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음악춘추

인물탐구 - 작곡가 조두남 / 음악춘추 2017년 7월호

언제나 푸른바다~ 2018. 2. 11. 19:18

음악춘추 기획대담 - 인물탐구 / 2017년 7월호
한국 고유의 정서를 가곡에 녹여낸 작곡가 조두남


1912년 평안남도 평양에서 출생했다. 평양 종로공립보통학교를 졸업했다. 6세 때 미국인 신부 캐논스(Cannons, J.)에게 작곡을 배운 뒤, 11세 되던 해인 1923년 가곡 ‘옛이야기’로 데뷔했다. 1928년 전후로 평양 산정현 잘로교회, 중앙교회, 남문외교회, 연화동교회, 명천교회, 기양교회 등 교회에서 개최하는 부흥회에서 오르간과 피아노를 연주하면서 찬송가 지도자로 지냈다. 그 뒤 일제의 탄압으로 국내활동이 여의치 않자 만주로 가 그곳에서 청년기의 작품 활동을 했다. 1943년 3월 만주국 『예문지도요강』의 취지에 따라 일본 중심의 국민음악 창조를 목적으로 조직된 만주작곡가협회에 회원으로 가입해 활동했다. 또한 1943년부터 징병제를 찬양하고 낙토만주와 오족협화로서 대동아공영권을 건설하자는 내용의 군가풍 국민가요를 작사·작곡해 보급했다.
1945년 광복과 함께 귀국하여 서울에서 창작활동을 하다가, 6·25전쟁으로 마산에 피난하여 그곳에 정착하였다. 마산에 정착한 후 작품 활동보다는 피아노 교육에 힘써 수많은 제자들을 양성했다. 1962년부터 1968년까지 한국문화예술단체총연합회 마산시지부 초대 지부장을 역임했고, 이어 경상남도문화상 심사위원, 한국음악협회 고문, 한국문화예술단체총연합회 마산시지부 고문을 역임하면서 향토문화 발전과 예술진흥에 많은 공헌을 했다.
대표작으로는 가곡 ‘선구자’·‘옛이야기’·‘그리움’·‘제비’·‘접동새’ 등과 교성곡 ‘농촌’, 오페레타 ‘에밀레종’, 피아노곡 ‘환상무곡’ 등이 있다. 작품 경향은 형식면에서는 고전주의, 내용면에서는 낭만주의, 정서면에서는 민족주의이다. 청년기에는 주로 우국(憂國)의 정을 담은 서정적인 노래들을 많이 작곡했고, 장년기에는 민족 고유의 장단과 가락이 어우러진 풍류의 멋이 깃든 민족주의 노래들을 많이 작곡했다. 작곡집으로는 가곡집 『옛이야기』(1962)·『분수』 (1962)·『산도화』(1970) 등과 피아노작품집 『환상무곡』(1970) 등이 있고, 음반으로는 『조두남가곡집』(1973)·『조두남가곡선집』(1979) 등이 있다. 저서로는 수상집 『선구자』(1975)와 『그리움』(1982) 등이 있다.

출처_ [네이버 지식백과] 조두남 [趙斗南]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일시 : 2017년 6월 7일 오전11시
장소 : 코스모스악기 7층
진행 : 이용일(한국음악교육협회 명예회장)
패널 : 김형주(한국원로음악가협회 회장)
이상만(음악평론가, 국제델픽위원회 명예회원)
이수인(작곡가)

정목일(수필가, 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 한국수필가협회명예이사장)



1. 조두남 선생의 성장과정과 음악의 출발
이용일: 오늘은 서정적인 작품을 작곡하시고, 마산이라는 좋은 환경에서 작품 활동을 하시면서 우리들에게 많은 작품을 남기신 조두남 선생님의 업적을 후세에게 남기고자 합니다. 조두남 선생님께서 활동을 주로 마산에서 하셨기 때문에 서울에 가족들과 함께하신 분들이 계시지 않아서 김형주, 이상만 선생님 두 분을 모시고 대담을 진행합니다. 그리고 선생님이 살아계실 때 가깝게 지냈던 작곡가 이수인 선생님과 수필가 정목일 선생님도 저희의 대담에 함께 덧붙여 주실 것입니다. 선생님의 성장 과정에 대해서 이상만 선생님 알고계신가요?


이상만: 조두남 선생님은 평양에서 1912년 10월 9일에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출생했습니다. 당시에 5~6세의 나이에 음악을 시작한 것은 상당히 빠른 경우인데, 조두남 선생님은 비교적 빨리 음악공부를 시작하셨습니다. 아마 초등학교는 유명한 종로 초등학교를 나왔고, 숭실학교에서 배운 것으로 기억을 하고 있습니다.
어렸을때 평양에 와있던 신부 캐논스에게 풍금을 배우면서 음악을 본격적으로 시작해서, 비교적 초창기인 1920년대에 작품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활동 중간에 일본의 간섭이 심해지자 만주로 이주하여 만주에서 활동하셨습니다. 해방후에 서울로 귀국 하셨는데, 6.25 전쟁으로 인해 마산으로 내려가면서 그곳에 정착하게 되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해방 직후 월남해서 서울에서의 활동 기간이 짧았고 마산에서 정착하면서 활발히 활동 하셨기 때문에 마산에서 대단한 유지인 동시에 마산 음악계뿐만 아니라 예술전반 부분을 이끈 선도적인 음악가입니다. 마산에서 피아노 학원을 조금 하셨는데, 거기서 많은 제자들을 배출하고 가곡 작곡가 이수인씨도 아마 이분한테서 배운 것으로 기억을 하고 있습니다.


정목일: 조두남 선생은 1912년 평양에서 출생했으며, 미국인 신부 j, 케논스에게 6세때 작곡을 배운 뒤 1923년 11세 때 가곡 <옛이야기>를 작곡하여 작곡가로 나서게 되었습니다. 천재적인 재질이 엿보이는 장면입니다. 청년기에는 만주에 가서 작품 활동을 하다가 8.15 직후 귀국, 6.25 이후에는 마산에 정착하여 작곡과 피아노교육에 전념하였습니다. 한국문화예술단체총연합회 마산시지부장, 한국음악협회 고문을 역임하시면서 마산지역을 음악이 있는 도시로 만들었습니다.


이수인: 마산으로 피난 오게 되면서, 그곳에서 후학들을 양성하시고 활동하셨습니다.


2. 조두남 선생의 첫 만남
이용일: 김형주 선생님은 조두남 선생님과의 첫 만남을 기억 하시나요?


김형주: 조두남 선생님과의 첫 만남은 기억나는 것이 없지만, 선생님이 마산에 정착 한 후에 서울에 올라오시면 항상 저에게 전화를 해서 만나는 자리를 가졌습니다. 나중에 이야기가 나오겠지만, 조두남씨의 인간성이 아주 좋았습니다. 점잖으면서 허튼 소리 하는 일이 없었고, 상당히 겸손하고 정직했습니다. 원칙주의자 같은 면도 있었는데, 이러한 점에 제가 호감을 가졌고 정도 많이 들었습니다. 함께 식사를 하면서 음악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며 공감했는데, 음악에 열정적이며 애정이 있는 분이었습니다. 서로 음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국내 음악의 정세와 현실에 대한 의견도 교환하고 이야기를 많이 했습니다. 그런 면에서는 참 호감이 가는 사람이었고 상당히 믿음직스러웠습니다. 언제나 모든 것에 꼼꼼하고 섬세했습니다. 대화를 나누어보면 조두남 선생님의 인생과 사고의 세계를 본다면 상당히 인도적인 면이 강한 분이었습니다.


이수인: 선생님께서 마산에 내려오셨을 때, 저도 음악을 하다 보니 선생님을 자연스럽게 만나게 되었고, 음악적인 교류를 하게 되었습니다. 선생님은 순수하고 음악만 아시는 분이셨고, 피아노를 가르치면서 마산의 음악교육 수준에 큰 기여를 하셨습니다.


정목일: 신문사 문화부 기자 신분으로 1980년대에 자주 뵙게 되었습니다. 한복을 즐겨 입으셨고, 온화한 미소를 머금은 노신사의 모습이셨습니다. 저는 마지막 만남의 장면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노년기엔 뇌졸중으로 손발이 마비되고 말을 제대로 할 수 없게 되었지요. 선생께서 한 번 ‘다녀가라’는 말씀이 전해와 저녁 무렵에 선생의 아파트를 방문하였습니다. 창문으로 바다 쪽에서 들어온 달빛이 거실을 밝히고 있었지요. 조두남 선생과 저는 말없이 포옹하였습니다. ‘부디 이 작곡가에게 마지막 곡을 남길 수 있게 기회를 허락해 주십시오’ 속으로 빌었습니다. 그 분은 말없이 피아노 앞으로 갔습니다. 그러나 손이 굳어 있어서 피아노를 칠 수도 없었지요, 피아노 앞 의자에 앉혀 드렸지만, 건반을 칠 수가 없었지요. 떠오르는 마지막 악상을 작곡할 수 없는 그 분의 눈에선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며칠 후 그 분은 타계하셨고, 어느 날 제자 한 분이 저를 찾아와 악보를 보여주며 말했습니다. 곡이 완성되었지만, 가사를 붙이지 않았기에 가사를 써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연유로 「고별의 노래」라는 유작에 제가 가사를 쓰게 되었습니다.


3. 조두남 선생의 음악세계와 교육관

정목일: 「선구자」를 비롯하여 민족주의적 정서가 깃든 가곡을 많이 작곡하셨습니다. 청년기에는 서정적인 우국의 노래를, 장년기에는 민족교육의 장단과 가락이 어우러진 노래를 많이 작곡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수인: 선생님은 부르기 쉽고 우리나라의 정서가 녹아있는 가곡을 많이 작곡하셨습니다. 특별히 한국적인 가곡은 「뱃노래」가 있겠죠.


이용일: 조두남 선생님이 거의 독학으로 작곡을 공부했었을 텐데, 만주에 갔을 때 음악 공부를 본격적으로 했을까요?


이상만: 이미 만주에 가기 전인 1920년부터 상당한 작품을 썼습니다. 독학이라기보다는 캐논스라고 하는 신부에게 비교적 본격적으로 음악 공부를 한 것 같습니다.


이용일: 우리나라 어느 작곡가가 작곡공부를 본격적으로 하기 전에는 많은 작품을 써서 유명해졌는데, 제대로 작곡 공부를 하니 다시 곡을 쓰기 힘들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제 생각에는 조두남 선생님이 제약을 받지 않고 자유롭게 작품세계를 펼치셨기 때문에 이러한 업적을 남기지 않았나 싶습니다. 우리나라 작곡계는 해방 후에 일본 음악계의 영향을 받아서 아방가르드 음악이 아니면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작곡가협회를 학교 측에서 인정하지 않을 때도 있었죠. 그러한 움직임이 우리나라 창작음악을 편협하게 만든 원인이 되었습니다. 조두남 선생님도 서울로 진출하지 못한 이유가 이러한 아방가르드 음악을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도 듭니다.


이상만: 조두남씨는 음악학교를 다닌 경우는 없습니다. 학교에서 배운 것은 아니고 어떻게 보면 신부의 영향도 받았지만 제도권 안에서 공부를 하지 않은 것만은 사실이죠.


이용일: 결국 우리나라 작곡계는 자신이 작곡하는 방법이 아니면 남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조성음악을 쓰면 작곡가로 인정해주지 않았습니다. 저는 찬송가를 가장 아름다운 음악이라고 생각해서, 서울대 재학시절에 찬송가와 같은 음악을 작곡했더니 지도하시는 선생님께서 조성음악을 쓰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우리나라에 그런 사조가 있어서 창작계가 발전을 못한 것도 사실인데, 조두남 선생님은 자기 스타일을 고집해서 작곡한 것이 대단한 업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상만: 이 분이 지방에서 활동하신 분이라서 업적이 덜 표현된 것도 있지만 여러 분야에서 다양한 작품을 남겼고 그 양은 광범위합니다. 특히 기독교 성가 범위에서도 그분의 업적이 드러납니다. 만주에 가서 활동하는 동안에 역시 그때부터 민족적인 성격이 강했는데, 「선구자」라는 작품이 대표적입니다. 이 작품은 윤해영이 작사를 했는데, 이 한곡만으로도 조두남씨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굉장히 깊은 영향을 주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조두남 선생이 중간에 만주에 가서 활동하면서 일본사람들 군가 비슷한 작품을 몇 개 썼는데 그걸로 인해서 친일이라고 하는 굴레를 쓰게 되었습니다. 참 이거에 대해서 조두남씨가 굉장히 원통한 일이라고 자기는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더라고요.


김형주: 조두남 선생님은 우리나라에서 가곡 작곡가로 잘 알려져 있는데, 젊었을 때는 피아노 연주도 많이 했습니다. 평양에 있을 때는 종교관계, 교회관계 활동도 했는데 그곳에서 피아노 연주도 하면서 만주에도 활동했습니다. 우리에게는 작곡가로 알려져 있지만 본인은 상당히 피아노에도 매력을 느꼈고, 피아노 작품도 많이 작곡하였습니다. 음악쪽  활동은 상당히 광범위하게 펼쳐 나갔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 생각으로는 서울에서 활동했더라면 더 많은 활동을 했겠다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내려가서도 지방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신 분이고, 예총 연합회 지부장도 하셨고 또한 음악협회 마산 지부장도 하셨습니다. 무엇보다도 젊은 음악가들을 키우기 위한 교육을 해서 피아노 학원도 운영하셨고 지방의 음악분위기, 실질적인 음악의 질을 높이는데 역할을 했다는 것이죠. 마산 지부에서 음악이 상당히 올라가게 하는 역할을 한 것이 아니냐는 생각합니다.


이수인: 그렇습니다. 마산에서 활동하셨지만 좋은 노래를 만드셔서 전국적으로 보급시키셨고, 마산의 학생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쳐서 많은 제자들이 피아니스트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용일: 우리가 유추할 수 있는 것은 선생님이 서울에 머무르시려면 경쟁을 해야 할 텐데, 당대 최고의 작곡가임에도 불구하고 음악 대학을 졸업하지 않았기 때문에 마산에 머무르지 않으셨나 생각합니다. 그렇게 능력 있으신 분이 우리 주위에 계셨고, 지방에 계시면서 다양한 활동을 한 것이 놀라운 일이죠. 그분이 주로 성악곡 위주로 작곡을 하셨죠? 그 분의 오페라가 연구가 되었나요?


이상만: 네. 조 선생님이 지방에 정착하신 것은 6.25전쟁으로 인해 피난가면서인데, 이 분이 사명감이 강하신 분입니다. 그곳에서 예총 지부장을 하면서 음악뿐만 아니라 예술 전반 부분에 일을 하셨습니다. 예총 지부장은 예술전반에 상당한 능력이 있어야 가능한 직위인데, 진주의 설창수라고 하는 유명한 분과 함께 마산의 조두남씨가 경상남도 문화계에서 독보적인 존재였습니다. 그렇다보니 서울에 올라와서 활동하기 보다는 그곳에 정착하여 지역문화를 키워야겠다는 사명감이 있었다고 보고, 그 당시 상당한 야인 작곡가죠. 야인 작곡가로 성악뿐만 아니라 피아노, 오페라, 칸타타 등의 작품을 썼습니다. 또한 3.15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작품을 써서 굉장히 저항적인 모습도 보여주었죠. 어떻게 보면 꿋꿋하게 자신의 일을 해 오신 분이라고 생각됩니다.


이용일: 윤이상 선생님과 직접적인 교류는 없었나요?


이상만: 직접적인 교류가 안되었죠. 마산과 진주는 또 풍토가 굉장히 자존심과 이런 것들이 강한 사람들이죠.


이용일: 정목일 선생님이 생각하는 그분의 교육관은 무엇인가요?


정목일: 음악을 통해 애국 애향의 정서와 맑은 심성을 꽃피워 주려고 최선을 다하신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피아노 교육에 있어서도 철두철미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김형주: 그분의 작품세계를 들여다보면 전위적인 수법을 쓰지는 않았고 전통적인 수법을 답습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특히 가곡에서는 굉장히 보수적인 수법을 사용했죠.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정서를 그대로 반영하여 작곡을 하셨고 전통적인 소재를 많이 사용하셨습니다. 대표작들인 가곡은 「고향」, 「옛이야기」, 「그리움」, 「선구자」, 「산」이 있습니다. 이러한 작품들이 많이 불리는 이유는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정서를 그대로 작품화했기 때문입니다. 이외에도 「두 개의 광시곡」, 「스케르초」, 「녹턴」 등의 피아노 작품부터 오페레타까지 작품을 쓰셨고, 「에밀레종」, 「어린이의 정경」 등의 작품도 썼고 성가집도 내셨습니다.


이용일: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조두남 선생이 작품에 활용한 정서가 우리가 가진 정서의 전부라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그것은 노래 부르기 쉽고, 단조롭고, 애조가 들어있었기에 사랑을 받았지만, 우리 국민의 정서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이상만: 이분의 작품은 고전, 낭만시대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 이상을 받아들일 여건이 되지 않기도 했고요. 우리나라 민요에 대한 관심이 있었기에 이것에 영향을 받아서 선율을 썼지만 어디까지나 낭만주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는, 어떻게보면 창작에 있어서는 보수적인 쪽으로 정착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나름대로 그 시대에 작품을 여러 분야에서 쓰셨다는 것은 작곡가로서 상당한 업적을 남겼다고 생각해야겠죠.


4. 조두남 선생의 국내 음악계에 끼친 영향
이용일: 선생님의 의견에 백프로 동의하면서, 창작 음악의 다양한 범주를 이해하지 못하던 당시 사조에서 자신의 음악을 꾸준히 끌고 나아가신 조두남 선생님의 업적은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분의 노래를 본받아서 곡을 작곡한 사람이 많이 있지 않습니까? 조두남 선생님은 가곡 작곡가로서 자신의 위치를 확고히 하신 분입니다. 그분의 가족관계는 어땠나요?


김형주: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안했습니다. 제가 추측하기에 집안 분위기가 윤택하고 전통적인 가족 스타일 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성격을 미루어 볼 때 자녀들도 잘 교육시키고 전통적인 것을 준수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이용일: 이상만 선생님, 조두남 선생님이 데뷔하게 된 동기가 무엇일까요?


이상만: 1923년에 평양에서 가곡집 <옛이야기>를 내면서 데뷔했는데, 그 시대 상황으로 봐서는 박태준, 홍난파 이런 분과 거의 동격의 작품을 일찍 썼다고 평가할 수 있죠. 그래서 어떻게 보면 가곡 세계에서 한 페이지를 장식할 수 있는 분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당시에 대단한 충격을 주었습니다. 동요적인 선율에서 벗어났으며, 작곡기법이나 구성으로 봐서 12살의 나이에 그러한 작품을 썼다는 것은 당시 시대에 살았던 사람으로는 굉장히 혁명적인 작곡가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김형주: 그러한 부분들이 아쉬워서 저도 서울로 옮겨올 생각이 없냐고 물어보면 시골에서의 생활이 더 좋다고 했습니다. 지방정서에 젖어서 서울로 올라오지 않았던 것이죠. 좀 더 광범위하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중앙을 권유했지만 지방이 좋다고 올라오지 않으셨습니다.


이상만: 당시에는 먹고 살기 어려운 때인데, 그 분이 일찍부터 마산에서 피아노 학원을 설립해서 풍족한 생활을 했습니다. 그렇다보니 마산에서 유지가 되었고, 그곳을 떠날 수 없었습니다. 이미 마산에서 너무 큰 거물이 되었기 때문에, 그러한 환경이 조성 된 것 같아요. 그리고 이러한 풍족한 환경이 뒷받침이 되었기 때문에 그래도 그 많은 작품을 쓸 수 있었던 것이죠.


이용일: 그렇죠. 작곡가가 서울에서 무한 경쟁 속에서 치열한 삶의 경쟁을 할 때, 과연 서정적인 작품을 쓸 수 있는가? 이 물음에 대답하기 쉽지 않겠죠. 이러한 삶의 경쟁 속에 오염되지 않은 작곡가 이었기에 그러한 서정적인 작품을 쓸 수 있고, 음악적으로 표현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만약에 서울에서 활동했으면 작품이 달라졌을 텐데요.


김형주: 역시 그 반사작용으로 해서 조두남 선생님이 살아 있었을 때는 경남에서 부산까지 광범위하게 지방 음악계가 발전했습니다. 지방음악발전에서 크게 기여하신 분입니다.


정목일: 6.25전쟁으로 큰 상처를 입고 황폐화된 국민들의 마음에 음악을 통해 서정과 희망을 안겨주었습니다. 마음의 상처를 씻고 다시금 우리 국민들에게 희망과 재활의 길을 가도록 서정과 위로의 노래를 안겨주었습니다. 조두남 선생의 서정적인 작곡 활동은 우리나라 음악계에 동력을 불어넣고 국민들에게도 희망과 위무의 선율이 되게 했습니다. 특히 서울이 아닌 남쪽 마산에서의 전 생애를 통한 음악활동은 지역문화의 키우는 원동력이 되기도 했습니다.


김형주: 음악계에서 조두남 선생님처럼 파란만장한 생애를 사신 분이 있지 않을 것이다.


이수인: 조두남 선생님은 나이에 비해서 순수하고 음악만 위해서 사신 분입니다.


이상만: 이 양반이 굉장히 겉으로는 부드러운 분인데 속이 강하신 분입니다. 생활력도 강하시고, 마산에 가서 정착해서 지방 문화계를 휘어 잡았다는 것은 보통능력을 가지신 분이 아닙니다. 평안도 사람의 기질을 가지셔서 강하고 정의감이 있으신 분이셨습니다.


정리_ 김진실 기자. 사진_ 김문기 부장

기사의 일부만 수록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음악춘추 2017년 7월호의 기사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김문기의 포토랜드>




진행 : 이용일(한국음악교육협회 명예회장)


김형주(한국원로음악가협회 회장)


이수인(작곡가)


이상만(음악평론가, 국제델픽위원회 명예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