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음악춘추

인물탐구 - 작곡가 성두영 선생 / 음악춘추 2016년 9월호

언제나 푸른바다~ 2016. 3. 29. 13:11

음악춘추 기획대담 - 인물탐구 2015년 9월호
피아노 음악의 선구자 작곡가 성두영 선생(1929년 2월 11일∼2015년 3월 4일)


일시: 2015년 8월 6일 오전 10시 30분
장소: 코스모스 악기사
진행: 이용일(한국음악교육협회 명예회장)
패널: 성승연(딸)
        나효선(동덕여대 피아노과 명예교수)
        김덕기(서울대 지휘과 교수)
        신희주(청주대 음악교육과 교수)


1929년 서울에서 출생한 성두영 선생은 피아노를 치면서 노래하는 것을 좋아한 어머니의 영향으로 일찍부터 피아노(사사: 이호석, 노신옥)와 작곡(사사: 정종길, 이문근) 지도를 받았다. 양정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동국대 정경학부 정치과에서 수학했으며, 1949년 서울 발레단을 위한 「꿩」, 1952년 한국무용단을 위한 발레곡 「남국의 연가」를 작곡했다. 1957년부터 수도여자사범대학에 출강했으며, 1958년 서울에서 첫 번째 피아노 독주회를 개최하는 등 활발한 음악활동을 했다. 프랑스 정부 장학금을 받아 1961년 5월 파리에꼴노르말에 입학, 1964년 지휘과(사사: Brun Amaducci, Pierre Dervaux)와 1967년 작곡과(사사: Henri Dutilleux)를 졸업하고, 1970년까지 Jules Gentil에게 피아노를 공부했다. 1971년 2월 귀국 후 성심여대(현 가톨릭대), 경희대, 단국대, 연세대, 서울대에서 후학을 양성했으며, 1976년부터 이화여대 작곡과 교수로 재직, 1994년 2월 정년퇴임했다. 한국작곡가협회 이사 및 자문위원, 창악회 이사 및 심의위원, 아시아 작곡가연맹 한국위원회 위원, 서울음악제 초청작곡가로 활동하며 많은 작품을 작곡, 발표했다. 중요 작품으로는 소프라노와 4대의 악기를 위한 「죄 없는 수인」(1972년), 남성과 12인의 주자를 위한 「기적」(1974년), 관현악과 파이프오르간을 위한 「시편118편」(1992년), 합창곡 「승무」(1973년), 피아노 독주곡 「경」(1982년) 등이 있으며 저서 『라벨 ‘거울’ ‘소나티네’ 작품해석과 운지법』(1976년), 『세계 음악의 역사』(1979년), 『단순전위 대위법, 모방』(1984년)이 있다. 정년퇴임 후 3년 동안 서강대 교양학부 강사로 ‘음악 감상’ 수업을 했고, 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은 많은 프랑스 피아노 음악을 후진들에게 소개하고 가르치고자 1995년 ‘프랑스음악연구회’를 발족해 2014년까지 9회의 정기연주회를 할 수 있도록 이끌었으며, 주요 일간지 및 음악관련 잡지에 음악평론 및 칼럼니스트로도 활동했다.


성두영 선생의 성장 과정 및 음악의 출발

이용일_ 이번 인물탐구에서는 우리나라 음악계에 큰 발자취를 남기신 성 교수님의 음악적인 업적을 논의하고자 합니다. 우선 따님 성승연 선생님은 할아버지가 어떤 일을 하셨는지 등 아버지의 성장과정과 가족사항에 대해 소개해주세요.


성승연_ 할아버지가 설탕, 사탕 같은 것을 만드는 공장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일찍 돌아가셔서 할머니께서 집과 공장을 팔아서 생활하시고 고모와 아버지 유학비도 대셨다고 합니다.


김덕기_ 제가 들은 바로는 저희 아버님(김희조)이 젊으셨을 때, 6.25 전쟁 후인데도 성두영 선생님 댁은 대단한 부잣집으로 충정로의 99칸 기와집이었고 그랜드 피아노가 있어서 피아노 5중주 연습을 하러 음악인들이 모이기도 했다고 합니다.


신희주_ 성두영 선생님 댁에서 운영하신 공장의 과자가 히트를 쳤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이용일_ 성두영 선생님 약력을 보니 양정고등학교를 졸업하셨네요.


나효선_ 네. 고등학교 졸업 후 동국대학교 정경학부 정치과에서 수학하시던 중 6.25 사변이 일어나 중퇴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이용일_ 그럼 성두영 선생님이 작곡과 피아노를 누구에게 배우셨나요?


나효선_ 성 선생님의 어머니가 아들과 딸을 위해 피아노를 너무 갖고 싶어 하셔서 아버지께서 야마하 피아노를 사주셨다고 합니다. 어머니께서 피아노를 치면서 노래하는 것을 좋아하신 덕분에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피아노와 작곡을 배우셨다고 합니다. 고등보통학교 때부터 먼 길도 자전거를 타고 마다않고 가셔서 계속 음악을 배워 피아노는 이호섭, 노신옥 선생님을, 작곡은 정종길 선생님과 이문근 신부님을 사사하셨고, 대학생 시절부터 무용곡을 작곡하신 것으로 압니다.


성승연_ 젊으실 때 발레곡을 많이 작곡하셨는데, 무용단과 함께 다니면서 곡들을 쓰셨대요. 처음 시작은 원래 무용곡을 쓰던 작곡가가 있었는데 그분이 돌아가셔서 아버지께서 이어 쓰셨다고 들었습니다.


나효선_ 유학 가시기 전인 1958년 독주회에서 리스트의 소나타, 바흐-부조니 「토카타 라단조」 등을 한국에서 초연하셨다고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성승연_ 그 독주회의 앙코르 곡으로 드뷔시의 「달빛」을 준비하셨는데, 갑자기 정전이 되어서 정말 창문으로 달빛만 들어오는 상황에서 연주하셨대요.


이용일_ 성두영 선생님의 형제 관계는 어떻게 되나요?


성승연_ 아버지가 첫째이시고, 삼촌 한분, 고모 두 분이 계십니다. 아버지께서 맏아들이라 형제들을 다 돌보셨지요.


신희주_ 그 고모 중 한 분이 서울대학교 피아노과 교수이셨던 성정희 선생님이에요.


성승연_ 네. 큰고모가 프랑스로 유학가신 후 아버지께서도 유학을 가셨어요.


이용일_ 네. 집안에 그런 예술적인 흐름이 있었군요. 성두영 선생님이 테크니션이 아니라 음악적 재능을 타고나셨단 생각이 드네요. 가보(家寶)에 예술적인 흐름이 있었지 않나 싶습니다.


성승연_ 듣기로는 할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셔서 할머니가 공장과 집을 파셨는데 사기를 당해서 많은 돈을 받진 못하셨대요. 아버지께서 대한민국 최초의 프랑스 국비 장학생이셔서 학비 걱정은 없었지만 생활비가 부족해서 아버지 표현을 빌리자면 ‘식부’ 생활도 하셨대요. 피아노가 있는 집의 설거지 일을 하시는 등 피아노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일을 하셨고 피아노 지도도 하셨고요. 그 일도 없을 때는 빵 하나 살 돈이 없어서 3-4일을 굶으실 정도로 굉장히 힘들게 유학생활을 하셨다고 합니다.


성두영 선생과의 첫 만남

이용일_ 저는 이번 대담을 준비하면서 나효선 선생님과 김덕기 선생님이 성두영 선생님의 제자일 것이라고는 생각을 못했습니다. 나운영 선생님과 김희조 선생님은 우리나라 음악계에서는 최고의 음악가들이라 자녀를 다른 피아노 선생님에게 보낼 수도 있었을 거 같은데요.


나효선_ 고등학교 3학년 11월 중순 경, 이화여대 약대를 지원하려고 준비 중이던 저에게 이애내 선생님께서 어느 날 갑자기 부르셔서 아버지의 뒤를 이어 작곡가가 되라고 하시며, 작곡가가 되려면 피아노를 잘 쳐야하니 우선 피아노 전공으로 진학하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레슨비도 안 받으시고 2달 반 동안 입학 시험곡을 가르쳐 주셔서 이화여대에 진학했고 제가 대학원을 졸업 할 때까지 성두영 선생님께서 귀국을 안 하셔서 성 선생님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었어요. 졸업 후 십년 정도 지났을 때 우연히 선화예고에서 성두영 선생님께서 어떤 학생을 가르치시는 것을 보고 감동을 받아 기본적인 소리 내는 것부터 배우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이화여대 은사님이신 이혜화 선생님께서 “성두영 선생님이 프랑스에서 10년 동안 공부하셔서 듣는 귀가 달라 가르치는 것도 다르다”고 하시며 성 선생님께 공부하라고 보내주셨어요. 저희 아버지께서 성두영 선생님을 소개해주신 것이 아니고요.


김덕기_ 저는 고등학생 때 신수정 선생님께 피아노를 배웠는데, 그 당시 신 선생님과 성 선생님께서는 음악에 관해서 다양한 의견을 나누곤 하셨답니다. 그래서 제가 고등학교 3학년이 되었을 때 신수정 선생님께서 저더러 성두영 선생님과도 공부하면 좋을 것 같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작곡가에게 피아노를 배우러 가보라는 선생님의 의중을 궁금해 하면서 성두영 선생님을 찾아뵈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두 선생님께 모두 가르침을 받게 되었습니다.  
성 선생님께 배우며 알게 된 것은, ‘인상파’라는, 이름부터 막연한 음악을 접할 때, 본능적으로만 느끼고 있던 음악을 구체적으로 어떤 연습 방법을 거치면 이런 소리가 난다는 식으로 설명하시던 선생님의 말씀은 우리에게는 큰 충격이었습니다. 우리는 소리에 대한 감각, 이를테면 명료한 소리, 크고 작은 소리 등 단편적으로만 생각하며 자라왔는데, 성두영 선생님께서는 같은 p(피아노)지만 작아도 명료한 소리와 흐릿한 소리가 있고, f(포르테)도 열린 소리와 닫힌 소리가 있다는, 다양한 소리의 층을 말씀하셨습니다.
예를 들어 수묵화를 그릴 때 같은 검은 묵이지만 물을 타서 그 농담(濃淡)으로 입체감을 주듯이 음악에서도 소리의 질도 농도로 볼 수 있다는 새로운 시각을 열어 주셨습니다.


이용일_ 나효선 선생님, 김덕기 선생님 두 분 모두 아버지의 권유가 아니었군요. 저는 우리나라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아시는 나운영 선생님의 딸이 어떻게 성두영 선생님을 사사했는지 내심 궁금했습니다. 그리고 천하의 김희조 선생님도 제자, 동료 등 수많은 피아니스트가 있었을 텐데 왜 성 선생님께 자녀를 보냈을까 싶었던 거죠.


이용일_ 신희주 선생님은 언제 처음 성두영 선생님들 만났나요?


신희주_ 저도 고등학교 3학년 때 신수정 선생님이 프랑스에서 오신 선생님이 계신데 배워보면 좋겠다며 보내셔서 두 분께 레슨을 받았습니다. 당시 성두영 선생님이 잘 가르치신다고 소문이 나니까 학생들이 자기 선생님이 있으면서도 몰래 성 선생님께 배웠어요. 피아노 실기를 C학점 받던 학생들이 A학점을 받을 정도로 굉장히 잘 가르치셨거든요(웃음). 그래서 한편으로는 선생님을 사사한 학생이 매우 많지만 몰래 배운 터라 성 선생님께서 가르친 공은 없으세요. 사사에 성 선생님 성함은 들어갈 수 없으니까요. 저희들처럼 지도 선생님이 정식으로 보내거나 허락하셨으면 사사에 성 선생님 성함도 쓸 수 있는데 말이죠.


김덕기_ 신수정 선생님과 그 선생님들께서 훌륭하신 점은, 많은 선생님들은 자신의 학생이 다른 선생님께 배우는 것이 도움이 안 된다고 생각해서 다른 피아니스트의 마스터클래스에 참가 하는 것도 권하지 않는 경우가 많은데 신수정 선생님이나 정진우 선생님은 제자들에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 성두영 선생님께 보내셨듯이 열린 마음으로 제자들을 가르치셨다는 겁니다. 


이용일_ 성두영 선생님 지도법이 워낙 뛰어나고 성품도 좋으셨으니까요. 제 생각에는 김덕기 선생님 말처럼, 악보에서 f(포르테), p(피아노), 크레셴도만 보던 한국 피아노에서 소위 피아노 음색을 제대로 지도하신 분이 성 선생님이 아니신가 싶습니다. 성 선생님 본인 귀가 좋은데다가 프랑스 유학이 큰 경험이 되었겠지요.


신희주_ 성 선생님께서 프랑스 유학시절 피에르 상캉(Pierre Sancan)등의 마스터클래스를 통역하시면서 유명한 음악가들의 레슨을 많이 접하셨다는 이야기를 자주 하셨습니다. 그리고 많은 한국 유학생들의 레슨 통역도 해 주셨고요.


이용일_ 성두영 선생님께서 아버지로서는 어떠셨나요?


성승연_ 저는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를 제자 분들께 뺏겼어요(웃음). 유치원 다닐 때였는데, 저희 집에 제자들이 레슨 받으러 오면 아버지께서 “내 큰 딸들”이라고 부르셨고, 그러면 저는 울며 “아빠 딸은 나 하나야”라고 했어요. “내 큰 딸들”이라고 부르실 정도로 제자 분들을 굉장히 아끼셨습니다. 그래서 집에서 레슨하시는 날에는, 특히 제가 어릴 때는 항상 피아노 아래, 아버지 발밑에 있다가 거기서 잠들고, 아버지 다리를 잡고 ‘아빠는 내거’라는 표시를 많이 했었지요(웃음).
아버지께서 평소 바깥 활동을 많이 하셔서 아버지가 편찮으신 후에야 아버지와 시간을 많이 보낼 수 있었어요. 연세 드신 후 편찮으시기 전에도 레슨을 하시거나 골프를 치시거나 친구 분들을 만나러 다니셨지 집에 많이 계시지는 않았습니다. 나중에 건강이 악화되어 집에 계실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어서야 저와 계속 같이 계시며 이야기도 많이 하셨지요. 아버지는 다른 아버지들에 비해 권위적이지도 않으셨고 딸인 저보다도 애교가 많으셨어요.
편찮으신 동안에는 아버지께서 “내가 너 없으면 어떻게 살아”라고 항상 말씀하셨는데, 사실 그때는 ‘긴 병에 효자 없다’는 말처럼, 아버지 간호를 하는 것이 힘들기도 했지만 막상 돌아가시고 나니 그 시간마저도 너무 소중했음을 느낍니다.


성두영 선생의 음악세계

이용일_ 그렇다면 성두영 선생님의 음악세계는 어떠하다고 생각하시나요?


나효선_ 성 선생님께서는 피아노만 하신 것이 아니라, 작곡, 지휘도 공부하셨기 때문에 음악의 전체 구조를 파악하고, 폭넓게 보셨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피아노 선생님들은 자신이 공부한 스타일로만 학생들을 가르치는데 성 선생님은 학생들의 의견, 해석도 받아주셨고요. 학생이 고집을 부리다가 자신의 해석이 잘못된 것을 깨달을 때까지 참고 기다리셨지요. 저는 선생님의 그런 부분에 감동을 받았어요. 또한 바로크부터 현대까지 다양한 음악을 알려주셨고, 소리를 중요하게 생각하셨습니다.


신희주_ 네. 학생들에게 프랑스 피아노 작품의 초연을 많이 시키셨습니다.


이용일_ 사실 성두영 선생님이 귀국하기 전에 국내에서도 프랑스 작품을 치긴 했는데 저는 베토벤 같은 작품들을 듣다가 프랑스 음악을 들으면 음악 같지가 않았어요. 라벨, 포레, 드뷔시 연주를 들으면 음색을 제대로 못 만들어서 모두 똑같게 들려 재미없다는 생각을 했었거든요(웃음).


나효선_ 성두영 선생님께서 처음으로 f(포르테)를 배울 때, 단순히 크게 연주하는 것이 아니라 ‘던져라’, ‘잡아당겨라’, ‘튕겨라’, ‘밀어라’ 등 다양한 설명을 해주셔서 굉장히 놀랐어요.


김덕기_ 프랑스 사람들이 어떤 일을 할 때 논리적으로 접근하는 성향이 있는데, 성두영 선생님께서 프랑스 음악에 계속 관심 가지신 이유 중 하나가 그런 것을 배우기 위해서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인상파 화가들의 작품도 논리의 결과이지 감이 아니듯이 성 선생님께서도 그런 점에 매료가 되셨고, 그것을 저희들에게도 알려주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지금도 악보를 볼 때 그런 시각에서 보게 됩니다. 성두영 선생님께 배운 제자들은 공통적으로 같은 관점에서 음악을 접하게 될 겁니다.


이용일_ 지금도 우리나라 피아니스트 상당수가 그런 점을 간과하고 가르치는 경우가 많은 듯합니다. 제가 예전에 한 피아니스트가 독주회에서 베토벤 소나타 두곡을 연주했는데 첫 번째 곡과 두 번째 곡의 음색이 다르게 들리더라고요. 그래서 함께 독주회에 온 다른 교수에게 음색이 다르지 않았냐고 물으니 같게 들렸다고 하고, 다른 지휘자에게도 물어보니 그 사람은 저처럼 음색이 다르게 들렸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연주회가 끝난 후 연주자에게 “베토벤 소나타 연주할 때 서로 음색이 다르게 들렸다”고 말했더니 “음색 안 바꾸려면 왜 치겠어요?”라고 하더군요. 이건 제 귀만 좋고 다른 사람들 귀는 나쁘다는 뜻이 아니라 음악을 듣지 않아서 그렇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김덕기_ 그렇지만 음악을 생각하는 관점에 따라서 음색을 다양하게 연주하는 음악은 잘못된 해석일 수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베토벤의 작품에 대해 지난 세기의 프랑스 음악가들이 생각하던 방향으로 해석하게 된다면, 소리에서 너무 많은 설명을 하게 됩니다. 단순함으로만 표현해야 하는 부분이 분명히 있는데 말이지요. 그래서 저는 ‘옳다 그르다’라기 보다는 ‘관점의 차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관점에서 보면 양념을 너무 많이 친 음식같이 될 수가 있기 때문에 그건 좋고 나쁨이 아니라 선택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이용일_ 성두영 선생님이 지휘 공부도 했지만 끝까지 지휘는 안하셨지요? 이화여대 교수로 재직하시던 당시 한번쯤은 오케스트라 지휘도 할 수 있었을 텐데 끝까지 안하셨어요. 만약 성두영 선생님이 오케스트라 지휘도 하셨다면 국내 오케스트라들의 음색이 확 바뀌었겠다! 는 생각이 드네요.


김덕기_ 지금은 전국에 오케스트라가 많아졌지만 성두영 선생님께서 활동하시던 당시만 해도 서울시향과 KBS교향악단뿐이어서 지휘하실 수 있는 기회가 거의 없었겠지요.


나효선_ 성두영 선생님 댁에 가면 늘 TV로 Arte, NHK, Classica 등 음악 프로그램을 듣고 계셨어요. 잠깐 뉴스를 보시는 때 외에는 오케스트라, 오페라 등 끊임없이 음악을 들으셨습니다.


김덕기_ 그렇게 하루 종일 음악을 듣는 건 정말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겁니다. 사실 저는 집에 좋은 스피커가 있어도 그렇게 까지 듣지는 않습니다. 저희 부친께서도 아침에 일어나시자마자 엠프를 켜고 하루 종일 음악을 들으실 정도로 좋아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그 세대 분들은 대부분 어려운 환경에서 음악을 직업으로 삼은 분들이라서 애착이 크셨던 것 같습니다.


성두영 선생의 교육관

이용일_ 성두영 선생님이 우리 음악교육에 가장 크게 영향을 주신 것은 무엇이라고 봅니까?


김덕기_ 아무래도 피아노 교육계에 가장 많은 영향을 주셨지요.


나효선_ 우리가 ‘프랑스 음악’하면 드뷔시, 라벨 정도만 알았었는데 성두영 선생님께서 많은 프랑스 작곡가들을 국내에 소개하셨습니다.


이용일_ 그것은 아까 이야기했듯이 f(포르테), p(피아노)만 있던 우리나라 피아노계가 생각하는 연주를 하게 만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과거에는 단순히 악보를 통해 눈에 보이는 대로 쳤지만 이젠 악보에 숨겨진 것을 찾아서 연주하게 되었으니까요. 학생들로 하여금 악보를 봤을 때 감춰진 금은보화를 찾을 수 있게 훈련시킨 것입니다. 우리가 음악을 어떻게 받아들일까하는 것이 처음부터 잘 정립되었으면 아까 말했듯이 생각하는 음악을 가르쳤을 텐데 단순히 눈에 보이는 악보대로만 가르쳤던 것이 문제겠지요. 한국의 학생들이 여전히 자신이 어떻게 치는지 듣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자신의 음악을 들으면서 치면 생각하게 된다는 겁니다.


나효선_ 그런데 어떻게 치는지 알려주지 않으면 몰라요. 손가락을 세워서 손끝으로 쳐라, 손목을 낮추고 손가락을 펴서 손가락의 살이 많은 곳으로 쳐라, 어떤 것을 손목을 쓰고, 어떤 것은 팔을 사용하는지 일일이 가르쳐 주셨는데 그런 것을 배우지 않으면 아무리 들어도 할 수 없어요.


김덕기_ 프랑스인의 국민성이 그런 것 같아요. 쇼팽 전곡의 프랑스 에디션을 편집한 ‘꼬르또(Cortot)’는 악보에 연습 방법까지 적혀 있습니다. 기술의 완성도를 위한 과학적인 접근법이 프랑스인들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성향인 듯합니다.


이용일_ 성두영 선생님은 프랑스에서 철두철미하게 공부하신 것이겠지요. 피아노는 어떤 소리를 내야 한다는 것을 연구하고 오신거지요. 그런데 당시 저희는 그런 것을 몰랐잖아요.


김덕기_ 지금으로부터 40년 전, 선생님이 귀국하셨던 1970년대만 해도 그런 음악을 생각할 여유가 없었고, 선생님을 통해 처음 배운 게 많았어요.
하지만 성두영 선생님이 프랑스 음악만 가르치신 것이 아니고 베토벤, 쇼팽 등 모든 작품을 지도하시며 기술적인 해결 방법을 알려주셨고, 어떤 소리가 나야하는지 가르치신 것입니다. 브람스, 베토벤 등 독일 음악을 해도 피아노의 기술적인 접근을 일깨워 주셨지 프랑스 음악을 알기 때문에 그렇게 지도하신 것은 아니셨다고 생각합니다.


신희주_ 네. 그리고 기초도 굉장히 잘 가르쳐주셨습니다.


이용일_ 이화여대의 출신으로 피아노 연주를 잘하는 한 대학 교수를 아는데, 그 분도 성두영 선생님께 배웠다고 하더라고요. 마음이 열린 선생님이면 자신의 제자를 다른 선생님께도 배울 수 있게 보내고, 그렇지 못한 선생님의 제자들은 몰래 가서라도 배웠군요.


신희주_ 성 선생님께서 돈에 대한 욕심이 없었어요. 그래서 외국식으로 학생에게 레슨이 더 필요하다면 그냥 오라고 하시고 레슨비를 받지 않고 가르치신 적도 있었습니다.


성두영 선생이 국내 음악계에 끼친 영향

이용일_ 성두영 선생님은 연주가가 아니었기 때문에 어떤 면에선 외로운 전쟁을 하셨어요. 작곡가로서 연주는 직접 안하셨지만 피아노 음악계에 새로운 이정표를 만든 분이지요.


나효선_ 성두영 선생님께서는 우리나라에 잘 알려지지 않은 프랑스 피아노음악을 후진들에게 소개하고 가르치기 위해 정년퇴임 후 1995년 ‘프랑스음악연구회’를 발족하셔서 ‘포레와 라벨의 밤’, ‘폴 듀카의 밤’, ‘프랑시즈 풀랑과 세자르 프랑크 피아노음악의 밤’ 등 19회의 정기연주회를 할 수 있도록 이끌어 오셨습니다. 지금까지의 정기연주회에서 프랑스 작곡가인 쿠프랑, 라모, 다캥, 프랑크, 생상, 샤브리에, 포레, 댕디, 드뷔시, 듀카, 루셀, 슈미트, 라벨, 오네게르, 미요, 타이유페르, 릴리 불랑제, 풀랑, 메시앙, 장 프랑세의 작품을 소개하였고, 프랑스인은 아니지만 파리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음악적 소양을 쌓았던 작곡가들 중 쇼팽, 리스트, 알베니즈, 그라나도스, 스크리아빈, 파야, 스트라빈스키, 성두영, 이영자의 작품들을 연구하여 발표했습니다.
정년퇴임 하시고 ‘프랑스음악연구회’를 하시는 낙으로 사신 것 같았어요. 늘 ‘이번에 뭘 연주할까?, ‘사람들이 잘 모르는 작품이 뭐가 있을까?’ 생각하셨지요.


성승연_ 아버지께서 자주 하시던 말씀이 “나 죽기 전에 배워요!”이셨지요.


나효선_ 프랑스음악연구회 제20회 정기연주회가 오는 9월 10일 오후 7시 30분 세종문화회관 체임버홀에서 개최됩니다. 이번 무대는 지난 3월 타계하신 고 성두영 교수님을 추모하는 음악회로 마련했습니다. 선생님을 기리는 마음으로 선생님의 작품 [경(磬)]과 그동안 선생님과 함께 연구하여 연주했던 곡들을 위주로 연주합니다.
 
이용일_ 성두영 선생님께서 천식이 있어 고생을 많이 하셨던 것이 안타깝습니다. 보통 사람이었으면 진작에 쓰러지셨을 텐데 성두영 선생님께선 힘든 가운데도 많은 일을 하셨어요.


김덕기_ 선생님께서 그것 때문에 불편하시긴 했어도 사실 고생은 따님이 했지요.


나효선_ 네. 성두영 선생님이 만성 폐쇄성 폐질환(copd)때문에 기관절개를 하고 밤에는 인공호흡기를 치료목적으로 사용하셨어요. 그래서 주무시다가 무슨 일이라도 있을까봐 따님이 밤을 꼬박 새며 지키다가 선생님이 일어나시면 잤어요. 따님이 그렇게 5년을 돌봐 드린 게 대단하죠.


성승연_ 아버지께서 어릴 때부터 몸이 약하셨다고 들었어요. 결핵을 앓아서 폐가 안 좋으셨어요. 할머니께서 점심 때 막 지은 따뜻한 밥을 하인더러 학교에 갖고 가게 해서 먹게 할 정도로 몸이 약한 아버지를 애지중지 키우셨대요.


김덕기_ 담배 때문만이 아니라 이미 결핵이라는 원인이 있으셨군요.


정리 배주영 기자 / 사진 김문기 부장

기사의 일부만 수록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음악춘추 2015년 9월호의 기사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 


<김문기의 포토랜드>



이용일(한국음악교육협회 명예회장)


나효선(동덕여대 피아노과 명예교수)


김덕기(서울대 지휘과 교수)


신희주(청주대 음악교육과 교수)


성승연(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