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음악춘추

인물탐구 첼리스트 현민자 / 음악춘추 2018년 6월호

언제나 푸른바다~ 2019. 5. 3. 10:34


인물탐구 첼리스트 현민자

우리나라 첼로음악의 위상을 높여준 첼리스트 현민자

일 시 2018년 5월 14일 오전11시

장 소 선궁


진 행 : 이용일(한국음악교육협회 명예회장)

패 널 : 이상만(음악평론가, 국제델픽위원회 명예회원)
김 봉(지휘자, 가천대학교 명예교수)
박태형(단국대학교 교수)
이숙정(현대음악앙상블 ‘소리’ 대표, ‘디 앙상블‘ 멤버)
장형원( 한국예술종합학교, 한국예술영재교육원,
           서울중앙음악학원, 경희대 출강)
정선이(서울아카데미앙상블 첼로 수석

첼리스트 故 현민자(1940~2018) 선생은 1940년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이화여자중학교, 서울예고를 졸업한 후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재학 중에 도독하였다. 뮌헨대학에서 수학하였고 쾰른·프라이부르크 국립음대를 졸업하였으며 유명 음악콩쿠르에서 첼로, 실내악부문에서 많은 입상 경력이 있다. 국내 각 지역과 독일, 미국, 스페인, 일본, 동남아 등에서 독주회, 실내악 연주를 하였으며 오케스트라 협연 등 활발한 연주활동을 펼쳤다.

A.Navarra, P.Muller, P.Tortelier, A.Noras, B.Greenhouse, M.Rostropovitch 등을 초청하여 국내에서 마스터클래스를 진행하였고 제1회 차이코프스키 주니어 콩쿠르 지도자 상을 수상하였다. 이태리 시에나 Academia Chigiana Mater Course에 수회 참가하여 A.Navarra를 사사 하였으며 G.Cassado, M.Cervara, 전봉초, 양재표 교수를 사사하였다. 연세대학교에서 후학을 양성하며 제자들을 사랑으로 가르쳤다. 저서로는 <첼로를 위한 음계와 아르페지오>이 있다. 


1. 현민자 선생의 성장과정과 음악의 시작


이용일 / 오늘은 우리에게 희망을 주시고 항상 웃는 얼굴로 대해주신 현민자 선생님을 추모하기 위해 이상만 선생님과 제자들과 함께 대담하는 자리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우리나라 첼로계의 개척자이시며 교육자로 좋은 제자들을 많이 길러내신, 우리사회에 많은 업적을 남기신 분입니다. 먼저 그분의 성장과정과 음악의 시작에 대해서 이야기 해보겠습니다.


이상만 / 현민자 선생님은 서울 출신이고, 당시에 현 선생님의 아버지가 사업을 굉장히 활발하게 하셨습니다. 현 선생님은 이화여중에 입학했는데, 당시에 이화여중은 서울예고가 생기기 전에 우리나라에서 서양음악을 발전시킨 요람 중에 하나입니다. 이화여중에 당시로 말하면 천재적인 소녀를 음악에 입문시켜서 가르쳤는데, 당시에 여자들이 첼로를 한다고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이화여고에서 장정자가 첼로를 먼저 시작했고 그 후에 조금 더 어린 현민자 선생님이 첼로를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먼저 돌아가셨습니다만, 당시 부통령이었던 이기봉씨의 딸인 이강희씨가 첼로를 했습니다. 그래서 강희장학회를 만들어서 콩쿠르를 만들었는데 그것이 이화경향콩쿠르의 시초입니다. 그분 일가가 사망하고 이강희씨도 죽게 되자 강희재단을 만들어서 콩쿠르를 시작한 것이죠. 그리고 이화여대 교수인 바이올리니스트 이종숙 선생님이 당시에 앙상블을 만들어서 전국을 순회하면서 연주했는데, 그런 틈에 현민자 선생이 첼로를 시작한 것이죠. 거기서 첼로 연주를 잘하니까 서울예고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초기에 서울예고에 입학해서 첼로를 전공하게 되었지만, 어렸을 때부터 모습이 밝고 공부도 매우 잘했습니다. 이분을 통해서 우리나라 여류 첼리스트가 자꾸 늘어나게 되는 중간 역할을 했습니다.


장형원 / 선생님의 부모님께서는 의식적으로 굉장히 앞서나가는 분이셨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서울대학교 음대 재학시절에 유학을 떠나셨겠죠. 귀국 후에 아이들 3명을 낳으시고 가족을 남기고 혼자서 다시 유학을 떠나셨습니다. 저는 유학시절, 현민자 선생님의 스승이신 Cervera 선생님께 배웠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유학간지 1년 만에 디플롬을 끝내시고 한국으로 돌아가셨고, 선생님께서 귀국하신지 얼마 되지 않아 유학을 떠났던 저는 선생님과 함께 공부했던 클래스메이트들과 함께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현 선생님은 유학을 마친 후에도 마스터 클래스를 받으셨는데, 저와 함께 많이 다니셨습니다. 너무나 열정적으로 배우셨죠.

 

2. 현민자 선생과의 첫 만남

이용일 / 김봉선생님은 현민자 선생님과 언제 처음 만나셨나요?


김봉 / 선생님께서 1967년도에 1차로 유학을 마치고 귀국 하셨습니다. 당시 제가 예고1학년에 재학 중이었습니다. 저는 원래 미술과로 서울예고를 입학했는데 음악과로 전과를 하게 되었습니다. 당시에 임원식 선생님께서 좋은 선생님이 있으니 가서 배우라고 현민자 선생님을 소개해주셨고, 제가 선생님의 1호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때 처음 선생님을 만나게 되었죠.


이용일 / 정선이 선생님은 언제 만나셨나요?


정선이 / 저는 선생님께서 1977년에 프라이부르크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오셨을 때, 전소영과 함께 지도 받으러 가게 되었습니다. 당시 저희 집안은 어머님께서 이따금씩 한복을 입으실 정도로 보수적이었는데, 레슨을 가니 선생님께서 너무나 예쁜 정장을 입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레슨을 하시면서 좋은 이야기들을 굉장히 많이 해주셔서 당시 신선한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아침에 일찍 레슨을 가게 되면 핫케이크를 구워주시면서 제자들을 사랑으로 대해주신 기억이 납니다. 어린 저는 소심해서 대답도 잘 못할 정도였는데, 따뜻하게 사랑으로 품어주셨습니다.


장형원 / 그저 선생님 댁에 가는 자체가 좋았습니다.


이숙정 / 선생님 댁이 아름다워서 마치 영화에서 볼법한 이국적인 곳이었습니다.


이용일 / 현민자 선생님은 마음 씀씀이가 좋으셨고 구김 없는 삶을 사셨습니다. 박태형 선생님은 언제 현민자 선생님을 처음 만나셨나요?


박태형 / 저는 연세대학교에서 선생님께 사사 받았습니다. 처음 만난 것은 입시생 때였습니다. 저는 공부를 하다가 재수하면서 첼로를 시작했습니다. 저희 어머님과 함께 선생님을 찾아 뵈었는데, 둘째 아드님과 저와 나이가 같아서 제가 아들 같다고 하시면서 “너는 첼로 하면 잘할 것이다.”라고, 당시 저의 인생을 바꾸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4년 동안 입시를 준비해서 연세대학교에 입학했는데, 선생님께서 저를 격려해주시고 챙겨주셨기에 가능했던 것 같습니다.


이용일 / 이숙정 선생님은 언제 처음 만나셨나요?


이숙정 / 저희 어머니와 현 선생님께서는 친구 사이로 가깝게 지내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선생님을 알고 있었죠. 당시에 어린 제가 ‘어떻게 저렇게 멋지고 세련된 분이 있을까?’라고 생각했던 기억이 나네요. 선생님의 자녀분들과 저희 남매는 유치원부터 함께 다녔습니다. 그래서 저는 선생님이 마치 가족 같아요. 저희가 세 자매인데, 어릴 때 같이 피아노를 배우다가 아버지께서 피아노 트리오를 하면 좋겠다고 하셔서 제가 첼로를 배우러 선생님께 가게 되었습니다. 그때 선생님께서 “너는 조그마한 아이가 손만 보인다. 첼로하면 잘하겠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당시에 저는 첼로가 싫었는데, 전부는 아니지만 선생님의 격려가 제가 첼로를 전공하게 된 하나의 이유가 되었습니다.


정선이 / 선생님께서는 항상 제자들에게 격려의 말씀을 많이 해주셨습니다. 레슨 받고 나오면, ‘내가 정말 잘하는가 보다.’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제자들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셨습니다.

 

3. 현민자 선생이 국내 음악계에 끼친 영향

이용일 / 위로와 격려가 있어야 학생들이 힘을 내서 공부하게 됩니다. 현 선생님께서 그 부분에 상당히 탁월하셨던 것 같습니다. 광주시립교향악단에서 지휘자로 있었던 저는 현 선생님과 협연을 몇 번 했었습니다. 당시에 현 선생님이 협연자로 오시면 단원들이 굉장히 좋아했는데, 같이 연주를 하면서 단원들에게 사랑이 가득 찬 말을 해주시고 격려도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면 거짓말처럼 오케스트라의 사운드가 달라졌습니다. 아마 단원들의 마음이 선생님의 말씀으로 풀어졌기 때문이겠죠. 또한 연주비를 드려도 받지 않으시고 단원들을 위해서 사용하셨습니다. 저하고는 참 좋은 인연이었습니다.


이상만 / 원래 음악 하는 사람들은 보통 성격이 자신의 악기를 닮아갑니다. 첼로를 하시는 분들은 포용력이 강합니다. 아마 악기를 하면서 원래 날카로운 분이지만 포용력이 강한 성격으로 변화한 것 같습니다.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여자 첼리스트로서 독주회를 일찍 하신 것이 현민자 선생님의 업적 중에 중요하게 손 꼽혀야 하지 않겠는가 생각합니다. 1세대 첼리스트들 중에서 전봉초 선생님을 제외하고 독주회를 하는 연주자들이 별로 없었습니다. 반면에, 현민자 선생님은 학교 재학 중에 독주회를 했습니다. 지금은 불에 타서 없어진 원갑사라는 극장에서 1960년에 독주회를 했습니다. 그러니까 대학 재학 중에 독주회를 여자가 한다는 것은 기록적인 일입니다.

그리고 1962년에 A.Navarra가 제1회 국제음악제에 참여하였습니다. 그때 현민자 선생님이 나바라를 찾아가서 레슨을 받았는데 그것을 계기로 나중에 인연이 되어서 그에게 배우게 되었습니다. 현민자 선생님은 적극적으로 나서서 연주하고 활동한 여성 첼리스트 1호라고 생각합니다.


이용일 / 서울대 트리오가 서울시향과 연주하기 전에 연습했던 곳이 광주시립교향악단입니다. 당시에 연주할 때는 피아노와 맞춰서 했습니다. 그만큼 당시 첼로의 연주수준이 높지 않았죠. 그런데, 현민자 선생님께서는 당시에도 너무나 연주를 잘하셨습니다. 그래서 인기가 많았죠. 초창기 오케스트라는 순진했습니다. 협연자들이 오면 그들에게 음악을 배우려고 했었습니다. 그래서 현 선생님이 왔다 가면 수준이 올라갔습니다.


장형원 / 선생님께서 독일에서 공부를 마치고 돌아오셨을 때 우리나라에는 보잉이나 에튀드에 대한 개념 없이 학생들이 배우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때 선생님께서 정확히 배워 오셔서 저희들에게 바로 전달을 해주셨습니다. 그때 선생님께서 가르치신 것이 저희에게 도움이 되어서, 저희도 지금 학생들을 가르칠 때 그대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학생들보다 더 열심히 배우러 다니셨습니다.


김봉 / 저는 활 잡는 것부터 현 선생님께 배웠습니다. 백지 상태에서 현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 했습니다. 국내에서 선생님께 배우다가 유학을 가서 Navarra 선생님께 배웠는데, 그때 기본기를 많이 고치지 않았습니다.

 

4. 현민자 선생의 음악세계

이용일 / 김봉 선생님은 현 선생님이 처음부터 가르쳤기에 나쁜 습관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가 레슨을 할 때, 처음 배우는 학생보다도 잘못된 습관을 가진 학생들을 고치는 것이 더욱 힘듭니다. 대한민국의 음악수준이 이만큼 발전하는 것에는 현 선생님의 영향이 굉장히 큰 것 같습니다. 선생님은 현대음악은 연주를 하셨나요?


이숙정 / 시대상황으로 인해 현대음악 연주는 많이 안하셨지만 관심이 굉장히 많으셔서. 현재 제가 대표로 있는 현대음악앙상블 ‘소리’를 2001년에 창단하셨습니다. 선생님께서 앙상블을 창단하면서, “프랑스에 피에르 불레즈의 Ensemble Inter Contemporain이 있는 것처럼 우리나라에도 현대음악 전문 연주단체를 한번 만들어보자.”고 제안하셨습니다.
대음악앙상블 ‘소리’가 현대음악 전문 연주단체로서는 우리나라의 1호입니다. 그 후에 비슷한 단체들이 많이 생겨났죠. 그 당시 선생님이 상당히 앞서가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김봉 / 선생님께서 유학을 다녀오시고 저는 군대를 다녀오고, 제가 한 학기를 선생님께 배우고 학교를 졸업했습니다. 당시에 제가 유학을 독일로 떠나고 싶다고 선생님께 상의 드렸는데, ‘고음악’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 어떻겠냐고 말씀하셨습니다. 항상 앞서서 생각하셨던 것 같아요.


이용일 / 우리나라에는 그때도 그리고 지금도 고음악이 거의 없다고 봐도 되겠죠. 예전에 악기가 있었는데 연주할 사람이 없어서 연주가 되지 않고 있습니다. 당시에 그런 생각을 하셨다는 것은 의식적으로 굉장히 앞서가신 것이죠.


장형원 / 항상 앞서가셨습니다. 선생님께서는 학생들을 가르치기 위해서 꾸준한 공부와 연구를 끊임없이 하셨는데, 페스티벌과 마스터 클래스를 꾸준히 다니셨습니다. 저도 선생님과 동반자로 함께 다니다 보니 큰 페스티벌에서 음악가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선생님께서는 그런 자리에서 굉장히 적극적인 자세로 임하시고 연주자들을 대하셨던 것 같습니다. 당시에는 한국에서 첼로를 한다는 것은 외국인들이 보기에 굉장히 생소했던 시절이었는데, 선생님께서는 적극적으로 저희를 알리셨고 나서셨습니다. 가장 대단하다고 느꼈던 점은 레슨 내용을 모두 녹음해서 방으로 돌아오셔서 몇 번씩 들으시면서 각 연주자들의 레슨 내용을 모두 정리하셨습니다. 또한 가정일도 열심히 하셨는데, 해외에 나오시면 자녀들을 위한 장난감을 빼놓지 않고 챙기셨고 사부님을 정성껏 보필하셨던 기억이 나네요.


이용일 / 그렇게 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여유인 것 같습니다.


장형원 / 네. 선생님께서는 항상 여유와 자신감이 있으셨습니다.


이용일 / 생각이 여유가 있었기에 멀리 내다 볼 수 있었고 사방을 둘러 볼 수 있었던 것이죠.


김봉 / 아주 솔직하고 내추럴 하셨습니다. 어떨 때는 제자들을 친구처럼 대하셨습니다.


장형원 / 저는 선생님과 여행을 많이 다녀서인지 정말 친 언니 같습니다. 그리고 저에게 “사회 활동 할 때에는 집안일 때문에 못한다는 말을 하지 말라.”고 조언하셨습니다.


이상만 / <첼로를 위한 음계와 아르페지오>라는 선생님의 저서도 있지만, 제가 생각하기에 선생님은 우리나라 첼리스트의 지적 수준을 많이 높여준 것 같습니다. 특히 첼로 문헌들을 먼저 접해서 직접 소개해 준 것이 그분의 또 다른 큰 공로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두 번째로, 앞에도 이야기 했지만 우리나라가 국제 교류를 많이 하지 않을 때 일찌기 헬싱키 콩쿠르에 심사위원으로 가서 우리나라 첼리스트들에게 국제 진출의 꿈을 주고 다리를 놓아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장형원 / 당시에 국제 콩쿠르에 첼로로 진출한다는 것은 상상도 못했었죠.

 

5. 현민자 선생의 교육관

이용일 / 지금 이 자리에 있지만, 김봉 선생님이 서울대 재학시절에 그 연주력이 대단했습니다. 현 선생님을 만나 기초를 잘 닦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선생님이 얼마나 프로그램을 다양하게 주었는지, 또 아까 말씀하신 것처럼 모든 첼리스트의 핑거링이나 티칭을 정리한 것이 정말 대단하신 것 같습니다.


장형원 / 네 그때 저에게 정리한 악보를 주시기도 하셨습니다. 편찮으실 때에도 코칭을 하셨습니다.


이숙정 / 아프실 때에도 선생님은 매일 연습을 하셨습니다. 선생님 댁에 가면 첼로 방에서 첼로 소리가 났습니다. 그래서 들어가 보면 연습을 하고 계셨죠.


정선이 / 치매를 앓으셨는데, 사부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선생님이 첼로를 하는 시간이면 자유롭다고 하셨습니다. 첼로를 연주하실 때는 첼로에만 온전히 집중하셨기 때문이죠. 그리고 저희가 찾아 뵈러 가면 첼로를 주시면 연주해보라고 하시고 격려하시고 서로 음악적으로 소통했습니다. 아프신 와중에도 제자들을 가르치는 것과 첼로를 연주하는 것은 선생님의 인생의 모든 것 이었습니다. 가르치는 것에 대한 열정은 돌아가시기 전까지도 그대로 남아있었죠.


장형원 / 항상 제자들에게 새로운 것들을 가르치시기 위해 노력하셨습니다. 또한 당시에 지금처럼 해외를 자유롭게 드나들기 힘든 시절이었는데, 학생들 같이 데리고 가서 레슨 받게 하시고 일일이 통역도 하셨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학생들을 데리고 레슨부터 여행까지 열정적으로 학생들을 위해서 일하셨습니다.


정선이 / 선생님께 제일 본받아야 할 점이 매사에 당당하신 분이셨지만, 악기 연주와 가르치는 것에는 항상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임하셨습니다. 선생님은 조금이라도 더 배워서 학생들을 더 잘 가르쳐 봐야겠다고 생각하셨어요. 사실 저희를 가르치시던 1977~1980년에는 이미 대한민국에서 최고의 선생님이셨습니다. 그러나 항상 겸손한 마음으로 조금이라도 더 배워서 학생들에게 더 좋은 것을 주려고 노력하셨습니다.


이숙정 / 맞아요. 항상 공부를 하셨습니다.


장형원 / 그리고 한국의 학생들의 실력향상을 위해서 마스터클래스도 꾸준히 개최하셨습니다.


이용일 / 연대에서 배우신 박태형 선생님은 어땠나요?


박태형 / 제가 연대에 재학 중일 때는 아르토 노라스 선생님이 학교에 한번 오시고 필립 뮐러 선생님이 많이 오셨습니다. 사실 당시는 외국 사람이 우리나라에 와서 연주를 하는 것도 신기할 때인데, 첼리스트가 오셔서 저희들을 레슨해주시고 선생님의 지식과 그분의 아이디어를 섞어서 가르쳐주셨습니다. 그 다음날 현민자 선생님께 레슨 받으러 가면, 저희는 초긴장 상태였습니다. 전날레슨 때 지적 받았던 부분들을 모두 고쳐 가야했죠.


이용일 / 그때 연대 분위기는 어땠나요?


박태형 / 학생들이 너무나 좋아했었습니다. 그러나 약간의 부담도 있었죠. 국내에는 어느 정도 실력 있는 학생들이라고 했었는데 압도적인 분들이 와서 연주를 보 여주시고 레슨을 하시니까 마스터 클래스를 하면 학생들이 꽤나 긴장했던 기억이 납니다.


이숙정 / 2004년과 2006년에 ‘크론베르그 아카데미 인 서울’을 현민자 선생님이 음악감독으로 이끌어 가시면서, 노라스 선생님과 그린하우스 선생님 등 많은 분들이 한국의 첼리스트들을 위한 마스터 클래스를 열었습니다.


정선이 / 이 크론베르그 페스티벌을 통해서 대한민국 첼로의 수준이 획기적으로 바뀌었습니다. 당시에 우리나라에 오셨던 분들은 지금도 한 자리에 모시기 힘들 정도로 탑 연주자 이십니다. 이런 분들이 한꺼번에 한국에 방문하셔서 학생들을 직접 가르치셨으니, 너무나 좋은 기회였습니다. 저는 이 페스티벌에서 통역을 했었는데, 마스터 클래스를 통해서 대한민국의 수준이 180도 바뀌게 되었습니다. 페스티벌이 열리기 전인 1990년대 후반에 까르네로라는 선생님께서 경주에서 캠프를 하셨고 몇 번 한국을 방문하셨습니다. 크론베르그 페스티벌이 끝난 후에 다시 오셨는데 “내가 지난번에는 와서 음정과 박자를 가르쳐주다가 갔는데, 어떻게 이렇게 갑자기 한국의 첼로 수준이 올라갔냐?”라는 말을 할 정도였죠. 이 행사는 대한민국 첼로계를 완전히 바꾼 행사입니다.


장형원 / 사실 지금도 다시 한 번 이 페스티벌을 개최하고 싶은데 그것을 이끌어갈 사람도, 상황도 여의치가 않습니다.


이숙정 / 그 당시에 너무 좋았습니다. 그래서 그때 오셨던 선생님들이 다시 한국을 방문하고 싶어 하십니다.


정선이 / 현재는 대한민국의 첼로 수준이 많이 성장해서 어느 외국 선생님이든지 한국의 학생들을 가르치고 싶어하십니다. 이 페스티벌이 그것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현민자 선생님은 우리나라 첼리스트의 지적 수준을 많이 높여준 것 같습니다. 특히 첼로 문헌들을 먼저 접해서 직접 소개해 준 것이 그분의 또 다른 큰 공로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또한, 첼리스트들에게 국제 진출의 꿈을 주고 다리를 놓아준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용일 / 연대에서 선생님께서 학생들을 가르치신 이야기를 조금 더 듣고 싶습니다.


박태형 / 저희가 학교에서 공부하면서 선생님께 영향 받은 것이 몇 가지가 있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도전정신입니다. 선생님은 저에게 음악을 늦게 시작한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앞을 보고 도전하고 진행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입시 때부터 지금까지도 제가 모토로 가지고 있는 선생님의 말씀이 있는데요. “무대에 올라가면 어떤 상황이 올지 모르는데, 100번하면 100번 다 맞아야 하지 않겠니?”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비슷한 시기에 다른 선생님께서는 저에게 “10번하면 7번은 맞아야 하지 않겠냐?”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것이 다른 선생님들과 현민자 선생님의 차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때 저에게 해주신 말씀이 가벼운 말씀이었을 수도 있지만, 저는 굉장히 큰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선생님께 받은 가장 큰 가르침은 자신감과 완벽한 연습입니다. 그리고 아까 말씀하실 때 선생님께서 인자하셨다고 말씀하셨는데, 저희에게는 굉장히 엄하셨습니다. 레슨 때는 대부분의 학생들이 울고 나올 정도였기에, 레슨 시간에 항상 초긴장 상태였습니다(웃음). 하지만 레슨을 받고 연습실에 가있으면 부족했던 레슨 더 봐주시겠다고 하시면서 많은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이숙정 / 선생님께서는 엄하실 때는 굉장히 엄하셨죠.


이용일 / 아무래도 현민자 선생님이 연대에서 학생들을 엄하게 가르치신 것은 서울대학교 학생들의 수준을 능가하려고 하신 것은 아닐까요?


정선이 / 그러셨던 것 같습니다. 당시에 연대에는 실력 있는 학생들이 많이 있었죠.


장형원 / 입시곡이나 실기시험을 선정하실 때도 학생들의 수준향상을 위해서, 당시 학생들 수준보다 앞서서 생각하셨습니다. 노라스 선생님을 만났을 때에도, 어떤 곡이 어떤 테크닉에 좋은지를 세세하게 물어보셨고, 열심히 준비하는 선생님의 모습을 보고 노라스 선생님도 본인의 티칭법을 많이 전달하셨습니다.


이용일 / 이숙정 선생님이 배울 때는 어떠셨나요?


이숙정 / 저는 예원, 예고 다닐 때 선생님께 배웠는데, 당시에 선생님이 제자가 가장 많으셨습니다. 그렇게 바쁘신 와중에도 자녀들과 집안일을 모두 챙기셨고 모든 살림도 선생님께서 직접 챙기고 정리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많은 학생들을 꼼꼼하게 가르치시고 챙기셨습니다. 정말 대단한 분이라고 생각됩니다.


김봉 / 기억력도 굉장히 뛰어나신 분입니다. 제자 모임을 한 적이 있는데, 제자들이 언제 배웠는지 모든 연도수를 기억하셨습니다. 하나도 틀리지 않고 정확하게 기억하셨어요.


이용일 / 제가 선생님을 마지막에 만난 것이 신당동에 스튜디오를 만드셨을 때입니다. 당시 시설이 굉장히 좋았던 것으로 기억이 납니다. 제가 볼 때는 후학들을 가르치는 것에만 그치지 않고 함께 연주하고 연습하는 것을 꿈꾸셨던 것 같아요.


정선이 / 그때 스튜디오를 만드셨을 때는 전공하는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도 목적이었지만, 주변에 첼로를 배우고 싶어 하는 직장인이나 일반인들을 가르치셔서 음악을 즐기는 마니아층을 넓히기 위한 목적도 있으셨습니다. 음악을 배우고 흥미를 가지다 보면 음악회에 찾아오는 발길도 많아지고 저변확대가 될 것이라는 기대감이 있으셨던 것이죠.


이숙정 / 선생님께서는 지식도 많으셨고 노력도 많이 하신 분입니다. 사실 아는 것이 많을수록 무언가를 가르칠 때 인내심이 부족할 수도 있는데, 선생님은 그렇지 않으셨습니다. 제가 선생님을 보면서 대단하다고 느낀 것 중 하나는 학생들을 가르치실 때의 인내심입니다. 스즈끼협회 일도 열정적으로 하셨는데 당시에 학생들이 전공하는 학생이 아닌 스즈키 학원 출신의 학생이었습니다. 저는 캠프를 할 때면 그 학생들을 가르쳤는데, 사실 학생들에게 해줄 말이 많이 없어서 난감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선생님께서는 쉬지도 않고 너무나 좋아하시면서 아이들을 가르치셨습니다. 선생님께서 초창기에 아프시기 시작할 때, 제자들이 걱정이 많았는데 이렇게 행복해 하시는 일을 그만두게 하면 안 된다고 제자들끼리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이용일 / 여유롭게 학생들을 가르치고 품어주신 현민자 선생님의 모습은 우리에게 모범을 보여주고 후학들에게 힘이 됩니다.


이상만 / 현민자 선생님에 대해 두 가지로 정리가 됩니다. 첫째는 공부를 잘하고 인물도 잘생긴 분이 음악을 했기 때문에 많은 학생들, 특히 여성 후학들의 음악 공부의 희망을 심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그 삶은 음악을 하는 음악가로서의 이유와 목표가 철저했던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우리나라 음악계에 위상을 높여준 분이 아닌가 생각 합니다.


글_ 김진실 기자. 사진_ 김문기 부장




진 행 : 이용일(한국음악교육협회 명예회장)



이상만(음악평론가, 국제델픽위원회 명예회원)


김 봉(지휘자, 가천대학교 명예교수)


장형원( 한국예술종합학교, 한국예술영재교육원, 서울중앙음악학원, 경희대 출강)


박태형(단국대학교 교수)


이숙정(현대음악앙상블 ‘소리’ 대표, ‘디 앙상블‘ 멤버)


정선이(서울아카데미앙상블 첼로 수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