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음악춘추

인물탐구 음악교육가 금수현 / 음악춘추 2016년 9월호

언제나 푸른바다~ 2017. 5. 22. 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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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춘추 기획대담 | 인물탐구 9월호

음악교육가  금수현 
음악교육가인 금수현 선생(1919. 7. 22~1992. 8. 31)은 경상남도 김해에서 출생하여 부산 제2공립상업학교(부산상고, 현 개성고등학교로 학교명 바꿈)를 졸업하고, 1940년 일본 동양음악학교(현 동경음악대학)을 졸업하였다. 일본 쇼치쿠가극단(松竹歌劇團)에서 근무하였으며, 귀국하여 1942년 동래고등여학교, 1945년 경남여자중학교, 경남여자고등학교 등 교직에 종사하며 교감, 교장을 역임하였다.
경남여고에 재직 중이던 1946년 당시에 작곡한 가곡 「그네」는 1948년 한국가곡발표회에서 처음 불렸고 민족적인 선율에 의한 작품으로 대중성을 띠고 널리 알려져 있으며, 이후 교과서에도 수록되었다. 1947년 경상남도 도립극장장 재임 시 오페라 「피리와 칼」이라는 경가극 형태의 작품을 발표하였다. 금 선생은 지방에 음악을 보급하는 운동가로서 부산과 통영 등지의 지방에서 특히 음악문화 발전에 공헌하였다.
1957년 문교부 편수관으로 음악용어를 한글로 바꾸는 데 기여하였으며, 1970년부터 음악전문지 <월간 음악>을 발간하여 음악언론인으로서 음악 언론계의 일각을 담당하였다. 1968년 영필하모니를 창단하여 젊은이들을 위한 교향악운동을 전개하였다.
저서로는 <가곡집 I·II>, <표준음악사전>, <음악·멋·말>과 수필집 <거리의 심리학> 등이 있으며 많은 음악수필도 남겼다. 그의 성은 원래 김(金)씨인데 광복 이후 금씨로 바꾸었으며, 자녀들의 한글 이름 짓기의 선구적 역할을 담당하여 금나라, 난새, 내리, 누리, 노상 같은‘ㄴ’행렬로 자녀들의 이름을 남겼다. 그러한 일들로 제10회 외솔상을 받았다.

일시 : 2016년 8월 3일 오전11시
장소 : 선궁
진행 : 이용일(한국음악교육협회 명예회장)
패널 : 김형주(한국원로음악가협회 회장)
이상만(음악평론가, 국제델픽위원회 명예회원)
금노상(지휘자, 중앙대교수)
이남진(전 음악저널발행인)


1. 금수현 선생의 성장과정과 음악의 출발
2. 금수현 선생과의 첫 만남
3. 금수현 선생의 음악세계
4. 금수현 선생의 교육관
5. 금수현 선생이 국내 음악계에 끼친 영향


이용일: 오늘 금수현 선생님의좌담회를 5년 만에 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금수현 선생의 3남인 금노상 선생님이 바쁘신 가운데 이 자리에 참석하여 대담을 진행 하게 되었습니다. 바쁘신 가운데 나와 주셔서 고맙습니다. 지금부터 시작하겠습니다. 금수현 선생님의 성장과정과 음악의 출발은 어땠나요? 아드님이 먼저 말씀해주십시오.


금노상: 이번에 개성고등학교(부산상고) 박물관 옆에 아버지의 인물관을 따로 만들었는데, 그 작업을 하면서 아버지의 생애에 이루어 놓으신 음악적 업적에 대해서 더 많이 알게 되었습니다.
저희 할아버지께서는 평범한 농부로 농사를 지으셨습니다. 그러한 환경이었지만, 아버지께서 처음 음악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아버지께서 초등학교를 다니실 때 음악선생이 아버지의 음악적 재능을 발견하고 발표회의 기회를 여러 번 제공해 줌으로 인해서 음악을 가까이 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하신 기억이 납니다. 음악 선생님이 아주 미인 이셨다고 웃으면서 말씀하셨고요(웃음).


이용일: 금수현 선생의 전성기는 부산에서 활동했던 시기였고, 서울에는 문교부 편수관을 하면서 오신 것으로 되어있습니다.


김형주: 총괄해서 이야기 해보자면 금수현 선생의 업적은 음악교육에 큰 비중을 갖지 않는가 싶습니다. 그분 일생의 다수는 교육계에서 헌신했습니다. 주로 부산지역에서 교육활동을 하면서 음악교사로 시작해서 교장이 되었습니다. 그 다음으로 중요하게 다룰 공헌은 <월간 음악>을 만들어서 음악계 언론 문화에 기여했다는 것입니다. 또한, 금 선생님은 한글 학자입니다. 한글 연구에 상당히 조예가 깊었고 음악계에도 있었기 때문에, 음악계에서 사용하는 음악용어 정리를 많이 하였습니다. 당시 우리나라에서 사용하는 음악용어는 일본을 통해서 들어온 것이 대부분이었는데, 금 선생님을 통하여 음악용어들이 한글로 바뀌게 되면서 음악계가 많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이남진: 이 자리에 음악계에 원로이신 분들이 계시지만, 제가 금수현 선생님을 가장 오랫동안 모셨고 존경합니다. 그분은 실제로 참 고상하고 훌륭한 생각을 가지셨고 원칙이 있는 분이셨습니다. 선생님께서는 동경음악대학을 나오신 이후에 귀국해서 1942년에 동래고등여학교 교사가 되셨습니다. 1957년 문교부 편수관이 되기 전까지 교사로 부산에서 활동하신 철저한 교육가입니다. 대한민국 음악계에서 처음으로 일제청산을 하고자 하셨던 분입니다. 일제 강점기에 우리나라 언어를 뺏기면서 대한민국 음악 용어가 모두 일본어로 표기가 되었습니다. 금수현 선생님께서는 1953년 부산 사범학교 교감이 되면서부터 학생들에게 한글화된 음악용어를 가르치게 됩니다. 교장으로 계실 때 문교부 장관에게 대한민국의 음악용어가 한글로 통일되어야한다고 책자를 만들어서 정식으로 건의를 합니다. 1957년 문교부 편수관으로 일을 하면서 음악용어를 한글로 바꾸는데 기여하면서 우리 음악 교과서가 바뀌기 시작하였습니다.
김형주 선생님께서 음악 언론에 대한 공적에 대해 말씀하셨는데, 금 선생님은 작곡에서 구조주의적인 움직임을 유지하고 싶어 하는 전통 보수주의자 이었습니다. 당시 서울대 음대 중심의 창악회는 비(非)조성 음악을 추구하였는데, 선생님은 이러한 새로운 물결에 대항해서 우리 것을 지키고 유지하기 위해서 <월간 음악>을 만들어서 이를 줄기차게 주장하게 되었습니다. <월간 음악>을 통해서 구조주의자들과 조성주의자들이 논쟁을 했고 선생님께서 그것을 이끌어 오셨습니다. 그래서 지금의 작곡가회를 만드셨고 한국작곡가협회도 금수현 선생에 의해서 만들게 됩니다.


이용일: 이남진 선생님께서 지금 일목요연하게 설명하셨는데요. 피아니스트 김형근 선생도 음악용어 한글화에 기여를 하셨습니다. 이러한 분들이 계셨기에 음악용어가 한글과 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상만: 사실 음악용어의 한글화를 제일 먼저 시작한 사람은 박창해씨입니다. 군정청 시대에 최현배씨가 편수국장을 맡았었고 그 밑에 박창해씨가 있었습니다. 최현배씨의 영향을 받아서 박창해씨가 한글화를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나중에 그것을 기초로 해서 김형근씨가 <중등음악통론> 등을 편찬했고, 본격화 시킨 것이 금수현씨 입니다. 금수현씨는 어떻게 보면 민족주의자입니다. 한글학회에서 우리말을 되찾는데 가장 실천적인 일을 한 중요한 사람이 금수현씨입니다. 성을 금씨로 바꾸고, 벌써 70년 전에 자녀들 이름을 우리말로 지었다고 하는 것은 그 분이 한글에 대한 굉장한 애착을 가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최현배씨와의 관계가 굉장히 깊었고 한글학회 회원이었습니다. 그러한 그분의 정신을 중심으로 해서 우리나라 민족음악 혹은 국민음악의 방향을 설정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생각이 됩니다.
또한, 이분이 일제 강점기에 부산 상업학교를 다니셨습니다. 그 당시 상업학교는 아주 우수한 학교입니다. 故(고) 노무현 전 대통령과 국회 부의장 신상우씨도 같은 학교를 나왔습니다. 이 학교는 일본 사람들이 철저하게 상업적인 교육을 시키기 위해 세운학교로, 상업학교라는 시스템이 영국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영어를 열심히 가르쳤습니다. 그 당시부터 여러 가지 세계관이 열려있는 공부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동양 음악학교를 그곳을 졸업하고 일본의 쇼치쿠가극단에서 근무하였습니다. 이러한 것들이 금수현씨가 여러 가지 다양한 사고를 할 수 있는 뿌리가 되었고, 후에 <학생 희곡집>이라는 학생들을 극으로 교육시키는 작품집을 내는 기반이 되었습니다. 저서 중에 <거리의 심리학>이라는 저서도 있는데, 이런 것들을 보면 한국 민족들의 장래에 대해서 굉장히 폭넓게 사고를 가졌다는 생각을 볼 수 있습니다. 앞서 <월간 음악>을 계속 이야기 했지만, 한때는 문교부 편수관이라는 우리나라 음악정책을 결정하는 주류에 있었고, 5.16 혁명 전에 부산 도립 극장장을 하면서 경남지방 문화에 대해 주도적으로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분의 역할이 우리나라 사회에 끼치는 영향이 아주 컸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용일: 우리나라 음악 현상이, 소위 주도해가는 그룹, 서울대 출신이 아니면 안되는 세상에서 뉴욕의 어느 학교를 안 나오면 안 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메이저가 아닌 사람들은 빛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금 선생은 서울대 음대를 나오지는 않았지만 교육부 계셨기에 메이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나는 그분을 존경하는 이유가 항상 아침에 글을 쓰고 계셨습니다. 그것을 보면 대단하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남진: 금 선생님께서는 오전에는 참 정신이 맑으셨습니다. 그러다가 12시가 넘어서 점심 식사를 하실 때는 술을 드시면 평소에 금 선생님이 아니셨습니다(웃음). 그리고 저녁에부터 새벽까지는 글을 쓰셨습니다. 실제로 글을 굉장히 잘쓰셔서 오페라 「장보고」의 대본도 쓰셨습니다. 오페라를 1989년에 완성하셨고, 1993년에 서울 오페라단에서 공연을 하려고 했으나 선생님께서 1992년에 돌아가시면서 흐지부지 되었습니다. 그 대본은 지금보아도 아주 잘 써진 대본입니다. 앞서 말씀하신 <거리의 심리학>도 요즘 인문학자들이 쓸 만한 글이며 베스트셀러 이었습니다. 또한 선생님께서 새로이출판사 라는 인쇄소를 만들고 <월간 음악>을 창간하셨는데, <월간 음악>은 우리나라 최초의 가로쓰기를 한 잡지입니다. 그 분은 평범한 사람보다 10년을 앞서 갔습니다. 이론과 원리, 원칙에 의해 사시는데 굉장히 머리가 좋으신 분이셨습니다. 그 이후 <뿌리 깊은 나무>가 나오면서 80년대에 출판 방향을 바꾸었습니다.


김형주: 이분이 교육계에서 건실했는데 문교부에 편수관으로 왔습니다. 퇴임할 때, 그분이 잡지를 내야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당시에는 음악잡지를 발간하기가 너무나 힘들었습니다. 많은 음악잡지들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중에 금수현 선생이 저에게 도움을 요청하여 제가 편집을 맡으면서 1970년 7월에 1호가 나왔습니다. 그래서 3년 가까이 제가 편집을 하면서 운영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전문인이 필요하다고 판단이 되어 이남진 선생님이 오게 되었습니다. <월간 음악>이 있었기에 음악계가 활성화 되었고, 금선생님이 언론인으로 활동 할수 있었습니다.


이남진: 제 생각에는 <월간 음악>을 창간하게 된 것은 금수현 선생님이 편수관으로 주류에 계시다가 그만 두신 후에 국회위원을 하려고 했었습니다. 1961년 5.16 혁명이 났을 때 즈음 이었는데, 공천을 받지 못하면서 정치에 미련을 가지고 계시면서도 손을 강제적으로 떼게 되었습니다.


금노상: 제가 아버지의 생애를 3기로 나누어 볼 때, 편수관 하시기전인 1957년 전과 서울 생활, 음악언론인 시절 이렇게 세 가지로 구분하고 싶습니다. 일반적으로 많은 분들이 아시는 때는 <월간 음악>을 발행하시는 음악언론인 시절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1기라고 할 수 있는 부산에서의 활동 시기에 이룩한 업적이 부산에서는 지금까지도 높이 평가되어 지금은 부산시 강서구로 편입된 강서구청 옆에 ‘금수현 음악당’이 건립중인 것으로 알고 있고, 아버지생가 옆에 ‘금수현 노래비’, 부산 대청동 위쪽에 ‘금수현 음악쌀롱’ 이라는 문화관형태의 건물이 건립되어있습니다. ‘금수현’이란 타이틀의 뮤직컬도 공연할 만큼 존경을 받고 있음에 저는 매우 기뻤습니다.


이남진: 선생님의 가장 큰 업적은 경남도립 극장장을 하면서 한국 전쟁이 터졌을 때, 서울 음악인들이 금선생에게 신세를 안진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나라 음악계에서 서울대 음대를 나와야 주류가 되는데, 선생님의 작곡스타일이 서울대 음대 출신들과 대립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서울대 음대 음악인들과 모든 정책에 대립 하는 기둥 역할이 되었습니다.


금노상: 아버지께서 작곡계, 언론계에 계시긴 했지만 저의 생각에는 서울음대 출신 작곡가 출신들로 구성된 창악회에 대한 대립은 아니었고, 우리나라 전통적인 음악을 바탕으로 국민정서에 흡수될 수 있는 작곡기법을 고수하시려고 했던 것 때문에 마찰이 생기지 않았나 싶습니다. 비단 창악회 뿐만 아니라 무조음악이나 실험적인 현대작곡기법을 거부 하신 거죠. 제가 현대음악을 공부하거나 피아노 연습하는 것도 못마땅하게 생각하신 기억이 납니다. 그 후 어느 정도는 공감하시면서 이해하려고 하셨고요.
이 자리에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부산 시절의 아버지 역할이 엄청나게 크다는 것입니다. 제가 이번에 아버지 인물관 때문에 부산에 갔을 때 제갈삼 선생님 등 몇 분과도 이야기 했지만, 그때 이미 해방 후 음악잡지라고 할 순 없겠지만 음악소식을 프린트해서 발간한 것도 있고 맹인을 위한 점자악보도 연구를 하셨다고 하셨습니다. 또한, 해방되기 전에 이미 한글로 자녀들의 이름을 지을 정도의 의지라면 음악용어를 한글화를 가장 중요한 사업으로 생각 하셨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이상만: 또한 금수현 선생은 상업학교를 나와서 경영면에 자신을 가졌습니다.


금노상: 당시 부산 상업학교는 일본사람 위주로 들어가는 학교였고 한국사람 들은 수재들만이 들어 갈수 있었다는 학교 이었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음악에 대한 애착이 깊어 수업시간에도 선생님 몰래 책상 밑에 음악이론 책, 악보들을 몰래 보고 있었다고 말씀하시곤 했습니다. 졸업 후, 은행이나 좋은 직장을 포기하시고 동경으로 유학을 결정하시고 떠나시게 됩니다.


이상만: <월간 음악>을 하기 전에 중요한 업적이 음악영감을 1966년에 만든 것이었습니다.


김형주: <월간 음악>을 창단해서 십여 년 동안 운영 했다는 것이 보통일이 아닙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음악잡지를 한다는 것이 당시에도 꽤나 어려웠습니다. 그렇게 긴 시간동안 지속해서 음악잡지를 낸다는 것이 음악계의 발전에 공헌이 지대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 한 가지 금 선생님의 중요한 업적은 음악 단체에 관계한 일입니다. 1972년에 월간지를 함께 만들면서 음악계 작곡단체가 없다는 이야기가 나와서 제가 회칙을 만들면서 함께 한국 작곡가회를 만들었습니다. 또한 그무렵에 사단법인 한국작곡가협회를 만들었습니다. 금선생님께서 작곡계의 조직을 운영하는데 공헌을 하셨습니다. 


이용일: 제가 당시에 보기에 <월간 음악>에 읽을거리가 상당히 있었습니다.


이남진: 금수현 선생님께서는 본인이 옳다고 생각하시는 부분에 대해서는 타협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성격 덕분에 다른 사람들이 불문율로 여기는 것을 그 분은 꼭 언급하고 넘어가셨습니다. 그래서 <월간 음악>을 읽는 독자들이 얼마 되지 않아도 음악계에 미치는 영향은 강하고 그만큼 깊이 박힐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용일: 편집자가 자신의 철학이 있었기 때문에 잡지의 내용이 그 철학을 따라 갔습니다. 당시 음악회에 가면 <월간 음악>을 읽지 않고는 대화에 낄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 이었습니다. 


이남진: 금수현 선생이 <월간 음악>을 하면서 아주 큰 공헌을 하신 것이 한국가곡에 대한 기여입니다. 그 시절에 한국 가곡을 다 무시했었는데, 1970년대에 한국작곡가회를 만드시고 바로 한국가곡부르기운동을 시작하신 것입니다. 당시 엄정행이라고 하는 경희대 대학원 나와서 피아노 장사하던 사람을 불러내서 나와 함께 작업하자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엄정행 선생이 전국을 돌면서 한국가곡을 불렀고, 당시에 한국가곡 붐이 일어나서 전국에서 국민가곡 운동을 하였습니다. 또한, 동양방송과 김화영 선생님이 연합을 해서 우리 가곡 부르기 운동을 만들기 시작하는데 장일남의 「기다리는 마음」, 「비목」, 최영섭의 「그리운 금강산」이 유명해졌습니다. 


이용일: 제가 사모님을 만났을 때, 금 선생님은 스스로 좋아하고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다고 말하셨습니다.


이남진: 그분의 성격 때문에 우리가 오해하는 부분이 있는데, 그분은 타협을 모르고 원칙을 지키는 성품을 가지셨습니다. 제일먼저 사람들에게 큰 시비가 되었던 것이 성을 김에서 금으로 바꾼 것입니다. 그것은 일반인들과 음악인들에게도 신비로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원칙을 만들어 주장을 하면 현실이 다른 쪽으로 흘러가는데도 자기가 주장한 것에 대해서 타협을 안했습니다.


김형주: 제가 <월간 음악> 관계로 10여 년간 접촉을 했습니다만 그분은 옳은 것에 대해서는 고집에 센 편이었습니다. 


이용일: 제가 금수현 선생을 느끼기에는 ‘너희가 뭘 알아?’라는 생각을 가지신 것 같았습니다. 이분이 머리가 워낙 좋으신 분이라서 음악적 표현은 자유롭게 되지 않아도 음악계에 대한 형태와 구조는 머릿속에 다 파악이 되어있어서 이미 답을 가지고 사람들이 생각하지도 못한 행동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남진: 그분이 오랫동안 교육자 생활을 하셔서 그런지 상대방이 이야기하는 것을 마치 학생이 선생한테 와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느끼셨던 거 같습니다. 그분 안에 선생님의 마인드가 형성되어 있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이야기가 끝나고 나면 틀린 것을 꼭 다시 설명해주셨습니다. 실제로 그분이 가지고 계신 답이 있는데 그것이 현실에서 이루어지기 힘들었고, 그것을 타협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볼 때는 고집을 부린다고 보였을 것입니다.


금노상: 아마 아버님께서 불모지인 부산에서 아버지 생각대로 순조롭게 잘 진행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편수관을 하시면서 서울에 와서 똑같은 방법으로 진행하시려고 하시려고 하니 어려운 부분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용일: 당시 부산에는 일본에서 들어온 사람들이 문화를 이끌어 갔습니다. 대구와 부산중에도 시립교향악단이 먼저 생긴 것이 부산입니다. 자체적으로 오케스트라를 개발하였습니다. 그곳에서 활동하셨으니 부산에서 할 일을 다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상만 선생님 더 하실 말씀이 있으신가요?


이상만: 금수현 선생님하고 저는 개인적으로 가깝지는 않았습니다. <월간 음악>에 글을 쓴 것도 초기 10년에는 근처에도 안갔고 1980년대부터 조금 가까워졌습니다. 아까 언급했듯이, 금수현씨가 참 독보적인 사상가입니다. 또한 그분이 가졌던 생각과 사상이 상당부분 실천 되었습니다. 우리나라 음악 문화를 바꾼 사람입니다. 여러 가지 다른 쪽도 기여하지만, 그분을 이야기할 때에 장모와 그 부인의 업적을 동시에 평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제가 다니던 서울 성남교회에 김말봉 여사가 다니고 있었는데, 우리나라 최초의 여자 장로가 되었습니다. 박재열, 강석희, 나인용이 같은 교회 출신입니다. 금 선생이 장모님의 시에 의해서 「그네」라는 가곡을 썼고, 제일 잘 알려진 가곡 「그네」라는 타이틀로 「파랑새」, 「구름」 등이 포함된 가곡집을 출판도 했습니다. 그분의 작곡가로서의 역량을 평가하는 것은 둘째의 문제이고 한국가곡에 민족적인 색깔을 입힌 우리나라 고유의 독자적인 것들을 추구한 것은 높이 살 만합니다. 물론, 그 이전에 김순남씨도 그러한 작업을 했었지만, 일관된 방향으로 우리나라 가곡에 기본적인 틀을 만든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 됩니다.
또한, 그분의 업적 중에 하나가 1968년 영필하모니를 창단하여 젊은이들을 위한 교향악 운동을 전개한 것입니다. 문화적으로 불모지인 곳에서 교향악 운동을 시작하면서 금난새, 금노상 이라는 지휘자들을 배출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나는 그때 국회의원으로 나서려고 한 것도 어떻게 보면 큰 뜻이 있어서 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우리나라 음악인들이 정치세계에 들어가지 못해서 음악문화들이 국가 정책적으로 잘 세워지지 못하고 성장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지금이야 정치참여 했던 것이 좋게 평가되지 않지마는 저는 그것을 부정적으로 해석하지 않습니다.
유아독존적인 사람이라고 했지만, 자신의 생각과 다르다고 해도 그것을 모두 버리지 않고 타인의 의견도 인정하는 모습을 보고 감탄을 한번 한 일이 있습니다. 제가 어떤 글을 썼는데, 제 글을 굉장히 열심히 읽으셨더라고요. 그러면서 나에게 “이게 글이야.” 이렇게 최초로 칭찬을 받은 일이 있습니다. 금수현 선생이 볼 적에 저는 별로 자기편에 선 사람이 아닌 반대편에 있는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을 보고 ‘내가 평소에 생각한 고집쟁이가 아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사상가로서의 금수현에 대해서도 높이 탐구를 하고 평가해야하지 않겠는가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 그분은 자신이 추구하는 것이 있으면 그것들을 이룬 분입니다. 오늘날 한글 이름이 많이 쓰여지게 된 것도 그분이 시작을 먼저 했기 때문입니다. 


이용일: 이남진 선생님, <월간 음악>은 사훈이 있었나요?


이남진: 사훈은 정론직필(正論直筆)이었습니다. 선생님은 사람에 대한 미움이나 이런것들을 가지고 계시지 않았고, 그 생각이 옳다고 생각하시면 반대 의견도 존중하셨습니다. 그래서 이강숙 선생님이나 김형주 선생님처럼 의견이 달라도 그 사람 자체를 좋아하셨습니다.


김형주: 저는 <월간 음악>을 통한 금수현 선생님과의 인연을 평생 잊지 못합니다. 저 또한 전력을 다해서 협력하였고, 매일 밤 금수현 선생님과 함께 만나서 이야기를 하면서 다투기도 하고 토론도 하면서 의견을 나누었습니다. 저도 관심을 가지고 잡지를 도왔고 금 선생님도 저를 신뢰하였습니다. 그러다가 13년간 금 선생님과의 인연을 끊게된 일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 출판된 잡지를 보니까 음악평론가 신뢰도 조사라는 항목이 있었습니다. 언론인들에 대해 독자들이 투표를 하여서 개인적 평가가 나오는데 투표한 것을 잡지에 냈습니다. 제가 편집할 때에도 몰랐는데 출판해보니 생겼습니다. 그것을 보고 제가 평론가로서의 권위가 떨어질 수 있다고 생각이 되어서 당장 따졌습니다. 그러한 의견 대립이 생기면서 오랜 기간 인연을 끊게 되었지만, 저는 그분의 공적이 우리나라 음악계에 굉장한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이 됩니다. 또한 음악계를 넘어서 한글학자로 활동했던 것과 음악계와 언론계를 연결하여 음악언론계에 큰 영향을 주었다는 것, 그리고 음악용어를 한글화 시킨 것이 큰 업적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정리_김진실 기자. 사진_김문기 부장.

기사의 일부만 수록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음악춘추 2016년 9월호의 기사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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