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춘추 기획대담 | 인물탐구
제도권 작곡계에서 새로운 음악의 길을 찾은 작곡가 강준일
작곡가 故(고) 강준일 선생은 1944년에 충남 서천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문리대학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교 작곡과를 수학하였다. 서울대학교 음악대학에서 잠시 수학한 것 외에는 거의 독학으로 음악을 공부한 작곡가이다. 서양음악이 한국에 수용된 이후 우리 창작계의 주요 화두였던 전통의 문제를 집요하게 고민해온 작곡가로 손꼽힌다. 한국적 소리의 본질, 음양오행 등의 구성원리를 통찰하면서 그것을 서양악기에 융합해 치밀한 음악세계를 펼쳐보였다. 특히 고인은 서울음악학회(SMA)를 통해 많은 음악가들을 길러냈으며 제자들로부터 음악의 정신적 가치를 지켜온 구도자라는 평을 듣는다. 서양음악 기법으로 전통음악을 만든 강준일 선생은 「사물놀이와 관현악을 위한 협주곡 ‘마당’(1983)」으로 주목받았고, 「사물놀이협주곡 ‘푸리’(1983), 사물놀이와 피아노를 위한 ‘열 마당 열두 거리’(1984)」로 명성을 얻었다. 또한 「비올라, 첼로, 피아노, 타악기, 소리를 위한 ‘만가’ (강준일 시, 1982)」, 「바이올린 셋을 위한 ‘삼행절곡(三行折曲)’(1990)」,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한국민요에 의한 소곡 제1번’(1994)」,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소곡 제2번’(1994)」, 「총체무대극 ‘울타리 굿’(1985)」, 「마을의 노래 Ⅰ '낙화', '도라지꽃', '고목', '낙엽Ⅰ'(조지훈 시, 1983)」을 작곡하여 동서양 음악 교류와 전통음악의 현대화에 기여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故(고) 강준일 선생은 88올림픽 음악위원을 역임하였고, 1994~1997 한국민족음악인협회이사장을 역임하였으며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 전통예술원, 서울대학교 국악과 출강,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객원교수 역임하였다.
일시 : 2016년 7월 4일 오후2시
장소 : 코스모스 악기사 7층
진행 : 이용일(한국음악교육협회 명예회장)
패널 :이건용(서울시오페라단 단장)
진규영(영남대 명예교수)
정치용(인천시립교향악단 상임지휘자,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강은구(작곡가, 극동대학교 강사)
이고운(한국예술종합학교 대학원생)
1. 강준일 선생의 성장과정과 음악의 출발
2. 강준일 선생과의 첫 만남과 교육관
3. 강준일 선생의 음악세계와 국내 음악계에 끼친 영향
1. 강준일 선생의 성장과정과 음악의 출발
이용일: 오늘 좌담은 우리들이 놓칠 뻔 한 강준일 선생님의 음악적 업적을 돌아보고자 합니다. 이 분이 서울대학교 작곡과 학생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치셨고 우리나라에서 자타가 인정하는 우수한 성적의 학생들을 지도한 엄청난 지도력을 가지신 분인데, 이러한 분을 제자들이 요구하여 좌담을 하게 된 것을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우리들이 오늘 이 분을 재조명해서 음악적 업적을 논하면 좋겠습니다. 먼저, 강선생님이 어디서 태어나셨나요?
정치용: 선생님께서는 1944년 충남서천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이용일: 그러면 선생님이 음악을 처음 접한 계기는 무엇인가요?
진규영: 어떻게 음악을 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저희는 후배 입장이라서 들어본 적이 별로 없습니다. 제가 선생님께 특별히 물어보지도 못했고요. 강선생님의 제자인 정치용 선생님이 혹시 들은 것이 있으신가요?
정치용: 언뜻 말씀은 하셨지만 자세한 것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이건용: 아마 제일 처음 한 악기는 피아노 같습니다.
진규영: 맞습니다. 강준일 선생님께서 피아노를 아주 잘 치셨습니다.
이건용: 강선생님은 저의 서울고등학교 한 학년 선배이셨습니다. 그때 합창반에서 피아노 반주를 맡아서 하셨습니다. 그러니 그 이전에 이미 피아노 공부를 하였었겠죠?
정치용: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기억해보면, 어린 시절 아버님이 은행에서 일을 하셔서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었습니다. 또한, 음악을 좋아하셨던 아버님의 영향으로 자연스럽게 음악을 접하셨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가세가 기울어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졌는데, 음악에 빠지면서 극복을 하신 것이 결정적 계기가 된 것 같습니다.
이용일: 그러니 그 당시에 충남 서천에서 서울고로 유학을 왔다는 것은 엄청난 사실입니다. 범상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이건용: 제가 어렸을 때를 회상해보면, 작곡을 하고 싶어 했던 중학교 2학년인 저도 레슨이라는 것을 몰랐습니다. 선배 한 사람이 저에게 “작곡을 하고 싶으면 예고에 가라.”는 말을 해주면서 그곳에 가면 레슨을 받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레슨을 받지 않고 예고에 갔습니다. 그 당시에, 피아노는 한 동에 한 대정도 있을 정도였고 음악을 들을 수 있는 것은 트렌지스터 라디오뿐이었습니다. 제일 부러운 집은 전축이 있는 집이였는데, 한 구에 한 대정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유추해보면 강준일 선생도 음악가의 길로 들어서기 위해서 특별히 레슨을 받거나 하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정치용: 선생님의 형제관계가 딸 3명에 아들 3명인데, 6분이 전부다 서울대 아니면 그에 준하는 학교를 갔습니다. 집안 자체가 재원이 많았습니다. 또한 서울대 문리대학 물리학과를 일 년 다시시다가 동대학교 음악대학에서 수학하셨는데, 수업을 들어가서 배우시기보다는 도서관에서 혼자 독학을 하셨다고 하셨습니다.
이용일: 음악가로서 첫발을 내딛은 것은 언제인가요?
정치용: 저도 선생님을 1976년에 뵈었는데 그때 선화예고에서 하는 발레음악을 쓰신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이전에 캠프를 통해서 활동하셨고 TV에서 연주도 하셨지만, 제대로 돈을 받고 작곡을 해서 연주하시는 것은 발레음악부터 시작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진규영: 그러면 저와 함께 곡을 쓴 것이 앞선 것 같습니다. 저는 서울음악학회(SMA)에서 강선생님을 처음 만났습니다. 그 당시에 대학은 보수적인 반면 학생들이 열성이 있어서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강원도 원주에서 관현악단과 작곡가들이 모여서 7박8일정도 공부를 했습니다. 제가 군대를 제대하고 나서, 1974년도에 강선생님과 4악장의 창작 무용곡을 작곡했는데 강선생님의 관현악법과 음악적 테크닉은 이미 완숙했던 것으로 기억이 됩니다. 공식연주는 「무영탑」이 처음이었습니다.
정치용: 그 기회가 인연이 되어서 무용음악을 계속 하셨습니다.
이용일: 저는 강선생이 무용음악을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성악가 남의천씨가 강준일 선생님을 좋아하는 것을 보고 부르기 좋은 노래를 작곡하는가보다 생각했습니다.
진규영: 곡을 부르기는 쉽지 않게 썼습니다(웃음).
이용일: 그 당시는 우리나라 작곡가들이 일본잡지에서 나오는 현대음악을 공부하여 음악적 흐름이 많이 변할 때입니다. 저는 강준일 선생이 그것에 대한 반사작용으로 나오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치용: 강준일 선생님은 현대음악이 우리나라에 들어왔을 때, 그것을 비난하기보다는 나름대로의 한국의 색채를 찾아서 원리를 만들려고 노력하셨습니다. 우리식의 기법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을 찾아보자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음양오행, 천지인, 60갑자를 화성학과 결합시키는 시도를 하는 등, 한국식 철학을 음악적으로 바꾸려고 노력을 하셨습니다. 그것들이 시도는 되었는데 발전이 되지 않아서 아쉽게 생각합니다.
이건용: 큰 그림으로 볼 때, 1960-1970년대 문화 쪽에서 많은 변화가 있었는데 그 중심에 있었던 흐름 중에 하나가 문리대학의 미학과 김지아 선생님 주변에서 새로운 움직임이 많이 나왔습니다. 탈춤, 마당극, 민요운동 이런 것들이 그 예입니다. 얼핏 이야기를 들었을 때, 강준일 선생의 예술적 배경은 그쪽에 상당한 토양을 섭취하면서 된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2. 강준일 선생과의 첫 만남과 교육관
이용일: 제가 생각하기에 그분은 다른 사람과 생각이 다른 기인(奇人)입니다. 선생님의 자료 중 남아있는 것들이 있다면 관심 있는 사람들에게 제공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후학들이 새로운 길을 찾아갈 수 있도록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 우리들 역할입니다. 정치용 선생님은 대학을 가기 위해서 강준일 선생님을 만나셨나요?
정치용: 선생님이 SMA 캠프를 위해서 원주에 오셨었는데 제가 고등학교 2학년 때 처음 뵈었습니다. 제가 음대를 가겠다고 말씀드리니 고등학교 음악선생님이 소개를 시켜주셨습니다. 강준일 선생님의 제일 큰 누님께서 원주에서 영어선생님으로 계셨습니다. 그래서 저희 음악선생님과 연결이 되어서 저를 소개 시켜 주셨습니다. 제가 지학순 주교님이 세운 학교에 다니고 있었는데, 원주 가톨릭 회관에서 캠프를 하고 계셨습니다.
이용일: 제자인 강은구 선생님은 선생님과의 첫 만남이 언제였나요?
강은구: 1982년도에 대학을 가기위해서 레슨을 받으면서 선생님을 처음 뵈었고 저는 1985년도에 서울대에 들어갔습니다. 진규영 선생님께서 1970년대 캠프의 분위기를 말씀하신 것처럼, 저도 학교에서도 공부를 했지만 선생님과 인연이 더 있었는지 따로 만나서 캠프도 같이 하고 스터디도 하면서 음악공부를 많이 했습니다. 그 당시에 제가 보았을 때 선생님의 곡이 제가 다니는 학교 선생님들의 곡과 다르게 느껴졌습니다. 강선생님께서는 전통음악과 소재 혹은 동양의 사상 이런 것과 음악을 연결하셨고 저는 그것이 새롭게 느껴지고 학교 공부에서 아쉬운 부분을 충족시켜 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저도 실제로 학교보다는 선생님과의 개인적 만남에 공부를 지속하면서 음악하게 된 과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저도 지금 곡을 쓰고 있는데, 선생님과 비슷한 면모들이 많이 보입니다. 아마도 선생님의 작품들에서 느꼈던 이미지들이 제 안에 남아있고 그것이 음악의 시작점이 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이고운: 저는 2008년도에 한예종 전통예술원 작곡과에 입학하여 그 당시에 강준일 선생님께서 1학년 화성학 수업을 맡으셔서 2008년 3월에 만났고요. 그때 일기를 찾아보니까 시간엄수, 매주숙제, 매주시험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당시에 정말 무서운 선생님으로 기억이 되고 어려웠던 것으로 기억이 납니다. 그러다가 2009년, 선생님께서 저에게 “서울음악학회 음악캠프가 있다. 한번 와보지 않겠냐?”고 말씀하셔서 참석하게 되었고 그 이후에 매주 토요일아침에 스터디와 매년 캠프를 하면서 인연을 이어갔습니다.
정치용: 강선생님에 대해서 말씀드리려고 하면 서울음악학회(SMA)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걸 시작하면 모든 이야기가 다 풀리게 됩니다. 아마 진선생님께서 SMA를 자세하게 알고 계실 것 같습니다.
이용일: 진선생님께서 소개를 해주신 다면요?
진규영: 제가 SMA의 초기 모습을 알고 있는데요. SMA는 학교라는 제도권을 벗어난 아웃컬리지 세력이라서 학교 내에서는 반기는 모임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제도권을 무시하기도 했고 유학파가 많으신 교수님들 입장에서는 자유로운 강준일 선생님을 주축으로 한 모임이 반갑지 않고 오히려 불쾌하게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SMA를 통해서 배운 것은 제도권 안에서 볼 수 없는 것, 음악만 보는 것이 아니라 음악의 적용과 사회성을 많이 보게 되었습니다. SMA에서는 관현악단도 있어서 관현악법 공부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경험이 제가 대구국제음악제를 만들게 된 원인이 되었고, 음악제의 위원과 이사로 활동하게 된 원인이 아니었나 생각하게 됩니다. 또한 묘한 것은 SMA에 후원그룹이 있었습니다. 후원그룹은 비전공자들 중에 음악을 애호하는 또래 학생들이 재정적인 지원을 해주었고, 캠프 마지막 날 함께 참여하여 어울렸습니다. 그분들이 가졌던 음악에 대한 열성은 우리보다 좋았다고 생각이 되고요.
지금까지도 대학에 있으면서 다른 교수님들이 강준일 선생님에 대해 부정적으로 말을 해도 저는 중의적인 입장에서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SMA를 통해서 음악뿐만 아니라 사회성을 배웠기 때문입니다. 아까 강선생님이 무용음악을 작곡하신 것을 이야기 하였는데, 작곡가가 수입원이 있어야 하기에 무용음악을 시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용일: 저도 그렇게 봤습니다. 음악은 빨리 체득해버리고 활용하면 됩니다. 그런 것을 생각하면 예술마저도 학문의 틀에 넣으려고 했던 것이 잘못 된 것이라 생각됩니다.
진규영: SMA에서 함께 활동했던 김광순 선생이 전주음악회를 만들고, 석필원 선생은 벤쿠버 한인관현악단, 합창단을 만들었습니다. 우리가 학교가 아닌 곳에 조직을 만드는 것은 SMA같은 묘한 조직에서 배웠다고 생각합니다.
이용일: 강은구 선생님은 처음 선생님을 만난 기억이 어땠나요?
강은구: 제가 선생님과의 첫 만남에서 기억에 남는 것은 반바지에 우산을 쓰고 저를 데리러 나오신 모습입니다. 그 당시 선생님 댁에는 좁은 공간에 선생님 책상과 학생들이 앉아서 공부하는 공간이 있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본인을 독서광이라고 표현하셨는데요. 책상에는 항상 많은 책이 쌓여있었고, 그 모습을 보면서 ‘항상 공부를 쉬지 않으시는 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피아노를 굉장히 잘 치셨기 때문에 항상 도전이 되었습니다.
선생님은 제가 공부해야하는 산을 보여주셨습니다. 작곡가는 저렇게 공부해야하고 아는 것도 많아야하고 피아노도 열심히 쳐야한다. 또한 항상 일찍 일어나서 공부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부지런하게 살아야한다는 것도 배울 수 있었습니다. 저의 삶의 기준을 세우게 해주신 분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래서인지 저도 후배들에게 조언을 해줄 때도 선생님의 삶에 비추어서 보게 되고 제 자신도 항상 그러한 삶을 살려고 노력합니다. 대단히 특별한 것이 아니지만 저에게는 가장 인상적인 기억이며 마음에 남아있습니다.
이용일: 강선생님의 수입원은 주로 어떤 것 이였나요?
강은구: 제가 아는 범위 내에서는 학생들을 가르치시고 무용음악이나 연극음악을 쓰시는 것이었고, 사모님께서도 일을 하셨습니다. 선생님이 음악으로 수입이 있으실 때도 적은 양을 하신 것이 아니라 아주 부지런하게 하신 것으로 기억이 납니다. 학생들을 가르치실 때는 애정을 가지고 가르치셨는데, 일반적인 레슨비 정도를 받지 않으셨고 사랑으로 가르치셨습니다. 제가 지방에 살다보니 레슨 받을 때 갈 곳이 없어서 숙직을 시켜주셨습니다. 선생님의 막내 동생분이 당시 미혼이셨는데 과일바구니를 사들고 저를 데리고 그 집에 가서 숙직하게 부탁하신 기억이 납니다. 또한, 둘째 동생 댁에 피아노가 있어서 그곳에 가서 피아노 연습을 하고 막내 동생 댁에서 자면서 공부한 기억이 납니다. 그래서 저는 사제지간이라는 관계를 삶을 통해서 먼저 느낄 수 있었습니다. 대학에 진학하고 나서도 누군가가 나에게 이렇게 해줄 수 있을까하는 생각을 하면서 선생님을 떠날 수 없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용일: 이건용 선생님은 언제 만나셨나요?
이건용: 1983년에 교향악 축제의 전신인 연주에서 이분 작품을 연주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당시에 서울시향과 연주하게 되어있었는데 결국 그 곡을 연주하지 못했지만 그 곡이 궁금했고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만나게 되었습니다.
정치용: 당시에 연주를 하지 못한 것이 큰 스캔들이 되었었습니다. KBS 교향악단과 연주를 하는데 지휘자인 이남우 선생님께서 곡이 많고 너무 어려우니 1악장만 연주하자고 하셨고 결국 연주를 못했습니다.
이건용: 저는 그때당시 현대음악을 기계적으로 받아들이지 말고 새로운 길을 찾아보자는 취지에서 제3세대라는 새로운 작곡계 모임을 만들었습니다. 또한, 1970년대 후반부터 김지아 선생을 시작으로 우리 것에 대한 새로운 조명이 시작되었고요. 음악계에서 새로운 움직임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때 시작되었던 것이 사물놀이를 이용한 것입니다. 강선생님도 그 영향으로 현대적이면서 전통적인 소리를 가지고 작곡을 했는데 그것이 그분이 가진 고유의 소리였습니다. 물론 제도권에서는 이분의 음악을 인정하지 않았지만 제 개인적으로는 이만한 작곡가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제3세대를 하면서 한 달마다 한 번씩 만나 스터디도 하면서 친분을 쌓았습니다. 그때가 1985년에서 1987년 정도입니다.
3. 강준일 선생의 음악세계와 국내 음악계에 끼친 영향
이용일: 1980년 민주화 운동이 일어나면서 우리의 것을 찾는 것이 모든 문화계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강선생님도 그러한 시기에 김지하 시인의 영향을 받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이건용: 그 이후에 스터디를 하면서 「마당」과 「풀이」를 같이 분석 했습니다. 강준일 선생이 스스로 보충해준 내용에 의하면, 이분의 음악적 사상이 감성도 있었지만 상당부분 형이상학적 이론적인 접근이 있습니다. 우선 음악적 재료를 찾는데 물리학자로서의 특유한 강점을 발휘한 것 같습니다. 한번은 윤선혜라는 가수의 노래를 들었는데 “그 친구 노래에서 7번째 배음이 틀린 것 같아.”라는 말을 했습니다. 하나의 음색 속의 여러 음결합의 특성 중에 어떠한 소리가 들리는지에 대한 체험과 이론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것들을 본인의 작품에 어떻게 적용한 것 같으냐면, 서양의 소리를 어떻게 하면 안 들리게 할까하는 소리에 대한 탐구가 있었습니다. 그분의 작품 속 소리의 특징은 화음을 쌓아서 협화적으로 들리기보다는 각 음들이 횡점연결 되어 있는 것을 많이 구상한 것 같습니다. 또한 증4도를 좋아했는데 이는 그분의 제자들에게서도 나타나는 특징입니다.
이용일: 완전4도는 서양음악의 대표적인 특징입니다. 증4도는 서양의 질서와 다르고요. 그 당시에 물리학과에 입학한 학생은 공부를 제일 잘하는 사람들입니다. 그 집요함으로 음악을 했을 때 얼마나 집요하게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데요.
정치용: 선생님의 성격을 볼 수 있는 면이 자동차 운전면허 필기를 3번 떨어졌는데, 보통 우리는 예상문제집을 보는데 그분은 그것이 용납이 안 된다고 하시면서 그 문제를 자동차의 메카니즘을 따지면서 풀려고 하셨습니다. 결국 4번째에 붙으셨습니다(웃음). 그런 식의 사고방식을 평생 가지고 계셨습니다. 음악과 제자들, 후배들과 대화할 때에도 자신이 공부하여 아는 것이 아닌 주제에 대한 궁금증이 굉장히 집요하셨습니다. 어느 정도 본인이 답을 얻기 전까지는 놓지 않고 집요하게 접근하셨습니다. 연습을 집요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사실에 대해서 지적으로 파고들어 탐구하는 근성이 굉장히 강하셨습니다.
이건용: 깐깐한 면모가 있었지요(웃음).
정치용: 나름대로의 원칙이 있고 그것에 맞춰서 사셨기 때문에 주변사람들이 힘들었습니다. 1970-80년대에 캠프를 할 때는 굉장히 힘들었습니다. 선생님께서 평소에 2-3시간 이상 잠을 주무시지 않으셨고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으시니 제자들이 힘들 수밖에 없었지요. 돌아가시는 날 새벽까지도 곡을 쓰셨습니다.
이건용: 저희를 보면 항상 광상을 보고 건강을 진단해주고 처방을 내려주곤 했습니다. 건강잘챙기고 우리에게도 건강에 조언을 많이 하셨습니다. 여주에 작업실을 만들고 출근하면서 스스로와의 약속을 지켰는데, 이는 보통 내공이 쌓이지 않고는 되지 않습니다. 내공의 고수입니다.
정치용: 더 고수는 사모님이십니다. 수십 년을 버티면서 사셨습니다.
이용일: 우리 사회에는 그런 기인이 있어야 재미있습니다. 강준일 선생님이 서울대 음악대학에 들어왔으면 그러한 것들이 다 깨졌을 것입니다.
진규영: 저는 이것을 꼭 이야기 하고 싶습니다. 저는 강준일 선생님이 오히려 제도권 안에 있었던 작곡가라는 생각을 가집니다. 작곡가들끼리 사는 세계에는 대학을 나와 유학을 다녀와서 귀국 한다 등의 어느 정도 정해진 경로가 있습니다. 그리고 유럽에서 유학을 마치면 나만의 음악양식과 언어가 있어야 한다는 하나의 강박관념을 가지게 됩니다. 그러한 상태에서 한국에 돌아오게 되면 갑자기 큰 충격이 생기게 됩니다. 왜냐하면 청중의 층이 굉장히 다양하기 때문입니다. 유럽에서는 그 음악적 언어를 받아들이는 청중들이 있는데, 한국은 그렇지 않은 청중들이 있기 때문에 자신이 공부한 음악과 청중들이 듣는 음악이 다릅니다. 콩쿠르에 참가하는 곡들은 연주자들도 어려워서 연주가 이루어지지 않고요. 그렇다보니 한국에서 적응하려면 한국적인 언어를 가지면서도 연주하기 쉬운 음악을 써야합니다. 제자들과 후배들이 저에게 찾아와서 연주되기 좋은 음악을 쓸 때, 이런 음악을 써도 되냐고 묻기까지 합니다. 본인들이 하고 싶은 음악을 하지 못하는 것이죠. 그렇다보니 이러한 움직임에 바탕이 될 작곡가가 되기가 어렵습니다. 제가 강준일 선생님께 배운 것은 자유입니다. 강선생님과 곡을 쓸 때 느낀 것은 그분은 모든 것을 자신이 결정하고 순리대로 하였습니다. 본인이 하고 싶은 대로 자유롭게 음악을 하신 것이죠. 그 모습을 보고 제가 반성을 많이 했습니다.
이용일: 아마도 다행히 강준일 선생님을 만나서 작품을 쓰게 된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진규영: 선생님의 제자들이 음악계에 많이 남았는데, 모두 작곡가로만 남지 않았고 지휘자도 있고 이론가도 있고 다양한 직업군에 있습니다. 제자들에게 한쪽방향만 제시한 것이 아니라 오픈을 시켰습니다.
정치용: 제가 느끼기에 강선생님이 가장 많이 보여주신 모습은 물론 음악하신 모습이지만 큰 덩어리로 보면 자신의 삶에 대한 철학이 분명하셨단 것입니다. 그곳에서 긍정적인 영향을 받은 제자들은 자신의 길을 찾아 갈수 있었고요. 제도권에 있는 음악가이던, 연주가이던 살다보면 사람들의 허술한 부분이 드러나는데 선생님은 그러한 부분을 보기가 참 어려웠고 그런 부분들을 제자들이나 후배들에게 보이지 않으려고 철저하게 애를 쓰셨습니다. 만약에 대학교수가 되었더라면 자의반 타의반 그렇게 살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한 부분들이 앞서 진선생님께서 자유라는 언어로 표현하신 부분인 것인데, 그렇다면 거기에는 얼마나 큰 용기와 희생이 있었겠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는 것도 필요한 만큼 벌고 사셨습니다.
이용일: 종교는 없으셨나요?
정치용: 원래는 기독교이신데, 교회는 안다니셨고 사모님이 기독교셨습니다.
이용일: 제가 생각하기에 이분은 올인 한 사람입니다. 자신이 하고 싶은 것, 자신이 가진 신념을 가지고 생활하고 그것에 매달렸습니다. 우리는 제도권에 밀려난다는 생각에 그렇게 살지 못합니다. 그렇게 생각하니, 예술가의 삶은 반드시 안정적이여야 하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예를 들면, 시벨리우스가 주변 환경이 시끄러워서 작곡을 못하겠다고 해서 조용한 곳에 좋은 집을 지어주니 그 후로 한 작품도 만들지 못하였습니다.
정치용: 네, 강선생님은 치열하게 사신 분입니다.
이건용: 지난 3월에 강선생님이 돌아가신지 1년이 되어서 제자들과 함께 모였습니다. 제자 중에 한 사람이 목사가 되어서 저에게 기도를 부탁했는데, 그때 기도한 내용의 핵심은 생명이었습니다. 그분은 생명을 엄청 사랑하고 민감하게 반응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삶과 죽음의 경계가 다소 넘기 쉬운 사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생길 정도로 생명을 사랑했습니다. 제가 여주의 강선생님 집에 갔는데 동네 꼬마들이 도토리를 따려고 망치도 나무의 둥치를 쳤습니다. 그러자 선생님이 나가서 아이들을 혼내면서 그렇게 하면 나무가 죽는다며 꾸짖고 상처 난 나무에 약도 발라주었습니다. 사람을 대하듯이 나무를 대했고 생명을 소중히 생각했습니다.
이용일: 자연과 벗하여 살았다고 생각합니다.
이건용: 생명을 나와 자연이 함께 공유한다고 생각하였던 것 같습니다.
정치용: 굉장히 오래전부터 영혼이란 것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셨습니다. 우리의 육신이 껍데기라며,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하셨습니다. 돌아가시기 몇 해 전부터는 사후세계에 대한 책도 읽으시고 목사가 되신 제자 분에게 자신을 위해 기도해달라는 말도 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본인은 영원한 생명에 대한 개념을 오래전부터 고민하신 게 아닌가 합니다.
이용일: 제자들은 어떻게 느꼈나요?
이고운: 저희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항상 똑같은 일상을 사셨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월요일에는 음악원 출강을 하시고 여주에 가신 후에 곡을 쓰시고 산책하시고, 텃밭정리에 손수 밥을 하시면서 작곡가의 삶을 자연과 함께 사셨습니다. 그리고 목요일에는 아침을 드시고 다시 전통예술원에 오셔서 수업을 하시고 토요일 아침과 일요일 아침에 스터디를 하셨습니다. 이러한 생활을 특별한 상황이 와도 꼭 지키셨고 돌아가시기 전까지도 아무렇지 않게 하셔서 저희는 예상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목요일 아침에 수업에 오지 않으셔서 무슨 일인지 알아보다가 알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선생님께서 굴곡 있게 삶을 사신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신념대로 꿋꿋이 사셨기 때문에 저희가 예상을 못했던 것 같습니다.
강은구: 저는 조금 달랐는데요. 제가 캠프를 할 때마다 일 년에 두 번씩 선생님과 같이 잠을 자는데 70세 전후부터는 호흡소리의 차이를 느꼈습니다. 그래서 제가 걱정이 되어 항상 몸이 괜찮으신지 묻곤 했는데, 항상 관리를 철저히 하셨습니다. 40대 때는 곡을 쓰고 나면 거의 기어 다닐 정도로 사력을 다해서 곡을 쓰셨다고 하셨습니다. 전통운동을 하시면서 그 운동의 사범님이 인정할 정도로 훌륭하게 관리하셨습니다. 그래서 겉으로는 전혀 흔들림이 없으셨던 것 같고요. 말씀과 일상은 항상 같았지만 주무실 때 차이를 느꼈습니다.
이용일: 병명이 어떻게 되나요?
강은구: 심장쇼크로 돌아가셨습니다.
정치용: 돌아가셨을 때, 심장이 딱딱하게 굳었을 정도였습니다.
강은구: 철저한 자기관리 하신분만 가질 수 있는 결코 쉽지 않은 떠남의 모습이었습니다. 아마 마지막 모습도 저희에게 보여주시는 게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용일: 제자들이 보기에 강선생님의 자료 중에 후학이 꼭 봐야하는 것이 있다면 소개를 해주십시오.
강은구: 선생님이 공식적으로 쓰신 책이 몇 권 있습니다. 요즘 국악과 양악이 협업을 많이 하는데 제가 느끼기에 그것을 할 수 있는 시작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이건용: SMA 교재가 있는데 저술은 많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 교재들이 출판되지는 않았습니다.
정치용: 화성법이 출판되기는 했지만 악보가 출판되지 않았습니다.
이고운: 악보는 지금 정리 진행 중에 있습니다.
정치용: 국악창단악단이 생겼을 당시에 김철호 원장님과 같이 작업을 하셨습니다. 개량악기들을 만드는 작업 이였습니다. 제가 그곳에 가서 지휘를 할 때 단원들의 불만을 설득하면서 음정 맞추는 것부터 시작하여 연주를 마쳤습니다. 당시에 굉장히 오랜 기간 동안 혁신적인 마인드로 시작한 일인데 발전되지 않고 사라져서 안타깝습니다. 그것을 해내었으면 지금 충분히 호환이 될 수 있고 21세기 우리나라의 양식에 맞출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면에서 서양음악을 작곡하는 분들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이용일: 국악기로 서양음악을 연주할 때는 그 음정의 미묘한 차이로 인하여 듣기 좋지 않은 음악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혹시 강준일 선생님의 음악은 어떠한가요?
정리_김진실 기자. 사진_김문기 부장.
기사의 일부만 수록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음악춘추 2016년 8월호의 기사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
<김문기의 포토랜드>
진행 : 이용일(한국음악교육협회 명예회장)
이건용(서울시오페라단 단장)
정치용(인천시립교향악단 상임지휘자,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강은구(작곡가, 극동대학교 강사)
이고운(한국예술종합학교 대학원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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