했는데 그중에 수업료를 면제받는 30명의 학생들은 심사장님이 무료로 제공해 주었습니다. 나중에 심성태 사장에게 들은 말로는 몇 년 팔만한 양의 책을 팔았다고 말했습니다. 그것이 시초가 되어서 그 후에도 원고 청탁을 하면서 만나게 되었습니다. 사실 부교재를 교감의 허락 없이 채택했다고 지적을 받기도 했었지만 당시에 <학생애창곡집>을 배운 학생들은 지금도 만나면 그 때의 기억이 즐거웠다고 이야기 합니다. 이상만 선생님은 언제 심사장을 처음 만나셨나요?


이상만: 저는 이분이 국민음악연구회에 있을 적에 만났습니다. 국민음악연구회에 있던 사람 중 노병남씨는 경향신문사 기자였습니다. 그러다가 나가서 음악춘추를 만들었습니다. 그분을 비롯하여 나상신, 심성태 이렇게 세분이 국민음악연구회와 관계가 있는 사람인데, 심성태씨를 만났더니 아주 당당한 사람이었습니다. 삶의 목표가 뚜렷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국민음악연구회를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접촉을 하기 시작한 것이 1961년에 한용희씨의 <동요애창곡집>을 만들기 시작하면서입니다. 이것이 비교적 잘 팔렸던 것으로 기억을 합니다. 이분이 처음 출판사를 세울 때, 현대음악출판사라고 하지 않고 현대악보출판사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악보를 출판해서 음악계에 뒷받침을 하겠다는 신념 같은 것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러한 강한 신념을 가졌고 아는 것이 많은 분이였습니다. 그래서 사람들 앞에 오면 다른 사람들을 교육하려는 성격도 강했던 것 같고요.


김형주: 우리나라 음악출판의 한 자리를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악보 뿐만아니라 해설, 이론 등의 책을 내서 영향을 주었고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것은 연주분야의 교칙법, 바이엘, 체르니, 하농 등입니다. 이러한 순수음악 피아노 교재는 세광음악출판사보다 앞서서 1960년대 초부터 출판하였습니다. 순수음악 출판쪽에서는 선구자적인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겠지요. 우리나라 음악 출판계에 역사적인 줄거리를 지켜왔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 사람의 성품도 상당히 단단하고 아주 곧은 사람입니다. 물론 한말로 말하면 술을 좋아하는 분이었죠. 사치도 하지 않고 소박하고 절약하며 경제적으로도 깍쟁이입니다. 제가 아주 잘 알지요. 저랑은 꽤 오랫동안 우정을 나눈 사이입니다. 저도 평론가로써 음악가들과 가까이 지내지 않으려 거리를 두었는데, 마음을 나눈 친구는 심성태 사장입니다. 오랫동안 세상을 떠날 때까지 교우관계가 길었다는 것입니다.


***심성태 선생의 음악세계와 교육관

이용일: 사실은 제가 심성태 사장을 정말 우리나라 음악계를 위해서 힘쓰신 분이라고 생각한 것은 <한국가곡전집>을 만든 업적을 보고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이종구: 악보출판이라는 것이 문자출판보다 시장이 좁아서 모험산업이라고 할 수 있는데, 사업가적인 안목에서 사업이 되는 기획도 있을 것이고 아닌 것도 있을 것입니다.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 심사장님은 장사가 안 된다 하더라도 우리 사회에 필요하면 기획을 하는 분이었습니다. 현대 작곡가들의 무조성 음악 피아노 전집도 있었는데 이런 것을 만들어서 옛 작곡가들과 동등한 대우를 해준 작업이하는 생각이 들고요. 그것이 사업적으로 성공했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그런 분야도 과감하게 손을 댔다는 것에서 작곡하는 사람으로서 존경하는 마음이 듭니다.


이용일: 예전에 심사장님과 점심을 같이 먹으면 오후 시간에 여유가 있어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같이 점심을 먹으면 밥을 먹고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누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은 저와 함께 밥을 먹다가 이야기를 하면서 “피아노 책 좀 개혁 하십시오.”하는 이야기를 제가 했었습니다. 이 문제를 가지고 저와 한참 논의를 하다가 만들어 진 것이 <재미있는 체르니 30번>입니다.


이종구: 저도 지금 이 책을 보았는데, 지금 봐도 새롭고 재미있습니다. 당시에 어디에서 이러한 아이디어를 얻으셨나요?


이용일: 저는 음악교본은 우리 주위에서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심성태 사장님과의 논의 끝에 이 책을 만들기 시작하고 방학 내내 제가 연구실에서 힘들게 만들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다시 심성태 사장에게 보여주니 무릎을 치면서 좋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이 책이 학원 원장들이 피아노과를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가르치기가 어려워서 잘 팔리지 않을 거라고 했지만 심사장이 좋다고 생각해서 책을 냈습니다. 그분은 그 정도로 수익도 중요했지만 그 책이 사회적으로 끼치는 영향도 생각했습니다. 요즘 같으면 아마 이러한 책을 못 만들었을 것입니다. 


이종구: 우리나라 환경에 맞는 교재를 만든 것은 큰 의의가 있습니다.


이용일: 체르니의 개혁을 시킨 것이 처음에 심성태사장입니다.


이상만: 그분의 또 다른 업적을 보자면 1973년 한국음악저작권협회 출판부를 인수한 것입니다. 음악저작권 협회라는 것은 그때에 실체가 없었고 저작권 보장이 잘 안되어있을 때였습니다. 음악저작권 협회에 장차 출판이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되어서 출판지도 만들고 거기에서 빠져나와서 1987년 현대음악출판사로 상호를 변경하였습니다. 아마 악보 출판만 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해설서와 부교재, 음악문화를 일으키는 서적을 출판 하였습니다. 또한 1997년에 현대음악신문을 냈습니다. 아마 심사장은 이를 통해서 음악계 전반을 부흥시키는 움직임을 출판을 통해 하려고 한 것 같습니다. 이러한 역할들을 통해서 음악계의 뒤에서 음악문화를 전반적으로 향상시키려는 생각을 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이용일: 예전에 제가 일본의 음악지우사에 세광음악출판사에 <세계명곡해설전집>을 소개해 주었습니다. 일본의 우리 선생님이 저한테 따로 연락이 와서 출판사를 소개해 달라고 했고 음악지우사에서 한국으로 현지답사를 왔습니다. 그래서 제가 먼저 심성태 사장을 소개를 했습니다. 심사장이 일본말도 잘하고 성격이 호탕해서 순조롭게 진행되는 줄 알았는데, 그 다음날 음악지우사 관계자를 만나보니 고개를 저으면서 한국의 음악출판에 대해서 우리가 도리어 공부했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그분이 워낙 지식도 많고 말도 잘하다보니 너무 강해서 같이 일을 하기 힘들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세광음악출판사와 같이 일하게 되었습니다. 이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이 그분은 상대방이 누구이던 간에 자신의 주장을 확실하게 이야기 합니다. 적당히 하는 면모가 없고 아주 확실히 했습니다. 사업가적인 기질보다는 자신의 주장이 아주 확실했습니다. 아마 제 생각에는 그 분의 사모님이 의사라서 돈을 잘 벌어주니까 경제적인 것이 목적이 아닌 자신의 신념에 맞는 일을 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심성태 선생이 국내 음악계에 끼친 영향

김형주: 심성태 사장은 성공한 하나의 케이스입니다. 우리나라 음악계에 영향을 미칠만한 사업을 해왔습니다. 그것은 과소평가를 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용일: 저는 사실 심사장님과 애증의 관계입니다. 저의 첫 저서 음악교육학 개설을 출판해주었고 중간에 교과서 문제로 저와 소송 전까지도 갔었고, 백병동 선생의 <대한음악이론> 원고를 매절한 것을 나와 화해 하면서  나의 요구대로 인세로 바꿔주었습니다. 저와 약간의 충돌은 있었는데, 그분은 잘못했다는 말을 절대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생각하기에 그 일이 맞는다고 생각하면 사과는 하지 않고 일을 바로잡아 주었습니다. 제가 <명곡해설전집>을 우리의 상황에 맞게 바꾸는 작업을 하자고 했었는데, 그분은 해설집을 쓰지 말고 사전을 만들라는 말을 했습니다. 그 책이 <명곡해설사전>입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분의 말씀이 일리가 있는 것이었습니다. 아마추어들이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을 만들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억에 남는 것은 제가 원고료나 인세를 이야기하면 항상 김형주 선생님을 이야기하면서 저에게 비교했던 기억이 납니다. 경제적으로 더하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술을 조금 덜 드셨으면 더 큰 성공을 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이상만: 근데 술은 마셨지만 술에 취해서 쓰러진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술도 마지막에 가서는 끊을 줄 아는 자제력이 있었습니다. 그 양반은 술을 마시는 것도 하나의 자기 사업 확장을 위한 방편으로 마셨지 술에 너무 빠져들지는 않았습니다. 또 하나 이양반의 꺾을 수 없는 것은 자존심입니다. 그분의 자존심을 건드리면 참지 못했습니다. 그분의 자존심이 있었기에 이만큼 악보다 책을 출판하고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당시의 어려운 시대에 우리나라 음악 출판사로서 굳건한 자리를 잡은 것이 중요하고 그런 업적 때문에 우리나라 음악계가 풍요해지지 않았나 싶습니다.


김형주: 그분은 한마디로 입신출세를 했습니다. 홀몸으로 월남해서 하고 8층짜리 사옥을 세웠고 성공한 사람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 배경이 보통 결심으로는 어렵지 않겠는가 싶습니다. 한때는 매일 밤 저와 술을 같이 먹으며 지냈습니다. 술로 인해서 위암관계로 3번이나 수술을 했습니다. 본인이 의대를 나왔는데....(웃음)


이용일: 당시 일본의 음악지우사에서 그분을 의사로도 인정을 했었습니다. 출판도 훨씬 앞서더라고 했습니다. 당시에 그분이 현실감각이 없고 꿈이 훨씬 컸던 것이지요.


이종구: 저는 조금 달리 생각하는데, 그분이 호방하고 사업적으로도 술도 마시고 그리고 근검절약하면서 자신감 있는 것이 사모님이 의사라서 그렇다고 말씀도하셨습니다. 하지만 제가 알기로는 그분이 알부자입니다. 당시에 지금의 충무아트홀 자리 적산집에 재산이 있었습니다. 그곳이 창고였습니다. 제가 그곳에서 일할 때 그곳을 들락날락 했는데 직원말로는 아마 3억정도 되는 재산이 있을 거라고 했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사옥도 8층으로 지은 것입니다. 사모님을 의지하지 않아도 될만큼 이미 자신의 재산이 충분하신 분이었습니다. 


김형주: 당시에 김선례씨라는 분이 있었는데, 심성태 사장과 매일 싸웠습니다. 원고료 때문에요(웃음). 심사장과 싸우면 이길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원고료나 인세로 싸워본 적이 없습니다. 제가 책도 많이 썼고 편집도 많이 했지만 보수는 안줬습니다.


이용일: 그래도 선생님은 비용을 부담하지 않고 책을 많이 내셨잖아요. 심사장님은 기브앤테이크가 정확한 사람입니다.


김형주: 저와 아주 가까이 지낸 관계이지만 금전적인 문제는 절대 터치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건드리면 우정이 깨지기 때문에요. 그만큼 그분은 단단한 사람입니다. 지금은 파주에 38선 가까이에 묻혀 있습니다. 그곳에 월남한 사람의 묘소가 모여 있습니다.


이용일: 앞서 이종구 교수가 말했지만 현대음악출판사에 편집부, 정사부, 영업부가 있었는데 영업부장들이 문제를 일으켜서 일이 생겼었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계는 혼자 잘나도 어떠한 사람을 만나느냐에 따라 결정이 되는 것 같습니다. 요즘 같은 컴퓨터 시스템이면 아무도 몰래 못해먹는데, 당시에는 얼마든지 할 수 있었기에 그분이 손해를 많이 본 것 같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저보다 음악도 훨씬 많이 알고 연주자, 외국 출판사도 다 외우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분 앞에서 말실수를 하면 큰일 났었죠. 그만큼 박식한 분도 없었을 것입니다.


김형주: 머리가 영민한 분입니다. 


이종구: 저는 그분이 상상력이 뛰어났다고 생각했습니다. 신문사도 만들고 시대에 따라서 적절한 것들을 만들어 낸 것 같습니다. 지금 이렇게 오래된 책을 보니까 감회가 새로운데 당시에 현대에서 책을 출판하면 다른 출판사에서 유사한 것들을 많이 만들었던 것 같습니다. 
 

정리_김진실 기자. 사진_김문기 부장.


기사의 일부만 수록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음악춘추 2016년 10월호의 기사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

<김문기의 포토랜드>


진행 : 이용일(한국음악교육협회 명예회장)


김형주(한국원로음악가협회 회장)


이상만(음악평론가, 국제델픽위원회 명예회원)


이종구(한양대 명예교수, 남북문화예술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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