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춘추 기획대담 | 인물탐구
작곡가 백대웅
국악작곡 및 국악이론의 거장인 故 백대웅(1974~2011) 선생은 1943년 전남 광주에서 출생, 광주일고를 거쳐 서울음대국악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한 해병대 제 5여단 사령부 군악대장을 역임한 이후, 1971년에 한국방송공사(KBS) 입사하여 TV국 PD 및 FM부 차장을 역임했다. 1984년 전남대학교 예술대학 국악과 교수, 중앙대학교 한국음악과 교수 및 음악대학 학장을 역임한 고인은 1998년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을 창립하여 초대원장을 역임하였다.
국악 이론의 걸출한 명저로 평가받는 <한국전통음악의 선율구조>를 비롯하여,<전통음악의 랑그와 빠홀>, <다시 보는 판소리>, <인간과 음악>등 총 16권의 저서를 남겼다. 또한 고인은 박범훈, 김해숙 등과 더불어 ‘뿌리깊은나무 조선소리전집’을 총괄 기획, 연출하였다. 이 프로젝트는 판소리, 산조, 민요 등 전통음악의 채보를 체계적으로 실천하여 그 음악적 요체에 대한 실증적 기반을 마련하는 작업이었다.
한편 고인은 현존 국악계의 명인과 문화계 인사들을 망라하는 <악서고회>라는 독서모임을 1982년에 조직하여 10년 가까이 지속하였다. 이 모임은 지금까지 미지의 영역으로 치부되던 국악 안의 새로운 구조와 가치들을 발굴하고 인식하는 연구모임이었고, 국악의 미래를 보다 창조적으로 확충하는 새로운 계기를 마련하는데 기여한 예술운동이었다.
국악작곡의 1세대로 불리는 고인은 다양한 편성의 가야금 합주곡과 협주곡, 관현악, 창작음악극 및 교향시 등에 이르기까지 다채롭고 폭넓은 영역을 아우르는 작곡가로 평가 받아왔다. 특히 엇모리장단을 비롯하여 불규칙한 장단을 바탕으로 하되, 이를 누구나 쉽게 공감할 수 있는 소통능력이 두드러지는 작품을 많이 발표하였다. 또한 「17현 가야금을 위한 산조」, 서양관현악을 위한 교향시 「천안삼거리」와 「가야금과 현악 4중주를 위한 ‘관동별곡’」, 그리고 한국 창작음악극 「영원한 사랑, 춘향이」에 이르기까지, 작곡가로서 백대웅의 인생은 새롭고 도전적인 영역을 붙들고 일상적으로 시름(씨름)하는 과정으로 가득 채워져 왔다. 1991년 KBS 국악대상, 대한민국작곡상 대상 「영원한 사랑 춘향이」 등을 비롯한 다양한 수상경력이 고인의 인생에 남겨져 있다.
일시 : 2018년 4월 16일 오전11시
장소 : 코스모스악기 7층
진행 : 이용일(한국음악교육협회 명예회장)
패널 :이건용(작곡가, 전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
김해숙(가야금연주자/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전 국립국악원장)
류형선(작곡가/전 국립국악원(창작악단) 예술감독)
윤호세(타악 연주자)
1. 백대웅 선생의 첫만남과 음악의 시작
이용일: 백대웅 선생님은 쾌활하고 넉넉하게 사신 분이십니다. 백 선생님은 국악을 서양음악과 똑같이 대하신, 폭넓게 음악을 이해한 선생님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분이 살아 계실 때 서양악기로 연주할만한 곡을 국악기로 연주하도록, 새로운 국악 작곡을 내기도 하시고 여러 가지 새로운 일을 많이 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백대웅 선생님의 업적을 재조명하면 좋겠습니다. 먼저 이건용 선생님이 처음 백 선생님을 만난 것은 언제인가요?
이건용: 첫 만남은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아마 음대에서 스쳐지나가듯이 만났던 것 같습니다. 그 이후에 백대웅 선생은 방송국에서 오래 근무를 했고 전공이 국악 작곡이었기 때문에 주로 서양음악 작곡 분야에 있었던 저와는 80년대 중반까지는 별다른 교류를 하지 않았다고 느낍니다.
그러다가 <국악 창작을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좌담에 함께 참석하게 되었는데, 국악 창작곡 위촉은 “이분에게 맡기면 됩니다.”라고 갑작스럽게 저를 지목했습니다. 그분이 ‘외교적인 발언’을 하는 분은 아닌데, 나중에 생각해보니 국악을 국악 하는 사람들만 누리고 있으면 안 되고, 관심이 있고 서양음악과 동등하게 취급할 수 있는 이론가, 연주가, 특히 작곡가가 있다면 그런 사람들이 얼마든지 그 경계를 넘나들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 그 말 속에 들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고 나서 얼마 후에, 백 선생님이 KBS국악관현악단 자문위원 혹은 운영위원으로 있을 때 저에게 국악 관현악곡을 하나 써달라고 의뢰를 했습니다. 그래서 원래 25현 가야금 독주곡으로 작곡했고, 지금도 연주되고 있는 25현 가야금 독주곡 「한오백년의 주제에 의한 변주곡」을 국악 관현악을 위한 가야금 협주곡으로 만들었지요.
이용일: 이건용 선생님 말에 덧붙이자면, 백대웅 선생은 음악을 하나의 큰 덩어리로 봤지, 국악과 서양음악을 나누지 않았습니다. 소리의 차이는 있을 지언즉 음악적 표현을 하는 것은 같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김해숙 선생님은 이 부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김해숙: 백대웅 선생님께서는 서양음악을 먼저 배우셨습니다. 전라남도 광주 출신이신데, 당시 시대의 여건을 놓고 볼 때, 지방에서 (남자가)피아노를 치는 것이 흔하지도 않고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외조부께서 목사님이셔서 피아노를 접하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서양음악 화성에 대단한 충격을 받으신 것 같습니다. 서울대학교 음악대학에 입학 하셔서 서양음악을 본격적으로 접하셨는데, 피아노뿐만 아니라 시창과 청음에도 탁월하셨습니다. 그러다가 방송국 PD로 오래 근무하면서 국악에 대한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된 것으로 압니다. 방송국에 재직하실 때 김소희 선생의 창극을 보고 음악적으로 큰 충격을 받으셨다고 해요. 그때부터 명인·명창을 일일이 찾아다니면서 그 분들이 들려주는 음악을 낱낱이 채보 하고, 그러면서 국악의 내면의 원리에 깊이 관여하시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 근현대 국악사를 살펴보면, 서구 문물이 밀려들어오면서 국악이 한쪽으로 밀려나게 되니까 당시에 국악을 하시는 분들이 우리 음악을 보호하자는 의도로 국악의 보편성보다는 특수성을 드러내는 쪽으로 연구를 많이 하셨습니다. 그러나 백 선생님의 경우에는 국악이 살려면 특수성만 가지면 안 된다, 보편성의 바탕 위에 특수성이 깔려야 국악이 모든 사람들에게 다가갈 수 있다고 생각하셔서 이를 위해 많은 노력을 해 오셨습니다.
이용일: 아마 백대웅 선생이 국악과로 들어와서 정회갑 선생님께 음악을 배웠는데, 정회갑 선생님 자체가 항상 전통음악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다가 과도 국악과니 더 많은 영향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혹시 백 선생님이 대학 졸업 후에 KBS가 아닌 대학원을 진학했으면 어떠한 형태로 그의 음악이 변했을까 궁금합니다. 아마도 방송국에 재직하면서 더욱 포괄적인 음악관이 생긴 것이 아닐까요?
류형선: 젊은 학생들이 백대웅 선생님의 성품이 어떤 분이신지 이해할 수 있는 단서가 하나 있는데요. 애니메이션 <원피스>의 주인공인 루피를 생각하면 딱 맞습니다. 자신이 세운 뜻과 가치를 향해 나아감에 있어서 찰나의 주저함이 없는 강력한 추진력, 머리를 오래 쓰는 것 보다는 몸소 직접 부딪혀서 활동공간을 만들어가는 성향, 특히 곡선이 아닌 정공법의 직진적 기질이 백 선생님의 리더십과 유사합니다.
저는 백대웅 선생님이 이미 교육자, 작곡가, 음악이론가로서 충분히 완결성을 갖추신 상태에서 만나게 되었습니다. 오히려 제가 백 선생님의 생각의 맥락을 알게 된 것은 그분의 책을 통해서 이었습니다. 직접 대면하기 전에 이미 그분의 생각과 이론에 대한 학습이 충분히 되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작곡을 하기 위해 이론체계를 필요로 했고, 그 이론 체계를 바탕으로 수많은 교수법과 교재를 만들어내셨죠. 국악인 중에서 백대웅 선생님만큼 서양음악에 능통한 분도 드물었지만, 거꾸로 서양음악의 맥락을 잘 알기에 역설적으로 국악의 고유성에 대한 집요한 천착의지를 갖고 계신 분으로 제게 기억되어 있습니다.
이용일: 윤호세 선생님은 언제 처음 만나셨나요?
윤호세: 첫 만남은 20살 전후 무렵 도올 김용옥 선생님의 책을 통해서 선생님을 처음 접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전통음악의 고수로서 사숙(私淑)하였던 선생님이 최고 명고수이신 김명환 선생님이신데, 백대웅 선생님께서 김명환 선생님의 애제자셨지요. 백대웅 선생님은 훗날 김명환 선생님의 생각과 이론을 책에 담으셨어요. 그런데 저는 전통음악과 관련한 이론이나 김명환 선생님의 이론을 백대웅 선생님의 책을 통해 먼저 접하게 된 거에요. 그 당시 <중고생을 위한 음악 강의>를 내셨는데, 그 책을 통해서 선생님의 생각을 처음 접하게 되었고, 이것이 인연이 되어서 늦깎이로 한예종을 입학하고 선생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첫 만남에서 선생님의 반응이 너무 썰렁하셨습니다. 워낙 무뚝뚝하셨거든요. 그러다가 대학교 4학년 때 전통예술원에 있는 연희과와 무용과 통합 관련 문제로 선생님께서 저를 처음으로 찾으셨고, 이 문제를 원만하게 해결하는 과정에서 선생님과 가까워지게 되었습니다. 후에 선생님이 스터디 그룹을 만드시면서 제게 좌장을 맡아달라고 하셨어요. 이러한 인연으로 선생님을 저의 스승으로 모시게 되었습니다.
2. 백대웅 선생의 음악세계
이용일: 제가 1980년쯤 정신문화연구원에서 국악교육에 대해 발표하라고 해서 발표를 했는데, 논문집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국악을 배우고 싶어도 쉽사리 그러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체계화 되지 않는 국악이 이유일까? 아니면, 이론이 별로 없어서 일까? 이런 질문을 국악하는 사람들에게 던지면 ‘알려고 하지 말라’고 한다는 것이 내가 맡은 그 발표의 주요 내용이었습니다. 그러니 국악 하는 사람들이 그리 좋게 생각할 리가 없겠죠.
김해숙: 국악이론이 디딤돌로 삼고 있는 초기 연구 분야는 조선조 전기의 문헌에 의거한 음악들입니다. 그것을 가지고 음악이론화 하려고 한 것이죠. 17세기를 전후로 해서 현존하는 전통음악의 대부분의 장르들이 형성되는데, 문제는 이것을 15세기 조선 초기에 형성된 음악이론으로 설명하려다 보니 설명이 되지 않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굳이 설명하려다 보니 억지논리가 될 수밖에 없죠. 그래서 국악이론이 혼란스러웠던 겁니다.
그리고 악보에 의존하지 않고 연주자의 구전심수로 전승되어 온 실제 음악을 이해하려면 먼저 채보를 해서 음악의 기본 구조를 이해해야 했는데, 국악이론의 초창기는 채보를 하지 않고 대부분 기존의 문헌에 의존해 연구를 해 왔기 때문에, 실체의 음악을 설명하는데 어려움이 많을 수밖에 없었죠. 정악과 민속악이라는 관념적 양분에 대한 국악인들의 편견도 같은 이유에서 파생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실 백대웅 선생님은 국악 작곡가가 되는 것이 소원이었는데, 작곡을 하려면 구전으로 전승되어 온 음악의 실체를 잘 알아야 했거든요. 이를 위해서 스스로 엄청난 양의 채보를 하면서 국악작곡 기법을 터득하셨어요. 그 과정에서 축적된 자료와 학습된 내용들을 바탕으로 실제음악에 기반 한 국악이론 책을 내게 되신 겁니다.
이용일: 이전에 언급한 이건용 선생님의 작곡의뢰 이야기가 백대웅 선생님의 스타일 그대로 입니다. 그때 연주한 작품의 평은 어땠나요?
이건용: 사실 그 곡은 25현 가야금을 위해 작곡된 곡으로, 국립국악관현악단에서 처음으로 25현 가야금을 채택 할 때 오디션곡이 없어서 박범훈 선생님이 저에게 의뢰해 작곡한 곡입니다. 그 곡을 토대로 국악 관현악을 붙여서 작곡했고, 백 선생님이 좋아했습니다. 사실 25현 가야금이 국립관현악단에 정착되는 과정에서 백 선생님의 의지와 역할이 크기도 했지만, 기존의 가야금이 새롭게 개량되어야 하는 사상적 혹은 이론적 바탕도 제일 많이 가지고 있던 분이 백 선생님입니다.
이용일: 그것은 아마 백 선생님의 스승님이신 정회갑 선생님의 영향이 클 것 같습니다. 백 선생님은 국악, 서양음악, 민속악을 차등을 두지 않는 것처럼 했습니다. 큰 구분을 두지 않고 모든 음악을 하나로 보았죠. 그래서 제가 이 부분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면, 국악인들의 눈을 높이려고 하는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김해숙: 보편적 가치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하셨습니다. 국악을 국악인들만 끌어안고 있는 것이 아닌, 음악을 바라보는 넓은 시야와 보다 높은 수준의 창작국악을 위해 많은 작업을 하셨습니다.
3. 백대웅 선생의 교육관
류형선: 백대웅 선생님의 일면을 보시는 분들은 그분의 음악과 이론을 ‘국악의 서양음악화’라는 말로 폄훼하기도 하는데, 제가 선생님께 받은 가르침 이야기를 들으면 얼마나 터무니없는 말인지 알 수 있어요.
제가 처음 작곡 공부를 하겠다고 백 선생님을 찾아 갔는데, 곡을 쓰기에 앞서 몇 가지 숙제를 주시더라구요. 그 숙제들을 나중에 쭉 정리 해보니, 50분 분량의 최옥삼류 가야금 산조, 지영희류 해금산조, 이생강류 대금산조, 오복녀 선생의 서도 잡가 CD 수록곡 전부, 김소희 선생님의 춘향가 CD 총 6장 중에서 100분이 넘는 2장 분량, 그 외 경기잡가와 남도잡가까지 합치면 엄청난 양의 채보 숙제를 내 주신 겁니다. 물론 제가 적극적으로 요청한 부분도 있었지만, 그야말로 혹독한 채보수업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국악 작곡을 하는 분들 중에서 제자들에게 전통음악을 이렇게 지독하게 학습시키는 분들이 누가 있었는지 궁금해요.
국악의 특수성 보다는 보편성을 백선생님이 지나치게 강조한다는 말도 하는데요. 원래 특수성만 보려고 하면 국악의 특수성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음악의 보편성에 대한 안목을 갖추어야 국악의 고유한 특수성이 무엇인지 명확히 알 수 있습니다. 실제로 서양음악과 국악을 맞비교 해 보면 다른 것 보다 같은 것이 더 많습니다.
김해숙: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초기에 국악이론 활동을 하신 분들은 문헌에 의거한 음악이론 확립을 위해 활동 하셨습니다. 그러나 백 선생님은 체험을 통해서 우리 음악의 전통성과 보편성을 명료하게 재구성하셨고, 그 결실을 저서 <전통음악의 랑그와 빠홀>에서 드러내셨습니다.
전통음악의 가치에 천착하는 과정을 꼭 한번은 밟아야 한다고 백선생님은 제자들에게 늘 강조하셨어요. 가령, 선생님만큼 우리 판소리를 많이 채보하신 분이 없습니다. 판소리는 그 이전까지 존재해 왔던 전통음악의 모든 장르들이 축적된 음악이기 때문에 선생님께서는 채보를 통해서 철저하게 학습하신 것입니다. 제자들에게 혹독한 채보 숙제를 주실 자격이 충분히 있는 분이시죠.
이용일: 그것이 뮤직랭귀지 아닌가요? 판소리 내에는 판소리 언어가 있고, 가야금 산조내에는 가야금 산조의 언어가 있습니다. 그것은 노력 없이 얻어 지는 것이 아닌 철저한 체험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체험이 없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음악이 되어 버립니다.
김해숙: 백대웅 선생님은 방송국에 재직하던 시절, 김소희 선생님의 창극을 보시고 30대 후반부터 채보를 시작하셨습니다. 우리나라에서 국악 채보를 가장 많이 하신 분입니다. 김소희 선생님께서 백 선생님이 채보한 것을 확인 하실 때, “장단과 음정은 맞는데, 성음은 호랑이가 쏙 물어갔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차피 성음은 악보로 기보되지 않는 부분인데요, 장단과 음정은 정확했다는 걸 김소희 명창에게 공증받은 셈이죠.
고수 김명환 선생님을 찾아가서 채보할 때도 몇 번씩이고 다시 확인해서 음체계를 정리하셨고, 지금은 국악계가 선생님께서 정립하신 음체계를 모두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를 언어학자 소쉬르의 이론을 빌려와서 설명하시기도 했는데요. 음체계는 곧 랑그이고, 시김새를 비롯한 특수성을 가진 요소들을 빠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초기의 음악가들이 랑그와 빠홀을 구분 짓지 않은 것에 답답함을 느끼셔서 선생님께서 많은 채보를 하셨고 이를 통해 전승되어 온 국악의 실체를 터득하셨기 때문에 제자들에게 그 방법을 제시 하신 것입니다.
윤호세: 백대웅 선생님께서는 서양음악 하시는 분들에게는 서양음악의 시각으로 공격을 받으셨고, 전통음악에서도 마찬가지였는데 정악을 하시는 분들은 그분들의 시각에서, 민속악을 하시는 분들은 시김새의 중요성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공격을 받으셨습니다. 제가 보기에 선생님께서는 도그마를 깨는데, 뭐랄까 우상을 허무는데 앞장서셨어요. 예를 들어 ‘우리 것은 좋은 것이고, 전통은 이래야 해’ 라는 일방적인 생각들에 맞서, 소리라는 본질로서 접근해 나가셨어요. 생물학적인 조건을 갖춘 인간의 보편적인 세계를 말씀하셨고 그러한 세계를 보이기 위해 노력하셨어요. 하지만 당시 전통음악계는 이런 내용을 받아들이기에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이러한 풍토가 참 힘드셨을 텐데 타협하지 않고 끊임없이 싸워 나가신 것이죠.
류형선: 아까 말한 언어학자 소쉬르의 랑그와 빠홀 개념을 가지고 조금 더 보충하면, 시김새와 성음은 연주자 개개인의 고유한 특성, 즉 빠홀이지 랑그가 아닙니다. 오선보로 온전하게 기보할 수 없는 부분이지요. 만약 시김새와 성음이 랑그라는 보편적 기호체계로 표현 될 수 있다면 그것은 인간을 복제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는 맥락으로 이해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윤호세: 한번은 선생님과 ‘시김새가 없는 음악이 어디 있겠느냐’라는 내용으로 말씀을 나눈 적이 있는데 대화에서 중요한 부분은 전통음악의 특수성을 교조적으로 바라보는 것을 경계하셨다는 사실이죠. 대부분 전통음악에서 시김새의 우월함에 대해 말했지만, 선생님께서는 이 시김새의 다양한 세계보다는 전통음악의 체계에 대한 즉 랑그에 대한 중요성을 말씀 하신 거죠. 좀 포괄적으로 말한다면 시김새의 의미나 중요성은 이미 알고 계셨지만, 선생님은 개인의 예술세계에서 발현되는 시김새와 같은 빠홀의 의미보다는 랑그와 같은 뼈대를 바탕으로 전통음악의 미래를 고민하신 거죠. 12세기부터 300년 단위로 우리 음악이 변화했으니 21세기에는 새로운 음악이 나와야 한다는 비전을 제시하시면서 말이죠. 선생님께서는 전통음악에서 보편의 가치를 끄집어내어 새로운 기둥을 세우고자 하셨습니다.
이건용: 실제로 서양음악에서는 굉장히 긴 역사동안 빠홀을 줄여 왔습니다. 합리화된 Tutti를 만들어 내는 것에 초반에 집중했는데, 이것이 서양음악의 독특한 구조를 만들어 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견이 충분히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백대웅 선생님은 양쪽에서 어떨 때는 랑그를 강조하고 혹은 빠홀을 강조하는 이중적인 입장에 놓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와 대화할 때 기억에 남는 이야기가, ‘왜 우리 음악의 고유한 아름다움과 섬세한 터치, 움직이는 소리들을 훼손하는가?’하는 나의 질문에 ‘시골에 사는 사람들에게 평생 초가집에만 살라는 소리와 똑같다.’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바꿔야 할지에 대한 고민을 해야 한다는 것이죠. 예를 들어 본인은 아파트에 살면서 남은 초가집에 살라는 것은 한가로운 소리라고 많이 이야기 했습니다. 그러한 저항감, 그것을 자신의 음악에도 적용했고 타인에게도 적용했던 것이죠.
4. 백대웅 선생의 국내 음악계에 끼친 영향
이용일: 제가 일본에서 공부할 때, 논문을 썼는데 그 논문의 내용이 우리나라 전통음악을 가르친 후에 서양음악을 가르치고 싶다고 했습니다. 당시에 논문 심사 들어온 선생님이 어떻게 음악을 가르치고 싶냐고 물었는데, 첫째는 소리를 가르치고 싶다고 했다. 가능하면 국악기를 사용하고, 안된다면 이미 우리는 평균율이 되었기에 피아노를 사용해서 가르치겠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작곡 선생님은 가능하다고 했는데 이론 선생님은 안 된다고 했습니다.
이건용: 그것은 아직도 남아있는 문제이고 이것이 바로 백대웅 선생님이 우리에게 물려준 문제의식이라고 생각 됩니다. 우리 음악을 이해할 때 시김새는 살리고, 랑그적 이론까지 모두 적립한다고 가정했을 때, 그래도 남는 문제는 우리 악사들의 음악 감수성을 어떻게 바라 볼 것인가 입니다. 평균률적으로 바라볼 것인가, 혹은 다양한 시김새들을 가진 것으로 바라 볼 것인가? 제 생각에는 양자가 같이 갈수 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결국 음악적 스펙트럼이 매우 넓어질 것 같습니다. 그것이 맞는 길이라고 생각 되는데, 최소한 그 문제를 노출하고 깊이를 보여준 것이 백대웅 선생님의 업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김해숙: 저는 그것을 보고 양손에 떡 쥐어야 한다고 표현 합니다. 제가 중학교 때부터 국악을 했는데, 국악에서의 장2도는 그 음정 폭이 서양악기 음정 폭과 다소 다릅니다. 그래서 국악에서 맞추는 음정 폭으로 맞추게 되면 서양악기들과 협연할 때 잘 맞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서양악기와 협연 할 때는 정음정으로 맞추고 국악기와 함께 연주 할 때는 좁은 음정 폭을 유지합니다. 그런데 저보다 더 오래전부터 국악을 하신 분들은 제가 가지고 있는 음정 폭보다 더 좁은 음정 폭을 사용하십니다. 이미 그분들은 오랜 기간 본인들이 가진 음체계에 따라 연주를 하기 때문에 바뀌기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요즘 학생들은 국악의 음체계와 서양음악의 음체계를 모두 받아들여 연주를 하고 있습니다. 양손에 떡을 모두 쥐고 있다는 것이죠. 그러나 한 가지 걱정되는 것은 우리가 아직 까지도 중국 문화권 내에 있으면 걱정 없지만, 이미 어릴 때부터 학생들이 서양음악 문화권 내에 있고 먼저 서양음악을 배우다보니, 이러한 서양음악 음체계에 훈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건용: 이것이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현재 국악을 하는 젊은 연주자들의 음악성은 어떤가요?
류형선: 문제의 요체는 국악기 자체가 피치의 유동성 보폭이 상당히 넓게 제작되었다는 것인데요. 그 이유는 음정을 수직적으로 뒤흔드는 개념의 다양한 시김새를 표현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 시김새는 자신의 악기가 표현하려는 이면을 빚어내는 수단으로 쓰여졌는데요. 연주자들에게는 그야말로 강력한 어휘력이 아닐 수 없습니다. 같은 이유로 ‘화성’과 우리음악은 괴리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습니다. 시김새를 구사하기 좋도록 피치의 유동성 보폭이 넓게 만들어진 악기로 안정감 있는 화성의 앙상블을 운용 할 수는 없으니까요.
말씀하신 국악과 서양음악의 음정의 간극에 대한 차이에 대한 의견을 덧붙였습니다만, 이를 일률적으로 정해서 될 문제는 아닐 것입니다. 음악의 현장에서 연주자들이 스스로 해결 할 수밖에 없어요. 제가 예술감독으로 재임하면서 만난 국립국악원 창작악단 연주자들의 음감이나 음악성은 대단했습니다. 그야말로 양손에 떡을 다 거머쥔 탁월한 연주자들이죠. 서양음악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분들을 객원으로 자주 모셨는데, 이구동성으로 대단한 음악성을 갖춘 연주자들로 평가했습니다.
이용일: 아까 말한 일본 교수중 제가 말한 이론을 인정한 이론 교수가 한국의 소리꾼들은 서양악기로 반주를 하면 그대로 부른 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미학 선생은 생명이 없는 음악이 된다고 말했습니다. 좌우지간 백 선생님은 우리나라 음악계에 도움을 줄 일을 많이 했고 연구 자료를 많이 내 놓았습니다.
윤호세: 앞전에 이건용 선생님께서 20세기 초까지 서양 음악의 역사가 빠홀을 줄이는 역사라고 말씀하셨는데, 백대웅 선생님께서는 이 개념을 완벽하게 가지고 계셨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전통음악이 가진 빠홀이 합주라는 형태로 오게 되면 맞추기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음악에 대한 고민을 랑그의 보편성이라는 측면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철저하게 공적인 사고를 하신 분입니다. 한번은 제가 전통음악과 관련하여 소리에 대한 접근과 깨달음, 감동,, 뭐 이런 것들을 개인적인 음악세계와 관련하여 말씀드렸는데, “너 하나만 배 따시면(따뜻하면) 돼!” 라고 하셨죠. 선생님의 말씀에는 개인이 아닌 모두에 대한 개념이 항상 들어 있으셨어요. 선생님께서는 전통음악과 관련한 졸업생들에 대한 이야기와 음악계의 미래에 대한 고민을 자주 말씀하셨는데, 전통음악을 하는 많은 학생들이 앞으로 나아가야하는 방향에 대해서 고민하셨어요. 이러한 고민이 관현악의 앙상블과 더불어 나중 악기 개량까지 나아간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이용일: 마지막으로 백대웅 선생님이 남긴 이론이나 작품중에서 후학들이 꼭 알아야 할 것을 말씀해주십시오.
이건용: 우리나라 전통음악계의 역사는 백대웅 이전과 백대웅 이후로 나누어 보아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그만큼 그가 이끌어 낸 변화가 컸습니다. 그는 늘 기존의 상식을 깨고 새로운 길을 만들어 나아갔습니다. 굉장히 걸출한 인물들이 있었지만, 백대웅 선생만큼 자신의 생각을 구현하고 그것대로 살아가기 위해서 구불구불 가지 않고 정면으로 관통해 간 분은 없다고 봅니다. 그러다 보니 정악, 속악, 이론, 서양음악, 채보 등 각각의 서로 다른 영역들을 모두 취합하여 연구해 냈고, 새로운 지평을 열어준 분입니다.
김해숙: 보편적 가치를 드러내는 것에 대해서는 백 선생님이 정점을 찍으셨고 성공하셨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채보를 통한 실질적인 음구조 체계 이론을 전해 주어서 현재 젊은 학자들이 선생님의 이론을 따라 연구하고 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심미적으로 즐기는 음악이 아닌 인간을 향한 음악을 작곡하셨습니다. 그래서 현재 여러 악단에서 선생님의 작품을 제자들이 하고 있고, 선생님의 곡을 연주하면서 울기도 합니다.
류형선: 몇 가지 사실은 반드시 기억되어야 할 텐데요. 우선 백대웅 선생님의 음악이론은 ‘실제 음악을 바탕으로 한 이론’이었습니다. 이론을 위한 이론을 그분만큼 비타협적으로 배격한 인생이 또한 드물 것입니다.
작곡가로서 그 분의 작품을 온전하게 이해하려면, 그가 ‘작곡가의 내면’의 자유로운 선택으로서 작품을 쓴 것이 아니라, 국악이 바로 지금 필요로 하는 작품이 무엇인가, 일테면 이런 시대의식이 그분의 창작활동의 가장 강력한 동기였다는 사실을 염두 해 두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부가리듬이 보편적으로 용해된 작품이 필요하고 특히 저음-중음-고음 가야금 앙상블 곡이 현재 국악계에 꼭 필요하다 판단해서 가야금 3중주 「봄의 리듬」을 쓰셨습니다. 국악 관현악의 안정감 있는 앙상블과 사운드의 규범을 만들어 보기 위해 「남도아리랑」이 쓰여졌고, 서양 실내악의 가장 규범적 편성인 현악사중주와 함께 연주할 수 있는 가야금 레퍼토리의 확보를 위해 작곡한 곡이 신 관동별곡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다섯 악기를 위한 몽금포타령’ 같은 작품은 악기 하나하나의 개성과 앙상블이 오밀조밀한 긴장관계를 형성하는 국악 실내악의 규범을 만들고 싶은 열망으로 쓰여진 곡입니다.
백 선생님은 특히 자라나는 세대들이 대학교육 현장에서부터 보다 보편적으로 새로운 규범이 될 만한 작품을 경험 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늘 주장하셨고, 실제로 그분의 작품의 많은 부분은 당신의 이 열망에 대한 응답으로 쓰여진 것들입니다.
윤호세: 선생님께서는 시대적과제, 당대성,, 이런 문제들을 중요하게 생각하신 것 같아요. 한발 앞서서 가셨죠. 상당히 난해한 곡을 쓴 작곡가들에게 ‘너만 아는 곡을 쓰면 어떻게 하느냐. 초연이 종연이 된다’고 현학적인 태도를 우려하기도 하셨습니다. 선생님은 앞으로 21세기에는 새로운 음악이 전개될거라고 하셨죠. 이러한 과정에서 느낄 수 있듯 선생님께서는 계몽적인 생각도 많이 가지고계셨는데, 한편 그 안에는 국민주의적 음악이 바탕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늘 가지고 계셨습니다.
이용일: 우리가 음악을 자체를 영혼과 영혼과의 대화라고 표현하는데, 한소리 하나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백대웅 선생은 양쪽 음악을 어떻게 어우를 것인지도 생각했을 뿐만 아니라, 모든 작곡도 필요에 의해서 했던 것 같습니다.
김해숙: 국악계에 독립운동가 같은 생각과 활동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음악의 특수성 위에 보편성을 어떻게 세울 것인가를 고민하셨습니다. 서양음악 하시는 분들 중에서 앞에 계시지만 이건용 선생님을 긍정적으로 평가하셨습니다.
류형선: 서양음악이 주도하는 시대의 국악의 생존은 어떻게 가능한가? 이 화두를 끊임없이 거머쥐고 한 평생을 사셨던 것 같습니다. 그분의 입장은 분명했죠. “법고(法古)는 수단이요, 창신(創新)이 목적”이라 했습니다.
이용일: 오늘 여러분들과 함께 좌담을 진행하면서 백대웅 선생님의 업적에 대해 조명할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이 기록을 잘 남겨 후대에 잘 전달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글_ 김진실 기자/ 사진_ 김문기 부장
진행 : 이용일(한국음악교육협회 명예회장)
이건용(작곡가, 전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
윤호세(타악 연주자)
김해숙(가야금연주자/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전 국립국악원장)
류형선(작곡가/전 국립국악원(창작악단) 예술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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