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음악춘추

인물탐구 작곡가 정회갑 선생 / 음악춘추 2013년 11월호

언제나 푸른바다~ 2013. 12. 29. 1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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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춘추 기획대담 | 인물탐구 11월호
작곡가 정회갑 선생
우리 민족의 토속적 정서를 바탕으로 한국 현대음악의 길을 개척한 작곡가

 

1950년대 현대음악의 태동기 무렵, 서양 창작음악계의 동향을 파악하고 현대적 기법을 국내에 도입한 인물로 주목을 받았던 정회갑 선생(1923. 9. 27 ~ 2013. 9. 13)은 전북 김제군에서  6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나 1937년 전주 제일공립보통학교를 졸업했다.
이어 1942년 전주사범학교에 진학해 밴드부에서 트럼펫을 배웠고, 5년간 피아노를 독학으로 깨우쳤으며, 졸업 후 군산 소화공립보통학교 교사로 재직한 바 있다.
광복 후 선생은 작곡가로서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교직을 뒤로 하고 1948년 경성음악전문학교에 1회로 입학하였고, 1951년 서울대 음대 작곡과를 졸업하였다. 그 후 전주 남중학교, 서울의 수도여자고등학교 교사를 거쳐 1961년부터는 서울대 음대에 재직하면서 많은 제자들을 길러내는 한편 작곡가로서의 활동을 하였고, 1989년에 정년 퇴임하였다.
1946년과 1947년 각각 고려교향악단과 서울교향악단에서 호른 주자로 활약하기도 한 정회갑 선생은 초기에 「진달래꽃」(1947), 「현악 4중주」(1948), 「교향곡 제1번」(1957), 영화음악 「피아골」(1955) 등을 작곡했고, 1960년대에 접어들어 대표작인 「가야고와 관현악을 위한 주제와 변주곡」(1961), 「피아노를 위한 한국무곡」(1967)을 발표했다.
1976년에는 ‘미래악회’를 결성하여 우리나라 현대음악계를 이끌었다. 1970년대의 대표작으로는 「인성과 5개의 악기를 위한 시나위-아라리요」, 「더블베이스와 다섯 주자를 위한 산책」(1978), 실내악곡 「살아난 소리-가장행렬」(1976) 등을 꼽을 수 있다.
1962년 서울시 문화상, 1980년 교육공로상, 1982년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1989년 국민훈장 모란장, 1990년에 대한민국 예술원상을 수상한 바 있는 정회갑 선생은 서울대 음대 학장, 한국음악협회 이사장, 대한민국 예술원 부회장을 역임하였다.

 

일시: 2013년 10월 10일(목) 오전 10시 30분
장소: (주)코스모스악기 10층
진행: 이용일(한국음악교육협회 명예회장)
패널: 백병동(서울대 음대 명예교수)
     김용진(한국음악협회 이사장, 한양대 음대 명예교수)
     윤상열(한국작곡가회 명예회장, 국립군산대 명예교수)
     정태봉(서울대 음대 교수, 미래악회 회장)
     이경미(한양대 음대 교수, 창악회 부회장)
     정종훈(유족 대표, 정회갑 선생의 차남)

 

정회갑 선생의 성장 과정 및 음악가로서의 출발

이용일_ 수년간 이 대담을 진행하면서 여러 선생님을 추모해 왔었지만 직접 가르침을 받았던 저희 스승님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자리에서 제가 사회를 보게 줄은 몰랐습니다.
얼마 전 정회갑 선생님께서는 그간의 업적을 뒤로하고 세상을 떠나셨는데요. 이번 자리가 다시 한 번 선생님을 재조명하고 추모할 수 있는 뜻깊은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나와주신 여러분들은 다들 정 선생님의 지도를 받았던 분들이시기 때문에 일반적으로는 알려지지 않은 사실들도 많이 알고 계실 것이라 여겨집니다. 그렇기에 선생님과의 소중한 추억들을 풀어내 주신다면 우리나라 현대음악의 이해에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사실 정 선생님의 강한 고집과 인내력은 제가 다 말씀을 드리지 않아도 잘 아실 것입니다. 그럼 정회갑 선생님의 음악 인생을 논하기 전에 선생님의 성장과정에 대해서 아드님이신 정종훈 씨께서 먼저 말씀해 주시지요.

 

정종훈_ 네. 저희 아버님께서는 1923년 전북 김제 구리골에서 태어나신 후 전주 지역으로 이사를 오셔서 30년을 사셨다고 합니다.
조부모님께서는 슬하에 6남매를 두셨는데 아버님께서는 그 중 장남이셨습니다. 형제분들이 신기하게도 5년 터울로 나셨는데 막내 삼촌과 아버님께서는 30년이라는 나이 차가 있습니다.
저희 자식들이 어렸을 때부터 성장할 때까지 아버님께서 속마음을 특별히 말씀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당신의 생각을 잘 몰랐었는데, 돌아가신 다음에야 아버님에 관한 기록들을 찾아보면서 많은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어떤 인터뷰 기록을 보니까 아버님께서 보통학교에서 중학교로 진학할 때의 일들을 떠올리며 한국인 선생님을 기리는 부분이 있더군요. 저희 아버님께서는 보통학교를 졸업한 다음 전주사범학교에 진학하셨는데, 당시 전주사범은 공부를 아주 잘하고 또 교장의 추천을 받아야만 입학할 수 있는 학교였는데, 제일보통학교에서 8명이 교장의 추천을 받아 원서를 낼 수 있었고, 그 중 저희 아버님을 포함한 4명의 학생이 최종 합격했는데, 그 4명이 모두 저희 아버님의 반 학생들이었답니다. 100명 모집에 천 명이 넘는 지원자가 몰렸었는데, 일제강점기인 그 시절에 더욱이 몇 명되지 않았던 한국인 합격자 중에 당당히 속하셨다는 사실, 나이가 들어서도 그 때의 감격이 마음속에 깊이 자리잡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용일_ 그렇군요. 그럼 혹시 할아버지의 직업은 무엇이셨나요?

 

정종훈_ 저희 할아버지께서는 평범한 소작인이셨어요. 그리고 할머니와 증조할아버지께서는 사금·구리와 관련된 사업을 하셨었는데, 일제강점기라는 시대적 아픔과 맞물려 사업이 어렵게 되면서 집안사정도 곤란한 상황에 처해 전주사범에 입학했을 때는 물론 아버님께서 전주사범에서 공부하실 때엔 장학금을 받으시기도 했지만 매우 힘들게 공부하셨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백병동_ 궁금한 것이 있는데요. 정회갑 선생님의 가족분들 중 음악에 조예가 깊으셨던 분은 없으셨나요?

 

정종훈_ 뭐 특별히... 하지만 저희 아버님은 태어날 때부터 음악성을 가지고 있으셨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당시 전주는 시골이었기 때문에 전라도 민요를 즐겨 연주하는 농악패들이 많았었는데, 농악패들이 연주를 하게 되면 아버님께서는 만사 제쳐두고 그들을 따라다니며 장단을 맞추곤 하셨고, 소학교 땐 꽹과리, 징, 장구 등에 관심이 많아 곧잘 다루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아버님께서는 하모니카를 통해 양악에 눈을 뜨셨고, 어린 시절부터 음악을 동경해 오셨기 때문에 음악부에 들어가 악기를 본격적으로 배우게 되셨습니다.
이후 트럼펫, 호른, 오르간, 피아노를 다룰 수 있게 되셨는데, 본격적인 음악공부에 대한 집안의 반대가 심해 생활이 어려웠을 땐 악기를 잘 다루는 재주를 살려 교향악단의 호른 수석주자로 활동하면서 학비를 조달하셨다고 합니다. 이 시기 작곡가로서의 첫 작품이 가곡인 「진달래꽃」입니다.

 

백병동_ 정회갑 선생님께서 자세한 이야기는 안 하셨지만 개인적으로 제가 느끼기에 형제분들이 많고, 또 장남이셔서 동생들의 뒷바라지를 위해 헌신하셨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용일_ 제가 정 선생님에 대한 한 가지 재미있는 이야기를 전해 드리자면, 사모님과 결혼하실 당시 나이를 속이셨는데요. 하필 그 해에 서울시 문화상을 받게 되셔서 수상자 프로필이 신문에 실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세간에 선생님의 나이가 알려지게 되었고, 그 기사를 장인 어른께서 보시고는, “기자가 사위의 나이도 모르고 기사를 썼네.”라고 하셨다더라고요(웃음). 그러한 일화가 있었을 만큼 사모님과 맺어지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마다하지 않을 정도로 열정적인 연애를 하셨던 것 같아요. 특히 헌신적인 사모님의 모습을 잊을 수가 없는데, 정 선생님의 제자들이라면 모두가 이를 기억하고 있을 것입니다.

 

백병동_ 네, 맞습니다. 제자들은 정회갑 선생님보다 사모님과 훨씬 더 친했지요.

 

이용일_ 정 선생님께서 제자들을 잘 아우를 수 있었던 것은 사모님께서 저희를 때로는 친구처럼, 때로는 가족처럼 다정하게 대해 주시고 사랑해 주셔서 가능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정회갑 선생과의 첫 만남

이용일_ 오늘 생전 정회갑 선생님과 각별한 사이였던 여러 선생님들을 모셨는데요. 어떻게 정 선생님과 인연이 닿게 되셨는지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윤상열_ 저는 1960년대 초에 정회갑 선생님을 처음 뵙고 인연을 이어오게 되었습니다. 당시 정 선생님께서는 굉장히 엄격하시면서도 따뜻하신 분이셨지요. 사회가 어지러운 가운데 청년들, 그 중에서도 작곡과 학생들 대부분이 가난한 형편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는데, 레슨 때는 어깨를 툭 치시면서, “젊은이가 패기 있게 나가야지. 위축되면 쓰나!”라고 하시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그런데 한 번은 제게 작품을 써오라고 시 한 편을 주셔서 선생님께 칭찬을 받기 위해 밤새도록 고민해서 레슨 때 찾아뵈었더니 칭찬은커녕 이걸 작품이라고 써왔느냐고 한 시간 내내 눈물이 다 날 정도로 야단을 치시더라고요. 전공을 바꿔야 하나라는 속앓이를 했을 정도였어요. 하지만 그러한 일들은 정말 열심히 노력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주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제가 1980년대 초에 군산대학으로 가게 되었을 때 제일 먼저 전화를 주신 분이 정회갑 선생님이셨는데요. 당신께서도 예전에 군산에 계셨었다는 이야기를 하시면서 교수로서의 여러 가지 덕목을 말씀해 주셨던 것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더불어 제가 군산시립합창단을 지휘하게 되었다고 말씀드리니 장문의 축사를 써서 보내주셔서 자랑스런 마음도 들었었습니다.

 

정태봉_ 1970년대에 정회갑 선생님을 처음 뵈었는데, 이미 정 선생님은 작곡가이자 교수로서 음악계에서 이미 입지를 단단히 다지신 후였지요. 정 선생님께서 당시 제자, 학생들을 가르치실 때의 성격은 다들 아시겠지만 매우 솔직하시면서 꾸밈이 없고 호탕하셨습니다. 야단을 치고서도 돌아서면 언제 그랬냐는 듯 금방 잊어버리시고 격의 없게 대해주셨지요.

 

이경미_ 저는 1981년 서울대에 입학하면서 처음 정회갑 선생님을 뵈었지요. 그 때는 음악계의 큰 어른이셔서 어린 마음에 조심스러웠었는데, 첫 레슨 때부터 농담도 하시면서 너무나 편안하게 대해 주셔서 한결 걱정을 덜었었습니다.
그리고 레슨 중에는 저희를 항상 재미있게 대해 주시고 가끔씩 레슨이 끝나면 “맥주 마시러 가자.”고 하셨을 만큼 제 기억 속 선생님께서는 밝고 인자한 모습으로 자리잡고 계십니다.

 

이용일_ 정 선생님의 제자들이 거의 남자들이었으니까 아마 이경미 선생님을 예뻐하셨을 것이에요(웃음). 더욱이 실력까지 겸비하였으니 더욱 각별하게 아끼지 않으셨나 싶습니다.

 

김용진_ 정회갑 선생님께서 서울대에 임용되신 첫 해에 제가 서울대에 입학하였으니 굉장히 오래 전 이야기네요. 그 때 학교에 국악 작곡 선생님이 안 계시다보니 정 선생님께 작곡을 가르쳐 달라며 찾아갔었고, 이로 인해 저를 인상깊게 생각하셨지요.
정회갑 선생님께서는 겉으로 드러내진 않으셨지만 직선적인 성격에 경쟁심도 강하셨고, 제자들을 키우는 데 있어 거의 남자들 위주로 뽑으셨습니다. 그래서 남자들의 세계에 여학생이 들어오게 되면 너무나 잘해 주셨지요.
그리고 결혼 후 경제적으로 힘드신 와중에도 자녀들에 대한 투자를 아끼지 않으셨을 만큼 자녀들에 대한 사랑이 끔찍하셨는데요. 어떨 때에는 제가 질투가 날 정도였으니 말로 다 못하지요.
또한 제자들에 대한 사랑도 그에 못지 않으셨는데, 물질적인 욕심이 없으셨다는 점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레슨비를 적게 드리거나, 심지어 안 드리더라도 아무런 말씀이 없으셨을 만큼 물질적인 탐욕이 없는 분이셨습니다.

 

정회갑 선생의 음악세계

이용일_ 정 선생님께서 창립하신 ‘미래악회’는 우리나라 작곡계에 신선한 돌풍을 일으켰습니다. 더불어 발표회를 꾸준히 열며 작품 활동을 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회갑 선생님께서 우리나라 음악계 활성화에 크게 기여하셨다는 말을 할 수 있겠습니다. 그 외에 정 선생님의 음악세계에 대해서 윤 선생님께서 말씀해 주시지요.

 

윤상열_ 정회갑 선생님께서는 한국음악협회 이사장 직을 수행하시면서 여러 가지 의욕적인 사업을 많이 하셨습니다. 당시 저를 비롯한 여러 음악 학도들이 정 선생님께서 쓰신 글들을 읽으면서 음악 평론에 대한 꿈을 키워나가던 시기에 음악협회 내에 평론분과위원회를 만들어 청년 음악가들 중에서 평론에 관계되는 사람들을 모아 회의의 장을 열어 주신 것은 물론이고, 여러 가지 유익한 정보도 제공해 주시면서 좋은 글을 쓸 수 있도록 도와 주셨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용일_ 그렇다면 백병동 선생님께서는 정회갑 선생님의 음악세계를 어떻게 보셨나요?

 

백병동_ 네. 저는 정회갑 선생님의 음악세계를 실험정신이라는 한 마디로 요약하고 싶습니다. 「더블베이스와 다섯 주자를 위한 산책」에서 무대 위 연주자들의 위치를 옮기는 등의 여러 시도를 했었던 것과 「인성과 5개의 악기를 위한 시나위-아라리요」의 마지막 종지, 즉 '아라리요' 하며 탁 치는 마무리는 당시 매우 신선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선생님의 대표작은 역시 「가야고와 관현악을 위한 주제와 변주곡」일 텐데요, 그 작품으로 서울시 문화상도 수상하시게 되었고, 특히 ‘황병기’라는 인물을 세상에 배출해 내기도 하셨지요. 당시 국악계에는 실력 있는 연주자들이 거의 발굴되지 못하고 있었는데, 황병기 선생이 혜성과 같이 나타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두 분은 음악적으로 상부상조하면서 입지를 다지는데에 서로 결정적인 역할을 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이용일_ 네, 맞습니다. 아주 중요한 말씀을 해주셨네요.

 

백병동_ 그리고 또 하나 지금까지 개인적으로 기억에 남는 것은 「피아노를 위한 한국무곡」입니다.
이 곡은 향토색 짙은 리듬에 바탕을 두고 작곡이 되었는데요. 저는 피아니스트들이 이렇게 좋은 작품을 왜 무대에 많이 올리지 않는지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이 곡을 높이 평가하며, 한국 사람이 만든 피아노 곡 중에 가장 으뜸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민속적인 리듬도 살아있을 뿐 아니라 우리만의 ‘흥’이라는 요소까지 들어가 있고, 농부가에서나 찾을 수 있는 민속적인 면과 유머까지 가미되어 있으니 당시로서 얼마나 참신했던 곡인지 모릅니다. 언젠가 제가 서울대 대학원에서 현대음악 개론이라는 수업을 맡았을 때 (입니다.)(일입니다.) 수업을 음악회 형식으로 하여 각국의 현대 음악을 학생들이 직접 연주하면서 본인들이 분석하게 하였지요. 그 때 피아노과의 한 학생이 「피아노를 위한 한국무곡」을 선보였고,  비록 대학원 음악회였지만 그 날 관객과 연주자들 모두가 정말 행복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연주자들이 이렇게 훌륭한 작품들을 계속해서 발굴해 연주해야 할 텐데, 우리나라 음악계의 사정이 거기까지에는 못 미치고 있다는 점이 안타까운 마음을 들게 합니다.

 

정종훈_ 「피아노를 위한 한국무곡」은 1969년도에 프랑스의 피아니스트 보야 통시치가 악보를 가져가 프랑스와 네덜란드 등지에서 순회연주를 했던 곡입니다. 그 때 4, 5차례의 앙코르를 받아 전 곡을 다시 연주하기까지 했지요. 가우데아무스 현대음악제에는 존 케이지의 음악과 함께 소개되어 절찬을 받은 바 있습니다. 외국에서 한국인의 곡을 연주한 첫 번째 사례라고 하시며 저희 아버님께서는 굉장히 자랑스러워 하셨습니다.

정태봉_ 정회갑 선생님의 모든 곡에 걸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것을 세 가지 정도로 압축 할 수 있겠는데, 그것은 ‘해학, 흥, 한’입니다. 질박하고 토속적인, 그런 민속적인 한을 바탕에 두고 있습니다. 흥겨운 곡에서도 그런 면이 바탕에 깔려있습니다. 이는 아무래도 정 선생님의 풍족하지 못했던 성장과정에 기인한 것이 아닌가 여겨지기도 하고, 정 선생님의 밝고 솔직한 성격이나 호탕한 면모 안에는 우리 민족이 가지고 있는 한의 정서가 깊이 녹아들어 있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도 듭니다.
그리고 제자로서 감히 정회갑 선생님의 작품 세계를 요약, 비유해 보자면, 선생님의 작품들은 고려청자라던가 백자와 같이 사람의 손이 많이 간, 잘 다듬어진 그릇이 아니라 옹기 같은 것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옹기를 일컬어 바깥 공기와 호흡하는 그릇이라고 하는데, 정회갑 선생님의 작품들은 그러한 면에서 최상급의 옹기가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듭니다.


 

정리_이은정 기자 / 사진_김문기 부장 

- 기사의 일부만 수록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음악춘추 2013년 11월호의 기사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

 

백병동(서울대 음대 명예교수)

이용일(한국음악교육협회 명예회장)

김용진(한국음악협회 이사장, 한양대 음대 명예교수)

윤상열(한국작곡가회 명예회장, 국립군산대 명예교수)

정태봉(서울대 음대 교수, 미래악회 회장)

이경미(한양대 음대 교수, 창악회 부회장)

정종훈(유족 대표, 정회갑 선생의 차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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