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음악춘추

인물탐구-작곡가 박재열 선생 / 음악춘추 2014년 7월호

언제나 푸른바다~ 2014. 9. 7. 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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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춘추 기획대담 | 인물탐구 7월호

한국 현대음악의 기틀을 다진 작곡가 박재열 선생

 

병환 중에서도 참다운 예술가의 면모가 무엇인지 몸소 보여준 작곡가 박재열 선생(1930. 10. 4∼2010. 10. 29)은 강원도 태백에서 출생하였으며, 연세대 종교음악과(1959) 및 동대학원(1961)을 졸업하고, 1962년부터 연세대 음대 전임 강사로서 활동하였다.
이 후 미국으로 건너가 1970년 클리블랜드 음대 대학원을 마친 바 있는 선생은 국내에서 20세기 작곡연구회 회장, 연세대 음대 학장, 연세대 음악연구소 소장, 아시아작곡가연맹 한국지부 이사, 한국음악협회 이사 등을 역임하였다.
대한민국 작곡상, 한국 작곡상, 대한민국 문화예술상을 수상하는 등 명실상부 한국 작곡계의 거목으로서 자리매김한 박재열 선생이 음악에 대한 의욕과 열정으로 남긴 작품들에는 20곡이 넘는 기악곡을 포함하여 전통 악기를 위한 곡, 성악곡, 오페라, 교성곡 등이 있다.
 
일시: 2014년 6월 10일(화) 오전 10시 30분
장소: (주)코스모스악기 10층
진행: 이용일(한국음악교육협회 명예회장)
패널: 이영조(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이사)
      김청묵(연세대 음대 작곡과 명예교수)
      이만방(숙명여대 음대 명예교수)
      류행웅(전 대구가톨릭대 음대 교수)
      박윤호(톤파크 사우드 프로덕션)

 

박재열 선생의 성장 과정 및 음악의 출발

이용일_ 생전에 남기신 여러 작품과 저서를 통해 후학들에게 본보기가 되어 주신 작곡가 박재열 선생님의 이야기로 이번 음악춘추 7월호 인물탐구 난을 채워보려 합니다.
오늘 참석해 주신 패널들께서는 박재열 선생님의 뜻이 오래도록 기억될 수 있게 박 선생님에 대한 좋은 말씀들을 전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박재열 선생님께서는 음악춘추 2012년 8월호 인물탐구난의 주인공이셨던 음악교육자 박재훈 선생님의 친동생분으로서, 분명 형제간에 음악적인 교류가 있었을 것으로 짐작되는데요. 그렇다면 먼저 박재열 선생님의 성장과정과 음악의 출발에 대해서 아드님이신 박윤호 선생님께서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박윤호_ 네. 아버지의 성장과정에 대해서는 자세히 들은 바는 없으나, 저희 할아버지께서는 일제강점기 때부터 교육계에 종사하셨었는데요. 강원도 지방을 돌아다니시면서 초·중·고교의 교사 및 교장직까지 맡아 봉직하셨다고 합니다.
어렸을 적 기억을 되짚어보면 할아버지께서는 직접 바이올린, 오르간 등을 연주하셨으며, 다른 가족 분들과도 함께 연주를 하셨을 정도로 음악을 즐기셨던 것 같습니다. 그러한 영향 때문인지 저희 아버지께서는 중학교 때부터 밴드부에서 활동을 하셨고, 후에 큰아버지(박재훈 선생)의 인도로 음악 공부를 위해 강원도에서 서울로 상경하셨지요. 그러나 특별한 연고 없이 서울에 올라오신 아버지께서는 나운영 선생님과 인연이 닿았다는 것을 생이 다할 때까지 천운이라 하셨고, 당신의 모든 부분을 나 선생님께서 이끌어 주셔서 항상 감사하게 생각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김청묵_ 박재열 선생님께서는 잠깐이지만 교단에 서신 적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이용일_ 큰아버지인 박재훈 선생님과 부친 모두 어렸을 때부터 음악의 뜻이 있으셨던 것인가요? 아무래도 형님의 음악에 많은 영향을 받았으리라 생각되는데요.

 

박윤호_ 큰아버지께서는 고등학교를 일찍 마치시고 바로 서울에 올라 오셨다고 들었습니다. 그 이후에는 형제 중 막내셨던 저희 아버지와 큰아버지와는 연배 차이도 있다보니 왕래가 잦지 않다가 어느 날 큰아버지께서 저희 아버지께 “너도 음악에 뜻이 있다면 형이 있는 서울에 올라 오라.”는 조언의 말씀에 서울로 무작정 발걸음을 하셨다고 합니다. 물론 서울행을 결정했던 처음부터 작곡에 뜻이 있으셨지만 막상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는 사실 큰아버지께서도 경제적으로 힘드신 상황과 더불어 작곡 분야에 대해서는 정보가 없으셔서 크게 도움을 주지는 못하셨다고 해요. 그렇게 쉽사리 갈피를 잡지 못해 오랜 시간을 고생하셨다고 합니다.

 

이용일_ 박재훈 선생님을 제외한 다른 형제분들 중 음악을 하시는 분은 없으셨나요?

 

박윤호_ 네, 없으셨습니다.

 

김청묵_ 박재열 선생님께서는 학교 밴드부에서 트럼펫을 부셨다고 들었습니다. 

 

박윤호_ 네, 맞습니다. 처음 서울에 올라오실 때에는 “트럼펫 하나 들고 상경했다”고 하셨을 만큼 트럼펫 연주를 위해 이곳저곳을 다니셨고, 1사단 군악대에서는 트럼펫 연주자로 활동하셨었습니다. 더불어 우리나라에 군악대가 만들어지던 초기에 주축이 되어서 군악대의 토대를 만들었다고도 말씀하셨고요.

 

이만방_ 아마 박 선생님께서는 학교를 늦게 들어가셨지요?

 

박윤호_ 네. 말씀드렸듯이 서울에 올라 와서 어느 방향으로 음악 공부를 시작해야 할지 몰라 잠깐 교사직을 맡기도 하셨고, 트럼펫 연주자로 활동도 하시다가 연세대 종교음악과에 입학하셨습니다.

박재열 선생과의 첫 만남

 

이용일_ 다음으로 박재열 선생님과의 첫 만남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눠보는 시간을 가져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영조 선생님께서 가장 먼저 박 선생님을 뵈었지요?

 

이영조_ 저는 1961년, 연세대 음대에 입학하면서 박재열 선생님을 처음 만나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박재열 선생님께서는 스승이신 나운영 선생님의 뜻을 잇는 활동으로 제자들에게 많은 귀감이 되셨고, 역사가 그리 길지 않은 연세대에서 현대 음악교육의 기초를 닦아 놓으심으로써 타 학교에 비해 그리 역사가 길지 않았던 연세대가 덕분에 눈부시게 빠른 발전을 보여주었다고 봅니다. 이러한 박재열 선생님을 곁에서 뵈오면서 저를 포함한 여러 후배 음악인들이 많은 영향을 받았지요.    

 

이만방_ 저는 1964년에 박재열 선생님과 첫 인연을 맺었습니다.

 

김청묵_ 1966년 1월 중순, 저는 강릉에서 어렵사리 피아노를 독학하고 박재열 선생님을 뵙기 위해 무조건 연세대로 찾아갔었습니다. 그 때 제가 선생님께 “연세대에 입학 시험을 보려고 한다.”고 하니까 시창, 청음 등을 테스트 하시더라고요. 그러더니 곧장 “다시 고향으로 내려가라.”고 하시는 거예요(웃음).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다음날 다시 선생님을 찾아갔습니다. 시험에 떨어져도 좋으니 선생님께 레슨이라도 한 번 받아보고 싶다고요. 그러자 박 선생님께서는 “당장 입학 시험이 2주 밖에 안 남았는데 무슨 소리냐, 절대 안 된다!”며 한사코 거절하셨습니다. 그러나 저는 간곡히 사정하여 레슨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저와 박재열 선생님의 첫 만남입니다.

 

류행웅_ 저는 첫 만남은 아니었지만 제 기억에 오래도록 남은 만남이 있습니다. 이성천 선생님을 처음 소개하는 자리였는데요. 박재열 선생님께서 당시 국악음악의 작품을 구상하고 계시던 중에 저를 통해 이성천 선생님을 먼저 소개해 달라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자리에 함께 나가 굉장히 오랜 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누었고, 그 후에도 자주 만남을 가졌었지요. 제가 그 때 아무래도 현직 교사였던지라 박재열 선생님께 종종 교직에 계신 여러 선생님들을 소개도 해드리면서 여러 해 동안 교류했었고, 특히 이성천 선생님과의 만남에서는 진지하게 국악에 대한 이야기를 하시면서 중요한 내용은 놓치지 않기 위해 항상 메모를 하셨던 기억이 나네요. 나이를 불문하고 배울 점이 있다는 생각이 드시면 항상 메모를 하셨고, 그 때 이후로 박 선생님의 작품에서 국악적인 요소들이 더 생생하게 가미되었습니다.

 

박재열 선생의 음악세계

이용일_ 아무래도 박재열 선생님의 음악세계에 대해서는 가까이에서 오랜 시간 관심을 가지고 지켜봐 오신 제자분들께서 자세히 알고 계실 것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이영조_ 네. 저는 무엇보다 박재열 선생님의 작곡가로서의 작곡 태도에 대해서 굉장히 깊은 감명을 받았었습니다. 학교 연구실에 선생님을 찾아 뵐 때면 항상 테이블에 앉아서 곡을 쓰고 계시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었고, “나는 쉬지 않고 매 순간 곡을 쓴다.”라는 이야기를 종종 해주셨습니다.
또한 어떤 음악의 목적에 대해서 집요하게 파고드시는 집중력이 있으셨으며, 한국적인 어법의 음악을 현대화시키는 과정에서 고심을 많이 하셨던 것과 더불어 그러한 부분들이 작품에 두드러지게 나타나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한국인이 한국적인 음악을 만드는 것은 어찌 보면 어떤 무엇보다 자연스럽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교육적인 배경, 즉 국악과 서양음악을 분리 교육시켜온 과정 등으로 인해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인데, 나운영 선생님과 함께 박재열 선생님께서는 이를 적극적으로 개선하고자 하셨고, 앞서 류행웅 선생님의 말씀처럼 항상 배운다는 마음가짐으로 메모를 생활화하시면서 스승이심에도 불구하고 항상 공부하는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이용일_ 이에 대해서 이만방 선생님께서는 어떻게 보시는지요?

 

이만방_ 박재열 선생님께서는 적극적으로 여러 시도를 하셨던 것 같습니다. 아무리 명품이라도 체질에 맞지 않으면 소용이 없듯, 성공과 실패를 넘어서 우리 정서에 맞는 음악을 만들고자 노력하신 분이 바로 박 선생님이셨지요.
그렇기 때문에 간혹 원형적인 우리의 전통음악을 그대로 사용하여 때로는 평자들에게 “이것을 창작 음악으로 봐야 할 것이냐, 편작으로 봐야 할 것이냐”라는 이야기를 듣기도 하셨지만, 이와 같은 부분의 물꼬를 처음으로 트시면서 우리나라 전통 음악이 가지고 있는 서정성을 창작음악에 처음으로 도입하신 분이 박재열 선생님이 아닐까 합니다.

 

이용일_ 다시 말해서 서양 음악이라는 틀에 넣지 않고 순수하게 우리만의 틀에 넣어 음악을 창작하셨다는 것이라고 볼 수 있겠군요. 굉장히 중요한 말씀이십니다. 이어서 김청묵 선생님께서 박재열 선생님의 음악세계에 대해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김청묵_ 한국적이면서도 현대적인 음악을 창작하고자 하였던 연세대 작곡과의 창작 정신은 나운영 선생님께서 처음 제시해 주신 것인데요. 제자, 후배들이 그 정신을 지금까지 지켜오고 있습니다. 박재열 선생님께서도 실내악곡 「공간의 환상 제2번」, 합주곡 「공간의 환상 제3번」, 「남창과 실내악을 위한 가시리」, 「대금과 합주를 위한 시나위」와 같은 전통악기를 위한 곡들을 작곡하시면서 저희들에게 이를 늘 강조하셨습니다.
그리고 박재열 선생님께서는 강원도 출생이셔서 그런지 서정성을 띤 음악을 많이 작곡하셨습니다. 특히 김소월 시에 의한 5곡의 「여성 3부를 위한 합창곡」과 같은 작품은 얼마나  서정적인지 놀랄 정도입니다.
무엇보다 박재열 선생님께서는 작곡에 정말 성실하셨는데, 새로운 소재에 대한 관심이 많으셨고, 여기에 외국에 새로운 악보가 나왔다 하면 꼭 주문해서 보셨습니다.

 

영조_ 저는 박재열 선생님의 곁에서 배우고 성장해 나가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박 선생님의 음악관으로 두 가지를 꼽을 수 있습니다. 하나는 음악을 배울 때 모든 과가 화성학을 배우듯, 그 중요성을 일깨우고 성악의 기본적인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기악곡의 바탕도 소프라노, 알토, 테너, 베이스의 4 성부의 기본에서 시작한다는 것을 늘 말씀하셨고, 그 연장선에서 오페라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으셨습니다.
이 생각은 나중에 선생님께서 합창 음악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더욱 확고해지셨는데, 후에 국립합창단을 통해 합창 발표회를 가지게 되었고, 나중에는 이것이 대학생 합창곡 작곡 응모곡을 통한 대학 합창제로 발전해 좋은 작품들이 여럿 발표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박 선생님의 또 하나의 음악관은 인성을 중요시해 인격이 온전해야 자연스러운 음악이 나온다는 것으로, 제자들의 인성 교육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이셨습니다.

 

이용일_ 제 생각으로 박재열 선생님께서는 형님의 영향도 많이 받았을 것이라 보는데요. 형님이신 박재훈 선생님께서는 첼로를 전공하셨고 그 후 우리나라에 리코더를 처음으로 도입하신 분(한국리코더협회 설립 회장 역임)으로, 이는 음악사에 길이 남아야 할 업적이라 봅니다. 두 분 형제가 우리나라 음악의 기본 틀을 잡아 주신 분들이신 것이지요.

 

김청묵_ 리코더 하니까 생각나는데, 리코더 음악이 일본 내에서 크게 유행할 때 박재열 선생님께서는 일본 유명 출판사의 부탁으로 리코더 음악을 수시로 작·편곡하여 출판사에 보냈다고 하셨습니다. 국내에서는 소개가 되지 않았는데, 일본에서는 선생님의 리코더 음악이 상당히 인기가 많았지요.

 

이용일_ 당시 박재훈 선생님께서 일본하고 교류가 잘 되어서 리코더를 국내에 많이 보급하셨거든요. 그렇게 박재열 선생님께서 리코더 음악과 연결이 되지 않았을까 유추해 볼 수 있겠습니다.

 

김청묵_ 이렇듯 많은 리코더 작품을 보내게 되면서 일본 출판사에서 감사의 의미로 박 선생님의 「관현악과 타악기를 위한 성(聲)」(일본 全音樂譜出版社)이라는 곡을 출판해주었다고 합니다. 이를 너무나 기뻐하시면서 저한테 자랑을 하셨던 것이 아직도 눈에 선하네요.

 

박재열 선생의 교육관

이용일_ 앞서 들은 박재열 선생님의 음악세계만 보아도 그러한 음악인의 곁에서 배움을 얻었다는 사실에 여러분들이 부러워지네요. 이번에는 나아가 스승의 교육관에 대해서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만방_ 박 선생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저 말로만 들었던 우연성 음악을 악보를 통해 실제로 접할 수 있게 하여 이를 직접 체험할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이것은 예술가, 특히 작곡가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부분이지요. 이와 더불어 당신의 작품 세계도 이 시기를 기준으로 그 전과 후가 많이 바뀌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사실 이 부분에서는 개인적으로 아쉬운 점도 있는데요. 박 선생님과 같은 세대에서 좀 더 한국적인 음악의 색깔에 있어 토대를 갖게 한 다음 서구화로 눈길을 돌리셨더라면 우리 창작음악계가 지금과는 다른 길을 가지 않았을까 하는 마음이 들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박재열 선생님의 작품 속에 우리 전래 토착 음악의 서정성이 점차 사라져 버리면서 작품의 완성도와는 별도로 선생님의 작품이 현대화 되는 과정에서 상당한 많은 혼란을 겪게 되지 않았나 짐작됩니다.
또한 현존하는 현대음악을 후배 음악인들에게 직접 보여주고 체득하게 하면서 이것이 작품으로 이어지게끔 연결고리를 이어 주신 것이 바로 박 선생님이시고, 거기에 10, 20년 아래인 후배와도 작품 활동을 경쟁적으로 하시면서 끊임없이 당신의 음악에 발전을 꾀하셨습니다. 이것이 박재열 선생님이 가지고 계셨던 큰 장점인 것 같습니다.

 

박윤호_ 특히 아버지께서는 악보를 정말 어마 어마하게 수집하셨어요. 모으실 수 있는 한에서는 빌려와서 사보나 복사를 할만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수집에 열정을 쏟으셨습니다.

 

김청묵_ 제가 4학년 때인 1969년에 학교 도서관에서 접할 수 있는 현대 악보는 바르톡의 「현악4중주 제1번」과 「제4번」 정도였어요. 그 외의 악보는 볼 수도, 들을 수도 없어서 그 곡들만을 듣고 “아, 이게 현대음악이구나”라고 느끼며 곡을 썼었지요.
박 선생님께서 1969년 2학기, 1970년 1학기 동안 미국에서 공부를 하고 돌아오셨는데, 그 때 처음으로 리게티, 베리오, 루토스왑스키, 펜데레츠키 등의 악보를 가져 오셨습니다. 당시 그러한 악보들을 처음 대하고 받은 충격은 정말 대단했지요. 지금까지 봐왔던 것이 현대음악의 전부인 줄로만 알았다가 그림 같은 악보들을 실제로 보고 들으니까 “아, 현대 음악이 이럴수도 있구나!”하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렇게 비싼 재료들을 구입해서 제자들에게 보라고 내어 주시고, 레코드도 주문하셔서 들어보라며 빌려 주셨던 선생님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이만방_ 우리나라는 일제로부터의 해방, 한국 전쟁으로 인한 혼란 등으로 서구 문화의 유입이 원활히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그 때문에 저희들이 한창 공부할 때만 해도 교과서가 없는 시대였지요. 박재열 선생님께서 짧은 기간이지만 외국에 갔다가 오시면서도 얼마나 많은 정보를 가져 오셨는지 모릅니다. 그로인해 현존하는 현대음악 작곡가들의 작품을 저희들이 접해 볼 수 있게 되지요. 그게 아마 한국에서는 당대에 활동하는 현대

음악 작곡가들의 작품을 대하는 최초가 되었을 겁니다.

 

이영조_ 박재열 선생님께서는 학교 도서관에 악보를 충분히 구비해야 한다는 행정적인 부분에서 생각이 열려 있으셔서 매년 미국에서 출판된 현대음악 악보를 비치해 그 당시 연세대 도서관은 오히려 다른 학교 학생들이 현대적 작품의 악보를 빌려 갈 정도였습니다.(연세대 음대 내 우리나라 대학 최초의 음악 도서관 설립)
그리고 작곡가는 악보를 보고 스스로 공부하는 것이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멀리 내다 보셨던 선생님의 안목이 제가 그 위치에서 일을 하다 보니까, 더욱이 예산적인 부분에 있어서 봤을 때 대단하신 분이었구나, 라는 생각이 듭니다. 더불어 우리나라와 타 국가 간에 현대음악 통로를 확장시켜 놓으신 분이기도 하고요. 지금이야 인터넷으로 어디를 가든 쉽게 새로운 음악을 접해 볼 수 있지만, 그 당시에는 보고 듣는 것조차 자료가 극히 제한된 시대였기에 교육적으로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하셨다고 볼 수 있습니다.

 

류행웅_ 당시에는 지금과 같이 쉽게 음악을 감상하고 다른 나라의 문화를 접하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마치 꿈 같은 이야기였지요.
 
이만방_ 당시 저희 세대들에게는 일본과 연관된 교육은 완전히 차단되었었는데, 1980년대에 들어와서부터는 그나마 문화의 교류가 활발해지기 시작했기 때문에 저희는 일본 현대음악 작곡가들의 작품을 접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영조_ 사실 역사적인 흐름이 그렇게 밖에 되질 못하였는데, 박재열 선생님께서는 당시 항상 일본을 거쳐 미국의 문화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다리를 과감히 건너뛰고 미국과 바로 연결해 주시는 파이프와 같은 역할로 그 길목에 서 계셨던 분이었습니다.

 

이만방_ 대중들에게 음악의 다양한 정보를 접하게끔 해야 한다면 책, 그 중에서도 교과서를 중요시해야 한다고 생각하셨습니다.
그리고 교과서 외에도 외국인들의 논문이나 서적을 번안하는 것 또한 중요한 작업으로 여기셨고, 그것을 근간으로 해서 한국 작품을 중간 중간에 삽입한 새로운 음악 방법론을 제시하셨습니다.

 

김청묵_ 당시에는 이론서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박재열 선생님께서도 이러한 부분에 있어 갈증을 느끼셨을 것입니다. 

 

이만방_ 역사의 기록이라는 것이 결국은 지금 이 시간의 기록들이거든요. 특히 우리나라는 기록 문화가 잘 정착되어 있지 않아서 그 중요성을 아직까지도 깨닫고 있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책으로만 보던 작곡가의 작품을 직접 악보와 음반으로 접하게 된다는 것은 새로운 것을 창작해야 하는 작가들에게 큰 충격일 것이며, 그 기회 역시 많아야 합니다. 음악 예술이 인문학과 역사, 철학과 연계되어있는 것도 이 부분 때문이고요.

 

이영조_ 우리나라는 지정학적으로 봤을 때 강대국의 틈새에 위치해 있다 보니 다양한 외국 문화를 많이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만의 장점인 융합 문화를 가능케 하였지요. 서양음악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문화와 같이 융합시키는 과정에 있어 나운영, 박재열 선생님께서 거부감이 느껴지지 않는 현대적인 감각을 접목해 국내에 서양음악이 자리 잡는 초기에 중요한 다리역할을 하셨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박재열 선생님께서는 융합 문화의 선도적인 역할을 하신 분이었다고 감히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다.

 

이용일_ 제가 과거 박물관을 구경하다가 문득 의문점이 생겨 가이드를 해주셨던 지인에게 “중국의 음악은 우리나라에 많은 영향을 끼쳤는데, 우리나라 음악은 중국에 끼친 영향이 없느냐”고 물으니 예상 외로 많았다고 하더라고요. 
더욱이 우리 민족은 세계의 모든 문화를 얼마든지 받아들여 와도 우리만의 것으로 융합시켜서 새로이 만들어 내는 능력이 뛰어나고, 나아가 이를 외래 문화라 여기지 않고 우리에게 하나의 새로운 힘이 들어오는 것이라 생각한다는 것은 우리 민족만의 큰 장점일 것입니다.
여기에 박재열 선생님과 같이 본거지와 직접 접촉하여 이를 통한 우리만의 것을 찾으려는 노력도 필요할 것이라 생각됩니다.

 

정리_이은정 기자 / 사진_김문기 부장

- 기사의 일부만 수록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음악춘추 2014년 7월호의 기사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

 

<김문기의 포토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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