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음악춘추

인물탐구 - 지휘자 김생려 선생 / 음악춘추 2015년 7월호

언제나 푸른바다~ 2016. 1. 5. 1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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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춘추 기획대담 | 지휘계의 선구자 지휘자 김생려 선생

 

바이올리니스트이면서 한국교향악운동의 선구자였던 지휘자 김생려 선생(1912∼1995)은 평안북도 영변에서 태어나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유학을 왔으며 초등학교 다닐 때 바이올린을 시작하여 고등학교 졸업 무렵에 본격적으로 바이올린의 기초를 다졌다. 해방 직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교향악단인 고려교향악단에서 총무로 일을 했고, 1947년에 서울교향악단(서울시립교향악단의 전신)을 창단하여 제 1회 연주회에서 지휘자로 데뷔하였다. 이후 한국전쟁 중에는 해군정훈음악대의 지휘자를 역임하였고, 1957년 서울시립교향악단의 초대지휘자로 부임하여 1961년까지 상임지휘자로 지냈다. 1962년에는 뒤늦게 미국으로 유학을 가 지휘를 공부하였고 1976년에는 다시 미국으로 이민을 가 1992년까지 남가주필하모닉 상임지휘자로 활동을 하였다. 한국교향악운동을 주도한 한편, 예그린악단 대표와 예술원회원, 경희대학교 음악대학 교수를 역임하면서 한국음악 발전에 많은 공헌을 하였으며 스웨덴 적십자훈장과 서울시 문화상, 대한민국 예술원상을 수상하였다.

 

일시: 2015년 6월 8일(월) 오전 10시 30분
장소: 코스모스 악기사 7층
진행: 이용일(한국음악교육협회 명예회장)
패널: 문두훈(서울시립교향악단 전 기획실장)
         이상만(음악평론가, 국제델픽위원회 명예위원)
         박동선((주)파킹턴 인터내셔널 회장)
         최기선(한국인삼제품협회 명예회장)

 

1. 김생려 선생의 성장 과정 및 음악의 출발
2. 김생려 선생과의 첫 만남
3. 김생려 선생의 음악세계
4. 김생려 선생의 교육관
5. 김생려 선생이 국내음악계에 끼친 영향

 

이용일_김생려 선생님의 업적이 너무 큰데 이제 좌담하게 된 것은 지휘자들이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에 제자가 없었고 가족들을 그리고 패널을 찾지 못하고 있어서 늦게 하게 되었습니다. 이상만 선생님께서 좌우지간 자료 가지고 있는 것으로 좌담회를 하자고 너무 오래 끌고 있다고 하셔서 오늘 여러분을 모시고 좌담을 하게 되었습니다. 김생려 선생님은 우리나라 해군정훈음악대를 시작으로 서울시립교향악단을 발전시켰고 우리나라 양대 교향악단의 산맥을 이룬 업적을 남기셨습니다. 먼저 김생려 선생님의 성장과정에 대해서 아시는 분이 계신가요.

 

이상만_김생려 선생님의 아버지가 독실한 기독교 장로였습니다. 부친은 김생려 선생님이 영변에서 태어난 후 얼마 안 되어 북청에 교회를 짓고 이사를 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보통 김생려 선생님을 평안도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함경도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하모니카, 오르간을 교회에서 배우다가 같은 동네에 있는 아마추어 바이올리니스트의 바이올린 소리를 듣고 그 소리에 반하여 그 아마추어 바이올리니스트에게 바이올린을 배웠습니다. 그렇게 김생려 선생님이 바이올리니스트가 되는 계기가 되었고 거기서 초등학교를 마치고 나서는 서울로 유학을 왔습니다. 지금의 경북고등학교인 제이고보를 졸업하고 현제명 선생님의 권유로 연희전문의 문과에 입학하고 그 때는 연희전문의에 음악과가 없었지만 밴드부로 활동을 합니다. 그 후 일본으로 건너가 2년 동안 지내고 다시 연희전문에 복교를 하죠. 그리고 같은 교회에 있던 「봉선화」의 작사자이며 정신학교 음악 선생이었던 김형준 선생님의 소개로 바이올리니스트이자 지휘자였던 부츠 부인으로부터 바이올린 레슨을 받았다고 합니다. 학교재학 중에 조선일보사에서 주최하는 콩쿠르에서 우승하고 그때 바이올리니스트로서 주목받게 되고 활동을 합니다. 그리고 홍난파 선생님이 지휘하시던 JODK관현악단에서 바이올리니스트로 활동하고 홍난파 선생님이 돌아가시고 나서는 스승인 계정식 선생님을 관현악단 지휘자로 모셔오는 역할도 했습니다. 해방 직후에 현제명 선생님은 서울대에는 음악대학을 그리고 고려교향악단을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현제명 선생님이 그의 제자인 김성태 선생님한테는 서울대학교를 맡기시고 고려교향악단은 김생려 선생님한테 맡깁니다. 고려교향악단의 악장겸 총무를 맡아서 실직적으로 이끌어 가는데 도움이 되었는데 오해가 생기자 김생려 선생님이 고려교향악단에서 나와 1947년에 서울교향악단을 만듭니다. 악장직과 대표직을 맡게 되시고요. 우리나라의 교향악단에 훌륭한 업적을 남기신거죠.

 

이용일_그렇다면 김생려 선생님의 형제관계가 어떻게 되는지 아시나요.

 

이상만_1남 4녀 중에 외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이용일_문두훈 선생님은 첫 만남이 언제이신지요.

 

문두훈_제가 1957년에 해군정훈음악대에 들어갔는데 그때 처음 뵈었습니다.

 

최기선_확실히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제가 사직동에 있을 때 처음 뵌 것 같습니다. 제가 사적으로 가끔 김 선생님을 모시고 만나기도 했었습니다. 인간적으로는 아주 깨끗하시고 욕심이 없으신 분이셨죠. 

 

박동선_저는 혁명직후에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 후 쭉 돌아가시기 전까지 만나 뵈었습니다.

 

이용일_그럼 이상만 선생님의 첫 교류는 언제이신가요.

 

이상만_제가 중학교 다닐 적에 바이올린을 해서 고려교향악단, 서울교향악단의 정기연주회를 구경 다녔는데 1948년에 교향악 연주를 가서 김생려 선생님을 처음 봤었죠. 김생려 선생님은 지휘자였으니까요.

 

박동선_그리고 김생려 선생님이 예그린악단의 단장으로 유럽을 순회하시다가 파리에서 자금난에 빠져 묶여있다고 하셔서 제가 도와드린 적이 있는데 그 계기로 김생려 선생님과 더욱 가까워지게 되었죠.

 

이용일_음악적인 것 외에 재정적으로만 도움을 주셨나요. 아니면 음악적인 면에서도 교류가 있었나요.

 

박동선_제가 바이올린을 배운 적이 있고 김생려 선생님도 바이올리니스트였지만 제가 미국에서 많은 생활을 보냈기 때문에 음악적인 것을 의논한 적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인간관계에서는 잘 지냈죠.

 

이용일_대단한 후원자셨네요. 후원자로 김생려 선생님이 활동할 수 있게 도와주시고요. 결국 김생려 선생님 주변에 박 선생님 같은 분들이 많이 계셨기 때문에 활동을 하신 것 같네요. 문두훈 선생님은 김생려 선생님과 오래 같이 있으시면서 김 선생님의 음악세계는 어떻게 보셨나요.

 

문두훈_김생려 선생님이 미국 유학을 가서 필라델피아교향악단의 지휘자 유진 오르먼디한테 개인적으로 지휘레슨을 받았다고 합니다. 김생려 선생님은 현대음악은 별로 안 좋아하시고 주로 모차르트, 베토벤, 브람스를 굉장히 좋아하셨습니다.

 

이용일_그럼 김생려 선생님은 서울시향에서 주로 무슨 곡을 연주했나요.

 

최기선_스트라빈스키의「불새」연습을 굉장히 많이 하셨던 것이 가장 기억납니다.

 

이용일_당시에는 악보를 쉽게 구할 수도 없었고 그래서 사보를 하기는 했지만 구하기 쉬운 악보로 연주했겠죠.

 

최기선_맞습니다. 그래서 현대음악은 많이 할 수가 없었죠.

 

이상만_김생려 선생님은 음악을 굉장히 진지하게 대했습니다. 선생이었던 계정식 선생님의 영향이 컸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바이올리니스트로서 연주하는 것은 본적이 없고 악장으로 연주하시는 것은 보았는데 굉장히 건실한 분이었고 음악에 굉장히 깊게 파고들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김생려 선생님은 지휘를 늦게 공부했습니다. 서울교향악단 창단공연 때에는 김성태 선생님이 지휘를 하시고 그 다음 공연 때 김생려 선생님이 한두 번 지휘하시고, 4회부터 십 몇 회까지는 미국인 방송국 고문으로 와있던 롤프 자코비에게 지휘를 하도록 시키셨습니다. 그 때 서울교향악단이 획기적으로 발전했죠. 김생려 선생님의 음악세계는 건실하다고 할까. 앞에서 스트라빈스키 이야기를 했지만 김생려 선생님이 브람스 정도에 가장 몰입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이용일_선생님이 서울교향악단을 지휘한 것도 지휘자가 없으니까 김생려 선생님이 나서신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김 선생님이 경희대학교 전임교수이지 않으셨나요.

 

문두훈_맞습니다. 경희대 조영식 총장이 김생려 선생님께 경희대학교에 음악과를 만들자는 제안을 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김생려 선생님을 주축으로 경희대 음악과가 만들어지게 되었고 처음부터 음악과장으로 들어가셨죠. 나중에 음악대학이 되었지만 김생려 선생님이 수완이 좋으시고 경희대 조영식 총장이 그만큼 수완이 좋은 음악가가 없으니까 김생려 선생님을 데려온 것 같습니다. 또한 음악과를 굉장히 키워나갈 것이라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관악기, 현악기 할 것 없이 서울시향에 있는 사람들도 경희대학교에 강사로 나와서 많이 가르쳤죠.

 

최기선_저는 전공이 음악과 관련이 없습니다. 제가 중학교 2학년 때부터 혼자서 음악회를 다녔습니다. 그렇게 음악을 좋아했거든요. 취미로 첼로를 배웠는데 처음에는 서울시향에 정식단원이 아니라 엑스트라로 갔습니다. 한번은 정식단원을 뽑는 오디션이 있더라고요. 거기서 제가 연주를 했는데 합격이 되어서 서울시향 정식단원으로 있었습니다.

 

이용일_실력이 확실하지 못하면 절대 안 뽑거든요. 한 연주자가 오케스트라에 주는 영향이 크니까요. 대단히 실력이 좋았다는 이야기죠. 김생려 선생님의 오케스트라 연습방법은 어떠셨나요. 저는 임원식 선생님이 지휘하시는 방법으로 지휘를 배웠는데 미국에 가서 미국사람들이 지휘하는 것을 보니까 한 시간에 오케스트라 악보의 반 페이지밖에 못하더군요. 연주가 잘 안 되는 부분은 다 해결하고 가더라고요.

 

문두훈_그 때는 레코드나 지금처럼 TV가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연주자들이 전체적인 음악을 들을 기회도 없으니까 연습을 많이 하면서 서로 맞춰갔습니다. 연습을 시작하면 연주자가 계속 듣고 연습하면서 서로의 부분을 익히는 거예요. 미국식으로 연습하면 못하죠. 자기 파트에서 무슨 역할을 하는지도 모르니까요. 김생려 선생님은 파트연습도 많이 시키셨습니다. 현악기, 관악기 등으로 나누지 않고 내일은 바이올린만 연습하고 첼로만 연습하고 이런 식으로 하셨죠.

 

이용일_최 선생님은 정식단원이 되어서 연습할 때 느낀 점은 무엇인가요.

 

최기선_서울시향에 계속 있다가 정식단원이 되었으니까 특별히 느낀 점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문 선생님 말씀대로 파트연습을 열심히 시키셨습니다. 그래서 같이 연습하는데 하다가 마음에 들지 않으시면 연습을 멈추시고 따로 파트연습을 시키셨습니다.

 

이상만_임원식 선생님한테 들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김생려 선생님이 임원식 선생님한테 가서 지휘를 가르쳐 달라고 해서 기본만 배웠답니다. 임원식 선생님밖에 제대로 지휘를 공부한 사람이 없었으니까요. 그리고 김생려 선생님이 1954년에 미국에 갔는데 그때는 학교에 들어간 것이 아니라 버크샤이어 페스티벌에 참관을 해서 사람들이 지휘하는 것을 보셨죠. 제대로 지휘를 공부한 경력은 없습니다. 전부 눈대중으로 공부를 했으니까요. 바이올린은 웬만큼 하셔서 계정식 선생님이 주도하는 현악4중주단에서 제2바이올린을 맡기도 했고요. 6.25전쟁이 나서 음악가들이 먹고 살길이 막막했고 특히 교향악분야에 종사하던 사람들도 갈 곳이 없어졌을 때 김생려 선생님이 기지를 발휘하기도 하셨죠. 해군참모총장이던 손원일 선생님의 부인이자 이대를 나온 작곡가인 홍은혜 선생님을 만났는데 홍은혜 선생님과 길이 통해서 해군정훈음악대를 만들어서 음악가가 먹고 살 수 있게 하시고 교향악운동이 지속될 수 있게 하셨죠. 정말 음악에 힘들게 온몸을 바치셨죠.

 

이용일_그럼 이상만 선생님 말씀에 이어서 그때 어떤 어려움이 있었는지 문 선생님께서 더 말씀해주세요.

 

문두훈_더 자세히 말씀드린다면 민주당 시위원들이 서울시향을 없애려고 했습니다. 일 년에 나오는 예산은 정해져있고 교향악단에 지원할 예산은 서울의 명동거리에 아스팔트를 깔 수 있는 금액이니까요. 그러니까 민주당 시위원들은 시민들을 위해서 예산을 써야지 교향악단을 만들면 시민들이 뭘 좋아하냐면서 반대했죠. 그래서 그때 김생려 선생님이 민주당 대표 최고위원 조병옥 박사에게 직접 찾아가서 부탁을 하고 예산안 전체 회의에서 통과하게 되어 서울시에 교향악단을 설립하게 되었죠. 

 

이용일_김생려 선생님이 우리나라 음악에 끼친 영향은 두말할 것 없이 서울시향을 굳건하게 만들어 놓은 것과 경희대학교 음악대학을 반석위에 올려놓은 것이죠. 참 훌륭한 일을 하셨죠. 그럼 그 외에 기억나는 일화나 재미있는 말씀은 없나요.

 

박동선_그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우리나라의 클래식 음악 특히 관현악을 장로 하셨던 분은 김생려 선생님입니다. 서울시향이 세종문화회관에서 공연을 한 적이 있는데 당시 서울시향 지휘자 원경수 선생님이 저보고 김생려 선생님을 모시고 공연을 하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김생려 선생님을 모셔서 나갔는데 병세가 악화되시면서 휠체어에 앉아서 지휘하셨죠. 그 때는 공연하기 전에 반드시 애국가를 연주했는데 그 날도 못나간다고 하시다가 마지막으로 무대에 선다고 휠체어에 타셨죠. 일어나지는 못하셨지만 애국가 지휘를 꽤 힘차게 해내셨습니다. 제가 기억하는 마지막 연주 같습니다.

 

이용일_참 대단하신 분이네요.

 

박동선_6.25때는 김생려 선생님이 해군정훈음악대 소속이었는데 군복입고 단원들 데리고 연주하시는 모습들도 제가 몇 번 봤고요.

 

문두훈_아까 이상만 선생님 말씀처럼 김생려 선생님이 고려교향악단을 나와서 얼마 있다가, 서울관현악단을 만들었습니다. 악장으로 계셨는데 처음에는 단원이 30명 정도였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단원이 50명을 넘어서자 관현악단이라고 하지 말고 교향악단이라고 부르자 해서 처음으로 서울교향악단이라고 부릅니다.

 

이상만_김생려 선생님은 박동선 선생님이 하던 숭의학교에 음악당을 최초로 건설하고 그때 그 사무국장을 김생려 선생님이 했습니다. 그래서 박동선 선생님이 계속 김생려 선생님 뒤에서 후원자 역할을 했고 나중에 숭의음악당은 없어졌지만 민간공연장이 생기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김생려 선생님은 국민가요 작곡을 많이 했습니다. 김생려 선생님이 작곡한 노래들이 방송에서 아주 많이 퍼져서 국민가요들이 많이 불렸습니다. 작곡을 한건 사람들이 잘 모릅니다.

 

이용일_이 선생님이 말씀하셔서 생각났는데 그 때 불렀던 노래 중에 김생려 선생님의 곡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 분은 음악에서의 다양성과 음악에 대해 많이 알고 계셨다는 이야기이죠.

 

이상만_김생려 선생님이 서울교향악단을 만들면서 서울교향악단만 키운게 아닙니다. 청중을 키웠어요. 서울교향악단을 창단하면서 필하모니라는 잡지를 창간했습니다. 계속 잡지를 만들어서 음악청중을 확대시키고 교양을 넓히고 그러면서 교향악운동을 정착시켰습니다. 그리고 1948년에 우리나라 교향악운동 소사 같은 것도 그때 벌써 썼습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앞서간 것입니까. 정기연주회라는 시스템도 김생려 선생님이 만들었는데 그때는 서울교향악단이 정기연주회를 한 달에 한 번 하지 않고 한 달에 두 번 했습니다. 두 번 공연하여 청중을 기르고 교향악단의 운영체계를 미국식으로 정착시키셨습니다. 얼마나 대단한 역할입니까. 결과적으로는 그러한 업적들은 김생려 선생님의 능력이 출중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문두훈_능력, 수완, 음악뿐만 아니라 행정, 앞을 내다보는 안목이 대단한 분이세요. 김생려 선생님은 정말 우리나라 음악계에서 기억되어야 할 분인 것 같습니다.

 

이용일_그 당시 시민에게 음악교육을 시켜야 교향악단이 운영된다고 생각하신거 아닙니까.

 

문두훈_김생려 선생님이 서울시향을 만들고 나서 영어로 서울필하모니, 한자로 서울교향악단이라고 하자면서 시립을 빼자고 했었습니다. 시립을 왜 넣느냐고 하시면서요. 그만큼 김생려 선생님은 생각하시는게 다르셨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관리인들은 시립을 넣어야 지원을 해준다고 했습니다.

 

이상만_1948년 그때 이미 서울필하모니라는 이름을 붙인 서울교향악단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전통을 계속 살려가려고 그랬던 거죠. 그리고 김생려 선생님이 냈던 잡지 이름도 필하모니고요.

 

정리 _ 김수현 기자. 사진_김문기 부장

기사의 일부만 수록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음악춘추 2015년 7월호의 기사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

 

<김문기의 포토랜드>

 

 

 

진행: 이용일(한국음악교육협회 명예회장)

박동선((주)파킹턴 인터내셔널 회장)

최기선(한국인삼제품협회 명예회장)

 

이상만(음악평론가, 국제델픽위원회 명예위원)

문두훈(서울시립교향악단 전 기획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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