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탐구
한국 음악교육의 열정적 로맨티스트 작곡가 백태현 교수
백태현 교수는 1927년3월28일 서울 서대문구 천연동에서 출생하여, 조부가 계신 평북 신의주에서 자랐으며, 소년시절 미국선교사에게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배웠고, 만주 용정에서 은진중학교(4년제)와 1949년 서울대 음대(3회) 작곡과를 졸업하고, 경희대 대학원에서 음악석사 학위를 받았다. 1952년 6.25전쟁 때부터 1968년까지 성신여고 음악교사를 역임했고, 1968년부터 성신여자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며 음악과를 1971년 최초 설립하였으며, 1981년부터는 강남대학교에서 종교음악과 교수로서 학생지도에 열중하셨다. 1964년부터 성신여고 스트링오케스트라를 국내최초로 창단하여 매년 정기연주회와 지방연주회를 지휘하였다. 그는 1947년부터 1975년까지 많은 가곡과 교성곡, 칸타타, 오페라 등을 작곡하였으나 발표하지 않아서 그의 작곡세계는 아직 신비에 쌓여있다. 70년대 중반 이후부터는 독실한 크리스찬으로서 교회음악을 작곡에 전념하여 1977년부터 2005년까지 합창곡, 독창곡, 찬송가 등 수많은 성가작품을 작곡 발표하였다. 교회에서 많이 부르는 찬송가431장 “주안에 기쁨 있네”와 584장 “우리나라 지켜주신” 두곡은 는 백교수가 작곡한 찬송가이다. 저서로는 “음악통론(대학생교양서적)”, “종교음악 학생들의 의식구조” 등이 있으며, 작품집으로는 “헤롯왕(오페라)”, “사랑의 언약(연가곡)”, “운정송(교성곡집)”, “노엘(칸타타)”, “십자가의 승리(칸타타)”, “하루살면(독창곡집)”, “교회음악신작발표집” 외 찬송가, 합창곡 등이 있다.
그는 1990년 대통령훈장 동백장을 수상했으며 한국교회음악협회 회장, 한국예술음악장학회 회장, 한국교회음악작곡가협회 회장, 동 고문을 역임하였다.
일시: 2015년3월4일(수) 오전10:30
장소: 코스모스 악기사 10층
진행: 이용일 (한국음악교육협회 명예회장)
패널: 임자향 (성신여대 피아노과 명예교수)
박수화 (콜레기움 보칼레 분당 지휘자)
김 선 (합창 지휘자)
차복희 (사모님, 시인, 원로장로)
백승암 (장남, ORSC Partners 대표)
백태현 교수님의 성장과정 및 음악의 출발
이용일_이번 4월호 음악춘추에서는 음악교육에 일생을 바친 백태현 교수님을 재조명해보고자 합니다. 백태현 교수님은 인간적으로 대단하셨던 분이기에 성신여대 음악과를 개설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셨습니다. 백교수님은 음악가에게 가장 부족한 신뢰감이 남달랐다고 생각합니다. 먼저 교수님의 성장과정과 음악의 출발에 대해 이야기 하고 싶습니다.
차복희_평소에 청년시절 얘기를 밖에서 잘 안하신 편이라 제 남편의 성장과정을 잘 모르실 겁니다. 남편은 한국전쟁의 직접적인 피해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서울에서 신학을 공부하시던 부친 백학신목사의 첫아들로 출생하여 유아세례를 받고 교회학교에서 성장하면서, 미국선교사를 통해 배운 피아노와 바이올린에 특출난 재능을 보였다고 합니다.
백승암_청소년시절 부친 백목사님의 권유로 만주 용정 은진중학교에 유학한 아버님은 재학중 음악부에서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연주하시면서 음악을 놓지 않으셨다고 했습니다. 월남 후 수원삼일중학교의 교사로 근무하던 아버님은 모든 생활이 안정되자 좋아하는 음악을 더 공부하기로 결심하고, 서울음대 작곡과에 입학하여 음악공부에 매진했다고 합니다.
김 선_말씀을 듣고 나니 정말 백교수님은 믿음의 사람이셨군요. 음악을 찾아 월남하셨던 열정이 남다른 분이셨음을 이제야 알게 되었습니다.
이용일_백교수님 부친께서 목사님이라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평소에 지난 일에 대한 가슴아픈 말씀은 하지 않으셔서 6.25의 직접적인 피해자라는 것은 이번에 처음 듣는 이야기입니다. 6.25가 백교수님에게 미친 영향에 대해서 좀 더 말씀해 주세요.
차복희_서울대음대 2학년생이었던 남편이 부친과 절친한 미국선교사의 권유로 미국 음대 유학을 준비하던 중, 갑자기 발발한 6.25전쟁으로 유학을 가지 못하게 됩니다. 그리고 교회를 지키던 남편의 부친과 남동생이 함께 공산당에게 납치되고 순교하시게 됩니다. 서울음대2학년이던 남편은 홀로 남게 된 조부와 모친의 생계를 책임지면서 학업을 계속했으며, 그래도 그의 얼굴은 언제나 천사처럼 평화롭고 밝기만 했었다고 주변사람들에게 들었습니다.
임자향_아... 백교수님께서 말씀을 안 하셔서 그 정도로 큰 아픔을 갖고 계신 줄 몰랐습니다. 그럼에도 항상 표정이 밝으셔서 저희들은 항상 행복하셨던 걸로만 기억됩니다.
이용일_백교수님의 가족 중에 음악인이 또 계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어떤 분이 더 계시죠?
차복희_우리는 딸 셋과 아들하나를 두었는데 큰딸은 피아노전공, 둘째딸은 첼로전공, 셋째는 바이올린을 전공했습니다. 둘째사위는 바이올리니스트 전용우 바이올리니스트입니다.
백태현 교수님과의 첫 만남
이용일_백태현 교수님과의 첫 만남이 궁금합니다. 임자향 교수님은 교수님을 언제 처음 만나셨나요?
임자향_백교수님께서 제가 해외유학을 하고 귀국하자 즉시 저를 성신에 불러주셨고, 성신에서 후학을 가르치고 정년퇴임하고 명예교수가 되었습니다. 백교수님은 평생 저의 멘토이셨고 은인이십니다.
박수화_저는 대학 입시 때 백교수님을 처음 뵈었습니다. 그때 정말 대단했었습니다. 당시 대학입시 2차 대학 음악과로는 경희대와 한양대가 있었는데, 오히려 예원. 예고 출신들이 서울대 떨어지면 성신여대 음악과를 지원할 정도였으니까요. 그리고 졸업 때 음악과 졸업생이 성신여대 전체에서 수석 졸업하는 대단한 일도 있었습니다.
이용일_김 선 선생님의 첫 만남은 어땠나요?
김 선_제가 서울대 떨어진 후 고민 하고 있을 때 저를 가르친 교수님께서 성신사대 (지금은 여대 이지만 저희 땐 사대였습니다)가 깨끗하고 막 떠오르는 대학이라며 추천해 주셨고 입학 후에 백교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저희 학교에 오케스트라가 없었던 당시에 백교수님이 기획, 지휘하신 정기 연주회 때 국립교향악단과 협연하며 더 가까이 뵙게 되었습니다.
백태현 교수님의 음악세계
이용일_백교수님은 많은 작품을 남기셨지만 발표는 거의 성가곡만 하셔서, 그동안 교회음악계 외에 일반 음악계에는 알려진 작품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래서 작곡활동을 안하시고 음악교육만 하신 걸로 알고 있는 음악인들이 많습니다. 백교수님의 음악세계가 어떠하셨는지 아드님부터 말씀해주시지요.
백승암_아버님의 유품을 정리하면서 부친의 음악세계를 알게 되었습니다. 부친의 음악은 클래식음악세계와 기독교음악세계 둘로 구분 지을 수 있습니다. 클래식음악은 발표하지 않고 가지고 계시던 청춘 때의 작품들이 해당되며, 기독교음악은 중년이후 작곡하신 종교작품들이 해당됩니다.
김 선_네, 저도 백교수님의 작품이 잘 알려지지 않은 점이 안타깝습니다. ‘저희 학교학생들이 널리 부르게 하셨으면 지금쯤 이 작품들이 많이 알려졌겠다.’는 아쉬운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이제라도 새롭게 발굴될 수 있는 노래가 있다는 것은 아껴두었다가 식상한 연주 레퍼토리에 생생함을 더하고자 의도 하신 게 아닐까요?
차복희_남편은 총각 때인 1952년에 오페라「헤롯왕」을 작곡하여 성신여고합창단과 합주단을 훈련시켜 이 작품을 발표하였고, 언니와 저를 공연에 초대했었습니다. 그때 「헤롯왕」에 대한 광고도 하지 않으시고 공연을 지휘했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는 알맞은 작품이 없으면 직접 만들어서 공연하셨고 만든 작품을 알리지도 자랑도 하지 않는 분이셨습니다.
박수화_‘작품을 왜 발표를 안 하셨을까.’라는 생각을 해보았는데 겸손함이 있으셔서 그러셨던 것 같습니다.
이용일_그 당시 작곡가들이 거의 다 현대음악에 심취하고 전통 스타일의 작품은 무시할 시기였습니다. 작곡가들에겐 힘들었을 때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임자향_음악이 서정적이면서도 박자를 또박또박 지키시는 분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김 선_제가 1학년 때 백교수님께 화성학, 관현악법, 합창은 배웠지만 교수님의 작품을 접해본 적은 없습니다. 하지만 그 당시 저는 화성학을 다른 과목보다 어려워했는데 아주 자상하시고 친절하게 가르쳐 주셨던 생각이 납니다.
박수화_좋은 선생님을 모셔온다던가 오케스트라를 창단하신다든가, 학생들을 연주가로 키우신다든가 이러한 것들을 볼 때 백태현 교수님께서는 음악세계에 대한 자신만의 철학을 분명히 가지고 계셨던 것 같습니다. 오케스트라 지휘를 하실 때는 굉장히 치밀하시고 단원들을 배려하시고 있다는 것도 굉장히 많이 느꼈습니다.
백태현 교수님의 교육관
이용일_백교수님의 교육관은 철두철미했던 것 같습니다. 평소에 실천하신 교육관을 이야기해주세요.
김 선_제가 대학졸업 후 유학을 꿈꾸고 있을 때 전화 한통이 왔습니다. 성신 여중에 자리가 있는데 저보고 가르치면 좋겠다고요. 그리고 백 교수님께서 합창 시간에 한사람씩 나와서 5분씩 티칭(teaching)하도록 시간을 준 적이 있습니다. 그 시간에 저를 유심히 보셨던게 아닌가 싶습니다. 이렇게 꼼꼼하게 지켜보시고 기다리시고 그 자리에 맞는 사람을 심어주고 이끌어 가시는 분이라 봅니다.
박수화_백교수님의 교육관을 이야기하면, 우선 부모와 같은 조건으로 우리를 교육하려고 애쓰셨습니다. “너희들은 내 아들과 딸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너희 부모님에게 양육을 부탁했다”고 하셨습니다. 또한 절대로 학생을 편애하지 않고 모두 똑같이 공정하게 대해주셨습니다. 학교에서는 소외되고 보잘 것 없더라도 집에서는 부모에게 사랑받는 귀한 아들과 딸이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이용일_우리나라 작곡계가 아방가르드 하나만 놓지 않고 갔더라면, 여력만 있었다면 백태현 교수님도 충분히 활동을 했을 텐데 말이지요. 작곡지도도 직접 할 수 있는데 하지 않고 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젊은 강사(작곡가)들이 가르칠 수 있게 기회를 주시고 뒤로 물러나시곤 하셨는데요. 이렇게 겸손하셨던 백교수님께서 평소에 가족에게 말씀하신 교육자상이 혹시 있으신가요.
백승암_작곡을 한다는 것은 자기만의 세계에 산다는 것인데 아버님은 작곡에 빠지면 교육에 애씀이 소홀해 질 것이 염려되어서 작곡활동보다는 음악교육에 더 치중하셨던 것 같습니다. 또한 은퇴하신 후에도 건강이 허락하는 한 대학 강의를 하시면서 교육자로 평생을 사셨습니다.
백태현 교수님의 가족사랑
이용일_청년 백태현은 6.25때 부친과 동생을 잃고 큰 변화가 왔었고, 또 한 번은 인생의 반려자인 차복희 여사를 만나 결혼하면서 제2의 인생변화가 시작 되었을 거라고 봅니다. 제가 목포대학에 몸담으면서 차여사님의 친정에 대해서 알게 된 일이 있습니다. 차여사의 친정오빠 차우균박사의 자제 둘에게 음악불모지 목포에서 음악을 가르쳤으니까요. 당시 차여사는 이화여대 재학 중이었는데, 미국 유학 가는 것으로 부모들이 준비하고 있었던 때였으니 부친과 동생을 잃고 고학하는 백태현과의 사귐을 얼마나 반대하셨겠습니까. 60년이나 지난 지금도 역시 여전히 맺어지기 어려운 결혼일겁니다. 그러나 독실한 기독교인인 차여사의 부모는 순교자의 아들 백교수를 외면하지 않고 딸과 혼인을 맺게 해주셨습니다. 백태현의 됨됨이를 보고 차여사의 부모가 허락한 것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백승암_그때 외조부님의 반대로 낙담한 아버님은 뜨거운 가슴으로 “사랑의 언약’ 이라는 연가곡(사랑노래)을 작사, 작곡하게 됩니다. 이후 결혼승낙을 받게 되자 그 기쁨으로 연이어 곡을 썼고 총17곡의 가곡을 작사, 작곡하게 되는데, 이 가사가 바로 두 분의 러브스토리입니다. 아버님은 작곡한 이 연가곡을 고희연에서 작은 음악회를 통해 발표를 하셨습니다.
김 선_오늘 오기 얼마 전에 받은 백 교수님 작품 집 ‘사랑의 언약’을 훑어보며 피아노로 쳐 보았습니다. 곡들이 아주 간결하며 백교수님의 순수함이 담겨져 있었습니다.
이용일_아드님이 보는 아버지 백태현 교수는 어떠하셨습니까.
백승암_부친에 대해서는 돌아가신 후 유품을 정리하면서 더 깊이 알게 되었습니다. 아버님 백태현 교수님에 대해 몇 가지 말씀드린다면... 평생을 사랑, 용서를 실천하면 살아오시고, 기획력과 창의력이 뛰어나셨습니다. 또한 기록과 보관의 달인, 남을 위해 희생하시고 그 대가를 절대 바라지 않는 분이셨습니다.
이용일_백교수님께서 남기신 작품과 유품들을 어떻게 정리 보관하셨나요.
백승암_부친께서는 모든 걸 서재에 잘 보관하셨어요. 생전엔 그런게 있는지 저도 몰랐지만, 돌아가시고 나서 제가 2년 동안 부친의 유품과 친필악보, 사진들을 모두 정리하면서 많은걸 새로 발견하였고 아버님을 다시 알게 되었습니다. 어머님도 이런 걸 모르셨습니다. 그리고 발표 안하신 작곡작품들을 세상에 널리 알리고, 쓰시다 돌아가신 미완성 자서전을 제가 완성해서 하늘에 계신 아버님께 선사해드리고 싶습니다
백태현 교수님이 국내 음악계에 끼친 영향
이용일_백교수님께서는 학교에서 음악교육을 어떻게 하셨는지 알고 싶습니다.
임자향_백교수님은 25세 때 성신여고 교사로 역임하시면서 여고합창단과 여고생 오케스트라를 창단하여 열렬한 음악에너지를 발산하고 음악교육에 전념하셨고, YMCA합창단을 창단하여 4년 동안 열정적으로 음악활동을 하셨습니다. 또한 성신학원 계열인 성신사대부국 음악선생님을 도와 어린 학생들로 구성된 아동오페라단을 창단케하여 아동오페라를 국내최초로 공연하였습니다. 백교수님은 “자교 출신 교수를 임용해야 그 학교가 발전하게 된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학교가 아니라 음악인을 길러내는 학원이라 해야 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백교수님은 항상 창의적인 음악활동을 통해 성신의 음악교육을 발전시켰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박수화_백교수님은 성신여대 음악과를 음악계에서 높이 평가 받는 학교로 만드셨고 그렇게 성신학원에 이바지하셨습니다. 그 열정은 누가 봐도 정말 대단하셨지요.
정리_김수현 기자 / 사진_김문기 부장
- 기사의 일부만 수록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음악춘추 2015년 4월호의 기사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
<김문기의 포토랜드>
이용일 (한국음악교육협회 명예회장)
임자향 (성신여대 피아노과 명예교수)
박수화 (콜레기움 보칼레 분당 지휘자)
김 선 (합창 지휘자)
차복희 (사모님, 시인, 원로장로)
백승암 (장남, ORSC Partners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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