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음악춘추

인물탐구 - 한국의 스즈키 메소드 도입자 김희모 박사 / 2015년 5월호

언제나 푸른바다~ 2015. 11. 30. 1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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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대담 | 인물탐구
한국의 스즈키 메소드(Suzuki Method) 도입자 김희모 박사

 

의사이시면서 한국음악교육을 위해 노력하신 김희모 박사는 1921년 6월 27일에 함경남도 함흥에서 출생하였으며, 함흥영생고등보통학교, 여순의학전문학교에서 공부한 후 서울대학교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68년 스즈키 메소드(Suzuki Method)를 국내에 도입하여 1968년 11월 청주재능개발연구회를 발족, 1972년 한국재능개발연구회 이사장 겸 회장으로 역임하였으며 제11회 재능개발 세계대회를 서울(선화예고)에서 개최하기도 하였다. 그의 저서로는 「유아의 재능교육」, 「유치원부터는 너무 늦다」, 「골목유아원 교본」, 「유아의 발달과 심리지도」가 있다.

 

일시: 2015년 4월 6일(월) 오후 1:30
장소: 코스모스 악기사 7층
진행: 이용일 (한국음악교육협회 명예회장)
패널: 곽진영(며느리, 사단법인 한국재능개발연구회 회장, 곽샘 피아노 저자)
      김순범(차남, 사단법인 한국재능개발연구회 이사장)
      신희주(청주대 음악교육과 교수)
      김  훈(사단법인 한국재능개발연구회 서울지부장, 온누리 음악학원장)

1. 김희모 박사의 성장과정
2. 김희모 박사와의 첫 만남
3. 김희모 박사의 유아교육 및 스즈키 음악교육
4. 김희모 박사가 음악계에 끼친 영향

 

이용일_오늘은 우리나라에 스즈키 메소드를 도입하신 김희모 선생님을 생각하며 그 분의 업적에 대하여 재조명해보고자 합니다. 과거 우리나라에서 쓰던 호만이라는 딱딱한 바이올린 책을 가지고 바이올린을 배울 때 스즈키 메소드라는 책이 들어오면서 한정된 인원에서 많은 인원이 한꺼번에 배울 수 있게 되어 음악인구가 확대되는 좋은 계기를 마련해주었습니다. 또, 바이올린을 하다가 그만두는 사람들이 줄어들고 바이올린뿐만 아니라 재능개발협회도 만들어서 유아교육에도 널리 활약을 하신 김희모 선생님에 대해 같이 의논해보고자 합니다. 곽진영 선생님은 언제 김희모 선생님을 처음 뵈었나요.

 

곽진영_결혼 전에 처음 뵈었고 또 결혼 후에도 유아교육에 대해서 테스트를 많이 받았습니다. 회의실에서 정식으로 1년에 한 번씩 영어시험, 한자시험도 보고 아버님이 쓰신 책에 대해서 아버님께서 질문도 하셨던 기억도 납니다.

 

이용일_그럼 신희주 선생님께서는 언제 김희모 선생님을 처음 뵈었나요.

 

신희주_어렸을 때 김희모 선생님 가족과 같이 파티를 하면서 만나 뵙게 되었습니다. 평소에 저의 아버님께서 김희모 선생님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해주셨습니다. 김희모 선생님은 의사를 하시면서 어린이들의 재능개발 일에도 힘쓰시니 대단하다고 말씀하시면서요. 

 

이용일_의사이신데도 다른 분야에 관심이 많으셨죠. 김 훈 선생님께서는 언제 처음 뵈었나요.

 

김 훈_저는 78년도 9월부터 재능개발에 근무를 했었습니다. 그때 처음 뵈었는데 바로 옆에 살면서 모시고 있었습니다.

 

이용일_우선 김희모 선생님의 아버님은 무엇을 하셨나요.

 

김순범_할아버지께서 고향이 함흥이시고 증조할아버지께서는 서당에서 후학을 양성하셨습니다. 그러다가 일본군이 한국에 들어오면서 할아버지께서 일어를 조금씩 알아가게 되시면서 본격적으로 일어 공부를 하셨습니다. 공무원 시험을 보시고 함경도 경성군수로 가서 공무원생활을 잠깐 하시다가 건강상의 문제로 퇴직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후에 법무사일을 하셨습니다. 자식들 8남매 모두를 전문대이상의 대학을 졸업시키셨는데 그때 아버님은 여순의대를 나오셨습니다. 그리고 제가 알기로는 아버님께서 일본에서 잠깐 유학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만 있으셨으면 그렇게 일어를 잘하시지는 않았을 겁니다.

 

이용일_일제강점기에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일어를 한국어같이 유창하게 하는 것은 왜 그런고 하니 교육용어가 일어였기 때문에 그랬는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만주에서 청주로는 언제 가신건가요?

 

김순범_6.25때 큰아버님이 청주에서 공무원으로 일을 하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그곳으로 아버님께서 찾아가신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결혼하시게 되면서 정착하시고요.

 

이용일_김희모 선생님이 의사생활을 잘 하시다가 왜 재능개발 일을 하시게 된 건지 아시나요.

 

김순범_아버님께서는 의사생활을 하시면서 여러 가지 취미활동을 하셨습니다. 조각도 하시고 도자기도 모으시고 그런데 여러 가지를 해도 만족스럽지 않으셨나봅니다. 처음에는 아버님께서 산부인과, 성형도 하셨습니다. 제가 듣기로는 우리나라 최초로 곰보수술도 하셨다고 했습니다. 글 잘 쓰는 한 여학생이 있었는데 곰보였답니다. 그래서 수술을 해줬더니 공부는 안하고 얼굴만 가꾸기 시작하니까 저희 아버님은 ‘성형이 그 사람 인생에 도움이 되는지 안 되는지 모르겠다.’ 라고 말씀하셨다고 해요. 그래서 뭐가 좋을까 계속 찾다가 로타리를 하셨습니다. 아버님이 마츠모토라는 도시에 있는 미나이마츠모토라는 클럽과 관계를 가지고 계셨습니다. 거기에 호가리사장님이라는 일본분과 아버님이 친해지신 거예요. 그 분이 일본 재능교육협회에서 이사를 하고 계셨는데 아버님께 스즈키 선생님을 소개시켜주셨습니다. 아버님은 만나서 이야기하다보니까 ‘아! 이거 괜찮다.’라고 생각하신거죠.

 

곽진영_스즈키 선생님이 아버님께 유아교육에 관한 책을 주셔서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읽었는데 우리나라에서도 음악을 이용한 조기교육을 시켜야겠다는 생각으로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다시 스즈키 선생님을 만나 뵈러 일본으로 가셨다고 했습니다. 그 당시 우리나라에는 유치원이 별로 없었습니다. 일본의 어린이들이 체계적으로 조기교육을 받고 있는 것을 부러워하시면서 나라가 잘 되려면 조기교육이 잘 되어야 하는데 우리나라의 어린이들이 조기교육을 받지 못하는 것에 대해 매우 안타까워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조기교육을 시킬 수 있는지 스즈키 선생님에게 자세히 물어보셨답니다.

 

김순범_그래서 유아교육관계자도 만나고 그렇게 그쪽으로 관심을 쏟게 되신 걸로 들었습니다.

 

이용일_청주에서 유치원을 만든 것이 언제인가요?

 

김순범_1972년에 인가를 받았습니다.

 

이용일_이야기가 맞아 떨어지는 것이 제가 71년도에 마츠모토를 갔었습니다. 스즈키 선생님이 김희모 선생님에 대해 ‘열성은 대단한데, 음악을 몰라서 걱정이다.’ 라고 말하시며 저에게 ‘당신이 도와줄 수 없냐’고 물으셨지요. 나는 유아교육이나 바이올린의 실기교육보다는 한국의 일반 음악교육을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게는 못할 거 같다고 했습니다. 우리나라 전체의 음악교육위기였기 때문에 난 그것을 연구하기 위해 여유가 없다고 말했지요. 의사가 유치원을 한다고 했을 때 난 충분히 가능하다고 봤습니다. 유치원 프로그램을 충분히 소화할 수 있고 스즈키 선생님도 김희모 선생님의 열정에 굉장히 공감하셨습니다. 재능개발은 한국에서 어떻게 처음 시작되었나요?

 

김순범_아마도 아시는 분들의 자제분을 이헌우 교수님께서 가르치셨는데 이때가 처음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헌우 교수님께서는 나중에 충북대 사회학과 교수로 정년퇴직하신 분이셨습니다. 그 분이 실제로 교육을 받고 오시고 사회학과를 나오셨는데도 바이올린을 괜찮게 하셔서 제자들을 많이 가르치셨는데 현재 원광대 음대 교수인 양승돈씨도 어릴 때 가르치셨다고 들었습니다.

 

곽진영_그 당시 아버님께서 바이올리니스트를 섭외하려고 굉장히 노력하셨습니다. 정경화 선생님의 어머니 이원숙 선생님도 직접 만나 뵙고 도와달라고 했다고 저한테 이야기하시더군요. 그리고 그 당시 서울음대 교수이셨던 양해엽 선생님도 뵙고 바이올린 선생님을 보내달라고 했지만 도움을 많이 못 받으셨죠.

 

이용일_도움을 받으셨다면 다른 상황들이 나왔을 것 같은데요. 그럼 이어서 지금 유치원은 청주 한군데만 있나요?

 

김순범_직영은 아니지만 우리의 교육법을 가지고 교육하는 곳이 여러 군데 있습니다. 그런데 대개 유치원들이 교육하면서 자기에게 필요한 것만 쓰죠. 요새는 누리과정이라고 해서 국가에서 프로그램을 다 정해줍니다. 그리고 그것만 하도록 국가에서 지도를 합니다. 그러니까 그 외의 프로그램은 인정을 잘 안 해주니까 점점 더 어려워지는 거죠.

 

곽진영_스즈키 메소드 이외에도 저희 아버님께서는 외국을 다니시면서 음악뿐만이 아니라 유치원교육법에 좋은 것이면 이를 다 도입하여 그것을 유치원 교사들에게 가르치셨습니다.

 

이용일_음악도 중요하지만 김희모 선생님이 유치원 교육에만 관심을 두지 않고 다른 것도 개발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럼 유치원교육 프로그램이 정리가 다 되어있나요?

 

김순범_저희 나름대로 정리를 해놨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유아교육 쪽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과 안 맞는 점이 있으니까 채택이 안 되는 거죠.

용일_처음에 바이올린에서 출발하기에는 쉬웠을 것 같지만 유치원은 어려웠을 것 같습니다. 김희모 선생님은 처음에 유치원시설과 한문을 가르치는 것들을 어떻게 시작하게 되셨나요.

 

김순범_청주에 시립유치원이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이곳을 시에서 운영했는데 문제가 생겨서 저희 아버님께 이양한 것이지요. 저희 아버님이 1년인가 2년을 운영하셨습니다. 그러다가 후에 정식으로 시로부터 저희 아버님이 위임받아 아버님이 가지고 있는 건물의 2층과 3층을 사용하셔서 유치원을 다시 시작하셨습니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바이올린은 의무로 시키셨습니다.

 

곽진영_레슨비보다 어릴 때 음악을 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고 돈보다 더 가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셔서 이 유치원을 다니는 아이들 전원에게 바이올린을 의무로 시키신 것이지요.

 

김순범_지금생각해도 참 대단하신 것 같습니다. 청주는 시골이었는데 말이죠.

 

이용일_아마 김희모 선생님이 음악가였으면 안됐을 겁니다. 우리사회가 그래도 의사는 신뢰 하거든요. 처음에 시립유치원을 인수받고 다시 유치원을 운영하는데 유아교육과 재능개발 프로그램을 했을 때 선생님들은 어떻게 훈련시켰나요.

 

김순범_저도 그 점에 대해서는 확실하지 않은데 일본에서 보신 것을 가져오셔서 선생님들에게 알려주고 일본에 데리고 가서 연수시키셨던 것 같습니다. 또한 일본에서 유아교육을 하시는 분을 모셔와서 통역을 시켜서 교육하기도 하셨고요. 그리고 스즈키 선생님한테 일본의 스즈키식 교육을 하시는 분을 소개받아서 그 곳의 교육법을 연수받았습니다.

 

이용일_그만큼 발전을 시키셨는데 당시 청주에서는 그곳에 들어가려고 하는 학생들이 얼마나 있었나요.

 

김순범_청주에서 내노라 하는 좋은 집안 자제들은 다 다녔습니다. 그리고 그 유치원을 다닌 자제들 중에는 바이올린을 전공으로 한 사람도 많이 나왔습니다.

 

이용일_국내 바이올린 쪽에서 한참동안 스즈키 메소드를 인정하지 않고 구식교과서 호만을 가지고 가르치고 스즈키 교본으로 배운 사람을 한참까지 무시를 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한글을 애들에게 가르칠 때 ㄱ,ㄴ을 가르칠 것인가 형태를 가르칠 것인가가 상당히 문제가 되거든요. 스즈키는 형태를 가르치려고 하니까요. 저는 형태를 가르치는게 옳다고 봅니다. 그러한 점이 우리나라의 바이올린이 활성화되게 하지 않았나 생각이 듭니다.

 

김 훈_스즈키 교육에 대해 외부에서 아는 것과 원뜻하고는 차이가 많습니다. 악기를 배울 때 악기의 역할이 어느 정도가 되느냐가 중요합니다. 물론 음악교육을 하는 것이지만 이것을 통해서 아이의 인성을 기를 수 있는 그런 방향으로 끌고 나가는게 원래 스즈키 메소드의 교육법입니다. 하지만 악기를 쉽게 가르칠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만 집중이 되어 문제가 많이 있었습니다. 악기를 쉽게 배우는 것도 중요하죠. 하지만 악기가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 아이들에게 어떻게 가르치고 그것을 아이들이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를 생각해야 하는데 쉽게 배우고, 재미있게 가르치려 하니까 문제가 많이 생기는 것 같더라고요.

 

이용일_스즈키 메소드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 제가 보기에는 모든 책 앞에 있는Tonalization인데 이것을 무시하고 손도 대지 않고 가르친다는 겁니다. 그래서 스즈키 바이올린 교본을 가르치는 선생님들이 스즈키 메소드를 공부한 사람들이 아니고 그냥 바이올린을 하던 사람들이여서 그런 거라 생각합니다. 스즈키 바이올린 교본의 Tonalization을 제대로 가르치면 호만보다 훨씬 더 재미있고 쉽게 진입할 수 있는 교재인데 말이죠. 스즈키 바이올린 교본을 시작하고 첫 발표는 언제 하셨나요. 재능개발이라고 이름을 지으신 이유를 알고 계신지요.

 

김 훈_1971년 9월에는 길거리 연주회를 하였다고 들었고, 그 이후로도 발표는 서울, 청주 부산, 전주 등에서 했습니다.

 

곽진영_원래 일본에서는 스즈키 메소드를 재능교육이라고 합니다. 우리 아버님께서 일본말 그대로 하면 안 되고, 재능은 개발하는 거라고 말씀하시면서 일부러 재능개발이라고 이름을 지으셨습니다.

 

이용일_그럼 여기서 하나 확실히 해야 할 것이 재능교육과 재능개발이 다르다는 것이네요. 창립할 때 같이 협력하여 일을 했던 멤버는 몇 명이 있었습니까?

 

김 훈_유치원 쪽은 원장들이 많았지만 바이올린은 3?4명밖에 없었습니다.

 

김순범_일단 연구회 이사들은 8명이고 의사분들도 있었습니다. 또 저희 아버님이 유아교육을 하시면서 골목유치원을 하셨습니다. 그 당시에 유치원 교육이 돈이 많이 드니까 돈을 들이지 않고 할 수 있는 방법을 개발하면 어떨까 해서 골목유치원이라고 만드셨고 원칙도 있으셨습니다. 교사 즉, 건물 없이, 자격증이 있는 선생님 없이, 돈 안 받고. 이것이 삼무의 원칙으로 골목에 텐트를 치고 대학교를 나온 엄마들을 모집하고 교육시키셨습니다. ‘내가 선생님을 교육시키겠다.’ 라는 생각을 가지고 계셨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 때 전국에서 한 100군데 정도에서 했습니다. 그리고 골목유치원 때문에 이용일 박사라는 정부 쪽 행정가를 만나게 되셨습니다. 그 분이 전 전두환 대통령의 부인 이순자 여사를 소개시켜주셨습니다. 민정당과 교육청에서 강의를 하실 때 제가 몇 번 같이 갔었습니다. 그때 이순자여사가 저의 아버님에게 들은 골목유치원의 아이디어를 참고로 만든 것이 ‘새마을유아원’입니다. 하지만 골목유치원을 새마을유아원에 흡수시킨다고 해서 도리어 골목유치원을 못하게 했습니다. 교수들이 ‘무자격자가 교육하면 안 된다.’고 하셨고 그렇게 새마을유아원에 흡수되면서 골목유치원은 없어졌죠. 그 때 관계 됐었던 원장 중에는 새마을유아원으로 흡수된 사람도 있고 유치원을 만들어서 운영하신 분들도 계셨습니다.

 

이용일_그러니까 오늘 여기서 특이할만한 사항은 ‘골목유치원’을 창안했다는 겁니다. 우리나라의 경제상황에 맞는 방법 같습니다. 먹고 살기 어려웠을 당시에 애들이 유치원가는 것은 특별한 아이들만 갔으니까요. 돈 안들이고 배울 수 있도록 해준다는 것은 획기적이네요.

 

김순범_물론 교수님들 생각에 싫은 점이 있었겠죠. 자격증이 없는 사람들이 가르치니까요. 골목유치원이 없어지게 되었지만 어쨌든 중간과정으로써의 어떤 아이디어를 내셨다는 것이 그 당시에는 대단하셨다고 생각합니다.

 

이용일_그러면 김희모 선생님이 결론적으로 우리나라의 음악교육에 끼친 영향에 대해 신희주 선생님은 어떻게 보십니까.

 

신희주_대단하시죠. 저는 전공이 피아노니까 일단 피아노 영재교육에 대해서는 굉장히 영향을 많이 끼치셨죠. 예를 들면 제가 저의 아버님으로부터 김희모 선생님께서 음악을 통해 유아교육을 하신다는 말을 듣고 어린 저의 아이를 데리고 박사님이 1993년에 서울에서 주최하셨던 세계대회에 참석했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우리 애가 그 방법으로 피아노를 배웠습니다. 그래서 저는 산 증인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 글도 모르던 어린아이가 악보를 보지 않고도 연주하게 되고 선생님이 재미있게 가르쳐 주시니까 스트레스 하나도 안 받고, 음악을 즐기며 배운 것 같습니다.

 

이용일_출발이 어찌되었던 간에 그 분이 창안해낸 교육방법이 엄청난 교육효과를 냈고 그것으로 성공한 것 아닙니까. 그래서 저는 학력이야기가 나오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고 봅니다. 김희모 선생님이 쉽고도 어려웠던 예를 들면 의사이기 때문에 남에게 신뢰감을 얻었지만 또 반대로 ‘의사가 어떻게 음악을 해’라는 불신감도 동시에 나타났을 것 같습니다.
김훈 선생님은 같이 일하시면서 무엇을 느끼셨나요.

 

김 훈_저는 지금도 기억나는게 저한테 김희모 선생님이 ‘일요일이 왜 필요해?’라고 질문을 하시더군요. 쉬지도 않고 아이들 교육에 전념하셨죠. 그만큼 아이들의 교육만 생각하시더라고요. 맨 처음엔 힘들었지만 나중에는 많은 분들이 호응도 많이 해주셨습니다. 그리고 교육할 때에는 이념이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용일_그래서 ‘곽샘 피아노가 여기서 태어난 것이 아닌가.’ 저는 그렇게 연결이 됩니다. 그럼 곽진영 선생님, 김희모 선생님은 어떤 음악활동을 하셨나요?

 

곽진영_아버님께서는 시각장애인에게 바이올린의 연주자세와 소리 내는 법을 가르치셨습니다. 옆에서 항상 참관을 하셨기 때문에 보이는 직접 연주는 못하셨지만 자세는 알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음악활동은 아니지만 음악과 뇌활동의 관련성에 대하여 연구하셨습니다. 이번 4월 초에 뇌신경을 연구한 이경면 교수에 대해 중앙일보에 기사가 났었습니다. 음악을 통해 좌·우뇌를 개발한다는 내용이죠. 그런데 저희 아버님이 지금보다 이십여 년 전에 이미 강연을 통해 이런 말씀을 하셨었지요. ‘사람의 뇌세포는 똑같다.’, ‘반복에 의해서 뇌신경이 튼튼해진다.’ 아버님이 말씀하신 말들이 다 그 기사에 쓰여 있더군요. 또 모든 것이 음악과 연결이 되어있다는 겁니다. ‘지금은 지식을 저장하는 학습이 필요 없고 학습하는 방법이 중요하다. 음악을 통해 학습을 주고 받는게 뇌활동에 영향을 준다.’ 지금 이렇게 주장하고 있는 것을 저희 아버님께서는 오래전부터 말씀하셨다는 겁니다.

 

이용일_아무래도 의사이시니까 출발이 자연과학 심리학에서 출발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김순범_성악의 발성도 가르치기도 하셨습니다.

 

이용일_그럼 곽진영 선생님의 곽샘 피아노는 어디서 영감을 받아 책을 썼는지요.

 

곽진영_아버님께서 저에게 ‘피아노 운지를 잘 가르치면 좋겠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미국에서 거주했던 도시에 스즈키 음악학교가 있었는데 거기에 가서 교육법을 공부하라고 하셔서 캠프를 갔었습니다. 다녀온 후 저는 교육법을 한눈에 알 수 있더라고요. ‘아! 이게 악보를 보고 가르치는 것보다 먼저 악보를 보지 않고 가르치는게 훨씬 낫겠구나!’라는 것을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저희 아버님이 저에게 ‘너의 남은 인생을 피아노 음악교육에 집중하여 이를 완성하면 좋겠구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교재로 여러 가지 곡을 가르치면서 이 곡을 넣었다가 ‘아, 이 곡 보다는 이게 좋겠구나’라고 다시 바꾸기를 수차례 하며 많은 검증을 거쳐 완성하였습니다. 곽샘 피아노 교재는 악보를 보지 않고 듣고 배운다는 점에서는 스즈키 메소드와 같지만 여러 부분에서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일단 그림동화로 어린이의 상상력이 풍부해지도록 그림 속에 아이디어를 많이 넣었습니다. 저의 책은 처음부터 Tonalization이거든요. 손 연습을 하고 곡을 쳐야 하지만 기존 피아노 책에는 그러한 내용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점을 보완해서 교재를 만들었습니다.

 

이용일_그러니까 스즈키를 그동안 하시면서 배운 지식을 새롭게 재개발한 거죠? 그럼 선생님께서는 미국교재와 어떤 차이점이 있는지 말씀해주세요.

 

곽진영_미국 교재는 그냥 악보일 뿐입니다. 소리내기를 가르치는 것이 없어요. 그래서 곽샘 피아노 교재에서는 어떻게 손가락을 움직이고 손목을 써야하는지에 대해서 알려준 후에 선생님을 따라 치는 방식으로 레슨을 진행하게 합니다. 먼저 악보를 보고 피아노를 배우게 되면 귀가 닫힙니다. 이런 점이 제 책의 장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용일_그럼 스즈키 교본과의 차이점은 무엇인가요?

 

곽진영_스즈키 교본에는 지침서가 없습니다. 첫 곡의 리듬도 아이들이 따라하지 못할 만큼 많이 어렵습니다. 그래서 곽샘 피아노에서는 자연스럽게 배울 수 있도록 난이도를 조정 하여 곡을 배치하였습니다. 또 부모님이나 교사가 이해할 수 있도록 CD와 지침서가 있어 쉽게 설명이 되어있다는 것이 매우 다릅니다.

 

이용일_우리 사회는 발전하게 되어있죠. 하나를 열심히 공부하게 되면 발전되어서 나갈 수 있다는 점을 곽진영 선생님에게서 보았는데요. 곽샘 피아노 책을 만들게 한 근본 동기도 김희모 선생님이 해놓으신 업적이 있기 때문에 이뤄진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아드님께서는 아버님이 우리나라 음악계에 도와주신 것들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김순범_일단은 옛날에 비해서 바이올린을 하는 사람이 청주만 해도 많이 늘었습니다. 청주뿐만이 아니겠죠. 음악교육 쪽에서 사실 아버님 돌아가신 다음에 저희 때는 바이올린을 배우는 인구가 많이 줄었습니다. 그래서 음악인구적인 면에서는 훨씬 더 크게 일을 하신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에 음악인이 아닌 의사가 그러한 교육방법을 도입하시고 다른 전공을 하는 분이 다른 시야로 접근했다는 샘플도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용일_스즈키 메소드를 만들 때에는 분명히 곡을 익히면서 이러한 요소가 있고 거기에서 전이가 된다. 이러한 핵심 내용도 모르고 했으니 문제가 생기는데 지금도 스즈키로 많이 배우고 있잖아요.

 

김 훈_지금도 많이 하죠. 교육도 많이 시키고 있고 많이들 따라하고 있고요. 저는 김희모 선생님의 원래 뜻은 악기교육의 100%악기교육이 아니라 인성교육인데 이것이 기능교육으로 바뀌어 가는게 아쉽습니다. 물론 악기음악을 배우는 것이지만 악기에 100%치중하는게 아니라 인성교육에 비중을 더 많이 두어서 아이들에게 악기를 가르치면 기능교육으로는 좋아질지는 몰라도 인성에서 문제가 생길수가 있거든요. 그래서 악기를 통해 인성이 더 좋아지는 쪽으로 이 악기교육을 하는게 어떨까하는 생각으로 매주 선생님들과 의논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인성교육을 더 강조하고 싶고 또 그렇게 이끌어 나가야 되지 않나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용일_쉽게 말해서 음악을 통해서 인성개발, 두뇌개발 등을 가르치는 그런 쪽으로 생각하셨던 것 같습니다. 연주자 양성이 목적이 아닌데 바이올린 교본을 연주자 만드는 책으로 착각했단 말입니다.

 

정리_김수현 기자 / 사진_김문기 부장

- 기사의 일부만 수록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음악춘추 2015년 5월호의 기사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

 

<김문기의 포토랜드>

 

 

 

진행: 이용일 (한국음악교육협회 명예회장)

 

김  훈(사단법인 한국재능개발연구회 서울지부장, 온누리 음악학원장)

 

김순범(차남, 사단법인 한국재능개발연구회 이사장)

 

신희주(청주대 음악교육과 교수)

 

곽진영(며느리, 사단법인 한국재능개발연구회 회장, 곽샘 피아노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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