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음악춘추

인물탐구 - 작곡가 이강율 선생 / 음악춘추 2015년 10월호

언제나 푸른바다~ 2016. 3. 29. 13:50

음악춘추 기획대담 | 인물탐구 2015년 10월호


작곡가 이강율 선생

작곡가 이강율 선생(1953. 9. 7∼2004. 4. 29)은 1953년 인천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음악대학에서 김용진 교수에게 작곡을 배운 후 오스트리아로 유학하여 비엔나 국립음대(옛 비엔나 아카데미)를 졸업하였다. 재학 중 화성법 및 대위법은 소년시절 비엔나에서 천재로 이름을 날렸던 하인리히 가터마이머(H.Gattermeyer)교수에게서, 분석은 카를 하인츠 휘슬(K.H.Fȕssel) 교수에게서, 오케스트레이션은 요한 마르틴 뒤르(J.M.Dȕrr) 교수에게서, 작곡은 보리스 블라허(B.Blacher)의 수제자이며 그의 열렬한 추종자인 프란시스 버트(F.Burt)교수에게서 배웠다. 또한 동 대학 지휘과의 오트마 쉬트너(O.Suitner)교수와 비엔나의 아마데우스 오케스트라 상임 지휘자 아쯔시 누끼이(A.Nukii)에게서 지휘법을 배웠다. 졸업 후 비엔나 젊은 작곡가 그룹 'Projekt Urauffȕhrung'을 통해 비엔나, 잘츠부르크, 파리 등에서 작품을 발표하였고, 귀국 후 창악회, 아시아 작곡가 연맹, 소리목, 국제 현대음악협회(ISCM)의 회원으로 국내를 비롯하여 동경, 뉴욕, 암스테르담, 모스크바 등에서 많은 작품을 발표하였다. 신인작곡상, 예음상, 대한민국 작곡상을 수상하였으며 서울대학교 음대교수로 재직하며 후학을 양성하다 지난 2004년 52세의 젊은 나이에 타계하였다.


일시: 2015년 9월 15일(화) 오전 11시
장소: 코스모스 악기사 7층
진행: 정태봉(서울대 작곡과 교수)
패널: 이종구(한양대 작곡과 명예교수, 남북문화예술원 원장)
        강혜리(작곡가)
        한경진(전남대 예술대학 교수)
        이재홍(작곡가)
     

1. 이강율 선생의 사고(思考) 그리고 교육관
2. 이강율 선생의 작품세계


정태봉_금년은 이강율 선생의 11주기입니다. 여러 가지로 바쁘신데 참여해주신 제자들과 이종구 선생님, 먼 걸음 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저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눠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 번째는 이강율 선생의 인물 그리고 사고(思考), 교육이 포함됩니다.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던 분인가, 교육에 임하는 자세는 어떠했는가. 두 번째는 작품과 작품세계입니다. 이강율 작곡가가 추구했던 음악세계에 대한 여러분의 생각이 어떠한지 이야기를 나눠보도록 하겠습니다.


한경진_이강율 선생님을 만나 뵌 많은 분들이 비슷하게 말씀하시는 부분이 있습니다. 담백함, 진실함입니다. 물론 진실함은 주관적일 수 있습니다만 그 분의 성품의 특징이 담백함, 진실함이었던 것 같습니다. 저는 서울대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이강율 선생님의 오케스트라 작품이 연주되었는데 거기서 처음 뵈었습니다. 곡을 먼저 들었죠. 그리고 난 후 실제로 뵙고요. 현대음악을 처음 접해봤는데 자세히는 모르지만 흘러간다는 느낌이 있었습니다. 지금생각해보면 많은 현대음악을 접해보면서 의도적인 단절성이 강조되는 현대음악이 있는데 이강율 선생님은 흘러가는데 주를 주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정태봉_인간적으로 직접 대면했을 때는 어떠셨나요.


한경진_사실 처음에 저는 이강율 선생님이 어려웠습니다. 첫 레슨을 들어갔는데 말씀하시는 문장이 10문장이 안되었고 분위기가 여쭤볼 분위기가 아니었습니다. 편하게 말을 나누기 시작한 것은 3학년 2학기쯤인 것 같습니다.


이재홍_저는 선생님과의 마지막 만남이 기억납니다. 미국에서 유학하고 있을 때 잠깐 한국에 왔었습니다. 이강율 선생님께서 병마와 싸우고 계실 때였는데 그때 선생님 집에 방문했었습니다. 너무 마르셔서 놀랐습니다. 저와 대화하시는데 아프신 분 같지 않고 계속 농담하시고 분위기를 즐겁게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제가 곡을 유학 가서도 열심히 쓰고 있는지 확인하시고 마지막에 하신 말씀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작곡가한테 가장 큰 선생은 본인이라고요.


정태봉_첫인상은 시간이 지나면서 바뀌겠지만 첫인상이 어려웠다는 이야기는 이강율 선생의 상징적인 정신세계, 추구하시는 게 있었잖아요. 그래서 그것이 어렵게 보여서 첫인상이 그랬을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강혜리 선생은요?


강혜리_저는 처음 뵌 것은 입시 면접 때입니다. 그때가 기억나는 이유는 그 전까지는 서울대 교수님하면 백병동, 강석희 선생님처럼 할아버지 같은 연세가 지긋하신 교수님들만 계실 것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 때 상대적으로 ‘정말 너무 어려보이시는 선생님, 되게 젊으신 분이 서울대 교수시네’라는 첫인상을 가지고 있었죠. 어려운 질문을 하실 줄 알았는데 자기 얼굴 중에 어디가 예쁜지를 물어보시면서 분위기를 어렵지 않게 만들어주셨습니다. 하지만 3월에 입학하고 보니 선배들이 왜 이강율 선생님이 어렵다고 하는지 알거 같았죠. 항상 연구실로 레슨 받으러 노크하고 들어가면 두 가지 중에 하나였습니다. 작곡테이블에 앉아서 사전을 보며 단어를 찾고 계시거나 피아노 앞에서 천천히 꼼꼼히 피아노를 치고 계셨습니다. 연구실에서도 항상 노력하시고 넓은 책상위에 사전이 6∼7개는 펼쳐져 있던 게 지금도 기억에 남습니다. 모든 작곡가가 영어로만 글을 쓰는 게 아니니까요. 가령 헝가리 출신 작곡가는 헝가리어로 나타냄말과 작곡가가 악보에 특별히 표현한 글을 자국어로 쓰는 경우도 있죠. 헝가리어를 이태리어로 번역하거나 그 이태리어를 다시 영어로 번역하거나 그 모든 단어들을 하나하나 사전을 찾아보시기 때문에 사전들은 늘 펼쳐져 있고 아주 작은 글씨까지도 작곡가는 이렇게 섬세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면서 항상 직접 보여주셨습니다. 1,2학년 때 이강율 선생님의 그러한 모습을 보고 선생님을 닮아가려고 했던 게 지금도 남아있습니다. 이강율 선생님과 처음 레슨은 할 때 선생님께서 엘리제를 위하여라는 곡을 분석해오라는 것이었습니다. 대학생인데 뭔가 신기한 것을 배우려나 했는데 “여기에 이 글자를 왜 썼을까, 이 음을 왜 썼을까”라고 질문하셨습니다. 생각하지도 못한 질문을 하시는데 아주 작은 음에도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알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정태봉_한경진 선생과 이재홍 선생은 이강율 선생에 대한 첫인상은 어려움이었다고 하는데...


강혜리_저는 지낼수록 어려웠던 것 같습니다. 말씀을 많이 안하셨는데도 “아, 내가 준비를 안 해왔구나”라는 것을 느끼게끔 하셔서 그랬던 것 같습니다.


이종구_세 분들은 이강율 선생과 사제지간이라는 관계가 있었기 때문에 어렵게 대하였겠지만 저는 대학교 입학을 하면서 처음 만나서 그러한지, 여러분들의 첫인상과는 많이 다릅니다. 저는 이강률 선생보다 7∼8년 선배입니다. 제가 학창생활 중, 군 입대 등 사연이 있어 늦게 졸업을 하였는데, 졸업할 때 쯤 이강율 선생이 신입생으로 들어왔습니다. 이강율 선생의 첫인상은 미소를 잃지 않고 해맑았습니다.“저런 사람에게도 삶의 어두운 질곡이 있을까? 밝게 살아 왔구나”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서로 유학을 하고 다시 만난 것이 제가 서울대에서 강의를 할 즈음이었지요.  그때도 역시 변함없이 항상 웃음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내면적인 갈등을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이 아닌가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이강율 선생의 음악을 많이들은 것은 아니지만, 상당히 많은 사고 속에서 정제된 소리들을 작품화 시키지 않았나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음악을 들으면서 씨줄 날줄이 정밀하게 조직된 듯 정연한 음들의 질서를 느낄 수 있었으며 그 조직 속에는 표현하고자 하는 사고와 내면의 깊이가 있었습니다. 부고 소식을 듣고서 ‘천재단명’이라는 단어를 연상하게 되었는데요, 천재단명이라고 하기에는 나이가 있었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지금은 평균수명이 많이 상향된 시대이고 보면 천재단명이 맞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천재라고 얘기 하면 모차르트 같은 천재형을 흔히 떠올리게 되는데, 사실 피카소 같은 광인적인 천재도 있고, 쇤베르크처럼 논리적인 천재 등 다양한 유형의 천재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이강율의 천재는 아마도 직감적 천재성을 그대로 표출하는 것이 아닌 가다듬고 다시 정화시키는 또 다른 유형의 천재가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정태봉_이종구 선생님께서 이강율 선생에 대해 모든 것을 설명해주신 것 같습니다. 저도 동감합니다. 저도 이강율 선생보다 학교를 먼저 입학했는데 군대를 다녀와서 복학하니까 학교에 있더라고요. 학교에서는 서로 있는 줄만 알고 있다가 이강율 선생이 먼저 유학을 가고 저는 한참 있다가 유학을 갔습니다. 돌아오니까 이강율 선생은 작품 활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강율 선생과 이야기를 많이 나눈 것은 한국에 들어와서 서로 열심히 활동하면서부터입니다. 처음 봤을 때 느낌은 굉장히 해맑고 소년 같았습니다. 작품세계는 그런데서 기인한 것도 있겠고요. 종교적인 측면에서는 가톨릭이 이강율 선생의 생각이나 행동에 영향을 많이 준 것 같습니다. 이종구 선생님이 말씀하셨듯이 거슬리는 것을 이것저것 빼다보니까 단순사고로 나타나는 측면, 인간적인 면모에도 분명히 있는 것 같습니다. 이강율 선생은 마음을 열 수 있는 사람한테는 한 없이 따뜻하셨습니다. 서로 모르는 사이라면 거리감을 느끼고 친해지는데 시간이 걸렸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농담도 잘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농담을 이해하려면 사고를 많이 안 한 사람들은 한참 생각을 해야 했습니다. 서로 농담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판단되면 편하게 대해주셨죠. 지금부터는 교육에 관한 이야기를 더 했으면 좋겠습니다. 제자의 입장, 선배의 입장에서 학교에서 어떤 식으로 학생을 가르치며 생활했는지, 교육적인 측면에 대해 말씀해주세요.


강혜리_저는 기억나는 게 “매일 한 음이라도 적어라”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지금도 그렇게 하려고 노력합니다. 천재적으로 뭔가 떠올라서 쓰는 것 보다는 작은 모티브나 작은 아이디어를 매일매일 수련하듯이 연습하는 과정자체를 높이 사시는 것 같기도 하고 가르쳐 주시려고 애를 쓰셨다고 생각됩니다. 아주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해서 어떻게 작품을 만들어 나가야할지 안 떠오르고 모르겠다 할지라도 일단 하얀 오선지 위에 점하나라도 찍어라 그래서 그 점들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고 의미도 부여해보고 거기서 뭔가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고요. 항상 저에게 해주셨던 말씀 중 하나가 작곡가는 금속세공하는 사람 같다는 말씀이셨습니다. “좋은 상품을 만들어내는데 그 상품의 무게나 크기가 중요한 게 아니라 갈고 닦아서 팔릴 수 있는 세밀한, 완성된, 최상의 작품을 작거나 크거나 상관없이 너 스스로가 내놓을 수 있느냐고 그것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도 선생님의 그러한 가르침이 큰 버팀목이 되고 방향을 제시해주신 덕분입니다. 학부시절 제 동기 중에서는 작곡을 잘하는 친구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능력에 관한 고민을 할 때 음악적인 능력에 대한 고민보다는 풀어나가는 과정에 대해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정태봉_이강율 선생의 교육관이 전수되는 모습이 보입니다.


한경진_작곡가가 자칫 학부시절에 빠질 수 있는 위험성이 악보의 허상입니다. 소리가 악보만 못한 경우가 가끔 있을 수 있으니까요. 그런 것에 대한 경계를 쉬지 않고 하셨습니다.


정태봉_그 이야기는 저와 이강율 선생이 개인적으로 만나면 많이 나눴던 이야기입니다.


한경진_아까 정 선생님이 말씀하셨던 소리를 선택하고 정제된 과정까지 일맥상통하는 말씀입니다. 저도 똑같았던 게 필요 없는 소리에 대해서는 가차 없이 때로는 지나칠 정도로 엄격하고 소리보다 과한 악보에 대한 경계. 특히 실제소리보다 과한 계획에 대해서 경계를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정태봉_이강율 선생이 그런 생각을 많이 하셨는데 스트레스를 내면으로 받아들이는 기질을 가지고 있는 분이셨습니다. 때문에 즉각 반응하지 않고 속으로 삭히셨죠. 이강율 선생이 그런데서 더 해방이 되었으면 아프시지도 않았을 거고 아프시더라도 완쾌할 수 있지 않았나는 생각이 듭니다.


이재홍_지금도 기억에 남는 게 레슨 할 때 선생님께서 비유를 많이 해주셨습니다. 예를 들면 우리가 주변에서 흔히 생각할 수 있는 밤하늘의 별을 생각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별을 자세히 관찰해보면 원모양, 세모모양 등 여러 가지의 다양한 모양의 별들이 있는데 그것들은 다 별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떻게 보면 음악과 관련이 없는 것 같고 이해도 못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음악의 본질적인 한 면을 말씀하셨던 것 같습니다.


정태봉_어쨌든 공통된 지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강율 선생하면 잊을 수 없는 게 있습니다. 그림을 잘 그린다는 것입니다. 웬만한 만화가들을 능가하는 그러한 그림의 섬세하면서도 피사체의 특징이라고 할까요. 포착해서 그려내고 실제로도 이강율 선생은 만화를 좋아했던 것 같습니다. 소년 같은 기질이 있기 때문인 것 같기도 하고 사고가 무한정 뻗어 나가고 일상에 갇혀 있는 게 아니어서 머릿속은 넓게 유영을 하고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 기억나는 것이 있나요.


한경진_한때는 미술을 전공하고 싶으셨다고 했었습니다. 레슨 할 때 비유를 음악외적인 것과 우주에 관련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보통사람이 생각하지 않는 차원의 관찰력이 있으셨던 것 같습니다.


정태봉_그렇죠. 그림을 그리려면 시각적인 관찰도 필요하니까요. 다양함에 대한 감각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의 차이가 있다고 봅니다. 본격적으로 이강율 선생의 작품세계에 대해서 이야기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음악평론가 한상우 선생님이 이강율 선생의 1주기 기념 책자에다 단순함, 여백이라는 말을 하셨습니다. 이강율 선생의 단순함에 대한 본질적인 문제를 아까 나눴습니다. 불필요한 것을 빼다보니 단순해졌다. 이것이 그의 음악세계를 다루는데 중요한 이야기인 것 같습니다. 저는 이강율 선생의 작품세계는 유리같이 투명한 감성의 세계라고 생각합니다. 들리는 소리의 감상적인 면을 가져다가 본질만 남기고 불필요한 것을 제거했기 때문에 유리처럼 투명하죠.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유리가 없는 줄 알고 그냥 지나가다가 부딪히지 않습니까. 유리인줄 모르는 사람한테는 이강율 선생의 작품이 가치 있게 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유리라는 것을 아는 사람들에게는 매우 가치 있게 들릴 것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제가 여러 곡을 들었는데 그런 것이 다 갖춰져 있었습니다.


이종구_말씀을 들으니까 생각이 나는데 우리 동양에서 천지인(天地人)을 이야기하죠. 그 천(天)이라는 것이 이강율 선생이 생각한 우주에서 출발하는데 이것을 상징할 때 주역에서는 원으로 표시하지만, 한글의 홀소리에서는 점 하나를 찍어 천(天)을 나타냈습니다. 즉, 하늘은 점, 지(地)는 가로로 긋는 줄 하나 ㅡ, 인(人)은 위에서 아래로 내려가는 ㅣ, 그래서 이 천지인(天地人)을 가지고 홀소리를 조합한 것인데, 그 광대무변한 천체를 단순한 점하나로 상징하였던 한글의 내재철학처럼, 이강율 선생도 우주적 상상력을 단순화한 음조직으로 표현하려 하셨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아, 참 멋있는 사고를 하였던 사람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정태봉_이강율 선생의 작품에서 그러한 점을 느낄 수 있는 묘미가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천부적으로 뭔가를 가지고 있지 않나 굉장히 중요한 말씀해주셨습니다. 이 복잡한 우주를 점 하나로 표현하려고 했던 점, 우리의 감수성, 본질을 꿰뚫으려고 했던 점을 이강율 선생은 발휘하고 있었다고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강혜리_저학년일 때는 이강율 선생님의 단순하고 투명한 그 음악이 왜 중요하고 어떤 의미인지 잘 몰랐습니다. 그 당시 다른 선생님들의 악보를 보면 뭔가 이야기도 많고 악보가 까맣고 배울 것도 많아 보였습니다. 그런데 이강율 선생님의 악보를 보면 하얗고 음도 몇 개 없고, 짧고 그래서 우리 선생님은 왜 복잡하게 안 가르쳐 주시지 이런 생각을 했었습니다. 이러한 생각이 완전히 깨진 것이 제가 석사 논문을 하면서부터입니다.  다시 한 번 이강율 선생님의 악보들 음 하나하나를 분석해보니 그 전에는 직관적으로 서정적으로만 표현한 줄 알았던 선생님의 음악에는 허투루 쓴 음이 하나도 없고,  모든 음과 음 사이에 의미가 있고 음들끼리도 연관성이 분명히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한곡을 일목묘연하게 그 논지가 쭉 나타나는 것을 분석적으로 볼 수 있어서 하얗게 쉽게 쓴 음악이 아니라 이렇게 쓸 수밖에 없어서 표현한 음악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분석하고 공부하면서 복잡함 또는 복합적인 발전만 중요하게 생각하고 자신을 발견하고 우리 선생님의 제자이고 선생님의 제자라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면서도 선생님과 그 작품세계의 깊이와 의미를 못 알아챘었다는 생각에 스스로 부끄러웠습니다.


정태봉_저는 늦게라도 깨닫고 작품세계에 대한 실체를 파악하고 이해했다는 점은 늦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50세가 넘은 작곡가들 중에서도 처음 시작과 마지막이 엉뚱한 방향으로 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 것을 이강율 선생이 보셨다면 용납을 못하셨을 것 같습니다.


이재홍_이강율 선생님의 음악을 듣고 분석하면서 느꼈던 점은 이강율 선생님의 곡 구조가 굉장히 단단하다는 것입니다. 몰입감과 만족감이 항상 있었습니다. 중간에 항상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앞으로의 일을 예상치 못하게 드라마틱한 반전이 있었습니다.  곡의 처음과 중간, 끝이 탄탄한 건물 같았습니다.


정태봉_그러한 것을 작품의 구성이라고 이야기하죠.


한경진_제가 이강율 선생님의 교수법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매번 그러셨던 것은 아니지만 많은 시간을 어디에 할애 했냐면 작품 속입니다. 이 부분은 늘리고 이 부분은 줄이고 이 부분은 저기로 옮기고 마치 블록을 만들 듯이요. 호흡에 도움을 많이 줬습니다. 그런 교수법이 저에게 좋은 영향을 미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정태봉_제자들 입장에서는 이강율 선생의 교육관이라든지 평소에 보여주신 모습이 뇌리에 남아서 이야기한 것 같습니다. 이강율 선생의 작품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이 있나요.


이종구_ 솔직히 이강율 선생의 작품을 평할 수 있을 정도로 많이 접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한 말씀 부언한다면, 우리 작곡가들이 한 세상을 살아가면서 환경에 따라 많은 학교를 중심으로 한 인연들이나 학회를 중심으로 한 인연을 거부할 수 없는데, 이러한 관점에서 이강율 선생은‘창악회’와‘소리목’과 인연이 컸다고 봅니다. 작품의 비중으로나 서울대 교수라는 사회적 신분으로 보나, 이들 단체에서 중책을 맡아 달라는 요청이 많았던 것으로 압니다. 그런데 매번 사양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당신의 머릿속에는 우주적 작품 속에서 유영하고 있는데 학회를 비롯한 대인관계가 거추장스럽고 불필요한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나 봅니다. 본인의 정의감에서 벗어나는 일은 단호하게 잘라버리는 대쪽 같은 일면을 가졌던 분이셨기에 이러한 일에 연연해하지 않는 것이 당연하였으리라 생각을 하게 되네요. 그것이 결국 이강율 선생의 성격이고 인간상이자 작품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제까지 우리가 논의 했던 모든 것들이‘인간 이강율이고 그것은 곧 그의 작품’이라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강혜리_저는 바이올린 사중주가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선생님께서 돌아가시고 나서 최근에 연주를 했고 제가 연습을 시켰던 곡입니다. 대학생 연주자들이 연주하게 되었는데 현대음악이라고 하니까 “잘 모르겠어요” 이러다가 곡에 대한 설명을 해주고 학생들이 악보를 이해하고 나더니 스스로 호흡을 찾고 베토벤 곡을 연주하듯이 초견으로 연주하고 그만하는 게 아니라 갈고 닦아서 연주했습니다. “여기서는 뭐가 좋아요?”이렇게 질문하면서 스스로 표현하려고 했었습니다. 연주자 스스로가 좋아서 연주하고요. 4대의 바이올린으로 표현할 수 있는 음역은 현악사중주처럼 넓지 않고 제한되어있는데 그 제한안에서 선생님께서 노래하고자 했던 모든 것을 자유롭게 하셨던 것이 이 음악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선생님 스스로 제한을 두고 최소한의 요소로 자기가 할 수 있는 일, 아름답게 풀어나갈 수 있는 일을 표현한 곡이 이곡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이재홍_저도 바이올린 사중주를 좋아합니다. 특히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미크로로기Ⅰ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제가 대학교 1학년 때 선생님께 처음 받은 악보입니다.


정리 _ 김수현 기자. 사진_김문기 부장

기사의 일부만 수록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음악춘추 2015년 10월호의 기사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


<김문기의 포토랜드>

 



진행: 정태봉(서울대 작곡과 교수)


이종구(한양대 작곡과 명예교수, 남북문화예술원 원장)


 한경진(전남대 예술대학 교수)


이재홍(작곡가)


강혜리(작곡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