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음악춘추

인물탐구 - 음악평론가 김원구 / 음악춘추 2017년 2월호

언제나 푸른바다~ 2018. 2. 4. 11:21

음악춘추 기획대담 | 인물탐구
뛰어난 문장력을 가진 음악문필가
음악평론가 김원구 


음악평론가 故(고) 김원구 선생(1928~2002)은 황해도 봉산에서 출생하여 1941년 경신고, 1943년 일본 주오대(中央大) 법학과를 졸업하였다. 1957∼1970년 대한교과서에서 근무하였으며 출판과장을 역임하였다. 1968년 [현대문학] 수필 추천 완료하였고 1969∼2002년까지 음악평론가로 활동하여 <중앙아세아의 광야에서> 등 팡세를 연상케 하는 수필과 음악평론을 썼다.
1978년 한국음악펜클럽 회원, 1985년 예술평론가협의회 기획위원, 1989년 공연윤리위원회 심의위원 역임하였고 객석공로필자상, 한국방송협회 표창장 수상하였다.
저서로는 <명곡을 찾아서>, <김원구음악수필집>, <명곡감상사전>, <음악사대도감>, <형이상학적 음악의 강은 흐른다>, <레코드콜렉션2001곡>, <오페라해설집>, <음악으로 사랑을 배웠네>, <팡세ㆍ시ㆍ잠언의 트리오>이 있으며 번역서로는 <갈리나자서전>,  <현대사상의 모험>, <베토벤의 생애>, <마음의 자유를 얻는 166가지 이야기>이 있다. 


일시 : 2016년 12월 8일 오전11시
장소 : 코스모스 악기사 7층
진행 : 이용일(한국음악교육협회 명예회장)
패널 : 김형주(한국원로음악가협회 회장)
이상만(음악평론가, 국제델픽위원회 명예회원)
김영숙(프라움악기박물관 학예사)


1. 김원구 선생의 성장과정과 음악의 출발
2. 김원구 선생과의 첫 만남
3. 김원구 선생의 음악세계
4. 김원구 선생의 교육관
5. 김원구 선생이 국내 음악계에 끼친 영향


이용일: 이 시간에는 음악평론가 김원구 선생님에 대해서 논하려고 합니다. 날씨도 추운데 김형주 선생님, 이상만 선생님, 김영숙 선생님 나와 주셔서 고맙습니다. 제 생각에는 김원구 선생님하면 외로운 분으로 기억이 됩니다. 말씀도 없으시고 묵묵히 음악회 오셨다가 가신 분, 글로만 나타나는 분이셨습니다. 김원구 선생님은 음악계에 대단히 중요한 업적을 남기신 분이라 생각합니다. 오늘 선생님의 업적을 조명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김형주 선생님은 언제 김원구 선생님을 처음 만나셨나요?


김형주: 언제부터 그분을 만났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데요. 정식으로 직접 만나고 작업을 한 것은 1990년에 제가 이끌어 왔던 한국음악평론가 협의회를 조직했을 때, 부회장을 부탁해서 부회장을 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전에도 만나서 오래 사귄다거나 하는 것은 없었지만 오며가며 만나서 인사할 정도는 되었는데요, 정식으로 활동한 것은 그때부터입니다. 이분은 음악 전공자는 아닙니다. 하지만 워낙 음악을 좋아해서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그것도 사실 처음은 아닙니다. 글쓰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 초반부터입니다. 이분이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을 처음에는 몰랐지만 점점 개인적으로 접촉하게 되었고 활동 범위가 넓혀지고 잡지에 기고하다보니 관심을 가져서 1990년에 평론가협의회를 부회장으로 영입을 했습니다.


이용일: 이상만 선생님은 언제 처음 만나셨나요?


이상만: 본격적으로 가까워진 것은 1978년에 세종문화회관을 개발할 때에 모든 해설이나 문서를 그분에게 맡겨서 가까워졌습니다. 가까워진 것은 1978년에 음악펜클럽회원으로 가까워 졌지만, 그분은 1970년대나 되어서 음악계하고 접촉을 가지기 시작했고 그전엔 출판계에서 일을 했습니다. 1969년에 현대문학의 수필로 당선이 되어서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그분의 연령에 비해서는 음악계하고 인연을 맺은 것은 비교적 늦었습니다.
또한 김원구 선생은 황해도 봉산분이신데, 봉산은 사리원 옆에 봉산탈춤으로 유명한 고장입니다. 봉산은 황해도에서 부유하고 잘살고 하는 동네고, 그곳의 사람들이 보수적이라 철도를 못 지나가게 해서 철도가 사리원으로 빠지게 되어 신도시가 되고 봉산은 구도시가 되었습니다. 중학교는 서울에 있는 경신 중학교를 다녔습니다. 아마 경신 중학교를 다녀서 기독교하고 일찍부터 관련이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김성태 선생이 같은 학교 출신이고요.
일본에서 가서 중앙대학이라고 하는 한국 사람이 많이 들어간 곳에서 법과를 다녔습니다. 이분이 음악평보다는 수필 같은 글을 많이 썼는데, 겉으로 보기에는 과묵한 것 같지만 말을 하면 굉장히 잘하십니다. 그래서인지 글도 굉장히 잘 쓰셨는데, 일반적인 사람들이 쓰는 용어보다는 문학적인 용어를 많이 구사하고 그리스신화에서 인용해서 거기에 다 대비를 시키는 글을 써서 ‘김원구’ 하면 ‘그리스신화’가 될 정도를 인용 하셨습니다.


김영숙: 저는 1984년부터 잡지 <월간음악>에서 일해서 그때부터 김원구 선생님을 뵈었는데 키도 크고 멋있으셨습니다. 원고를 받으면 원고가 한편의 문학 수필을 읽는 것 같았고요. 본인이 음악을 전공하지 않아서인지 유신선생님과 다르게 음악인들과의 교류보다는 혼자 활동하셨습니다. 인용문구가 많았고 표현이 화려하고 섬세하고 그래서 칭찬을 했는지 지적을 했는지 분간이 안 될 정도로 이었습니다(웃음). 보듬어 주고 격려하고 꾸짖으면서도 직접적으로 표현을 하지 않으셨죠. 그 특이한 필체 때문에 처음에는 놀랐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인용을 많이 하실까 하고 생각했었죠. 제가 공부할 때에도 그분의 문장을 가지고 공부했습니다.


이용일: 김원구 선생은 편집자로써는 좋은 직장을 오래 다녔습니다. 퇴직을 하신 후에, 평소에 좋아했던 음악 쪽으로 방향을 바꾸지 않았나 싶었습니다. 가족관계는 어떻게 되나요?


김영숙: 사모님이 계셨습니다. 선생님께서 60대 정도에 <음악동아>, <객석>에서 글을 쓰시면서 원고 수입이 많아지게 되셨고 사당동에 저택을 사셨습니다. 기자들을 초대한다고 해서 저도 초대받아서 사모님과 음식도 먹었던 기억이 납니다. 당시에 60대 나이에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에 대해서 설레고 좋아하셨습니다.


이용일: 요즘 “영어, 수학, 국어로 먹고 살고 예체능으로 노후를 즐기자.”라는 말을 하는데요. 건실한 출판사에 계셨고 현대문학에 등단될 정도의 문장력이 있으셨으니, 젊은 시절에는 열심히 일하시고 노후에는 그 좋은 문장력으로 남은 삶을 즐기신 것이 되겠네요.


김영숙: 저희 잡지 마감 날에도, 오늘 원고를 주세요하면 편집실에 오셔서 원고를 쓰셨습니다. 그분의 글씨체가 벌레가 기어가는 글씨였는데 그분의 글씨는 보는 차장님이 따로 계실정도로 독특한 문체였습니다. 그 당시에 귀국한 연주자 가족들이 같이 김원구 선생님에게 이야기 듣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이용일: 이야기를 들으니 호랑이 담배 물던 시절 같습니다. 당시에도 김형주 선생님은 조용히 음악회에 다녀오셨는데 김원구 선생님은 음악인들을 많이 만났네요.


김형주: 김원구 선생은 무거운 호인입니다. 화를 내는 것을 보지 못했고 마음이 선하고 착했습니다. 말수도 그리 많지 않아서 필요한 말만 하고 조용히 지냈습니다. 사람이 선하고 착해서 남을 비난하거나 욕하는 것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단 한 가지, 술을 좋아했죠.
수필을 주로 했지만 결국 음악을 좋아해서 음악평론으로 돌아갔는데, 글 자체도 신랄한 날카로운 면은 없었습니다. 음악을 들어도 좋은 점만 택해서 쓰게 되고, 성격이라던지 연주를 있는 그대로 썼습니다. 어떻게 보면 비평을 하는 성격이 아니지요.
상대에 대한 애정과 말하고 싶은 것, 도움이 되는 것을 해주고 싶다는 평이 있습니다. 이러한 면에서 그분이 비평가냐 하는 말을 하기도 하지만, 그분은 그분 나름대로의 비평세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주장해서 쓴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는 상당히 인간미랄까, 상대에 대한 애정이랄까 하는 것이 강하다 할 수 있습니다.


이용일: 사실 상대방 배려하고 하는 것은 평이 끝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그런 이유가 음악을 전공 안했기 때문에 깊이까지는 파고들 수가 없지 않나 싶습니다.


이상만: 음악 비평가이긴 하지만 그분은 속성은 수필가입니다. 모든 비평을 쓸 때도 수필로 쓰는 경향이 많았고 굉장히 부지런하셨습니다. 음악회마다 빠지지 않는 곳이 없고 그 분이 일본 책을 많이 읽으셨습니다. 그래서 독서량이 많아서 인용을 많이 했고 좋은 문장력을 가지고 있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을 하는데... 비평을 썼으니까 비평가라고 할 수 있지마는 어떻게 보면 주례사를 쓰는 듯한 비평이 그 양반의 특징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 것으로 인해 사람이 자성하고 말은 없지만 누구나 접근하기가 쉬워서 특히 음악 하는 여자 학부형들이 그분의 주위에 많았고 김원구씨가 안 오면 심심하다 하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이용일: 우리나라 음악계에서 감상자들이 잘 듣지 않고, 평이 부재하다고 말하는 것을 제가 지난번에 느꼈습니다. 지난번에 한 교수님의 베토벤 소나타 연주를 듣고 다른 피아니스트들과 작곡가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1번과 2번의 소리가 차이가 있다고 제가 말하니, 그들은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연주가 끝나고 제가 무대로 찾아가서 “1번과 2번 듣고 소리의 차이가 있네?”라고 물으니까 “교수님 차이가 없이 왜 치겠습니까? 당연히 차이가 있습니다.”라고 대답하여서 쾌재를 불렀습니다. 나에게 차이가 없다고 한 음악가들은 음악회에 와서 음악을 듣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음악가라도 전심을 다해서 듣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김원구 선생도 전심으로 들었으면, 의례적으로 들었던 음악가들보다 낫지 않나 싶습니다. 그런 마음을 문장력으로 표현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상만: 비평가로서 보다는 이 분이 여기저기에 글을 많이 썼습니다. 그런 것으로 인해 그 음악에 대한 흥미와 관심을 일반 음악가가 아닌 대중들에게 확산시키는 일에는 굉장한 역할을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이용일: 대단한 업적입니다. 저도 다른 곳에서 많이 봤습니다. 글쟁이들은 글을 알아봅니다.


김영숙: 지금은 음악감상 해설과 렉처콘서트가 많이 있지만 그 당시에는 연주자가 숨을 죽이면서 연주에 집중하지 모션과 말은 생각지 못했다. 김원구 선생님의 음악평론은 렉처스타일로 연주자가 선곡한 레파토리와 프로필을 가지고도 근사한 평을 할 수 있는 탁월한 능력이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예를 들어, ‘베토벤 소나타 전곡을 하기 위해 연주자는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을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음악을 듣지 않고도 좋은 평을 쓰셨습니다. 음악을 좋아한 마니아들에게는 아주 굉장히 좋은 해설이었습니다. 저도 역시 좋아했던 것은 그런 흐름에서 이었습니다. 


이용일: 특별히 더 하고 싶은 말씀 있으신가요?


이상만: 이분은 음악 주변의 이야기를 많이 썼습니다. 그리고 이 분 만큼 많이 쓰신 분도 없습니다.


김영숙: 잡지 한 호에 많아야 3편인데 김원구 선생님의 글은 4~5편이었습니다. 평을 꼭 써야하는데 실을 글이 없어서 못 올리게 되면 김원구 선생님께 부탁했습니다.


이용일: 다른 잡지에도 엄청 쓰셨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상만: 1980년 중반에는 원고료를 많이 받았습니다. 객석에 내가 있을 때도 그분에게 공로 필자 상을 드렸는데, 그때 객석은 원고료가 작지 않았었습니다. 


김형주: 이분은 음악을 전공하지 않았고, 이분의 비평은 전문적인 입장에서의 예리한 비평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문장력이 좋고 둥글둥글하면서 인상적인 면이 그분의 특징입니다. 미학적인 면에서는 그런 면이 좋은 영향을 미치지 않았겠는가 싶습니다. 그렇게 깊이 있는 비평은 아니지만 그분대로의 좋은 면이랄까, 인상을 그대로 표현하는 과정에서는 하나의 미화 의식이 강했습니다. 그래서 문장 자체에서 주는 매력이 있는 독특한 비평 활동을 했습니다.


이상만: 경신중학교로 유학 올 정도라면 꽤 잘 살던 집안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원래 괜찮은 집에서 태어났으니 경제적인 어려움도 별로 없었겠고, 그래서 그런 성격이 글에 나타나지 않았는가 생각합니다. 음악 이해를 위한 많은 책을 썼는데, 호불호가 갈립니다. 어쨌든 간에 많은 글을 남긴 것은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고 ‘음악문필가’라고 이야기 하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싶습니다.


이용일: 일본의 중앙대 법과는 알아주는 대학이었다. 엘리트 코스를 밟으신 분이 아닌가 싶습니다.


김형주: 학자 스타일입니다. 활동적인 활동가라고 할 수는 없고 차분한 성격에 사람이 원래 착해서 내가 볼 때는 착할 선자의 표창적인 장본인입니다.


이용일: 하지만 잘 모르는 사람에게는 냉철했습니다. 


김영숙: 가정적인 편이셨습니다. 딸 이야기를 많이 하셨는데 가정적이고 여성을 높여주시는 분이셨습니다.


이용일: 출판사에 오래 계시면서 생활 기반이 닦이신 분입니다. 


이상만: 좋은 자리에 계셨지요.


김형주: 당시 음악회에 리셉션이 많았는데 김원구씨는 그 자리에 꼭 갔습니다. 그것이 인상에 남습니다.


이용일: 김원구 선생님의 마지막은 어디에서 보내셨나요?


김영숙: 서울에 살다가 춘천으로 내려가셨습니다.



이상만: 장례식은 서울 보라매 병원에서 했습니다.


정리: 김진실 기자. 사진: 김문기 부장


기사의 일부만 수록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음악춘추 2017년 2월호의 기사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김문기의 포토랜드>



김형주(한국원로음악가협회 회장)


진행 : 이용일(한국음악교육협회 명예회장)


이상만(음악평론가, 국제델픽위원회 명예회원)


김영숙(프라움악기박물관 학예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