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음악춘추

인물탐구 - 합창지휘자 박태준 / 음악춘추 2017년 4월호

언제나 푸른바다~ 2018. 2. 6. 1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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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춘추 기획대담 | 인물탐구
우리나라 합창음악의 초석을 닦은 합창지휘자 박태준


합창지휘자 박태준(1900~1986)은 대구에서 출생하여, 기독교계 계성학교를 거쳐 평양숭실전문학교를 졸업하였다. 숭실전문학교 재학시 서양 선교사들에게서 성악과 작곡의 기초를 배워 「가을밤」, 「골목길」 등을 작곡하였는데, 이 곡들은 동요의 초창기 작품으로 평가된다.
졸업 후 마산 창신학교에서 교직생활을 하며 우리나라 선구적 시인 이은상(李殷相)과 함께 「미풍(微風)」, 「님과 함께」, 「소나기」, 「동무생각」 등의 예술가곡 형태의 노래를 작곡하였다. 1924년에서 1931년까지 모교인 대구 계성중학교에 재직하면서 「오빠생각」, 「오뚝이」, 「하얀밤」, 「맴맴」 등의 우리나라 동요의 대표적인 작품들을 작곡하였으나, 이 가운데 윤복진의 작사에 곡을 붙인 50여 곡의 작품들은 윤복진의 월북관계로 1945년 이후 가사가 바뀌거나 또는 금지되기도 하였다.
1932년 이후는 그의 음악세계의 제2기로서, 미국의 더스커럼(Tusculum)대학과 웨스트민스터(Westminster)대학에서 합창 지휘를 배워 최초로 합창지휘로 석사학위를 취득하였다. 귀국한 뒤 1936년 숭실전문학교 교수로 취임하였으며, 민족 항일기 말에는 민족운동으로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1945년 전문 합창단인 한국 오라토리오합창단을 창단하여 1973년까지 지휘자로 활동하며 합창음악 발전에 기여하였다.
1955년 연세대학교에 종교음악과를 개설하여 기독교 음악교육의 초석을 쌓고, 연세대학교 음악대학 학장 및 명예교수를 역임하였다. 1945년 이후 1973년까지 남대문교회 성가대를 지휘하고, 또한 1968년 이후 한국음악협회 회장을 역임하면서 서울음악제를 창설하기도 하였다. 박태준 작품은 동요 등 150여 곡으로, 정돈되고 아름다우면서 격정이 내재되어 있다. 문화훈장·서울시문화상·예술원상을 수상하였다.
출처: 박태준 [朴泰俊]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일시 : 2017년 3월 7일 오전11시
장소 : 코스모스 악기사 7층
진행 : 이용일(한국음악교육협회 명예회장)
패널 : 이상만(음악평론가, 국제델픽위원회 명예회원)
김영방(연세디지털 콘서바토리 특임교수, 아태 관악연맹 부회장, 전 해병대 군악대장)
나인용(연세대학교 명예교수)
신갑순(삶과꿈 발행인, 전 삶과꿈 챔버오페라)
도정삼(전 해군국악대장, 로타리클럽5240지구 총재)
김선애(성악가, 전 전남여고 교사)
김명엽(서울시합창단 단장 겸 상임지휘자)


1. 박태준 선생의 성장과정과 음악의 출발
이용일: 오늘은 우리나라 합창음악과 기독교 음악에 초석을 닦으신 박태준 선생님에 대해서 이야기 하면서 후세에게 그분의 업적을 알리고자합니다. 바쁘신 가운데 이렇게 나와 주셔서 감사하고, 특별히 오늘 화상통화를 통해 미국에 계신 도정삼, 김선애 선생님도 함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먼저 선생님의 성장과정에 대해서 아시는 분은 있나요?


상만: 아버지는 장로교인 대구제일교회의 장로로,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박태준 선생은 소학교 다닐 때부터 풍금을 잘 쳤습니다. 4부로 찬송가를 칠 수 있을 정도로 잘했고, 노래도 잘해서 숭실학교에 갔습니다. 대구에서는 계성학교를 졸업했는데, 장로교 계통의 학교입니다. 당시에는 장로교가 서울보다는 평양에서 더 강했고 숭실학교가 우리나라에서 제일 먼저 된 대학인데 그쪽으로 유학을 갔습니다. 박태준 선생이 먼저 가고 현제명 박사가 계성학교를 졸업하고 숭실학교를 따라 갔습니다. 숭실학교에서는 문과지만 말스벨이라는 선교사에게 배웠는데 그분이 음악을 본격적으로 지도해서 음악가가 되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한때 학교를 졸업하고 나서는 마산에 창신학교(기독교계통학교)에서 교직생활을 했는데 당시 이은상씨의 아버지가 창신학교를 설립하셨습니다. 그래서 그곳에서 이은상씨와 가족관계가 형성이 되었고, 이은상씨의 가사를 많이 써서 작곡을 했습니다. 1922년에 작곡을 시작해서 그때 당시로서는 예술적인 측면에서 가장 수준 높은 작품을 쓰셨고 가곡뿐 아니라 동요도 많이 쓰셨습니다. 윤복진이라는 월북 작가의 가사에 동요를 많이 썼는데, 대표작품이 「아 가을인가」입니다. 당시에 명곡처럼 부르던 이 노래는 후에 가사가 바뀌게 되었습니다.


2. 박태준 선생과의 첫 만남
이용일: 박태준 선생님과의 첫 만남에 대해서 이야기 해보겠습니다. 신갑순 선생님은 언제 박태준 선생님을 처음 만나셨나요?


신갑순: 저는 연세대학교 종교음악과 1회 입학생입니다. 박태준 선생님께서는 경성여대 의과대학에서 교양수업으로 음악을 가르치셨는데, 제 모친 되시는 분이 그 학교에 다니시면서 배우셨습니다. 제가 학교에 진학했을 때, 박태준 선생님께서 합창음악의 세계를 열어주셨습니다.


이용일: 화상대화를 하면서 미국하고 연결되어 있는데요. 김선애 선생님이 처음 박태준 선생님을 만난 것은 대학에서 인가요?


선애: 제가 대학 입학할 때, 아버지께서 연세대학교에 종교음악과가 생겼다고 하셔서 박태준 박사님을 처음 뵈었습니다. 박사님께서 무슨 과를 가고 싶은지 물어보셔서 성악과를 가고 싶다고 대답했고, 박태준 박사님의 반주에 맞춰서 1~2절을 부르고 학교에 등록 했습니다. 4년 동안 다니면서 박태준 박사님께 많은 은혜를 입었습니다. 선생님의 오라토리오 합창단에도 들어가서 활동하게 되었고요. 


김영방: 제가 초등학교 시절에 학예회 때 독창을 했었는데 박태준박사님의 미풍을 노래하였습니다. 대학교에서 제자가 되기 전부터 인연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웃음). 저는 고등학교 때 신학교와 음악대학 중에 고민했습니다. 그러던 중, 연세대학교에 종교음악과가 생겼다는 이야기를 듣고 입학시험을 보았습니다. 입학시험을 보기 전에 박 박사님을 만났는데, 그동안 알고 있었던 예술가들의 화려하고 독특한 모습이 아닌, ‘순수한 그 모습 그대로구나.’라는 생각을 하면서 놀랐습니다. 후에 대학교 학생시절에 박태준박사님이 남대문교회 성가대 지휘 하실 때 대원으로 있으면서 학생 성가대를 지휘 하였습니다.


나인용: 첫인상은 앞에서 말씀하신 것과 같이 거룩하시고 근엄하신 모습이었습니다. 보통 예술가라면 생각 할 수 있는 모습이 아닌, 근엄하시고 말씀도 없으시고 한마디가 진리의 말씀만 하시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이용일: 첫인상이 그랬군요. 김명엽 선생님은 어떠셨나요?


김명엽: 저는 연세대학교 종교음악과 10회 입학생입니다. 제가 2학년 때 음악대학으로 승격되었고, 박태준 박사님이 초대 음대학장을 하셨습니다. 저는 교회음악을 하기 위해 연세대학교를 진학했습니다. 당시에 박태준 선생님께서 “성가대석은 스테이지가 아니다. 연주 무대처럼 요란스럽게 지휘하지 말라.”며 예배음악의 중요성을 강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준비 찬송에 대해서도 이야기 하셨는데, “수영하기 전 체조하듯이” 자리를 정돈하기 위해서 찬송을 하는 것이 아니고 찬송도 예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상만: 박태준 선생을 본격적으로 접촉한 것은 1957년입니다. 제가 방송국 PD로 있을 때 연사로 모시면서 알게 되었는데, 당시에 만나니 학자였습니다. 그때 방송국에 연사로 몇 년 동안 강좌를 했는데, 제가 깜짝 놀란 것이 영어발음이 그렇게 좋았습니다. 미국 유학을 하셨으니까 그렇긴 하지만... 어떻게 영어를 잘하는지 물어보니까 영어를 좋아해서 계성학교 다닐 때부터 영어 웅변대회에도 나갔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당시 현진건과 함께 당대 문학계에서 활발하게 문학 활동을 했던 소설과 박태원씨가 형입니다. 박태원씨는 숭실전문학교 문과 출신이었는데, 집안의 문학적인 소양이 몸에 배어 있는 것입니다.


이용일: 도정삼 선생님 말씀해주십시오.


도정삼: 저도 고등학교 때부터 교회에서 음악을 하면서 자랐고, 피난 때에 배제학교를 다녔습니다. 천막을 치고 학생들이 모여 있는 초라한 학교였지만 당시에 쟁쟁한 음악선생들이 많았습니다. 김학성, 구두회, 박상수, 황병덕 선생들이 음악을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배제학교를 다닐 때 합창단을 하면서 어려서부터 음악을 하고 싶다고 생각했고 후에 종교음악과가 생겼다는 말을 듣고 진학하게 되었습니다. 학교에 진학해서 박태준 박사님을 뵙게 되었는데, 선생님께서는 마치 우리 아버님 같았습니다. 학생들을 자식처럼 따뜻하게 대해주셨습니다. 박태준 박사님이 웨스트민스터대학에서 종교음악과를 공부하고 돌아오셔서 백낙준 박사님께 학교에 종교음악과를 만들 것을 제안하여 종교음악과가 생긴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과가 창설된 후, 3회째에 어려운 일이 많이 생겼습니다. 기억에 남는 것은 당시 합창시간에 박태준 선생님이 브람스의 레퀴엠 중「복이 있도다」를 연습시키다가 학생들 앞에서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우셨습니다. 학생들도 함께 눈물을 흘렸고 아버지를 모시는 것처럼 교수님을 모시고 함께 마음을 합해 어려움을 물리쳐 나갔습니다.
박 박사님은 우리 학생들을 자식처럼 생각하고 학비가 없어 어려운 아이들은 박 박사님이 등록금을 다 대주셨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특별한 사랑을 받아서 박사님 집에 한 학기를 살면서 아침저녁으로 사모님이 차려주신 밥상을 먹었습니다. 그 은혜에 감사해서 제가 미국에 와서도 꼭 설날이면 박사님을 찾아뵙고 세배를 드리고는 했고요.


이용일: 저희가 100회 이상 이 대담을 진행했는데, 화상통화는 처음 시도해봅니다. 처음에는 결과가 어떨지 몰라서 화상통화에 대해서 걱정도 했었지만 이렇게 박태준 선생님과 관계가 깊은 분을 함께 모시니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박 선생님의 음악세계는 어떠셨나요?


3. 박태준 선생의 음악세계
신갑순: 당시의 음악세계는 순수 했다고 봐야합니다. 박 박사님이 브람스의 레퀴엠 중「복이 있도다」를 연주하시면서 뭉클하여 울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선생님은 독창회를 할때 저희에서 기회를 주시고, 저에게 “너의 목소리는 로떼 레만 같다.”면서 격려를 해주셨습니다.


도정삼: 앞서 오라토리오 이야기를 했지만, 박태준 선생님은 교회 음악에 평생을 바치신 분이고 교회합창곡뿐만 아니라 오라토리오를 오랫동안 연주 하셨습니다. 아마 연주 레파토리에 오라토리오가 거의 다 있을 것입니다. 1959년에 웨스터민스터 콰이어 컬리지의 윌리암슨 박사가 웨스트민스터 콰이어 합창단과 함께 한국을 방문하여 연세대학교 합창단과 함께 합창을 했습니다. 박태준 선생님의 스승을 모셔서 두 학교의 합창단이 함께 노래를 하니 매우 감격적이었습니다.


이용일: 나인용 선생님께서는 박 선생님의 음악세계를 어떻게 보셨나요?


나인용: 선배님들 하신말씀이 그대로입니다. 저는 에피소드 하나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선생님께 지휘를 배울 때, 찬송가를 지휘할 때에는 손의 위치가 너무 올라가도 안 되고 내려와도 안 되며, 절대 오버액션 하면 안 된다고 당부하셨습니다. 또한 예배음악은 거룩하게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는데, 찬송가 「주예수 내 맘에 들어와 계시니」에 싱코페이션이 있다고 절대 부르면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또한 합창시간과 음악사를 가르쳐주셨는데, 합창시간에 있었던 재미난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당시 합창시간에는 신학과와  음악과가 함께 있었는데, 합창을 하니 이상한 소리가 났습니다. 한 신과 대학생을 불러서 혼자 노래를 불르게 했는데 ‘도레미파솔라시도’를 노래하는데 모든 음이 같아서 수업시간에 다 같이 웃었던 기억이 납니다(웃음).


김영방: 박태준 박사님하면 합창음악의 기반을 만드신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교회음악하면 주로 합창이니까요. 서울대 나오신 분들도 합창을 많이 하지만 연세대 출신들의 합창은 다른 곳에서 따라오지 못한다고 자부합니다. 합창음악의 기본을 세우신 분들입니다. 또 한 가지, 선생님의 작품 중에 동요들이 150곡이나 되는데, 어린 학생들의 정서교육에 아주 큰 공을 세웠다고 생각합니다. 요즘은 그런 정서가 없습니다. 옛날에는 멜로디 위주로 곡이 진행되었기에 정서가 통했는데 요즘에는 매스컴으로 선정적인 컨텐츠들이 노출되면서 좋은 동요를 찾아보기 힘들어 졌습니다. 박태준 박사님이 만든 동요가 정서 발전에 그야말로 시금성이 되었는데, 지금은 그것이 없는 것이 마음이 섭섭합니다.


이용일: 당시에는 바흐의 칸타타가 우리말로 번역된 것이 없었을 텐데요. 박태준 박사님이 이 일에 관여하셨나요?


김명엽: 이분이 한국오라토리오합창단 창단 연주로 1945년도에 헨델의 「메시아」를 하셨고, 초연도 많이 하셨는데요, 1961년도에 바흐의 「b단조 미사」를 연주하고 1954년에 하이든의 「d단조 미사」, 오라토리오 「사계」, 베토벤의 「C장조 미사」 등을 번역해서 연주하였습니다. 멘델스존의 「엘리아」를 1964년에 연주하고 「성바울」을 1972년도에 번역하여 연주하였습니다. 또한, 대부분의 성가들을 번역하여 출판, 보급하였습니다. 지금도 교회에서 많이 부르는 곡인 「주의 이름은 크시고 영화롭도다」와 「하늘의 아버지」, 「경배하라 우리하나님」 등 수많은 성가를 처음 번역하였습니다.
제가 지금 그분의 뒤를 이어서 남대문 교회 성가대를 지휘하고 있어서, 박태준 선생님의 기념사업에 여러 번 참여했습니다. 박태준 박사님의 기념비는 이미 대구에 세워져있고, 교회음악협회 60주년 기념으로 남대문 교회 마당에 노래비인 ‘나 이제 주님의 새 생명 얻은 몸’이 세워져 있습니다. 그분의 막내아들인 박문식 선생과 가족도 아직 그곳에 다니고 있습니다. 대구에서는 봄여름가을겨울로 노래하는 ‘동무생각’ 노래가사에 나오는 청라언덕에 노래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작년 10월 30일에 남대문 교회에서 돌아가신지 30주기 음악예배를 주관하면서 박 박사님의 업적을 정리해봤는데요, 박사님은 교회음악가로서 합창지휘자로서, 가곡과 동요작곡가로서, 교과서 집필자로서, 대학교수로 활동하신 교회음악의 개척자이십니다. 찬송가를 작곡하셨고 그의 음악에 5음 음계를 사용한 것은 일부러 한국적인 양식으로 쓰고자한 의도로 보입니다. 성가대 찬양곡도 작곡 하셨고 남대문 교회에서 지휘를 오래 하면서 청년찬송가 편집위원, 개편찬송가 편집위원, 교회음악협회 초대회장을 역임하셨습니다.

이상만: 1920년 초반에 우리나라 작곡계에서 가장 수준 높은 작품을 쓰신 분이 박태준 박사님입니다. 그때 홍난파씨는 1920년에 「봉선화」를 작곡하여 그곡이 1923년에 가곡화가 되었고, 나중에 김형준씨라고 김원복씨 아버지가 멜로디에 가사를 붙였는데, 그 이전에 이미 1922년도에 박태준 박사는 우리나라 가곡풍의 작품을 쓰셨습니다. 그분의 작품중에 「향수」라는 노래가 있는데, 그게 어떤 작곡가의 「선구자」라는 노래가 그 작품의 모작이라는 이야기도 한때 돌았는데, 그것은 박 박사가 그런 이야기를 하지 말라고 해서 잠잠해진 이야기도 있습니다. 1925년에 「반달」을 썼는데, 그 이전에 훨씬 질 높은 작품을 쓴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사실 음악지도자로서 계성학교 선생을 오래하면서 영향력을 많이 주었습니다. 계성학교 출신들이 박태준 박사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김만복씨 같은 분이 음악을 전공하게 된 것도 박태준 박사의 영향입니다. 마침 그 양반이 20세기를 여는 해인 1900년에 태어났어요. 돌아가셨을 적에 87세 이고 작년이 서거 30주년인데 30주년을 기념하는 좌담회가 열리니 의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다음에 교회 음악을 교회 안에 머물게 하지 않고 일반 사회로 진출시킨 분이 박태준 박사님입니다. 1945년에 오라토리오 협회를 창립한 것이 역사적으로 큰 의미가 있습니다. 그 첫 번째 헨델의 「메시아」 공연을 했는데, 아마 그것은 박태준 박사가 번역하지 않은 것으로 생각됩니다. 1915년에 종교교회에서 김인식씨가 찬양대로 헨델의 오라토리오 「메시아」를 초연했는데, 그때 번역한 곡으로 쓴 것으로 생각합니다. 헨델의 「메시아」를 연말에 연주하는 관행도 박태준 박사님으로 인해서 만들어 진 것입니다. 박재훈 박사를 주축으로 영락교회에서 주관하여 교회 안에서 연주가 시작되었지만, 박태준 박사는 이미 영락교회에서 연주하기 이전에 교회 밖에서 시작했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콰이어 커리지에서 공부했는데, 그곳이 미국의 대표적인 교회음악육성 학교입니다. 그곳에서 받은 성숙한 교육을 바탕으로, 합창음악뿐만 아니라 교회음악의 진수를 우리나라에 심어 놓았다는 것도 중요한 역할이다.


4. 박태준 선생이 국내 음악계에 끼친 영향
이용일: 박태준 선생은 한국 교회음악을 정립하신 분입니다. 당시에는 아방가르드 음악을 쓰지 않으면 작곡가로서 인정해주지 않는 시대의 흐름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연세대학교에서는 박 선생님께서 중심을 잡고 교회음악을 발판으로 음악을 발전시켰기 때문에, 교회 음악을 전공하는 사람들이 활동하면서 한국 교회음악이 발전 되었습니다.


이상만: 한때 평양의 숭실학교에서 교수도 하셨습니다. 그때 평양 음악계에 여러 가지 터전을 닦아 놓으신 것이 박태준 박사의 역할입니다. 그때에 우리나라 애국적인 사상을 고취하기 위해서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라고 하는 노래책을 그때 작곡해서 만든 것인데, 지나간 이야기지만 철모르는 사람들이 박태준 박사님을 친일음악가로 치부를 하려 했던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을 박태준 박사가 굉장히 가슴 아프게 생각했었습니다. 그분이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라는 책을 저한테 책을 보여주면서, 그 당시의 음악가들, 특히 미국에서 공부한 음악가들이 일제 강점기에 얼마나 많은 탄압을 받았는지를 이야기하면서 가슴 아프게 생각했습니다.


나인용: 교회 음악 뿐만 아니라 일반 음악협회에도 관여하셨습니다. 1968~1972년, 4년 동안 한국음악협회의 이사장을 하셨습니다.


이상만: 저하고는 직접 관련된 일이 서울국제음악제의 일입니다. 1962년에 제1회 서울국제음악제를 안익태씨가 주장을 했습니다. 실제로는 안익태씨가 하지 않고 결국 공보부에서 주관을 해서 음악회를 개최했고요. 그때는 이미 현제명씨는 돌아가셔서 계시지 않았고, 우리나라에 가장 중립적이고 관계가 원만한 분을 운영위원장으로 추대해야한다고 해서 제1회 서울국제음악제의 운영위원장을 박태준씨가 역임하였습니다. 그런 것들이 기초가 되어 1968년에 한국 음악협회의 이사장이 되었습니다. 한국 음악협회 이사장을 당시에 가장 중립적이면서 음악가들 전체를 어우를 수 있는 사람을 추대해야한다고 해서 박태준씨를 추대하게 되었습니다. 한국 양악 80주년을 기념하는 해인 1969년, 선배 음악가들인 이상균, 김인식씨 등에게 패를 준 것이 박태준씨의 큰 덕입니다. 제1회 서울 음악제를 그때 창설했는데, 일주일동안 순수한 우리나라 작품만을 연주했습니다. 이는 그동안 우리나라 역사상에 없던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서양악기 연주자들이 한국작품을 연주하는 것을 기피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에 실내악, 독주, 합창곡 등의 한국작품이 초연되었고, 이때에 김달성씨와 정회갑씨의 작품들이 한국초연이 되었습니다. 박태준 선생이 있을 때인 1~3회까지는 이것이 잘 이어져왔습니다. 저는 당시 음악제 사무국에 차장으로 있었고 조상현씨도 함께 일했습니다. 그때 만나니 박태준 선생의 성격이 원만하고 자기주장을 펼치지 않아서, 민주적으로 화목하게 협회를 이끌어 가셨습니다. 이것은 박 선생님의 생애에서 길이 남을 것입니다. 음악적으로는 아주 순수하고 거짓 없이 음악을 해석하고 공연하였습니다. 어떻게 보면 너무 무던하긴 했지만, 이는 그 시대에 그렇게 하지 않았으면 사람들과 어울려 갈 수 없었고 그 시대에 중화를 못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김명엽: 아까 말씀 중에 제가 기록을 보니까, 일본 패전 말에 귀국 하셨는데 미국에서 공부하고 왔다는 이유로 헌병대에 잡혀가 투옥되셨다가 그곳에서 해방을 맞았다고 합니다. 


신갑순: 당시에 남대문 교회에서 박태준 선생님이 오라토리오를 지휘해서, 저와 선애씨가 가서 참여했었습니다.


나인용: 기록에 보니까, 두 분이 3회째 전국순회 연주할 때, 독창하셨다고 연세 10년사에 나와 있습니다.


5. 박태준 선생의 교육관
이용일: 도 선생님 박태준 선생님의 음악세계에 대해서 말씀해주세요.


도정삼: 연세대학교 종교음악과에 나온 사람들은 박 박사님께 지휘법을 배웠기에 선생님의 모습을 닮을 수밖에 없습니다. 아까, 나인용 선생님이 지휘하시는데 박태준 선생님과 똑같았습니다(웃음). 박사님이 얼마나 고지식하신지, 쓸데없이 흔드는 것을 매우 싫어하셨습니다. 또한 지휘법시간에 찬송가 중에 8분의 12박자인 곡을 지휘하는데, 12개의 박자를 모두 저어서 지휘하라고 하셨습니다. 근본을 알아야한다는 의도를 가지고 가르치신 것이죠.


이용일: 12박을 모두 디바이드를 해서 지휘하라고 하신 것이죠?


도정삼: 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저희 부부도 남대문 교회 성가대에서 오래 했습니다. 당시에 찬송가 번역에 대해서 말씀하셨는데, 박 박사님들이 학교에서 그런 말씀을 많이 하셨어요. “우리 찬송가들이 영어로 된 곡을 한국말로 번역한 것이 많은데, 음악을 모르는 사람이 가사를 번역하니까 엉뚱하게 번역이 되어있다.” 음악과 가사가 맞지 않는 곡들을 이야기 하셨습니다.


이용일: 제가 젊었을 때, 합창음악을 하고 싶어서 필그림합창단, 시온성합창단, 오라토리오 세 군데를 모두 가봤는데 힘 있고 신나는 음악을 하는 시온성 합창단이 가장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시온성에 다녀서 온 힘으로 하는 합창을 배웠습니다. 사실 합창은 화음을 제대로 만들어 아름답게 해야 하는데... 나이가 들고 나니까 박 박사님이 한 합창이 정답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젊어서는 누가 무엇을 제안을 해주는 것이 위험합니다. 영향을 많이 받기 때문이겠죠. 예를 들어 요즘 우리나라 교회에는 복음찬송만 하기 때문에 파이프오르간을 찾지 않고 모두 밴드악기만 찾습니다. 교회에서 순수 음악을 하지 않기 때문에 교회에서 음악가가 나오지 않고, 우리나라 음악계의 후진양성에 대단한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교회 음악이 다시 살아나야 우리나라 음악이 살아날 것입니다. 이는 김명엽 선생님이 자세하게 연구 하셨겠죠?


김명엽: 박 박사님의 성품과 음악관을 보면 재미있는 것을 일부러 피하시는 것 같습니다. 재미있는 것보다는 좋은 것과 바른 것을 추구하신 다는 것을 입고 다니시는 옷차림과 말씀에서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더군다나 교회음악에서 경건함을 유지하기 위해서 리듬이 경건해야 한다고 주장하시며 4분음표를 중심으로 하였고 5음음계를 주로 사용하셨습니다. 그리고 성가대 지휘하면서도 재간을 부리지 않았습니다. 미국에서 공부하신 분이 흑인영가를 하셨다면 잘 하셨겠죠. 하지만 흑인 영가를 하지 않고 오라토리오와 미사만 하신 이유는 예배음악에 적합한 음악만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연세대를 비롯한 여러 학교의 교가와 유엔 환영의 노래, 제헌절 노래 등을 작곡 하셨습니다. 특별히 연세대 교가를 보면 선생님의 음악적 스타일이 그대로 나타납니다. 연고전을 하면 고대 교가를 바꿔 불러주곤 했는데, 고대에서는 연세대학교 교가를 불러주지 못합니다. 연세대 교가는 통절로 되어있어서 거의 소설 같기 때문이죠(웃음). 그저 그분의 정신은 양반 같은, 하나님 앞에서 경건한 자세가 아니었는가 생각이 됩니다.


이용일: 작곡가는 아니시면서 교회음악전공자로서 작곡하는 것은 본인의 능력 한계를 벗어나지 넘어나지 않았습니다.


김명엽: 1975년도에 연세대 음대 동문들이 <박태준 작곡집>을 출판해 드렸는데, 그 서문에 본인이 직접 말씀하신 것이 적혀 있었습니다. ‘음악을 정식으로 공부하지 못하던 때인 1920년대 작품들은 전문적 기교면에서 볼 때, 매우 유치하고 평할 가치가 없는 것일지 모르지만, 과거 일제 강점기에 우리나라 어린이들에게 많은 기쁨과 위안을 주었다는 사실에서  볼 때에 그 의의가 큰 줄 생각하면서 한국음악 역사의 한 페이지를 일으켰으리라 나는 자부해본다.’ 라고 쓰여 있습니다.


나인용: 아까 교가 이야기가 나왔는데, 사실 박태준 선생님이 작곡하신 교가는 길이도 길고 선생님의 음악적인 성격이 그래도 드러나기 때문에 아주 차분합니다. 운동장에서 할 수 있는 노래가 아니죠(웃음). 그래서 연고전에는 나운영 선생님의 연세찬가를 교가로 대신하고 졸업식과 입학식에서만 교가를 부릅니다. 에피소드를 하나 말씀드리자면, 제가 학장일 때 박영식 총장님이 저를 불러서 교가가 너무 길다보니, 2절로 나누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박태준 박사님의 전통을 말씀드리면서 이 곡에 대한 필요성을 말씀드리면서 설득했습니다. 그래서 다른 곡을 하려다가 교가를 그대로 놔두고 있습니다.


이용일: 역시 경건한 것은 4분의 4박자에 4박자로 진행하는 것이 가장 경건하죠.


김명엽: 남대문 교회에서 교인들로부터 장로 피택을 받았는데, 이분이 장로를 사양하셨습니다. 왜냐면 교회 음악가는 음악목회를 하는 성직자이기 때문에, 장로를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서 장로를 하지 않으셨습니다. 


이용일: 사실은 박태준 박사님 이야기를 하면서 교회 이야기가 계속해서 나오는데, 교회는 사실 모든 문화의 중심축이 됩니다. 음악과 문학, 산업, 건축의 신문화를 가장 먼저 접했고, 교회를 중심으로 발전했습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에 불편한 독자들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박태준 박사님을 이야기 하면서 교회음악의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영방: 조금 외람된 말씀인 것 같지만, 박태준 박사님 이야기를 하면 교회음악을 하게 됩니다. 지금 교회 내에서 여려가지 갈등이 있는데, 그중에 교회음악에 대한 갈등이 가장 많습니다. 세대차이가 있어서 찬양에서 오는 갈등이 심하죠. 이것을 우리가 보고만 넘어 갈 수 없습니다. 이러한 세대 간의 갈등을 해소할 수 있는 방법과 돌파구를 찾아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 현대는 변하고 있는데 아직도 음악과 사고는 옛날에 머물러 있습니다. 현 시대에 맞는 합창음악과 동요가 나와야 하고 지금 심화되고 있는 세대 간의 갈등에 대해서 생각해야 하는 시점이 오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글: 김진실 기자. 사진: 김문기 부장

기사의 일부만 수록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음악춘추 2017년 4월호의 기사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김문기의 포토랜드>



진행 : 이용일(한국음악교육협회 명예회장)


나인용(연세대학교 명예교수)


이상만(음악평론가, 국제델픽위원회 명예회원)


김영방(연세디지털 콘서바토리 특임교수, 아태 관악연맹 부회장, 전 해병대 군악대장)


김명엽(서울시합창단 단장 겸 상임지휘자)


신갑순(삶과꿈 발행인, 전 삶과꿈 챔버오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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