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탐구
끊임없는 학구열로 한국음악계에 큰 업적을 남긴 지휘자 정재동 선생
지휘자 정재동 선생(1928. 11. 25?2014. 12. 17)은 강원도 원주 출생으로 서울대 음대를 졸업한 후 1965년부터 국립 오페라단의 지휘자로서 활동했다. 그 후 도미하여 보스턴 뉴잉글랜드 음악대학 대학원에서 지휘 공부를 하였다. 1971년 서울시립교향악단 전임 지휘자를 역임하고 1974년에 상임지휘자로 취임한 후 1977년에는 동남아 5개국, 1982년에는 미국 서부에서 지휘자로서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또한 1986년에는 미국 주요 도시를 서울시향과 부지런히 순회연주 하러다녔다. 이후에도 미국 시카고시빌 심포니,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 필하모니, 미국 플로리다 필하모니, 뉴욕 퀸스 심포니, 싱가포르 심포니, 홍콩 필하모니 등 수많은 교향악단을 지휘하기도 하였다. 한국에서는 한양대학교 음악대학 교수, 중앙대학교 음악대학 학장으로 역임하면서 한국음악협회 부이사장·서울시 정책자문위원 등 행정에 관여하기도 했으며, 대한민국 보관문화훈장을 수상하기도 했다. 1988년에는 국내 교향악단 최초로 서울시향유럽 순회 연주를 하였다.
일시: 2015년 1월 30일(금) 오전 10시 30분
장소: 코스모스 악기사 10층
진행: 이용일(한국음악교육협회 명예회장)
패널: 나덕성(중앙대학교 명예교수)
이택주(전 서울시향악장, 이화여대교수)
김영준(전 서울시향악장, 서울시립대교수)
이혜경(중앙대교수)
오병권(전 서울시향 기획 자문역)
정재동 선생의 성장 과정 및 음악의 출발
이용일_오늘 음악춘추 ‘인물탐구’에서는 지휘하는데 일생을 바친 정재동 선생님을 재조명해 보고자 합니다. 선생님의 성장과정과 음악의 출발에 대해서 오병권 선생님께서 말씀해 주시지요.
오병권_제가 알기로는 정재동 선생님의 할아버님께서 세우신 교회에서 오르간을 배우기 시작했다고 들었습니다. 교회에서 오르간과 피아노를 반주하시던 중 목소리가 좋다고 성악을 전공하는 것이 좋겠다고 성악을 권유하신 선생님의 조언에 따라 서울음대 성악과를 입학하셨는데, 그 선생님이 북한으로 월북을 하게 되시는 바람에 갈등을 하다 성악공부를 중단하고 피아노로 전공을 바꾸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6.25 전쟁시절에는 해군 정훈음악대 대원으로 활동하면서 당시 수많은 음악가들의 연주 반주를 도맡아서 하신 그야말로 반주의 귀재였다고 합니다. 전쟁 후에는 숙명여고에서 음악교사로 교편을 잡으시기도 하셨다고 합니다.
정재동 선생과의 첫 만남
이용일_나성덕 선생님 정재동 선생님과 첫 만남은 언제인지요.
나성덕_정재동 선생님은 70년대 후반까지 서울시향의 야외음악당에서 지휘하셨습니다. 1년에 한 번씩 한국작곡가의 작품정기연주회에서 박재열 선생님의 작품을 초연으로 시향과 협연했는데 음악적인 교류는 이때가 처음이었습니다. 제가 중앙대를 가게 된 동기도 정재동 선생님과의 인연 때문이었습니다. 정재동 선생님이 잠깐 저를 부르시더니 “중앙대학교 안성캠퍼스에 음악대학이 설립되는데 관현악과가 생긴다.”라고 말씀하시며 같이 있자고 하셨습니다. 83년도에 국내 최대 시설을 갖춘 음대로 정재동 선생님께서 초대 학장으로 부임하셨습니다. 그때는 제가 유럽의 잘츠부르크에 있어서 바로 가지 못했습니다. 84년도에 정재동 선생님을 만나 뵈었는데, 그 전에는 계속 음악가로 교류하였지만 음악대학을 총괄하시는 정재동 선생님을 가까이서 만나 뵌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습니다.
김영준_첫 만남이라고 말할 순 없지만 기억을 더듬어보면 제가 유학시절에 비엔나 무지크페라인(Musikverein)의 황금홀에서 톤퀸스트러 교향악단(Tonkunstler Orchestra) 공연에 정재동 선생님이 오셔서 베토벤 심포니 5번 「운명교향곡」을 지휘하셨습니다. 이 악단은 비엔나의 4대 교향악단 중 하나로 굉장히 좋은 오케스트라인데, 이 악단 공연에 한국의 지휘자가 와서 황금홀에서 지휘하니까 유학생들이 흥분하고 그랬습니다. 그래서 자부심을 갖으며 선생님을 모시고 안내해 드리기도 하였습니다.
이택주_제가 제일 각별한 인연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한국에서 1980년에 서울시향 악장을 시작으로 음악생활을 시작했으니까요. 그 이전에 정재동 선생님을 처음 뵌 것은 대학교 다닐 때였습니다. 그 당시엔 대학교 재학 중에도 오케스트라에 들어가서 연주할 수 있었습니다. 73년에 서울시향에 학생신분으로 차석주자로 들어갔습니다. 그때 정재동 선생님과 같이 연주하며 지휘자로 알게 되었습니다.
이혜경_저는 1972년도에 시립청소년오케스트라의 오디션에서 뽑혀서 정재동 선생님과 함께 구 시민회관에서 연주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84년도에 정재동 선생님이 주변의 반대를 무릅쓰고 어린 나이인 저를 불러주셔서, 그때부터 지금까지 한 직장에서 30년 동안 일하고 있습니다. 당시에 신관건물이 건축 중이었기에 처음 몇 달은 저의 교수실이 없어서, 학장님 교수실 옆의 빈방으로 들어가게 되었는데, 혹여 방에라도 계실까봐 피아노소리 내기가 매우 조심스러웠던 기억이 납니다.
오병권_저는 1974년도에 작곡과로 한양대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작곡과 학생은 무조건 합창을 들어야만 했습니다. 오케스트라에 관심이 많아서 정재동 선생님을 찾아갔습니다. “선생님, 저는 오케스트라에 들어가고 싶습니다.”라고 말씀드렸더니 “다룰 줄 아는 악기 가져와서 한번 연주해봐.”라고 하셔서 그 앞에서 오디션을 했습니다. “곧 잘 하네, 내일부터 들어와” 라고 이야기해 주셔서 대학교 1학년 때부터 오케스트라에 들어갔습니다. 선생님과 지내면서 기억에 남는 일화는 지방공연을 간다고 연습하고 있었는데 그 당시 학생들의 실력 편차가 매우 컸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연습을 중단하고 한 사람씩 시키시는데, 그때 제가 세컨드 바이올린 맨 뒤에서 연주하고 있었습니다. 한 사람씩 시키시니까 떨려서 다리를 꽉 모으고 연주를 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제 앞에 오시더니 “자넨 왜 다리를 꼬고 연주를 하나!”하시며 소리치셨습니다. 그때만 해도 정재동 선생님 카리스마가 대단하셔서 무서웠습니다. 그러시고는 앞으로 가시더니 저보고 앞으로 나와 앉으라고 하시는 거였습니다. 전공도 아닌 학생이 전공하는 학생들 보다 앞자리에서 바이올린을 하게 되었습니다. 선생님과의 만남은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정재동 선생의 음악세계
이용일_여러 가지 일들이 우리가 정재동 선생님을 추모할 수 있는 마음을 갖게 합니다. 선생님의 음악세계를 나덕성 선생님은 어떻게 보셨나요. 교육과 연주로 나눠서 말씀해주세요.
나덕성_정재동 선생님의 전공이 지휘 아닙니까. 일반 악기를 다루는 그 수준을 넘어서 지휘자가 가지고 있는 인품과 음악성으로 끊임없이 도전하고 노력하셨기 때문에 서울시향오케스트라를 20여년을 이끌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인품이 되지 않으면 불가능합니다. 그런 점에서 높이 평가합니다. 음악적인 면에서는 그 당시 어려운 형편, 모든 분야가 힘든 시기임에도 음악을 포기하지 않고 교향악단과 삶의 고락(苦樂)을 함께 하면서 음악을 포용했다는 것을 우리가 마음에 새겨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이택주_1980년에 정재동 선생님의 권유로 서울시향의 악장이 되었는데 사실 그 과정엔 사연이 있습니다. 제가 서울시향에 악장이 되려 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시는 분은 알겠지만 제가 미국에 갈일이 있었는데 비자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래서 정재동 선생님을 찾아뵙고 도움을 청하였습니다. 저를 학생 때부터 아껴주셔서 선생님이 미 대사관에 편지도 써주셨습니다. 도와주시는데도 불구하고 비자가 나오지 않아 미국을 못 갔습니다. 그 소식을 듣자마자 선생님이 “마침 서울시향에 악장이 절실하게 필요한데, 미국 못 가게 되었으니 나와서 일을 해라“ 그래서 제가 악장으로 취임을 해서 한국에서 활동을 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정재동 선생님이 퇴임하실 때까지 오랜 기간 악장을 하면서 모셨습니다. 그 힘든 시기에 어려운 여건으로 서울시향의 발전을 위해서 노력하셨습니다. 행정적으로 또 음악적인 발전을 위해서 오랫동안 애를 많이 쓰셨고, 굉장한 수준으로 올려주셨습니다. 미국순회연주, 유럽순회연주 등 중요한 연주를 통해서 실력도 많이 향상시키셨고요. 정재동 선생님은 그 당시에는 파격적인 기획프로그램을 많이 하셨습니다. 범세대 연주회에서 서울시향이 창작곡들을 많이 연주하여 선보이는 기회도 있었습니다. 팝스콘서트도 서울시향이 처음 기획하여 굉장히 반응이 좋았고요. 또한 꾸준하게 청소년들을 선발하여 교향악단과의 협연기회를 주는 일도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런 여러 가지 기획적인 면이 음악적인 발전, 음악의 수준을 높이는데 큰 기여를 했다고 봅니다. 제가 정재동 선생님과 같이 있으면서 그런 경험을 많이 하였습니다.
암보로 지휘
김영준_예전에는 서울시향이 남산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세종문화회관이 개관하면서 서울시향이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때부터 오케스트라의 기틀을 확실하게 만드신 것 같습니다. 정재동 선생님의 지휘에 관하여 말씀드리자면 공부를 많이 하시고 준비도 많이 하셨습니다. 어디서 그런 면을 볼 수 있냐하면 항상 어떤 곡이던 암보로 지휘를 하셨습니다. 요즘 젊은 지휘자, 연주가들이 본받아야 할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이택주_ 정재동 선생님이 지휘자로서 가장 탁월하신 것 중 하나가 협연자에 대한 배려. 지금까지 많은 지휘자와 외국의 많은 지휘자들이 와서 연주했지만 협연자와의 협력. 그런 능력은 제가보기에 단연 대한민국의 지휘자 중에 가장 능력이 뛰어나신 분인 것 같습니다.
이용일_저는 정재동 선생님이 지휘하시는 청소년음악회에서 연주하는 학생의 연주지도 장면을 본적이 있습니다. 정재동 선생님은 학생의 연주를 들으며 메모를 하더라고요. 보통 지휘자들이 요구를 하는데 정재동 선생님은 학생의 특징을 본인이 직접 메모했습니다. 특이하고 열정이 넘치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혜경 선생님은 어떻게 보셨습니까.
이혜경_정재동 선생님은 오랫동안 방송에서 청소년음악회를 진행하셨잖아요. 그것도 굉장히 중요한 업적이신 것 같습니다. 갑자기 전화를 하셔서는, 몇 일후에 무슨 작품을 준비해와 치라고 하시곤 했지요. 또한 정기연주회에서는 과감하게 메시앙의 「투랑갈리라 교향곡」등 파격적인 레퍼토리를 가진 곡을 많이 시도하셨습니다. 제가 인상 깊게 들었던 이야기는 정재동 선생님이 젊으셨을 때, 직접 단원들하고 포스터를 붙이고 다니셨을 정도로 굉장히 열정이 많으셨다고 하시더라고요. 겉보기에는 무뚝뚝하시지만 속으로는 깊은 생각을 가지고 계셨던 것 같습니다.
이용일_열정이 없으면 20년을 이끌지 못하죠. 서울시향 지휘자로 20년을 하신다는 것은 정말 온 정성을 다하고 다시 말하자면 공과 사를 정확하게 구분하시며 자기의 한쪽 부분을 포기하고 사신 것 아닙니까. 더구나 모든 곡을 암보로 연주하려면 그만큼 많은 노력이 필요한데 정말 우리가 존경할만한 지휘자라고 생각합니다. 오병권 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오병권_저는 옆에서 정재동 선생님을 모시고 있었고 기획실을 맡고 있었습니다. 행정적인 면에서 이야기를 하면 정재동 선생님은 굉장히 대단하셨습니다. 예를 들면 서울시 행정이 1년 단위 예산으로 나오고 있어서 2?3년 뒤의 일에 대해서 계약을 한다던가, 계획을 세우는 것이 힘든 시절이었습니다. 게다가 예산이 많이 들어가는 것은 위험부담이 많아서 더더욱 계약서에 서명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88년도에 서울시향이 국내최초로 유럽순회공연을 했습니다. 그전에 했던 미국순회공연의 경우는 교민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현지의 신문사나 중앙일보나, 한국일보 등 여러 신문사를 중심으로 하여 공연을 했습니다. 이러한 점이 양해가 되었지만, 88년도 유럽순회공연은 정식 매니지먼트와 계약을 했습니다. 그래서 2년 전에 계약서에 서명을 해야 했고, 만약 이 계약이 실행되지 못한다면 어마어마한 위약금을 물어야 했습니다. 그 계약서에 사인을 하시기 전에 굉장히 갈등 하시며 “안 되면 집을 팔지!” 하시면서 과감히 사인을 하셨습니다. 그 결과, 국내 오케스트라 최초의 유럽공연을 외국 매니지먼트사와의 계약에 의한 개런티를 받으면서 실현하게 되었습니다. 이외에도 서울시 소속의 악단으로써는 관료적인 구조 속에서 새로운 일을 하기가 대단히 어려운 시기였음에도 이러한 추진력으로 파격적인 공연들을 많이 했습니다. 팝스콘서트, 범세대 연주회, 등이 있었으며 청중들이 잘 듣지 않는 창작곡이 아닌 잘 듣게 되는 창작곡을 양산하였습니다. 사물놀이와 교향악단의 협연, 재즈그룹과 교향악단의 협연, 등의 현대 곡들이 그것입니다. 국내 교향악단 역사에 남을만한 새로운 기획들에 대해서도 과감하게 지원해주셨습니다. 리더로서의 능력도 대단했던 것 같습니다.
이용일_결국 정재동 선생님의 음악세계는 현재 우리나라에서 연주하는 고전, 낭만만 연주하는 것이 아니라 현대음악을 추구하면서 또 우리나라 음악을 계속 발굴했다는 이야기가 되겠네요.
오병권_제가 정재동 선생님 찾아뵈면 늘 피아노 앞에서 악보를 보며 연습하고 계셨습니다. 그 노력이 없으면 암보로 연주하는 것이 불가능 했겠죠. 그리고 협연자와의 호흡 또한 피아노를 많이 치시고 반주를 많이 하셔서 그런지는 몰라도 정말 뛰어나셨습니다.
정재동 선생이 국내 음악계에 끼친 영향
이용일_정재동 선생님이 초연한 곡이 굉장히 많지 않나요?
나성덕_테마가 있는 창의적이며 실험적인 공연을 많이 하셨습니다.
오병권_예를 들면 메시앙의 「투랑갈리라 교향곡」을 연주할 때 잘 연주되지 않는 옹드마르트노악기와 연주자를 구해오라 하셔서 프랑스 문화원의 도움을 받아 옹드마르트노 연주자를 데리고 와서 연주한 적도 있습니다. 한국 작곡가의 창작품은 모두 세계초연이었습니다. 곡에 대한 집착이 많으셔서 늘 공부 하셨으며 새로운 곡이 있다고 말씀드리면 악보를 구해서 공부하셨습니다.
이택주_정재동 선생님이 방대한 일을 하셨지만 그 중에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서울시향이 음악애호가들에게 상당히 사랑받고 관심도 많이 받았지만 정재동 선생님이 어려운 시기에도 높은 단계까지 끌어올린 것입니다. 또한 정재동 선생님은 제가 87년으로 기억하는데 서울시향 30주년을 맞이하여 정재동 선생님은 선배를 부르셔서 행사를 하셨습니다. 전통을 중요시 하면서도 좋은 환경을 후세에 물러주셨는데 그런 점을 서울시향에서는 영원히 기억해야하지 않나 싶습니다.
이용일_서울시향은 오랜 전통이 흐르고 있다고 봐야 되겠죠.
이택주_여러 가지 리더로서의 인품을 가지고 계신데 20년을 직접 지휘하면 굉장한 아집에 빠지기 쉬운데 정재동 선생님은 악장들이 제안을 하면 열린 마음으로 받아주셨습니다.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외국인 수석 객원 지휘자가 지휘하는 것을 기획하였는데 정재동 선생님은 흔쾌히 받아주셨습니다. 그런 면에서 정재동 선생님은 대인이셨던 것 같고 존경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용일_바꿔 말하면 열린 분이라는 거죠.
이택주_명예롭게 퇴임하시는 상임 지휘자들을 본 적이 없는데 정재동 선생님이 퇴임하실 때에는 온 단원이 다 같이 모여서 환송하는 자리를 마련하고 박수를 받으시면서 임기를 마치셨습니다.
이용일_정재동 선생님은 외부 객원 지휘자를 많이 받으셨잖아요. 그러면서 자기 발전과 부족했던 부분을 커버하시지 않았나 싶습니다. 인격적으로 훌륭하셨고 신앙심을 근본적으로 놓고 사셨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좋은 음악을 하지 않으셨나 생각합니다.
오병권_ 정재동 선생님이 단원들의 신뢰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단원들의 복지나 급여에 대하여 굉장히 많은 배려를 하셨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또한 단원들의 수익이 늘 수 있도록 노력도 많이 하셨습니다.
이용일_어떻게 했던 간에 대단하신 분이죠.
김영준_MBC 청소년 음악회 지휘를 하셨잖아요. 해설하시는 것도 아주 뛰어나셨습니다. 긴 문장을 외우는 것이 쉽지 않은데 정재동 선생님은 외우셔서 해설하셨습니다.
이택주_어느 정도로 해설을 잘 하시냐면, 방송 녹화할 때 해설하는 도중에 NG가 날 때가 있는데 다시 녹화할 때 똑같은 해설을 하신 적이 한 번도 없으십니다. NG가 나서 다시 녹화할 때 다른 이야기를 하시며 자연스럽게 넘어가셨습니다.
이용일_정말 시기심 많고 혼란한 시기의 대한민국에서 20년을 유지 했다는 것은 기적과도 같은 일입니다. 그만큼 노력을 해서 가능했던 일이지 노력하지 않으면 어림도 없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서울시립교향악단이 서울시립교향악단만이 아니라 대한민국 전체의 오케스트라를 이끌었다고 생각합니다. 정재동 선생님이 중앙대 학장으로서 음악대학을 어떻게 발전시키셨는지 나덕성 선생님이 말씀해주세요.
나덕성_정재동 선생은 성격이 자상하십니다. 사람과 이야기 할 때에 많이 생각하시고 잘 정리해서 이야기를 하시는 것을 많이 봤습니다. 사람들이 서로 조화로워져서 발전할 수 있는 계기. 사람을 컨트롤 할 줄 아시고 학생들에게 애정을 많이 주셨습니다. 정재동 선생님 추모 예배를 갔는데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곳에 지금은 50?60대가 넘은 초창기 학생들이 거의 다 왔습니다. 음악가로서 성공한 화려한 삶이 아니라 삶을 건전하면서 누군가를 추모할 줄 알도록 만드신 거죠. 그 점에서 교육자로서 상당히 마음속으로 존경하고 있습니다. 정재동 선생님이 미국에 계시다가 잠시 귀국 하셨을 때에도 여러 사람을 만나 따뜻한 정을 나누셨습니다. 항상 정이 있으셨던 분인 것 같습니다. 제가 학장으로 재직할 때 중앙대 음악대학설립 20주년 되는 해가 2003년이었습니다. 정재동 선생님을 모셔서 초대학장의 업적을 기리며 모시려 했는데 미국에 계셔서 못 오시고 그 분의 아들을 초청하여 초대학장의 뜻을 기렸습니다. 제 마음속으로는 정재동 선생님을 다시 기억할 수 있는 가장 큰 행사가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음악성과 인간적인 자상함으로 이 모든 사람들이 정재동 선생님을 기억하게 만들었다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정리_김수현 기자 / 사진_김문기 부장
- 기사의 일부만 수록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음악춘추 2015년 3월호의 기사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
<김문기의 포토랜드>
이용일(한국음악교육협회 명예회장)
나덕성(중앙대학교 명예교수)
이택주(전 서울시향악장, 이화여대교수)
김영준(전 서울시향악장, 서울시립대교수)
오병권(전 서울시향 기획 자문역)
이혜경(중앙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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