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음악춘추

인물탐구 - 합창지휘자, 오르가니스트 곽상수 / 음악춘추 2017년 3월호

언제나 푸른바다~ 2018. 2. 4. 1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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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춘추 2017년 3월호

기획대담 | 인물탐구

합창지휘자, 오르가니스트 곽상수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합창지휘자이자 오르가니스트인 故(고) 곽상수 선생(1923-2013)은 경기중학교와 일본 야마구치 고등학교에서 문과를 졸업하였다. 학병으로 인하여 동경대학 미학과를 2년 수료하였고 1947년 서울대학교 철학과를 제1회로 졸업하였다. Westminster Choir College(파이프오르간 및 합창지휘 전공) 대학원 졸업(1957), 2007년 3월 11일 개교기념일에 졸업50년에 수여되는 뛰어난 동문공로상 Distinguished Alumni Merit Award을 수상 하였다. 1959년부터 1988년까지 연세대학교 음악대학 교회음악과 교수로 재직하였고 1975년부터 2001년까지 연세대학교회 교회음악지도자를 역임했다.
곽상수 선생은 한국 합창음악의 선구자로, 성종합창단(1947-1964) 창설지휘하고 바흐「마태 수난악」 등 수많은 합창대곡을 한국 초연하였으며 서울소년합창단(1958-1964) 창설지휘, 연세콘서트콰이어(1965-1986) 창설지휘, 연세심포닉콰이어(1965-1993) 창설 지휘하여 여러 차례의 국내 및 해외 연주를 하였다. 또한 합창총연합회 이사장(1981-1984) 역임하였다.  
한국 최초의 파이프오르간 전공자인 그는 한국 최초의 주문 파이프오르간을 연세대 루스 채플에 설치(1977)하였고 서울 세종문화회관(1978). 횃불선교센타(1992) 오르간 설치 자문하였으며 한국오르가니스트협회 창설 이사장(1983-1988)을 역임하였다.
교회음악의 개혁자로 광복 후 승동교회 6년, 영락교회 4년, 전주 서문교회 1년, 향린교회 5년 성가대를 지휘했으며 새문안교회 3년, 동신교회 10년, 연세대학교회 26년, 교회음악지도자로 2001년 6월 은퇴하였다. 그는 교회음악이 올바른 예배음악의 기능으로 한국교회 예배 갱신에 기여할 것을 역설하였으며 교회음악학회 창설 회장(1983) 역임하였다.


일시 : 2017년 2월 10일 오전11시
장소 : 코스모스 악기사 7층
진행 : 이용일(한국음악교육협회 명예회장)
패널 : 이상만(음악평론가, 국제델픽위원회 명예회원)
김명엽(서울시립합창단 단장 겸 상임지휘자)
김은영(대전침신대교수)


1. 곽상수 선생의 성장과정과 음악의 출발
2. 곽상수 선생과의 첫 만남
3. 곽상수 선생의 음악세계
4. 곽상수 선생의 교육관
5. 곽상수 선생이 국내 음악계에 끼친 영향


이용일: 곽상수 선생님은 일생을 우리나라 오르간과 교회음악을 위해 헌신하신 우리나라 오르간뿐만 아니라 교회음악의 개척자입니다. 우리나라 음악사에 길이 남으실만한 분이니 오늘 나오신 패널 분들께서 그 업적에 대해서, 또 알려지지 않은 것이 있으면 더 좋겠고요. 말씀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먼저 이상만 선생님께서 말씀해주십시오.


이상만: 먼저 자료에 빠진 것이 있습니다. 곽상수 선생님이 기독교 방송국의 초대 음악과장을 했습니다. 우리나라 클래식 음악을 본격적으로 다룬 것이 기독교 방송이 처음입니다. 명곡감상이라고 해서 저녁8시에 하이든의 「101번 교향곡의 2악장」이 테마 음악으로 울리면 클래식 음악을 듣는 사람들이 전부 그걸 들었습니다. KBS가 있었지만 거기도 본격적인 클래식 음악은 다루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 방송이 클래식계에서는 상당히 영향력이 있고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지금은 기독교방송국이 옛날처럼 선명하지 않지만 그때는 그런 일을 했었습니다.
곽상수 선생이 권위가 있었습니다. 첫째는 공부를 많이 했기 때문입니다. 처음에 이 양반이 우리나라에 알려지기는 경기중학교 다닐 때 피아노를 했습니다. 조선일보 콩쿠르에 입상해서 알려졌는데 경기 중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일본으로 유학을 가서 일본의 야마구치 고등학교를 나왔습니다. 그곳은 일본의 명지유신을 주도한 사람들이 야마구치 출신일 정도로 명문 학교입니다. 일본에는 숫자고등학교라 하는 일고, 삼고 오고, 육고가 있었는데 그게 다 동경대, 경동대로 가는 지름길입니다. 곽선생은 야마구치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가기 어려운 동경대학의 미학과를 다녔습니다. 동경대 미학과를 다닌 한국 사람은 곽상수씨와 윤현대씨 두 사람 뿐입니다. 윤현대는 문화 연극 쪽이었고 곽상수 선생은 음악 쪽으로 학교를 다녔습니다. 그러다가 전쟁이 터지면서 학병으로 가서 일본 군대 생황을 마친 후 서울대학교 철학과에 들어가서 철학과 1회 졸업생으로 졸업 하였습니다. 이러한 교육적 배경이 튼튼했기에 곽선생이 권위가 있었습니다. 미국 유학도 2번이나 했고 웨스트민스터 콰이어 컬리지도 갔기에, 또 학력이나 이런 것으로는 다른 사람들이 빼놓을 수 없는 존재 이었습니다. 여기 제자들도 계시지만, 충청도 청주 출신으로 사람은 부드러웠지만 권위 면에서는 누구보다도 자기의 존재를 자존하던 분입니다.
방송도 했지만 이론적인 면도 뛰어나서 음악적 용어도 꼼꼼하게 관여했습니다. 교회 음악이라는 말도 곽상수씨가 만든 말입니다. 원래는 종교음악이라는 말을 사용했는데 교회음악으로 바꾸어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이용일: 혹시 선생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으신가요?


김명엽: 어리시절 이야기는 듣지 못했습니다. 제가 선생님을 처음 만난 때는 1963년, 제가 입학하고 나서입니다. 당시에 연세대학교에 오시면서 여러 가지 일들을 시작하셨는데, 지금의 콘서트콰이어인, 연세스몰콰이어도 만드셨습니다. 연세스몰콰이어가 생겼을 때 제가 대학교 4학년이었는데, 그곳에서 초대 총무가 되어 선생님과 본격적인 합창활동을 시작하였고, 평생 그분 밑에서 심부름을 많이 했습니다. 한국 합창 총회 연합회장을 하실 때 제가 사무국장을 했고요. 앞서 이상만 선생님께서 좋은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젊은 사람들에게 곽선생님의 업적을 이해시키기 위해서는 20세기 중반의 우리나라 상황을 먼저 이야기 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이분의 업적을 따져보자면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겠습니다. 방금 말씀하신 교회음악분야와 오르간음악분야, 합창음악분야이고 여기에 교육파트도 덧붙일 수 있겠죠. 그래서인지 곽상수 교수님을 이야기 할 때는 ‘최초, 초대, 1대’라는 용어가 많이 붙습니다. 한국 최초의 오르가니스트이고, 최초의 오르간 독주회를 열었습니다. 또한 창단한 합창단도 많이 있어서 ‘창단, 창립, 최초 번역, 초연’등의 해설이 많이 붙습니다. 1958년 미국에서 공부를 마치고 오셔서 처음 만든 합창단이 한국 최초의 소년 합창단입니다. 당시에 보이소프라노를 처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두성발성이라는 말도 처음 사용하셨습니다. 


이용일: 당시 시대상으로는 보이소프라노와 두성발성은 생각도 못할 일입니다.


김명엽: 지금도 그렇죠. 또한 선생님이 교회음악분야에 남기신 업적을 말하자면, 앞서 말한 종교음악과를 교회음악과로 명칭을 변경하셨는데 제가 종교음악과에 마지막으로 입학한 학생입니다. 종교음악이라고 하면 모든 종교를 총괄하는 종교예술로서 음악을 지칭하는데, 교회 음악은 Church music으로 그 안에서도 교회음악과 예배음악으로 나누어집니다. 교회음악은 예배, 교육, 친교, 선교, 봉사를 위한 교회안의 음악을 총칭하는데 예배음악은 예배를 위한 음악, 예배 봉사에 합당한 음악으로 회중찬송, 성가대 찬양 등을 다루는 음악입니다. 이분이 예배 음악에 아주 집중을 해서 목사님들이나 성직자들이 해야 할 만 한 예전(禮典)이나 의식을 많이 만드셨고, 돌아가시기 전까지 루스채플에서 그것을 행했습니다. 그분이 만든 예전음악을 보면, 미연합장로교 예식서에 의한 성찬 예배를 1984년도에 교회음악 세미나에서 했고요. 미국 에피스코펄처치 예식서에 근거한 음악을 1986년에 오르가니스트 대회 때 했습니다. 오르가니스트 대회 때 개회예배도 하고 제가 이끌고 있는 교회음악아카데미 주최로 성찬 모범예배 등등 예식서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용일: 네. 김은영 선생님은 어떻게 처음 만났나요?


김은영: 저는 연세대학교 교회음악과에 입학했을 때 학과장이자 저의 오르간 지도교수님으로 곽상수 교수님을 만났습니다. 제가 2학년 때 교수님께서 은퇴하셨는데요, 대학교를 갓 입학했을 때, 개강 모임에서 곽상수 교수님이 교회음악에 대해서 말씀하신 기억이 납니다. 교회음악에 대한 열정이 대단하셔서 교회음악의 중요성과 교회음악을 공부하러 온 학생들에게 사명감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힘 있게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당시 어린나이에 그 말씀을 들으면서 ‘교회음악이라는 것이 막연히 피아노 치고 오르간 치면서 반주하는 것이 아니라 중요한 사명을 가지고 있는 것이구나.’하는 것을 느끼면서 많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열정을 돌아가시던 때까지도 그대로 가지고 계셨습니다. 선생님께서 돌아가시기 2년 전쯤 연세대 교회음악과 동문회에 연로하신 곽교수님이 참석을 하셨는데, “곽상수 교수님 한 말씀 말씀하시죠?”라고 사회자가 이야기 하니, 제가 입학했을 당시의 열정이나 목소리 톤이 전혀 다름없는 모습으로 한 시간 넘게 열정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그걸 보면서 평생을 교회음악에 대해서 강한 사명감을 가지고 교육 하셨고 그것을 위해서 살아오셨다는 것을 느낄 수 있어서 저희 제자들이 감동받았던 기억이 납니다.


이용일: 과거에 교회음악이 찬미가, 찬양가, 찬미가, 찬송시로 불렸는데, 찬송가로 바뀐 것이 언제인가요?


이상만, 김명엽: 합동찬송가가 나올 1950년대쯤입니다.


이용일: 찬송가로 변하면서 교회음악이 한번 크게 도약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때 곽상수 선생님께서 관여하셨을 것 같고요. 또 하나, 세상 지식이 풍부하신 분이시기에 거기에 기초한 기독교 신앙, 거기에 기초한 음악. 이러한 튼튼한 뿌리가 있었기에 그러한 업적을 남기지 않으셨나 싶습니다. 한쪽으로만 기울어지면 균형감이 없는데 선생님이야 말로 인격형성과정이 제대로 나와 있지 않았나싶습니다.


김명엽: 곽 선생님께서 1967년 개편찬송가 운영위원을 했습니다. 개편찬송가는 아주 정성껏 만들어진 찬송가이지요.


이용일: 1950년대 후반부터 1960년대까지는 우리나라 합창의 전성기였습니다. 당시에 곽 선생님은 어떤 활동을 하셨나요?


김명엽: 그때 곽 선생님께서 창단하신 성종합창단과 서울소년합창단 중심으로 활동하셨습니다. 


이상만: 성종합창단은 1940년대 해방 직후에 만들어 졌습니다. 제일 먼저 생긴 것이 박태준의 오라토리오이고 후에 이동일의 시온성합창단. 곽상수의 성종합창단이 서울에서의 본격적인 합창 운동의 시발이 되었습니다.


이용일: 곽상수 선생님의 오르간 음악의 특징은 어떻게 보시나요?


김은영: 저는 곽 선생님께 오르간의 기초부터 배웠습니다. 그리고 선생님께 배웠던 티칭 기법을 저도 지금까지도 계속 사용하고 있고, 저에게 배운 제자들도 역시 그 방법으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하시는 것을 들어보니 곽상수 선생님께서 학문적인 깊이가 있으셨기에 이론이 바탕이 된 티칭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맨 처음에 오르간에 앉을 때는 앉는 위치와 중앙을 찾는 방법, 발을 사용하는 방법 등 어린아이들이 피아노를 처음 배울 때 가르쳐주듯이 기초부터 세밀하게 가르쳐 주셨던 기억이 납니다.
뿐만 아니라 오르간에서는 어떤 소리가 나야한다는 것과 음악적으로 손에서 표현하는 방법을 섬세하게 레슨을 하셨습니다. 처음 레슨에서 당황했던 기억이 나는데, 악기가 익숙하지 않은 상태에서 레슨을 받으며 굉장히 힘들기도 했고, 5~10페이지를 악보를 봐서 갔는데 한 시간 내내 한 두 마디 레슨을 받으니 허무할 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교수님께 레슨을 점점 받으면서 추구하시는 것이 무언지 알 수 있었습니다. 매우 꼼꼼하고 세밀하시며 철저하셨습니다.
곽 선생님의 철저한 티칭은 연주회 준비를 할 때 절감을 했는데요, 심미적인 것을 중요시 하셨던 선생님은 포스터를 어떻게 만들 것인지, 종이의 질과 크기, 글씨체 등등부터 연주자가 무대에 걸어 나가서 인사하는 방법, 오르간 의자에 앉고 내려오는 것까지 모든 것을 점검하고 지도하셨습니다. 연주 뿐 아니라 총체적인 예술을 지도하고 추구하셨습니다.


이용일: 저는 일본에 공부하러 가서 오르간을 치는 것을 보게 되었어요. 일본 사람 90프로는 풍금으로 배우고 오르간으로 연결하지, 피아노에서 오르간으로 오는 경우가 거의 없다고 합니다. 우리나라는 거의 피아노에서 갑니다. 또한 어느 성당에 갔는데 오르간 자체가 울리게 만들어 놓아서, 설계부터가 중세 성당처럼 만들어 놓았습니다. 제가 스키바라고하는, 우리나라로 치면 항구근처 절에 갔는데 그곳에도 파이프 오르간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오르가니트들이 와서 스님의 목탁에 즉흥연주를 했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일본은 오르간이 벌써 세상 속으로 들어왔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지금 제가 걱정되는 것은 요즘 교회에서 오르간을 설치하지 않습니다. 교회에서 좀 더 일찍 곽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받아드렸더라면, 교회음악이 더 활발해졌을 텐데... 교회음악이 발전하지 않으니 학과가 사라지면서 직접적인 영향이 옵니다. 우리들이 이 좌담을 통해서 교회음악에 대한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면 좋겠습니다. 


김명엽: 그분이 주장한 것을 오르간하고 합창을 같이 엮어서 이야기를 드리겠습니다. 그분이 하신 합창음악은 전부 교회합창입니다. 그분의 주장이 뭐냐면, 예배에는 정서가 있어야 하는데 그 정서가 ‘경건’(piety)과 ‘흠숭(欽崇, adoration)’입니다. 성(聖)과 속(俗)이 구별되어야 한다는 것이죠. 현재 우리나라 교회에 속이 많이 들어와 있습니다. 곽 선생님은 세속과 성스러운 것은 구별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셨는데, 예배음악의 전문성을 위해서 단어를 찾아내신 것이 <시33편 3절> 말씀 중에서입니다. ‘즐거운 소리로 공교히 찬송할 지어다. (시편33편 3절)’ 공교해야한다. 또한 예를 갖춰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름다움이라도 거룩한 아름다움이 있어야 한다고 하시면서, 특별히 합창 음악에 있어서는 가사 제일주의를 외치셨습니다. 성경에도 보면 ‘지혜의 시’라고 표현 했는데, 그 말을 강조해서 성악곡이나 합창곡을 할 때에 텍스트를 상당히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선생님께서 펼치신 것이 아주 무의미하진 않습니다. 파이프오르간이 서울을 비롯하여 전국적으로 많이 생기고 있고 콘서트도 많이 열리는데, 단지 이것이 예배에 적용이 되고 있지 않을 뿐입니다. 이는 목사님들이 모르시기 때문에 적용이 잘 되지 않는 것인데요. 저 같은 경우에는 싸워가면서 하고 있고요(웃음). 콘서트는 오르간 연주가 상당히 많이 발전했죠.


이상만: 오르간 이야기를 하자면, 사실은 일제 강점기에는 우리나라에 오르간 4대밖에 없었습니다. 제일먼저는 시작한 곳이 명동성당에 프랑스제 오르간, 두 번째는 덕원에 독일 수도원이 있었는데 그곳 성당에 독일제 오르간, 그리고 정동제일교회에 미국제 오르간, 원주에 감리교회에 오르간 이렇게 4대입니다. 해발 후에 최초로 오르간을 설치한곳이 연세대학교 루스채플 오르간입니다. 곽 선생님의 의견이 적극적으로 반영된 것으로 생각됩니다. 또한 오르간 설치를 적극적으로 반영한 것이 세종문화회관의 오르간인데, 그때도 제가 주도적 역할을 했지만 곽선생의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곽 선생님은 원칙주의자입니다. 원칙에 어긋나는 것은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아마 제자들도 고생을 많이 했을 것입니다(웃음).

명엽: 1957년에 미국에서 돌아오시면서 승동교회 성가대를 지휘했는데, 당시에 미국에서 오르간 지도교수님이 선물로 주신 파이프 오르간을 그 교회에 기증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6년간 지휘를 하셨습니다.


이상만: 그때는 승동교회는 아주 중요한 교회였습니다.


명엽: 그렇습니다. 교단이 분리되면서 지휘를 그만두게 되었죠. 또한 영락교회도 계셨습니다.


이용일: 저는 이 자리에서 오르간에 대해서 한 마디 하고 싶은 것이, 금호의 박승용 이사장이 예술의전당에 오르간을 설치하라고 재정적으로 도움을 주었는데, 그것으로 분수를 만들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가 있는지... 그런데 오르가니스트들은 불평 않고 음악가들도 불평을 않았습니다. 음악가들이 자신들의 눈앞에 있는 것만 바라보는 좁은 시야를 가지지 않고 그로인해 후에 자신들에게 돌아오는 영향을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이상만: 제가 예술의전당을 지을 때 초기에 관여 했었는데, 콘서트홀에 오르간을 설치할 자리로 지정해 놓았는데, 지금까지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내년이 30주년인데... 이것은 지도자들에게도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횃불선교회관에 오르간이 생긴 것도 곽선생의 꾸준한 압력이 작용했다고 봅니다.  우리나라 오르간 문화를 개척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고, 피아노를 치던 그분의 누이 곽은수 선생도 오르간으로 전환을 시켰습니다. 또한 하나 빠진 것이 6.25때 전주에 피난 가서 전주 신흥학교 선생을 해서 전주지역 음악문화를 확산하는데 굉장히 영향을 끼치셨습니다. 


김명엽: 그때 전주 서문교회 성가대도 지휘 하셨습니다.


김은영: 예술의전당 오르간 말씀하시니까 저도 이야기 하자면, 우리나라 콘서트홀에는 오르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합니다. 외국의 콘서트홀을 보면 뒷면에 오르간이 설치되어 있고 연주에도 활용하는데... 우리나라 콘서트홀은 다목적으로 짓다 보니까 오르간이 설치되는데 방해가 된 것 같습니다. 예술의전당과 같은 공연장에도 파이프오르간이 많이 들어왔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이용일: 예술의 전당은 콘서트홀 순수 무대인데도 설치되어 있지 않습니다. 세계의 어느  콘서트홀에도 오르간은 무조건 설치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잔향에 큰 영향을 주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의 음악가와 정치가들이 우리나라 음악계에 무엇이 필요한지를 정확하게 알고 시야를 넓혀 더 멀리 내다보면 좋겠습니다.


이상만: 곽 선생님이 오르간에 대해서 그러한 비전을 제시했다는 것이 상당히 중요합니다. 그것은 그 분이 철학을 공부했기에 가능한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그 씨앗을 우리가 자꾸 곽 선생님의 이야기를 하면서 사람들에게 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첫 번째, 교회 예배에서는 음악이 차지하는 비중이 제일 큰데 우리나라는 목회자들이 그런 이해가 굉장히 부족한 분들이 많고 신학에서도 이것을 철저하게 가르쳐야 하는데 목회자들에게 문화적인 교육이 거의 없어요. 그래서 이런 것들도 곽 선생이 일찍이 주장을 해서 목회자들이 예술적인 무식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많이 하셨습니다.


김명엽: 곽 선생님의 교회 역사를 보면 승동교회 6년, 영락교회 4년, 전주 서문교회 1년, 향린교회 5년, 새문안교회 3년, 동신교회 10년, 연세대학교회 26년 계시면서 뜻을 펼쳤습니다. 연세대학교회에서 모든 음악을 다 거기서 펼쳤죠. 은준관 목사님과 이계준 목사님과 콤비가 되어 곽 선생님이 펼치고자 했던 교회 음악을 계속해서 할 수 있었습니다.


김은영: 사실 교회음악을 하면서 가장 어려운 점은 목사님과의 교회음악에 대한 이해가 맞지 않을 경우에 저희들이 생각하는 교회음악을 펼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저는 교회음악가들과 목사님들간의 교류와 상호 이해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데요, 그런 면에서 신학생들에게 교회음악을 강의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저는 2년 전부터 신학을 공부하고 있어요. 신학을 함께 공부하다보니 어떤 면에서는 목사님들을 이해하게 되고 접근할 수 있는 부분도 보게 되면서 그 차이를 좁힐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교회음악가와 신학자들의 생각이 너무 단절되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서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깊이 있는 교육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용일: 제 생각에 우리나라에서 오르간에 대해서 혹은 교회 음악에 대해서 주장하려면 곽 선생님만큼 사회에서 학력과 발언권이 있어야 하는데, 우리가 그만한 경력이 없습니다. 선생님만큼 참고 기다리고 사람을 다루는 분이 안 계십니다. 한편으로는 곽 선생님도 교회를 옮기실 때는 좋게 끝나서 옮겼다가 보다는 많이 부딪혔을 것입니다. 곽 선생님도 그랬는데 우리야 오죽할까요. 우리가 더 노력하면 좋은 결과가 있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김명엽: 그분이 줄곧 평생 주장한 것이 예배음악 담당자의 호칭을 교회음악지도자라고 했습니다. 미국 주보에는 담임목사와 음악감독, 두 사람의 이름 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미국이나 독일에서는 교회음악지도자가 담임목사님과 공동목회하면서 음악분야는 음악가에게 일임하고 목회는 성직자가 맡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루스채플에서 실현했고요. 그런데 한국교회에서는 그것을 실현하기 쉽지 않습니다. 제가 교회 주보를 보며 순서를 세어보니 예배순서의 의 3분의 2가 음악입니다. 교회음악가가 예배 안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하는데, 그런 역할을 주지 않으니까요.


김은영: 발언권이 없는 것이 학문이나 정치적인 파워의 문제라기보다는 한국의 교회는 목사님께서 모든 것을 결정하는 문화가 되어 있기에, 다른 모든 분야에서 전문성이라기보다는 목사님 위주로 맞추는 경향이 있습니다. 또한 지휘자나 음악 담당자가 교회음악을 잘 모르는 경우도 있어 아쉬움을 느끼기도 합니다. 교회음악에 대한 인식을 바로 하고 교회 안에서 교회 음악가들의 전문성과 역할이 인정받았으면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이상만: 곽상수 선생님의 가장 큰 업적 중에 하나는 합창지휘나 오르간 분야에서 한국의 지도자들이 거의가 곽선생의 밑에서 자랐다는 것이 우리나라 교회나 음악사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교회 음악과가 몇 군데 있지만, 연세대학교 교회음악과같이 확고하게 많은 지도자를 낸 것은 한국뿐만 아니고 세계적으로도 굉장히 중요한 학교가 아니었던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곽 선생이 우리 역사에 끼친 가장 큰 공로 중 하나가 아닌가 싶습니다.


이용일: 곽상수 선생님의 합창음악은 어땠나요?


김명엽: 그분이 합창음악에 중점을 두신 것이 예배음악, 예를 들자면 바흐의 칸타타, 영국의 앤썸이나 이런 음악들을 정교하게 만드는, 혹은 그분이 잘 쓰시는 단어인 공교하게 만드는 음악을 하셨습니다. 저희들이 모셔서 합창총연합회를 만들면서 2대 회장을 하시면서 전국으로 펼치는데 많이 애쓰셨습니다. 당시에 전국 연합회가 일반합창연합회, 고등학교합창연합회, 소년소녀합창연합회 등 3개가 있었는데 이를 9개 단체로 확산을 시키면서 전국규모의 단체로 활성화시켰습니다. 또한 「메시아」, 「천지창조」, 「바흐 칸타타」 등을  번역 하시면서 많은 외국 곡들을 소개하는 일도 많이 하셨고, 찬송가도 작곡을 하셔서 우리찬송가에 4곡이 실려 애창되고 있습니다. 


이용일: 오늘 곽상수 선생님이 우리나라 오르간 음악과 합창음악에 길잡이가 되어주신 것을 조명해 볼 수 있었습니다. 또 하나는 우리 사회에서 좋은 학교 나온 사람들이 리더가 되어야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김명엽: 사실 곽상수 선생님께서 자신의 장례식 순서도 스스로 만드셨습니다. 장례식의 음악도 제자들과 함께 녹음을 하셨고요. 새문안 교회 묘지에 묻히셨는데, 교수님이 원하시는 순서대로는 이행하지는 못했습니다만...


이상만: 곽상수 선생님이 청주에서 경기고로 들어온 것만 해도 어렸을 때부터 천재적인 머리를 가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 하나는 우리나라의 교회가 경건성을 회복하여야 합니다. 이를 곽상수 선생님의 유언으로 오랫동안 간직하여야 하지 않아 생각이 됩니다.


정리: 김진실 기자. 사진: 김문기 부장

기사의 일부만 수록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음악춘추 2017년 3월호의 기사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김문기의 포토랜드>




진행 : 이용일(한국음악교육협회 명예회장)



이상만(음악평론가, 국제델픽위원회 명예회원)



김명엽(서울시립합창단 단장 겸 상임지휘자)



김은영(대전침신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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