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음악춘추

인물탐구 음악춘추사 노병남 사장 / 음악춘추 2018년 8월호

언제나 푸른바다~ 2019. 5. 3. 12:24

기획대담 인물탐구

우리나라 음악계와 음악출판계에 큰 영향을 끼친

음악춘추사 노병남 사장

 

1934510일 생.

전라남도 함평에서 태생.

서울공고, 건국대 졸업.

경향일보 조사부 기자 역임.

국민음악연구회 기자로 근무.

1977년에 악보출판 전문 음악춘추사 설립.

19824월 피아노음악 창간.

19959월 음악춘추 창간.

2002년 타계.

베스틴 피아노 교본을 비롯하여, 피아노 대전집, 이태리가곡집, 독일 가곡집, 및 이론서 2000여종을 출판하였고, 클래식 음악전문지 음악춘추를 발행하여 현재 275권을 발행하였다.


일시 : 2018711일 오전11

장소 : 코스모스악기 7

진행 : 이용일(한국음악교육협회 명예회장)

패널 : 김형주(한국원로음악가협회 회장)

이상만(음악평론가, 국제델픽위원회 명예회원)

이한돈(강원대학교 명예교수)

김난희(계명대학교 명예교수)

노창영(음악춘추 대표)

 

1. 노병남 사장과의 첫 만남

이용일: 오늘은 낙천가로 우리 음악계에 여러 가지 소식을 알려주고, 음악가들에게 좋은 책을 공급해주신 노병남 사장의 업적에 대해 이야기 하겠습니다. 노병남 사장님은 한국 음악출판계를 활성화시키신 참신한 분이십니다. 200270세의 나이로 조금 일직 돌아가신 것이 아쉽습니다. 먼저 아드님이신 노창영 사장님이 아버님의 성장과정에 대해 말씀해주시죠.

 

노창영: 아버님의 초창기의 대해서는 제가 자세히 모르겠습니다. 단지, 서울공고를 나오시고 국민음악연구회에서 기자로 계셨던 것은 알고 있습니다.

 

김형주: 저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1957년 서울 시공간에서 국민음악연구회에서 주최한 저의 작곡발표회를 준비할 때였습니다. 당시 노병남 사장이 이강념 사장이 운영하던 국민음악연구회에 기자로 있으면서 제 작곡발표회의 실무를 맡아 모든 업무를 다 해주었습니다. 그때 알게 되었죠. 성격이 아주 착실하고 정직하고 꼼꼼했습니다. 그 이후 일 년에 한 두 번씩 만났던 것 같습니다. 이 인연을 시작으로 상당히 오랜 기간 교우 관계를 맺었습니다. 노 사장님이 국민음악연구회를 그만두고 독자적으로 음악을 출판했는데, 당시 사용했던 사무실이 충무로4가에 있던 금수현씨가 운영하던 월간음악 사무실 옆이었습니다. 제가 월간음악에도 자주 들렀기 때문에 오가며 노 사장님을 자주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월간 피아노 음악을 발행할 때 제가 매월 글을 기고하면서 꾸준히 교류 하였습니다.

 

이상만: 앞서 자제분께서 서울공고를 나오셨다고 했는데, 그 당시 서울공고는 공부를 잘 하지 않으면 입학하기 어려운 명문고였습니다. 그래서 서울공고를 다녔다고 하면 사회적으로 상당히 인정을 받았고, 공과계통으로 나가면 출셋길도 빨랐습니다. 그런데 이 분이 공과계통으로 가지 않고 첫 번째 취직한곳이 경향신문사 조사부입니다. 경향신문은 당시에 가장 올바른 소리를 하는 언론사이었습니다. 아마 경향신문 조사부에서 상당히 혹독한 훈련을 받았다고 생각이 됩니다. 저와는 후에 국민음악연구회에서 만났는데 이분이 굉장히 환상적인 사람이었습니다. 늘 얼굴에 미소를 띠면서 친화적이었습니다.

 

이한돈: 제가 1975년부터 강원대학교에 교수로 재직했는데, 당시에 노병남 사장님께서는 지방 출장을 자주 다니셨습니다. 강릉에 있는 관동대학교에 가셨다가 춘천에 꼭 들리셨습니다. 제가 바쁘신데 왜 춘천까지 들리시냐?”고 물으니 빙그레 웃으며 저를 보러 오셨다고 유쾌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게 춘천에서 노사장님과의 만남은 돌아가시기 전까지 이어졌습니다.

 

김난희: 저는 1979년에 귀국한 후, 번역한 책 출판 문제로 사장님을 처음 뵙게 되었습니다. 첫 만남이었지만 이상한 친밀감을 느꼈습니다. 그 친밀감은 후에 사장님과 책을 출판하고, 베스틴 피아노 교재에 대한 강의를 하면서 운명적인 만남이 되었습니다. 항상 음악계에서 진취적인 노사장님은 한국에 베스틴 교본을 소개하면서 저를 강사로 초청하였습니다. 베스틴 교본의 저자 베스틴 여사를 미국에서 한국으로 초청하여 전국을 순회하며 교재를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 강의를 하였는데, 제가 통역을 맡았습니다. 사장님께서 직접 차를 몰아주시기도 하며 베스틴 여사와 함께 전국을 돌면서 한국 피아노 교사들을 위해 강의를 하였습니다. 당시에 베스틴 교본을 우리나라에 도입한 것은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어린이 음악교육을 중요하게 생각하시고, 새로운 방법을 도입하여 바른 방향으로 바꾸기 위해 노 사장님이 직접 발로 뛰신 것이죠. 저는 이때의 일이 음악인으로 평생 잊지 못할 추억입니다. 그리고 노병남 사장님의 인품에 대해 존경 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용일: 국민음악연구회를 나와 잠시 태림 출판사에서 일본 춘추사판 피아노 전집을 만들고 영업한 분이 노 사장님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것이 노 사장이 본격적으로 음악출판계에 들어오면서 세일즈맨으로서 능력을 발휘한 것이며, 그분이 태림출판사가 음악계에 기반을 잡는데 큰 역할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음악출판이 나아갈 방향에 대한 본인의 주관이 매우 뚜렷하셨습니다. 그리고 친화력이 좋으셔서 일을 할 때 상대방이 기분 좋게 하게끔 하셨습니다.

 

이상만: 이용일 선생이 말씀을 하셨지만, 노병남 사장님은 아이디어가 많은 사람입니다. 그러한 아이디어는 경향신문 조사부에서 훈련 받은 것으로 생각 됩니다. 조사부가 화려한 직장은 아니지만 많은 정보를 다루는 곳이었습니다. 그리고 노사장이 꿈이 컸습니다. 사업을 하면서 돈을 벌려고도 했겠지만, 자신만의 아이디어를 실현하는데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한 가지 일화를 이야기 하자면, 2달에 한번 구두를 새로 사 신었다고 합니다. 그 말은 발로 전국 각지를 뛰어 다니면서 일했다는 것이겠죠. 음악출판 언론계에 전설적인 인물이라고 생각합니다.

 

김난희: 대단하셨습니다. 베스틴 여사를 모시고 전국 각지를 돌면서 배스틴 교본을 사용하는 방법에 대한 세미나를 여셨는데, 봉고차로 강원도부터 시작해서 비행기를 타고 제주도까지 우리나라 전체를 돌았습니다. 또한, 한국 학원 원장 20여명과 함께 미국의 베스틴 여사 스튜디오에 직접 방문을 한 적이 있습니다. 당시 저와 추계예대의 하혜자 교수님께서 통역을 맡고 노 사장님께서 인솔하셨는데, 한명 한명 세심하게 신경 써주시고 모든 일정을 관리하시는 등 너무나 많은 배려를 해주었던 기억이 납니다.

미국 샌디에고에 위치한 베스틴 스튜디오의 방문은 효과적인 피아노 교수법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하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당시에 미국의 교수법이 상당히 우리나라보다 앞서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나라도 시간이 지나면 이 수준으로 성장할 것이라는 기대감도 가졌습니다. 당시에 인상적인 에피소드가 있는데, 베스틴 여사의 스튜디오에는 손자, 손녀의 손을 잡고 어르신들이 피아노를 배우러 오시는데, 한 달에 한 번씩 열리는 향상음악회에서 혼자 연주하기에는 떨리니 손자와 함께 치겠다는 할아버지가 계셨다고 합니다. 이 분의 원래 직업은 의사이셨는데, 손자와 듀엣으로 함께 연주를 하신 후에 무대를 마치고 내려오셔서도 손을 떨면서 이렇게 떨리기는 처음이라고 하신 것이 생각납니다. 이러한 미국연수를 노 사장님께서 앞서서 생각하시고 우리나라 음악교육에 새로운 씨를 뿌리고자 하셨던 것 같습니다.

 

이용일: 노 사장님이 어떻게 베스틴 교재를 알게 되었나요?

 

노창영: 추계예술대학에 계신 송정이 교수님께서 소개해주셨습니다.

 

이용일: 사실 베스틴이라는 좋은 교본을 주변에 아무리 소개해줘도, 노사장 본인이 좋은 책을 찾으려는 마음이나 그것을 보는 눈이 없으면 그것을 활용 할 수 없었을 것 입니다.

 

이한돈: 당시에는 모든 학원들이 바이엘로 아이들을 교육했습니다. 그러나 바이엘은 기능적인 음악을 배우는 것이기에, 음악적으로 아이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기에는 부족했죠. 춘천에 오셔서 함께 식사하는 자리에서 피아노를 전공하지 않은 저에게 베스틴 피아노 교재에 대한 이야기를 처음 하셨고, 당시에 강원대학에 근무하고 있던 저는 노 사장님께서 부탁하는 춘천에서의 베스틴 강습회에 적극 협조하였던 기억이 납니다. 그 당시 베스틴 교육은 큰 반향을 일으켰고, 강원도의 음악 교육 수준이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노사장님의 역할이 굉장히 컸다고 생각합니다.

 

이용일: 노 사장님은 전국을 출장 다니면서 많은 음악가들과 연을 맺었습니다. 대인관계가 굉장히 무난하신 분이셨죠. 제 생각에는 베스틴을 하게 된 동기가 현재 교육계에 대한 불만과 새로운 사업에 대한 갈망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김난희 선생님 함께 베스틴 전국을 다니며 강습회를 하셨기 때문에 많은 일화가 있을 것 같은데, 생각나는 것이 있으신가요?

 

김난희: 재미있는 일이 많았는데 그 중 생각나는 한 가지가 있습니다. 어느 도시인지는 잊어버렸는데, 베스틴 여사가 자신이 피아노를 치는데 함께 치면서 도와줄 사람이 필요하다고 수강생들에게 요청했는데 선뜻 나서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자 노 사장님께서 손을 번쩍 드시고 무대에 올라오시더니, 무엇을 치면 되냐고 물으시면서 직접 피아노를 치셨습니다(웃음). 또 하나는 관동대학교에서 썸머 뮤직 캠프를 할 때였습니다. 김석 교수님, 카자흐스탄 피아니스트 등 많은 음악가들이 함께 했습니다. 그때 밤마다 노사장님이 저희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면서 즐겁게 해주시려고 노력하셨습니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그때 육체를 너무 혹사하셔서 일찍 저희들 곁을 일찍 떠나신 것이 아닌가 싶어 마음이 아픕니다.

 

3. 노병남 사장이 국내 음악계에 끼친 영향

이한돈: 음악이 발전하려면 음악인, 출판업, 악기점이 함께 발전해야 합니다. 좋은 악기와 책을 음악가들에게 소개하는 것이 음악을 발전시키는데 중요한 것을 합니다. 노 사장님께서 이것의 중요성을 아시고 그 역할을 하신 것 같습니다.

 

김난희: 외국에서도 국내 음악출판사를 이야기하면 음악춘추사를 대표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만큼 국내 음악출판계를 격상시켜놓으셨고, 밑바탕이 되었다고 할 수 있겠죠.

 

이용일: 지금은 인터넷이 있다 보니 악보 구하는 것이 쉬어졌습니다만, 옛날에는 악보 구하는 것이 어려웠습니다. 그 당시 전집을 구상하고 보급한 사람이 노사장입니다. 노 사장님이 출판계에 돌풍을 일으키셨습니다. 이상만 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이상만: 이 분이 물론 악보 출판에 상당히 주력했지만, 악보 이외에 단행본 출판도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음악문화 전체를 아우르는 분위기를 조성해야 하겠다고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이유선씨가 쓴 <한국양악 100년사> 같은 경우에는 경제성이 없어 절판 위기에 몰린 책이지만 나중에 음악춘추사가 출판해주었고, 어려운 음악가들의 출판도 많이 도와줘서 출판문화 전체와 음악계 전체를 아우르는 생각을 했다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금성음악 출판사에서 <한국가곡 전집>을 출판했는데 그것의 오리지널 아이디어는 노병남씨가 가지고 있던 것을 넘긴 것이었습니다. 물론 돈을 받고 넘기는 것은 아니었지만, 당시에 노 사장 입장에서는 음반 제작이 벅차서 김정엽씨와 의논해서 금성 출판사에서 출판하게 했는데, 그것이 대히트를 했습니다. 또한, 아까 이야기 했지만 노사장이 사람과의 관계를 아주 친화적으로 맺으니, 여러 사람의 이야기를 귀담아 들었습니다. 추계에 있었던 송정이 선생이 음악문헌에 대한 정보를 많이 가지고 있었는데, 미국에서 공부했으니 베스틴이 굉장히 좋은 것이라고 광고를 했습니다. 이 이야기를 흘려듣지 않고 귀담아 들은 노 사장이 국내에서 베스틴을 시작했는데, 처음에 굉장히 고민이 컸습니다. 이것이 굉장한 모험이라고 하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이를 극복하고 시작한 것이 너무나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용일: 베스틴 교본은 가르치는 교사의 깊은 연구가 필요한 교재이다 보니 교재의 확산이 쉽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김난희: 저도 그 부분에 대해 생각해보았는데, 베스틴 교본은 바이엘 교본과 접근방법 자체가 다릅니다. 학원 원장들이 베스틴 교본을 가르치려면, 이 교본에 대한 완벽한 이해가 있어야 합니다. 이용일 교수님께서 말씀 하셨지만 이 교본의 진가를 보면 이 교재가 대한민국을 휩쓸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 것은 한국적인 토양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것과 학원 원장들이 스스로 연구하지 않은 자세가 아쉽습니다. 당시만 해도 피아노 학원은 어깨 너머로 피아노를 배운 원장들이 운영을 했습니다. 그래서 이 새로운 접근 방법을 실제적으로 적용하기가 힘들었던 것 같습니다.

 

이용일: 제가 만든 <재미있는 체르니 30>을 피아노과를 졸업한 원장들은 좋아했는데 전공하지 않은 원장들은 활용하지 못했습니다. 아무튼 피아노 교육의 한 시대를 정리하게 된 것이 베스틴의 도입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 피아노 음악의 전환기였습니다. 매우 획기적인 작업을 하신 것이죠.

 

김형주: 노 사장님은 우리나라 음악출판의 초창기에 활동한 분입니다. 음악가들이 책을 많이 사지 않기 때문에, 음악출판이 상당히 어려웠습니다. 그런 어려움 가운데서 언론계통의 잡지를 낸다는 것이 대단합니다. 노 사장이 어려움을 각오하고 한 것입니다. 그것이 음악계에 큰 공헌을 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면에서 음악계에 기록할만한 업적을 남겼다고 할 수 있겠죠.

 

이용일: 노 사장님이 열심히 돌아다니며 쌓은 인연으로 인해 제가 알기로 노사장님이 살아계실 때, 음악춘추 잡지를 구독하는 독자가 상당히 많았습니다.

 

이한돈: 베스틴 강습회를 춘천에서 처음 열었을 때, 수강생들이 많이 오지 않았습니다. 그때도 노 사장님은 첫 숟가락에 배부를 수 없다며, 끝까지 밀고 나가셨습니다. 추진력이 대단하셨던 것 같습니다.

 

이상만: 피아노 음악이 1977년에 창간되었는데, 그때 피아노라고 하는 한 음악분야 이름을 가지고 전문잡지를 만든 것은 처음입니다. 그것이 우리나라 피아노계가 폭이 넓어지고 발전할 수 있는 결정적인 계기를 만들었습니다. 지금 우리나라 피아노 연주자들이 국제적으로 많이 배출이 되고 성공한 연주자가 많이 나올 수 있는 것은 노 사장 같은 분들 때문에 현재와 같은 긍정적인 결과들이 나오는 것에 대해 밑거름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물론 그 옆에는 피아니스트 정진우 교수님이 뜻을 같이하며 음으로 양으로 많이 도와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사실 정진우 교수님과 함께 일했다는 것은 노병남 사장이 가진 자질과 철학을 정진우 교수님이 인정했다는 것이지요. 이 두 사람의 관계가 우리나라 음악계의 전반을 발전시킨 것이 중요한 요소 중 하나입니다.

 

노창영: 제가 1988년에 회사에 입사해서 아버님과 20년 같이 근무했는데, 아버님의 친화력과 추진력이 대단했습니다. 또한, 정진우 선생님이 물심양면으로 도와준 것이 커다란 도움이 되었습니다.

 

이용일: 베스틴 책을 배우면 음악통론을 배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이 책은 화성법을 모르는 사람이 가르치기 힘듭니다. 우리나라 피아노 음악계가 이정도로 발전한 이유는 판에 박힌 바이엘과 체르니에서 벗어나기 시작하면서 부터입니다. 틀에 박힌 교육에서, 지금은 그것에서 많이들 벗어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피아노 음악의 궤도를 바꾸어 놓은 것이 베스틴이고, 그것을 보고 자극되어 만든 것이 현재 나와 있는 다른 교재들입니다.

 

김난희: 현재 출판되는 바이엘 중에서는 <새로운 바이엘>이라는 이름을 가진, 베스틴적인 요소가 많이 담겨 있는 교본들이 출판되고 있습니다. 베스틴 교본이 가지고 있는 장점들을 상당히 많이 가미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저도 어릴 때 바이엘로 피아노를 처음 배웠는데, 미국으로 유학을 가서 같은 클래스에 있는 다른 친구들의 음악적인 면모를 보고 많은 것을 느꼈습니다. 같은 곡을 교수님께서 과제로 내주시면 미국 학생들 두 명은 암보를 못하고 가도 음악이 살아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는데, 저는 곡을 완벽히 외우고 가도 돌을 치는 듯한 소리가 났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힘들었습니다. 저는 이것의 원인을 어릴 때 배웠던 교본의 차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저 역시 노사장님과 베스틴 강습을 함께 한 것도, 사장님의 방향이 옳고 이 정도면 내가 기여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전국 순회를 참여한 것 입니다.

 

이용일: 처음부터 즐기면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갇혀지는 음악을 기계적으로 가르쳤기에 어린이들이 음악을 힘들어 했습니다.

 

김난희: 베스틴이 큰 뿌리를 내리지는 못했지만, 현재 20~30대 피아니스트들의 음악교육에 기여하고 효과를 본 것은 맞습니다.

 

이용일: 오늘 나와 주신 패널 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제가 알기로 음악춘추사의 노사장님과 저희 보다 더 인연이 깊고, 이 자리에 나와서 함께해야할 음악인들이 많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한정된 지면으로 인해 패널들끼리 이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감사합니다.

 

_ 김진실 기자. 사_ 김문기 부장




김형주(한국원로음악가협회 회장)


김형주(한국원로음악가협회 회장)


진행 : 이용일(한국음악교육협회 명예회장)


진행 : 이용일(한국음악교육협회 명예회장)


이상만(음악평론가, 국제델픽위원회 명예회원)


이한돈(강원대학교 명예교수)


이한돈(강원대학교 명예교수)


노창영(음악춘추 대표)


김난희(계명대학교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