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춘추 기획대담 | 인물탐구
한국에서 전개된 모든 음악을 연구하는 통칭의 음악학자
음악학자 노동은
음악학자 노동은(1945.2.22~2016.12.3)은 전북 익산시 출생으로, 중앙국민학교와 남성중학교, 남성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남성고등학교 시절에는 밴드부 생활을 했으며 전북 도교육위원회 주최 음악경연대회 기악부 1등을 수상하였다. 한양대학교 음악대학 관현악과(클라리넷 전공)를 졸업하였고, 대학 재학시절 '음악비평학회'를 창립하고 초대회장을 역임하였다.
1970년대 함열여자중학교와 안양공업고등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했고, 1978년 연세대학교 교육대학원을 전체 수석졸업하였다. 1981년 목원대학교 음악대학 교수로 부임하여 학부장, 음악대학 초대 학장을 지냈으며, 한국음악과를 설립하였다. 1989년에는 민족음악연구회 회원과 회장으로 활동하였고 민족음악협의회(현 한국민족음악인협회)를 창립하여 초대의장을 역임하였다.
또한 민족음악연구회 회장과 민족음악협의회 초대 의장 등을 지냈고, 1998년 평양에서 개최된 제1회 윤이상통일음악회 추진위원회 추진위원장을 지냈다. 1999년부터 2006년까지 중앙대학교 국악대학 교수로 재직했으며, 중앙대학교 한국음악연구소 소장을 역임했다. 1996년 단재학술상 본상을 수상했으며, 2011년 황조근정훈장을 받았다.
일시 : 2018년 3월 15일 오전10시 30분
장소 : 코스모스악기 7층
진행 : 이용일(한국음악교육협회 명예회장)
패널 :이건용(작곡가, 전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
문옥배(당진문예의전당 관장, 음악평론가)
김수현(단국대학교 연구교수, 음악학박사)
강태구(대전시립연정국악원 공연기획자)
1. 노동은 선생의 첫 만남
이용일: 오늘은 우리 음악계에서 어려운 일을 마다하지 않고 열심히 연구하신 노동은 교수님의 업적에 대해서 논의하고자 합니다. 오늘 패널로 나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평소에 노동은 선생님을 존경하고 마음으로 응원을 했습니다. 아마 그가 좀 더 오래 살았더라면, 지금까지 한 작업을 승화시켜서 또 하나의 답을 내놓지 않나 생각했습니다. 오늘은 그의 남은 업적을 논의해보면 좋겠습니다. 먼저 이건용 선생님이 노동은 선생님과의 첫 만남이 언제였나요?
이건용: 1984년도에 서울대학교에 제가 재직하고 있을 때인데, 당시에는 음악이론, 음악분석이라는 용어는 사용했었지만 음악학이라는 용어는 별로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때 서울대학교 작곡과 이론전공에서 음악학 모임을 하면 좋겠다는 의견이 나왔고, 발표자를 찾던 중에 열심히 공부하는 분이 목원대에 계신다는 소식을 듣고 노동은 선생님을 모시게 되었습니다. 노동은 선생님이 이야기 하는 것을 보면서, 이렇게 성실한 사람이 있을수 있을까 생각했고 겸손하게 이야기 했지만 그 아래 감추어진 공부 내공이 보통이 아니었습니다. 굉장히 좋았고 그 이후에 더러 만나면서 지냈습니다.
그것이 첫 만남이었고 본격적인 인연은 학력고사 출제위원을 함께 하면서 시작 되었습니다. 1987년 학력고사에 음악과목이 처음으로 도입되었을 때, 제가 출제위원이었습니다. 둘째해인 1988년에 출제위원을 추천할 기회가 저에게 있어서, 노동은 선생님을 추천하여 함께 출제위원을 했습니다. 그곳에 들어가면 15일간은 일하고 15일간은 외부 출입을 하지 못한 채 내부에서 자유로운 시간을 보내게 됩니다. 그때 음악에 대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었고, 그것의 연장으로 전 한예종 총장인 이강숙 선생님께서 조직한 음악학연구회의 멤버로 함께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또 이어서 1989년에 저와 같이 민족음악 연구회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수시로 만나 이야기하고 공부하며 모임을 가지며 교류하였습니다.
이용일: 문옥배 선생님은 언제 처음 만났나요?
문옥배: 저는 1984년에 선생님을 처음 만났고, 그후 개인적으로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선생님이 재직하고 계셨던 목원대 음악대학 제자를 중심으로 음악이론을 공부하는 모임인 ‘악학(樂學)연구회’를 만드셨고, 당시 저는 타 대학교 학생이었지만, 목원대 제자보다 먼저 선생님께 음악학에 대한 개인적 가르침을 받은 제자였기에 참여하여 선생님께 지속적으로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악학연구회는 1987년에 ?악학연구?라는 학술지를 발간했고, 노동은 선생님과 저는 음악해석학에 대한 번역과 논문을 썼습니다. 그 후 선생님이 이건용 선생님께 저를 추천하여 이건용 선생님이 저의 두 번째 음악학 스승이 되셨습니다.
이용일: 강태구 선생님은 언제 처음 만났나요?
강태구: 저는 노동은 선생님께서 1995년도에 목원대학교에 한국음악과를 창설하셨을 때, 학과조교로 일하게 되면서 선생님과 만나게 되었습니다. 당시 저는 음악전공생도 아니고 사회생활을 하고 있을 때였는데, 다시 공부하려고 늦게 학교에 들어간 친구들을 통해서 저를 아시고 먼저 전화를 주셨습니다. 학과 조교를 필요로 하는데 해볼 의향이 있으면 만나보고 싶다고 하셨고, 만나서 한국음악과에 대해서 공부하는 것을 설명해 주셨습니다. 당시에 저는 대전에 내려가서 선생님을 만나 뵙고 1997년부터 한국음악과 조교로 만나면서 선생님과 함께하게 되었고, 돌아가실 때까지 함께하게 되었습니다.
이용일: 김수현 선생님은 언제 처음 만나셨나요?
김수현: 민족음악연구회 전에 준비모임에서 처음 뵈었습니다. 그때는 서로 만난 것이 아닌 제가 선생님에 대한 인식을 처음 했고, 민족음악연구회를 창립할 때 만나게 되었습니다. 저는 대학교에 재학 중이었는데, 당시 노동은 선생님께서 제가 생각하지 못했던 ‘근대시기의 왜곡된 음악문화가 오늘날에도 영향을 끼쳤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어렵기도 했지만 배우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민족음악연구회에서 활동하면서 더 깊이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 대학원을 진학해 노동은 선생님의 제자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이용일: 노동은 선생님의 가장 큰 이슈는 무엇이었습니까?
문옥배: 노동은 선생님의 관심 영역은 이 땅의 음악, ‘지금․여기’의 음악이었습니다. 과거부터 전해온 전통음악과 근대 이후의 양악을 포함한 지금의 한국음악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밝히기 위해 역사적 접근을 하셨습니다. 우리 역사에서 근대까지 쓰인 악(樂)의 개념을 끌어 들였고, 음악이론을 넘어 철학적ㆍ윤리적ㆍ미학적 개념을 포함한 악학(樂學)이라는 개념을 적용하셨습니다. 조선후기 이후 전통음악과 양악을 포함한 한국 근현대음악사가 선생님의 관심영역이었습니다.
김수현: 오늘날의 세대마다 다른 음악문화를 가지게 된 것이 일제강점기때 역사와 관계가 있다는 것과 당시 양악인 들의 친일적인 행위가 우리의 올바른 음악문화를 만드는데 부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2. 노동은 선생의 음악세계
이용일: 우리나라 대학 형편상 해당 학과를 졸업하지 않으면 교수가 될 수 없는데, 목원대와 중앙대에서 교수로 재직한 것을 보면 노동은 선생님의 학문적 파워가 대단했던 것 같습니다. 목원대 재직 시절에 저와도 가끔 만났는데, 제가 여러 가지 질문을 하면 한 번도 똑똑한 척 하지 않고 겸손하게 대답을 했습니다. 우리들이 여러 가지 면으로 노 선생님이 하신 일을 따라가지 못한 것 같습니다.
이건용: 노 선생님이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역사적이다’이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밥이 맛있는 음식점에 가면 ‘역사적인 식당’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역사적’이라는 말을 의식하면서 살지 않았으면 나오지 않을 말을 한 것 같습니다. 이분이 역사학자라서 이기도 하지만 스스로도 늘 ‘후세에 이 일이 어떤 영향을 끼칠 것인가, 내가 어떻게 행동해야 역사에서 바로 서서 일하는 것인가, 어떤 태도가 옳은 것인가’라는 질문을 항상 했습니다. 그것이야말로 학문하는 태도뿐만 아니라 역사학자가 반드시 가져야할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점에서 제가 많이 배웠습니다. 저는 기록을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았는데, 노 선생님은 늘 만나면 사진 한 장이 귀하게 될지 모른다고 사진을 찍어두고 기록을 남겨두었습니다. 또한 언어를 노동은 교수를 통하여 언어를 허투루 사용하면 안 된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음악학 연구회에서 있었던 일을 예로 들면, 노동은 교수가 음악학 연구회에서 우리가 어떤 일을 할 것인지 논하던 중에 “어떤 일을 할 것인지 논하기 전에 음이 뭔지, 악이 뭔지, 학이 뭔지 이야기를 해야 하고 음악이 뭔지, 음악학지 뭔지 발전시켜서 이것을 논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 발언을 듣고 정말 놀랬습니다. 음악학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음악이 뭔지, 음악학이 뭔지 정확하게 알고 있지 않은 채로 일을 하게 되면, 허툰 수고를 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상당히 많은 부분에서 같은 방식을 고집했습니다. 전통에 대해서 이야기 할 때에도, 전이 무엇인지 통이 무엇인지 알면 전통이 무엇인지 자연스레 알게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분의 전통에 대한 관심은 그래서 생긴다고 봅니다. 노 선생님이 국악이라는 말을 이러한 방식을 가지고 접근 하였기에, 오늘날 우리가 하는 음악행위가 전통이 되기도 하고 옛날 음악과 만나게 되는 것 아니냐고 주장하고 글도 쓴 것 같습니다. 또한 이를 통해 미루어 볼때 이분이야 말로 국악과를 나오지 않아도 전통음악을 연구한 가장 훌륭한 역사학자라고 생각 됩니다. 물론 세속의 분류가 학과와 계로 분류되지만, 이 사람 마음속에서 그것들을 다 초월하는 학문적 바탕이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용일: 음악 자체를 큰 범주로 본 것이죠. 그것이 음양론에도 나오지 않습니까?
이건용: 무엇이 음악인지 이야기할 때 인간과 음악이 주체와 객체로 분리가 되지 않고 순환되는데, 그것을 몸소 살았던 사람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용일: 문옥배 선생님은 노동은 선생님의 음악학 첫 제자인 듯 싶습니다. 1980년대 선생님이 만드신 악학연구회를 하셨다고 했는데, 당시 모임에서 제자들에게 무엇을 가르쳤고, 강조하셨는지요?
문옥배: 저는 학교의 서양음악사 시간에 양식사 중심으로 배웠는데, 선생님은 처음 저에게 음악역사철학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충격이었죠. 양식사와 다른 철학적 접근법이. 선생님께서 정리하신 알랜의 ?음악역사철학?(W.D.Allen, Philosophies of Music History: A Study of General Histories of Music 1600-1960, 1962)을 저에게 가르치셨고, 음악이론만의 공부에서 탈피하여 해석학ㆍ과학철학ㆍ역사철학ㆍ사회철학ㆍ미학 등을 공부하라고 하셨죠. 음악에만 매몰되지 말고, 인문사회과학적으로 음악을 바라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항상 이 땅의 문제, ‘지금ㆍ여기’를 중심에 두라 하셨고, ‘음악이 무엇이냐’라는 물음뿐 아니라 ‘왜 음악을 하느냐’, ‘누구를 위해서 음악을 해야 하느냐’, ‘어떤 음악을 하여야 하느냐’, ‘좋은 정치와 사회를 위하여 음악은 어떠한 기능을 가져야 하느냐’, ‘열린음악사회를 위하여 우리는 이론을 어떻게 실천하여야 하느냐’ 등 실천적 물음을 끊임없이 던지고 풀어 나가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이용일: 강태구 선생님은 노동은 선생님과 목원대에서 공부를 하셨나요?
강태구: 목원대에서 중앙대까지 함께 조교로 따라가서 대학원 과정부터 중앙대에서 공부 했습니다. 앞서 이건용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던 것과 같이, 선생님께서 관심을 가지시는 부분에 대해서는 굉장히 치밀하셨고 이론뿐만 아니라 몸소 실천하시려고 많은 부분에 노력을 기하셨습니다. 한국음악의 여러 가지 정수들이 있지만 무용과 장단은 기본적으로 악기와 소리를 하는 학생들이 해야 한다고 강조하시면서, 다른 한국음악과에 없는 과정을 직접 이수하게 하셨고 본인이 직접 배우기도 하셨습니다. 그러한 과정들이 일상이셨습니다. 바쁘신 와중에도 학과일 하면서 본인이 직접 학습하러 다니신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건용: 노동은 선생님은 그 음악을 밝히는 일들을 위해서 그는 자신의 관심을 어느 한 군데에 안정되게 둘수 없었습니다. 영아들에게 가르치는 노래를 연구하는가 하면 윤이상에 대한 저서를 내기도 하고 해방공간의 음악가들, 조선후기 실학자들의 음악, 개화기의 음악, 민악, 천주가사, 권번, 친일파의 음악 등을 연구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한 전문 연구 분야를 가지는 것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연구를 하던 그에게 있어서는 같은 것이었습니다. 즉 그가 사랑하는 민족의 음악이 무엇이며 어떻게 알리는 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노동은 선생을 국악과라는 범위로 제한하는 것은 너무나 카테고리가 좁다고 생각됩니다. 이분은 진정한 음악학자입니다.
이용일: 이분의 업적을 보면 국악학자로만 칭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문옥배: 중앙대 국악대학 교수로 재직하셔서 국악학자로 보게 되는데, 타 국악학자와는 다른 연구영역을 가지셨습니다. 이건용 선생님 말씀처럼 조선후기음악사를 연구하실 때도 전통음악만이 아닌 서양음악을 당시 조선인은 어떻게 보았고 수용하였는지, 개화기음악사와 일제강점기음악사, 해방공간음악사를 연구하실 때는 전통음악과 양악이 어떻게 그 시기의 시대정신과 함께 전개되었는지 동시적으로 밝히셨습니다. 특정 영역을 의미하는 국악학자라기보다는 한국에서 전개된 모든 음악을 연구하는 통칭의 음악학자라 부르는 것이 적절하죠.
이건용: 국악은 전통음악으로만 정의해서는 안 됩니다. 요즘엔 음악학과에서 근대, 현대에 음악현상까지 연구대상으로 삼는 새로운 연구들이 많이 나오고 있는데. 저서들 중에 가장 감탄한 것은 <김순남, 그 삶과 예술>입니다. 그는 음악을 찾는 일이라면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기다림을 마다하지 않고, 돈을 아까워하지 않았습니다. 책 한 권, 사진 한 장, 기록 몇 줄, 증원 몇 마디 이런 것들이었습니다. 그런 단편들을 엮어 마치 고대 유물을 복원하는 사람처럼 책을 완성했습니다. 북쪽에서도 음악가 김순남에 대해서 연구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 작업을 한 노동은 선생의 공이 상당히 크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대단한 작업을 역사학, 국악, 음악이라는 하나의 카테고리에만 넣기는 힘들지 않나 싶습니다.
이용일: 몇 년도에 발행한 책인가요?
강태구: 1992년도에 발행한 책입니다.
이용일: 1992년이면 아직까지 우리나라에 군사정부가 정권을 잡을 때인데, 정말 용기있는 사람입니다. 좌우지간, 제가 볼때 노동은 교수는 탱크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방향만 잘 잡고 가면 큰 일을 내겠다 싶을 정도로 일처리가 대단했습니다. 그가 중앙대와 목원대 양쪽에서 가르쳤는데, 한예종이나 서울대에서 가르쳤더라면 더 많은 지원을 받고 본인도 더 알려졌지 않을까 싶습니다. 열심히 일하신 노동은 교수님이 무슨 병으로 돌아가셨나요?
강태구: 폐암이었습니다. 선생님께서 흡연을 하시기도 했지만, 연구실에 갇혀서 항상 옛날 책들을 쌓아놓고 자료를 보고 연구하셨습니다. 점심때도 나가지 않으시고 주로 배달 음식을 드시거나 김밥 한줄 정도 드실 정도로 건강관리를 하지 않으셨습니다. 물론 아침에도 가장 먼저 출근하셔서 연구를 하시고 가장 늦게 퇴근하셨습니다.
3. 노동은 선생의 국내 음악계에 끼친 영향
이용일: 노동은 선생님은 본인이 하는 연구에 완전히 몰두하고 몰입하셨기에, 건강은 그 다음이었던 것 같습니다. 노동은 선생님의 업적 중에서 현재 우리음악계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무엇인가요?
이건용: 민족음악에 대해서부터 이야기해야 할 것 같습니다. 1980년대에 여러 가지 움직임이 나타났는데, 그 중에 제도에서 만들어 놓은 문화가 아닌 새로운 문화에 대한 여러 가지 움직임이 나타나는 시기였습니다. 당시에 민족이라는 말을 많이 필요로 했습니다. 서양 문화로 꽉 차있는 현실에서 우리 고유의 것을 찾아 자존감을 회복하는 것도 필요했기 때문에 민족이라는 단어를 많이 사용했습니다. 그러한 움직임이 음악계에서도 시작되었고, 그 움직임의 내용을 채우는 부분에 결정적으로 노동은 교수의 연구가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노동은 선생은 박지원, 홍대홍이 과거에 주체적으로 음악 연구했고 서양에서 들어오는 음악에 대해 관심과 기록을 남겨놓았다고 이야기 했고, 홍대홍은 당시 양악기를 연주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부터 음악사를 시작했습니다. 그 분이 복원한 것이 한국의 근대음악사였습니다. 사실 그 이전에 있었던 연구들은 주로 세종조에서도 아주 옛날 문헌들을 고증하는 것에 관심이 많았던 것에 비해서 노 선생님은 그때부터 시작해서 차곡차곡 해방공간, 일제시대 음악사, 북한음악, 우리토착문화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음악 등 안에 숨겨진 음악사를 연구해 저서를 내면서 우리의 끊어진 음악 전통을 되살려 주었습니다. 그래서 공허하게 민족음악에 대해 정의하는 것이 아닌, 실재적인 부분들을 복원하여 민족음악에 대해서 증명하였습니다. 앞전에 이야기한 김순남에 대한 저서와 지영희 선생님 연구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가 될 것입니다.
강태구: 지금이야 친일 음악과 북한 음악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있지만, 선생님께서 연구할 당시 우리사회에서는 그러한 이야기들이 시대적 배경과 상황 안에서 금기되었고 터부시 되었던 것들입니다. 선생님께서 술을 드시면 에피소드처럼 신변의 불안함에 대해서도 말씀하기도 하셨습니다. 그런데 선생님께서는 이러한 분야들도 모두 객관적인 자료와 사료에 근거해서 이야기 하셨습니다. 또한 반대되는 의견을 반박하거나 논의 할 때에도 논리성을 가지고 이야기 하시는 것을 보면서 대단하다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 하나는 그런 작업들이 음악학의 대상들이나 지평들을 엄청 넓혀놓은 것입니다. 사실 현대에도 국악학과 (서양)음악학의 경계가 단단해서 서로 접근하기가 힘듭니다. 그런데 노동은 선생님께서는 한 세대, 두 세대 앞서서 그 경계가 아무의미가 없음을 실제 연구로 보여주신 것 같습니다.
김수현: 민족음악론을 내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양악과 국악을 골고루 연구 하시면서 중요한 음악가들을 발견했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음악가를 발견하셨지만 특별히 양악쪽에는 김순남, 국악은 지영희 선생님을 발견하여 평전을 쓰셨습니다. 두 분 모두 민족음악이라는 공통성을 가지고 있죠. 뿐만 아니라 탄탄하게 연구를 통해 조명되면서, 우리의 음악 역사가 튼튼한 자산이 있었다는 것을 학문적으로 보여주지 않았나 싶습니다.
문옥배: 한국 음악사를 바라보는 관점, 기술관점을 바꾸어놓으신 것이라 생각합니다. 노동은 선생님 이전의 한국음악사는 과거부터 내려온 전통음악만의 역사이거나, 서양음악이 수용된 사실 중심의 기록이었죠. 국악사가 한국 음악사였고, 양악사는 별개라 생각했죠. 그런데 선생님은 국악과 양악을 동시적으로 바라보았고, 역사철학적 관점으로, 항상 ‘지금ㆍ여기’를 역사기술의 시점으로 보았습니다. 최한기의 ?기학?(氣學)의 1권의 첫 명제인 “학자는 모름지기 현재의 기(氣)를 근기와 표준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을 역사 해석의 근간으로 삼으라고 선생님은 가르치셨습니다. 또한 선생님의 음악사기술은 일반적인 음악사처럼 어떤 음악양식과 음악현상, 음악인이 있어 왔는가, 그것들의 공간적․시간적 관계성을 밝히는 것이 아니라, 당대마다 한국 음악인들이 시대적 상황과 현실에 대하여 어떻게 인식하고 실천하여 왔는지 구명하고자 한 것이 차이라 생각합니다.
이용일: 제가 1980년쯤 정신문화연구원에서 국악교육에 대해 발표하라고 해서 발표를 했는데도 불구하고 논문집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체계화 되지 않는 국악이 이유일까? 아니면, 이론이 별로 없어서 일까? 국악 하는 사람들에게 접근해서 물어보면 알려고 하지 말라고 한다는 것이 그 발표의 내용이었습니다. 그러니 국악 하는 사람들이 그리 좋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국악에 대해서 자세하게 알고 싶어도 배울 수 없었는데, 노동은 교수는 혼자서 깊이 연구했습니다. 처음에 음악교육이면 한국 사람들이 한국어를 배우듯이 한국음악을 시작해서 점점 넓혀가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민요를 가르치자는 것이 아니라, 소리 자체가 중요하다는 말을 했습니다. 예를 들면, 가야금의 농현이 중요하지 음계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사회가 꽉 짜여 있는 것을 조금도 바꾸려고 하지 않는 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노동은 선생은 용기 있게 이러한 것들을 해결하셨습니다.
이건용: 노동은 선생을 보면서 부흥사 같다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부흥사가 회개시키기 위해서 부흥 집회에서 이야기 하는 것처럼, 음악의 회심을 주장했습니다. 음악이라고 하는 기존의 체험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지금 그 음악이 처음부터 음악이었던 것은 아니고, 어떠한 역사적 상황 속에서 빚어진 것이다. 그러니 새로운 마음으로 새 음악을 바라보고 만들어가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많이 주장했다고 생각이 됩니다. 옛말에 ‘마음을 바꾸는 순간 그대 눈에 금으로 보이든 것이 똥으로 보이고 똥으로 보이든 것이 금으로 보일 것이오.’ 라는 말이 너무나 와 닿는 말이었습니다. 지금은 국악의 위상이 낮다고 생각 되지 않고, 오히려 새로운 것을 더 많이 만들어 낸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당시에는 서양음악에 비해 국악이 사소하고 부수적으로 다뤄지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인식을 바꾸기 위해서 무던히 노력했고, 그 결과가 오늘날인 것 같습니다.
이용일: 노동은 선생님이 저에게, “선생님의 음악교육 전망에서 영감을 많이 받았다.”고 했습니다. 그것에 대해서 굉장히 많이 칭찬을 했습니다. 저는 국악 작곡가들이 양악을 따라가는 경우가 있어서 불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건용: 최근의 경향을 보면 국악이 더 이상 수세에 몰린 것이 아니고, 젊은 사람들의 움직임은 굉장히 활발합니다.
문옥배: 제가 80년대 말 세종문화회관내 서울시립국악관현악단에 기획관련단원으로 근무한 적이 있었는데, 당시 국립국악원은 전통음악을, 서울시립국악관현악단은 창작국악곡을 주로 연주했습니다. 초기의 국악창작곡은 서양음악의 형식을 차용한 경향이 일부 있었습니다. 그러나 2000년대 이후 젊은 국악작곡가들은 그러한 것에서 벗어났다고 생각됩니다.
이용일: 국악은 레파토리가 없다보니 위촉하고 연주하는 움직임이 활발한데, 양악은 창작곡을 연주할 곳이 마땅치 않습니다. 그래서 앞으로 우리가 우리나라 음악시장을 어떻게 볼 것인지 고민해 봐야 합니다. 이러한 것을 음악학자들이 정리해서 조명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이미 국악에서는 서양음악을 활용하고 있다고 해야 합니다.
이건용: 노동은 교수가 제 음악을 좋아했습니다. 그 중에 「사랑」이라는 노래를 퍽 좋아했던 것 같습니다. 이 분이 참 실천적인 분이라서, 음악에 대해 강의하는데 말로 설명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고 하고 음악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면서 강의 끝이나 중간에 음악을 집어넣는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 작품인 「사랑」을 부를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해서 허락한 적도 있습니다. 강의시간에 손수 연주자를 불러왔습니다. 예를 들어, 장단에 대한 강의를 해야 하면 ‘고수’를 불러오기도 했습니다. 말로만 하는 강의가 아닌 직접 느끼게 하는 강의를 했습니다.
이용일: 그 정도 갈 때까지 본인이 고생을 많이 한 것입니다. 어떻게 이해를 시킬지에 대한 것을 총체적으로 생각한 것 아닐까요?
강태구: 선생님께서도 내적 갈등이 있는 과정이라고 생각되는 것이, 선생님 집안이 굉장히 독실한 크리스천 이셨는데 전통음악을 하려고 하다 보니 내적인 갈등이 있으셨습니다. 말씀하신 것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 국악을 공부하면 무속신앙과 불교음악을 연구하다보니 신앙적인 갈등이 많았다고 하셨습니다. 대전에 가면 계룡산에 있는 동학사라는 절이 있고 일주문을 지나야하는데, 국악을 하기 전에는 그곳을 지나가본 적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아마 그게 당신이 가지고 계신 신앙생활과는 분리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기 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는 것을 깨닫기 까지 오래 걸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처음에 연구를 할 당시에 몇 년 동안은 계속 채보하고 자료를 수집하시느라 굿판이나 사찰 등에 가지 않으실 수 없었고 무속인 들을 만나실 수밖에 없었는데, 그때도 내적 갈등이 계속 있으셨습니다. 또한 양악 쪽에서는 국악을 공부한다고, 국악 쪽에서는 양악을 전공했는데 국악을 공부한다는 이유로 양쪽으로부터 공격을 계속 받으실 수밖에 없는 상황이셨습니다.
이용일: 제가 일본에서 공부할 때, 음악사 특수 연구라는 과목을 공부했습니다. 원시불교의 발흥과 성경 신구약 등을 공부하면서 그 안에 음악이 왜 필요했는지를 찾는 것이 강의 내용 이었습니다. 우리가 접근을 시킬 때 어떠한 방법으로 접근시키는지 상당히 중요한데, 노동은 선생님이 한 강의 방법이 굉장히 효과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교육하고 싶은 마음은 있는데 힘들어서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 실천까지 한 것이 참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자제분들은 음악을 하나요?
강태구: 장남이 작곡전공을 했고 국악예술고등학교 강사로 출강하고 있고, 며느님이 서울대 국악과 가야금을 전공했습니다. 막내아들과 따님 2명은 음악을 하지 않았습니다.
4. 노동은 선생의 업적을 정리하는 작업
이건용: 노동은 선생님의 육필 원고가 상당히 예쁩니다. 예전에는 종이에 빽빽하게 적어서 논문 발표를 했는데 지면에 꼭 실리면 좋겠습니다. 현재 노동은 선생님의 자료들을 제자들이 정리하고 있는 것으로 아는데, 어떻게 되고 있나요?
강태구: 선생님께서 유지로, 내 자료들이 한군데 잘 보관되어 활용되었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셔서 제자들 5명 정도가 뜻을 모아 정리하고 있는데, 장서가 3~5만 정도 되다보니 보관 장소를 구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현재 남양주에 마련된 공간을 올해 12월까지 비워주기로 약속을 하고 들어가서, 시간적인 한계가 저희들에게 있습니다. 김수현 선생님께서 현재 발 빠르게 알아보고 계십니다. 현재 평택쪽에 있는 지영희 국악관에서 프러포즈해서 진행되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이용일: 제가 일본에서 공부할 당시에 우리나라에서 민족음악을 연구한 사람이 별로 없었습니다. 당시에 장사훈 선생님이 일본에 와서 남도음악이 4음계라도 주장했는데, 일본사람들이 3음계라고 주장하니 인정해 버렸습니다.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앞으로 노 선생님의 업적을 어떻게 활용하실 것인가요?
김수현: 앞으로 어떻게 활용 할 것인지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떠오르는 건 아니지만 대강의 윤곽을 이야기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도 제 나름대로의 연구를 이어가고 있고, 그 분야에서 제가 해야 할 역할들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동은 선생님께 배운 것들을 다시 되새겨보면 정말 놓칠 수 없는 것들이 많습니다. 저는 최근에는 두 가지 면에서 조명을 하고 있는데, 그 중하나는 항일 음악입니다. 항일음악은 어떻게 보면 새로운 양식을 만들었다거나, 음악적으로 뛰어나다거나 하지 않다고 생각되어서 조명할 수 없다고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항일 음악은 몇 사람에 의해서 불러진 음악이 아닌, 굉장히 큰 흐름을 가진 음악이라고 생각됩니다. 그것이 노동은 선생님의 <항일음악33곡집> 을 통해서도 느낄 수 있고요. 노동은 선생님께서 평생 하시고 싶었던 연구 중에 항일음악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어떻게 보면 친일음악은 항일음악을 부각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었나 싶고요. 그래서 이 부분의 연구를 이어나가고 싶습니다.
또 하나는 지영희 선생님에 대한 연구입니다. 노동은 선생님께서 평전을 내시기 전까지 지영희 선생님에 대해서 얕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단순히 김기수 선생님과 지영희 선생님이 민속음악과 정악에서 상당히 팽팽하게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만 생각했죠. 그런데 요즘에는 지영희 선생님이 민속음악의 뿌리를 잘 가지고 계시고 전승하셨기 때문에 국악이 지금까지 발전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이것을 조명하신 노동은 선생님의 업적을 더욱더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저도 민속음악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공부해야겠다고 생각이 듭니다.
이용일: 앞으로 노동은 선생이 한 작업이 후세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그분의 연구를 잘 계승하면 좋겠습니다. 연구하고 발표해서 모든 사람들이 인식하기까지는 시간이 걸리고 어려움이 있습니다. 앞으로 우리가 노력하면 우리나라 음악이 바로가지 않겠는가 생각합니다. 평생을 노력한 노동은 선생님의 연구가 사장되면 너무나 안타까울 것 같습니다.
글_ 김진실 기자, 사진_ 김문기 부장
진행 : 이용일(한국음악교육협회 명예회장)
진행 : 이용일(한국음악교육협회 명예회장)
이건용(작곡가, 전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
이건용(작곡가, 전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
강태구(대전시립연정국악원 공연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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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현(단국대학교 연구교수, 음악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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