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춘추 기획대담-인물탐구
대구 관악계의 발전 초석 세운 오보이스트 임종명 선생
대구 출생으로 계성고등학교를 마친 후 서울대학교 음악대학에서 작곡을, 한양대학교 대학원에서 국악이론을 전공한 임종명(1934. 6. 18~ 1991. 3. 13) 선생은 1961년부터 1969년까지 서울시향 수석 오보이스트로 활동하였으며, 1970년 대구로 내려간 후 계성중 고등학교 교사를 역임하고 1977년부터 효성여자대학교(현, 대구가톨릭대) 음악대학 교수로 재직하였다. 그리고 오보에를 더욱 연마하기 위해 1983년 도미하여 뉴욕 부르클린 콘서바토리와 필라델피아 템플 대학에서 수학하였다.
한편, 1976년 한국음악협회 경북지구 부회장으로 활동한 임종명 선생은 이외에도 대구 목관5중주단을 창단하여 대표를 역임하였으며, 대구 관악합주단 상임지휘자, Al Fine Concert Band 단장 및 상임지휘자, 달구벌 교향취주악단 지휘자로도 활동한 바 있다.
또한 미국과 일본 무대를 포함하여 세 차례의 오보에 독주회와 교수음악회, 달구벌취주악단 지휘, 한국작곡가협회 작곡발표회 등의 활동상을 보인 임종명 선생은 부인 김희영 선생(국립 안동대 성악과 명예교수)과 교수음악회, 부부음악회 등을 가지기도 하였으며, 대학교재인 「대학음악 통론」을 비롯하여 다수의 논문 등을 남겼다.
일시: 2012년 6월 8일(금)
장소: 계명대학교 음악 공연예술대학 학장실
진행: 이용일(한국음악교육협회 명예회장)
패널: 김희영(국립 안동대 명예교수)
오영종(대구예대 교수)
박성완(부산대 교수, 경상북도립교향악단 상임지휘자)
임우상(계명대 명예교수)
임종명 선생과의 첫 만남
이용일_ 이번 달 인물탐구에서는 우리나라의 목관악기계에 큰 공적을 남긴 오보이스트 임종명 선생의 음악 인생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임종명 선생은 저와도 매우 각별한 사이였습니다. 임 선생은 서울대 작곡과에 입학해 작곡을 열심히 공부하였는데, 학교에서 부전공을 강조해서 오보에를 부전공으로 택하였고, 공군오케스트라에서 본격적인 오보에 연주자로 활동하였습니다. 제대 후 임 선생은 서울시향 수석 오보이스트를 역임한 후 대구로 내려가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교육자로서의 역할에 충실하였기에 업적이 널리 알려져 있지 않지만, 선생의 노력이 오늘날의 대구 관악기계 발전에 초석이 되었음은 분명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럼 먼저 임종명 선생의 성장과정에 대해 부인이신 김희영 선생님께서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김희영_ 대구에서 태어나 성장한 남편은 대학에 진학하면서 서울로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가정형편이 매우 어려워서 시어머님께서는 타지에 계셨고, 그래서 남편은 외삼촌 밑에서 자랐다고 들었습니다. 시아버님께서는 한때 전라도에서 공직생활을 하셨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용일_ 초창기의 서울대 음대에서는 오케스트라의 단원이 부족하다 보니 작곡과 학생들에게 부전공으로 악기를 배울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그래서 임 선생처럼 부전공으로 오보에를 시작한 것이 전공이 되어 버린 학생들도 종종 생기곤 했지요. 선생은 작곡가로 남았더라도 좋은 작곡가가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당시 작곡가는 먹고살기가 어려웠던 반면 서울시향의 오보이스트는 안정된 직업이었고, 앞서 말씀해 주신 선생의 가정형편에 비추어볼 때 어렵게 자란 것이 이러한 선택에 영향을 끼치지 않았나 싶습니다. 임우상 선생님께서는 언제 처음 임종명 선생을 만나게 되셨나요?
임우상_ 임종명 선생님과는 서울대 음대 작곡과 입학 시험을 같이 보았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제가 불합격하게 되어 학교는 함께 다니지 못하였습니다. 후에 선생님과 제가 대구에서 교사로 재직할 때 대구시 전체 음악교사 연수가 1년에 한 번씩 열렸기 때문에 가끔 만나 뵙곤 했지요. 하지만 본격적으로 인연을 맺기 시작한 것은 제가 대구 경일중학교에 재직하고, 임 선생님이 계성학교에 근무하시고 계시던 1973년도부터입니다. 그렇게 선생님과 가까워지게 되어 그 후 1976년에 임 선생님과 함께 ‘동음회’를 만들었습니다. “서양음악을 전공하는 사람들이 국악을 연구해 보자”는 취지로 만든 모임이었고, 지금까지도 이어져오고 있는 모임이지요. 또한 저의 제1회 작곡 발표회 때에는 제가 쓴 오보에 곡을 선생님께서 연주해 주기도 하셨습니다. 물론 저 또한 임종명 선생님을 생각하면서 쓴 작품이었고요.
박성완_ 저는 대학교 2학년 때인 1970년, 임종명 선생님께서 대구에 내려오셨을 때 뵙게 되었습니다. 당시에 선생님께서 대구로 오시기도 전에 “오보이스트 임종명이 온다”는 소문이 이미 대구 관악계 전체에 퍼져있었습니다. 사실 지방에서 음악을 공부하는 학생들과 대구의 관악계에게는 서울시향에 수석 오보이스트로 계신 분이 내려오신다는 것은 하늘에서 천사가 내려온다는 말과 같게 들렸었지요(웃음). 정말 많은 음악인들이 임종명 선생님이 내려오시는 날을 학수고대하였습니다. 드디어 선생님께서 오셨을 때는 듣던 소문대로 훌륭한 오보에 소리도 들을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대구 관악계가 새로운 눈을 뜨고, 새롭게 다시 태어나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오영종_ 저도 임 선생님을 처음 뵌 것은 선생님께서 1970년 계성중학교에 부임하셨을 때였지요. 저는 중·고등학교 시절 6년을 선생님이 맡으셨던 밴드부에서 생활을 했기 때문에 선생님과 그 누구보다 가깝게 지낼 수 있었습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본격적으로 오보에를 배우기 시작했고요. 제가 기억하는 선생님의 모습은 밴드부를 맡으셨을 때 힘들고 어려운 학생들을 경제적으로나 심적으로 많이 도와주셨던 것입니다.
이용일_ 그럼 사모님께서는 임 선생과 어떻게 만나게 되셨는지도 궁금한데요(웃음).
김희영_ 저는 당시 한국복음성가단에 오랫동안 활동을 했었는데, 거기에서 같이 활동하셨던 정성훈 선생님이 저의 남편과 친구 사이였어요. 그리고 그분께서 임종명 선생님이 대구로 내려온다는 소리를 듣고 남편에게 저에 대한 이야기를 하셨다고 하시더라고요. 왜 저를 소개했는지는 모르겠는데…(웃음). 후에 저도 음악 교사로 재직 중이었기 때문에 교사 연수회에 갔을 때 남편을 처음 보게 되었고, 계성학교에 같이 근무하시던 김병태 선생님께서 만남을 주선해 주셨습니다. 서로가 미리 호감을 가지고 있었으며, 음악을 한다는 공통점 속에서 어떤 비전을 느꼈고, 가정형편과 신앙적으로도 이해와 신뢰를 가지고 만남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용일_ 사실 임 선생이 처음에 대구로 간다고 했을 때는 제가 화를 냈어요. “말은 태어나면 제주도로 가고 사람은 서울로 간다는데 왜 너는 시골로 다시 가느냐”고요. 그랬더니 임 선생이 “내가 할 일은 따로 있는 것 같다”고 이야기하더라고요. 그것이 아마 사모님을 만나러 간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드네요(웃음). 사실 임 선생이 왜 대구로 내려갔는지는 아직도 명확히 알지 못합니다. 아무리 물어도 “네가 내 속을 알 수 있겠냐.”고만 대답하였으니까요. 추측하건대, 앞에서 말씀 드렸다시피 선생은 서울대의 잘못된 관행 때문에 오보에를 시작하여 혹시 본인도 오보에 연주에 대해서 한계를 느낀 것은 아닐까 생각도 해봅니다. 그리고 오보에는 당시에만 해도 대중적으로 알려진 악기가 아니었기에 배움을 구할 선생님이 마땅치가 않았지요. 또한 초창기에는 악보가 많이 없었고, 리드도 없어서 하루종일 리드 깎느라고 시간을 다 보내기도 하고, 거기에다 악기도 없어서 군대에서 쓰던 악기를 사용하는 등 아주 어렵게 공부했고요. 그러다 보니 임 선생은 가끔 자신은 10년이 걸려서 배운 것을 다른 학생들은 1년을 배워서 따라오는 것에 쫓긴다고 얘기하기도 했습니다. 아무래도 선구자로서 도와주는 사람도 없이 혼자 해결해 가야 한다는 부담감이 컸을 테지요. 다른 분들은 임 선생이 왜 그런 결정을 했다고 생각하시나요.
박성완_ 임종명 선생님께서 처음 대구에 내려오셨을 때 오영종 선생은 중학생이었고, 같은 목관악기의 가장 가까운 분류 안에서는 저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셨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렇게 가깝게 지내며 선생님께서 저에게 가장 많이 하신 말씀은 용기를 심어주는 이야기들이었습니다. 열악한 지방의 관악계에서 포기하지 않고 더욱 시야를 크게 볼 수 있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셨겠지요. 제 기억으로는 임성길 선생님과 김성태 선생님께서 계성학교를 조금 더 음악적으로 부흥시키고자 대구로 오라고 적극적으로 권유하셨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임성길, 김성태 선생님 두 분 모두 성악이 전공이셔서 학교의 밴드부를 담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한 번씩 서울이 싫었다는 의미의 말씀을 하기도 하셨는데, 대구에서 그렇게 적극적으로 영입하려고 하시니 마음에 동요가 생기신 것 같습니다. 당시 저희들이 대구 지방에서 관악을 전공하는 학생으로서는 나름대로 활발하게 활동을 하고 있었고, 서울 다음이 대구라고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사실 우물안 개구리일 뿐이었지요. 선생님이 오셔서 관악합주단을 만드시는 등 학생들에게 희망이 되어 주셨고, 돌아가시기 전까지 대구 관악을 큰 음악의 장르로 이끌어 후세에 이어질 금자탑을 세우시기 위해 정말 많은 노력을 하셨습니다.
오영종_ 저는 중학교 때 임 선생님을 처음 뵈었고, 당시에는 음악을 전공하는 학생이 아니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관악계에 어떤 도움을 주셨는지는 잘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중·고등학교 시절을 보낸 후 대학을 가고, 성인이 되기까지의 긴 세월을 선생님과 함께 보냈다는 것이 더욱 감사하게 생각된 것은 선생님이 돌아가시고 난 후였습니다. 선생님이 돌아가셨을 때 5일장을 치렀는데요. 제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상갓집에 문상 오시는 분들이 그렇게 많은 것을 본 적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또한 문상오시는 분들이 형식적으로 인사만 하고 가시는 것이 아니라 다들 밤늦게까지 자리를 지키시는 모습을 보고 “선생님은 정말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았던 분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지요.
이용일_ 네. 임 선생은 생각이 굉장히 깊고, 어지간하면 불평을 안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가식이 없어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는 사람이었고요. 저는 선생과 군대시절도 같이 보냈습니다. 당시 임 선생이 저보다 1년 먼저 입대하였는데, 제가 훈련을 마치고 밥을 먹으러 가니까 “배고프지?”라면서 자신의 밥을 덜어주더라고요. 그렇게 배려심이 깊은 사람이었습니다. 제가 임 선생을 친구로써 경외한다고 표현하는데, 이것은 임 선생이 언제나 다정하지만 깍듯이 예의를 지키는 사람이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럼 김희영 선생님께서는 부부 사이가 아닌 음악가로서는 임 선생님을 어떻게 보셨나요?
김희영_ 저는 계성학교 밴드부의 음악회를 처음 보았을 때 매우 놀라웠고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들이 음악을 대하는 마음가짐이나 열정이 굉장히 신비롭게 다가왔고, 이러한 학생들의 모습에서 남편의 모습도 비추어졌고요. 계성학교 밴드부는 중·고등학교 학생들로 구성되어 있었고, 이 학생들이 콩쿠르에도 많이 참가하였었는데, 당시 그 어느 학교보다도 더 큰 성과를 내었습니다. 또한 저는 성격이 차분하고 내성적이라 어떤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하는데, 남편 덕분에 사회에 한 발짝 더 나아갈 수 있는 힘을 얻었습니다. 실제로 남편이 저에게 대학원에서 더 공부해 볼 것을 권유해 주어서 대학원에 진학하기도 하였고요.
임종명 선생이 국내 음악계에 끼친 영향과 교육관
이용일_ 그럼 계속해서 임종명 선생이 대구 음악계에 끼친 영향에 대해 구체적으로 이야기해 보고자 합니다. 임 선생이 대구 관악5중주단과 대구 관악합주단을 만들어 이끌기도 하였는데, 어떻게 창단하게 되었고, 어떠한 활동을 했는지에 대해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박성완_ 처음 저희 관악을 전공하는 대학생들이 모여서 임 선생님을 찾아갔습니다. 이렇게 산발적으로 관악계를 이끌어 가시는 것보다는 관악합주단을 만들어 주실 것을 요청드리기 위해서였지요. 선생님께서 처음에는 거절하셨지만 저희가 젊은 혈기에 앞뒤 일은 생각도 안 하고 밀어붙이니 후에는 결국 승낙하셨지요(웃음). 그리고 창단 연주회를 갖기 위해 연습하면서도 대부분의 연주 레퍼토리들은 무난히 연주할 수 있었는데, 유난히 5박자가 나오는 곡이 있어서, 당시 저희들은 이 곡을 보고 “우와! 이런 박자도 있냐”며 놀라기도 했었습니다(웃음). 그만큼 앞선 지식으로 대구 음악가들의 눈을 일깨워 주시고, 저희들이 경험치 못한 새로운 음악세계를 지도해 주셨지요. 그리고 연습이 끝나면 포장마차라도 꼭 들러서 선생님의 사비로 맛있는 것도 사주시고 술도 한 잔씩 건네주시곤 하셨지요.
임우상_ 대구목관5중주단은 플루티스트 김진경, 오보이스트 임종명, 클라리네티스트 박철수, 호르니스트 천창욱, 바수니스트 김종수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제가 작곡 발표회를 할 때 목관5중주곡을 써서 대구목관5중주단에서 연주해 주신 적도 있는데, 1971년도에 대구에서 처음으로 만들어진 목관5중주단이었기 때문에 대구의 자랑이라고 할 만했지요. 당시 지방에서 목관5중주단을 만들었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거든요. 아마 서울을 제외하고는 대구가 처음이었을 것입니다.
이용일_ 현재도 목관5중주나 관악합주단이 유지되고 있나요?
오영종_ 지금도 남아 있긴 하지만, 리더가 바뀌면서 활동을 쉬었다가 다시 조직되어지고 하면서 점차 뜸해진 것 같습니다.
김희영_ 저도 목관5중주단의 자료를 찾아보니 4회까지만 남아 있고, 그 이후로는 못 찾겠더라고요. 아마 6회 정도까지 이어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박성완_ 이렇게 활동이 뜸해지게 된 것에는 시대가 바뀐 영향도 있다고 봅니다. 당시에는 실내악, 관악합주 등 대부분의 실내악 모임이 영리 목적이 아닌 순수한 음악의 열정으로 조직되어지고 활동하였는데, 요즘은 영리가 개입되지 않으면 존립 자체가 어려우니 아무래도 활동을 이어가기 힘든 점이 있지요.
이용일_ 그럼 연습은 어떻게 진행하였고, 임 선생의 가르치는 방식은 어떠했나요?
박성완_ 정확한 요일까지는 기억이 안 나지만, 주기적으로 하기보다 연주회 일정을 잡고 2, 3주 전부터 매일 연습을 하였습니다. 저희들에게 고민이나 힘든 점이 있을 때 선생님께서 항상 용기를 심어주신 덕분에 당시 관악합주단에서 활동한 대부분의 학생들이 지금까지 관악계에 몸담고 있습니다.
오영종_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고등학교 3학년 때 오보에를 정식으로 시작하였습니다.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선생님께서 저를 부르시더니 “음악이라는 것은 내 음악도 있고 다른 사람의 음악도 있는데, 네가 노력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하였으니 가능한 많은 사람에게 배우는 것이 좋겠다”고 하시면서 몸소 저를 데리고 서울의 이한성 선생님과 이재옥 선생님을 찿아뵙기도 하셨습니다. 이재옥 선생님 댁이 당시에 삼성동인가 삼전동에 있었는데, 사모님이 다 찌그러진 양은 주전자를 난로에 얹어서 커피를 끓여주신 그 맛을 아직도 잊지 못합니다(웃음). 세월이 지나 저도 이제 학생들을 가르치는 위치에 있으면서 임종명 선생님께서 보통 선생님들과 다르게 학생들을 대하셨다는 것을 새삼 깨닫고 있습니다.
이용일_ 아마 그렇게 서울까지 데리고 다니신 것을 보면 오 선생을 자신의 후계자로 삼으려고 애를 쓴 것 같네요. 임종명 선생은 자신의 연주나 연습보다 학생을 가르치고 지역의 음악계를 발전시키는 것에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지요.
오영종_ 네. 임 선생님께서는 오보에뿐만 아니라 다른 악기 또는 성악에도 관심이 많으셔서 음악에 재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이 드시면 전공을 불문하고 음악계로 인도를 하셨습니다. 트럼피터 이강일 선생님(계명대 교수)과 바리톤 성기훈 선생님이 대표적인 분들이십니다.
김희영_ 남편은 투병생활을 하면서도 관현악 교재를 쓰기 위해서 계속 자료를 모으고, 외국 서적을 번역하였어요. 거의 완성을 하였는데 결국 책으로 출판하지 못하고 돌아가셔서 그것이 매우 안타까웠습니다.
이용일_ 임 선생이 서울시향에서도 수석 오보이스트로 활발히 활동하였지만 대구에서 관악합주단, 목관5중주단을 창단하여 활동한 것을 비롯하여 많은 후학들을 양성하고, 교재까지 스스로 집필하며 대구 관악계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는 것은 확실하네요.
박성완_ 네. 물론 중심체는 관악이지만 관현악 전체에 부흥을 일으키셨다고 봅니다. 일단 선생님께서 솔선수범을 하시니까 젊은 학도들이 이에 따를 수밖에 없었지요.
이용일_ 이 말씀을 통해 또 하나 생각할 것이, 이처럼 지역에 머무르는 사람 중 걸출한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나타나면 그 악기뿐만 아니라 다른 음악가들의 실력도 따라 올라가게 된다는 것이죠. 대구에서는 그러한 영향력을 가진 사람이 임종명 선생이었고요. 당시에는 충남 대전 쪽에도 관악이 많이 발전되어 있었는데, 학구적으로 자리잡지 못한 이유가 임 선생같은 리더가 없었기 때문은 아니었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이렇게 학생들에게 언제나 귀감이 되었던 분인데, 그럼 가정에서는 음악교육을 어떻게 시키셨나요?
김희영_ 첫째 딸을 작곡가로 공부시켜 보려고 했는데, 부모는 자식을 가르치기가 힘들잖아요. “그것도 못 하냐.”고 꾸중하니 결국 그만 두고 말았지요(웃음).
이용일_ 그래도 임 선생은 사람을 굉장히 중히 여기는 분이었기 때문에 가족에게도 좋은 남편, 아버지였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김희영_ 네. 말씀은 많지 않으셨지만 언제나 한결 같으셨습니다.
오영종_ 지금 생각해 보면, 선생님의 그러한 면 때문에 매주 손님이 너무 많이 와서 사모님이 힘드셨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웃음).
박성완_ 저도 기억나는 것이 당시에 선생님께서 “모여라”라고 한마디만 하시면 만사 제쳐두고 몰려갔었지요.
임우상_ 저 또한 동음회 모임을 선생님 댁에서 갖곤 하여서 찾아 뵌 적이 있는데요. 무척 궁금한 것이 임종명 선생님께서는 서울대에서 작곡을 전공하셨지요?
이용일_ 네. 맞습니다.
임우상_ 그런데 언젠가 “작품을 한 번 봅시다” 하니까 “나는 작품이 없어요. 난 작곡가가 아니라 오보이스트입니다.”라고 말씀하시더라고요. 작곡전공으로 졸업했다면 졸업작품이 있었을 텐데 말이지요.
이용일_ 당시에는 현대음악을 쓰지 않으면 아예 봐주지도 않았는데, 기독교인 작곡가로서는 가장 크게 상처받는 일이었습니다. 찬송가처럼 좋은 음악을 전혀 인정해 주지 않았으니까요. 임 선생도 독실한 기독교라서 그러한 점 때문에 많이 고통을 받았는데, 오보에로 전공을 바꾸고는 해방이 되었지요(웃음). 또 한 가지 일화가, 임 선생과 저는 공군 현역으로 서울대 음대를 다녔는데, 하루는 임 선생이 학교에 가질 않아서 “왜 안 가냐. 같이 가자.”고 했더니 “난 한 번에 두 가지 일은 안 해”라고 말하더라고요. 그런데 저는 군대와 대학을 같은 시기에 마친 것 때문에 후에 감사원의 감사에서 문제가 되어 곤란을 겪었지요. 왜냐하면 공무원은 이중경력을 쓸 수가 없는데, 저로써는 군 경력을 빼면 병역 미필자가 되고, 학력을 빼면 학력 미달자가 되기 때문지요(웃음). 그러니까 그런 것까지도 임종명 선생은 참 원칙주의자였어요. 욕심이 없는 사람이었고, 항상 바르게 살고자 노력하였고요.
박성완_ 네. 임 선생님은 대구시향에서도 몇 년간 활동을 하셨는데, 대구시향에서는 아무래도 서울에서 온 사람에 대한 배타적인 감정이 있었겠지요. 대구는 다른 도시보다도 더욱 폐쇄된 도시였는데도 선생님은 스스럼없이 잘 어울리셨고, 대구시향 사람들의 마음을 돌릴 만한 인격을 지닌 분이셨습니다.
이용일_ 그렇다면 임 선생은 주로 어떤 스타일의 곡을 좋아했나요?
오영종_ 레슨 곡을 주시거나 그럴 때는 주로 로맨틱하고 발라드한 느린 템포의 곡들을 많이 추천하셨습니다.
이용일_ 그것은 아마 연주자들을 노래부를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들고자 함이 아니었을까요. 오보이스트가 오케스트라에서 활동하기 위해서는 노래하듯 연주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한 자질이기 때문에 그것을 보완하려는 의도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럼 임 선생은 음악 말고 다른 취미 활동은 없었나요?
박성완_ 제가 음악 외에 또 하나 배운 것이 바둑입니다. 선생님께서는 바둑을 잘 두셔서 저를 붙들고 처음 기초부터 하나하나 수년 동안을 가르치셨습니다(웃음).
김희영_ 그리고 낚시도 즐겨하셨고요. 여가 생활은 항상 조용한 것을 추구하셨어요.
임우상_ 의외인 것이 바둑이나 낚시는 차분한 성격이어야 하는데, 임종명 선생님은 그렇게 조용한 성격이 아니셨거든요(웃음). 음악가는 자신의 악기에 성격이 따라가다 보니 선생님은 날카롭기도, 때론 부드럽기도 하신 분이셨는데, 무엇보다 유머러스하신 면이 많으셔서 저희 모임에서는 항상 분위기를 밝게 만들어 주시는 역할을 하셨거든요.
이용일_ 이야기를 나눌수록 참 아까운 사람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 정치적으로 연관되거나 사회적 활동을 활발히 하는 사람은 사회에 이름이 알려지기 마련인데, 자신의 일만 충실하게 그리고 묵묵히 한 사람은 그냥 묻혀버린단 말이지요. 그러한 사람이 임종명 선생이고요. 실제로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출신들조차도 임 선생에 대해 잘 몰라요. 사모님은 그러한 부분에 대해서는 아쉬운 마음은 없으신가요?
김희영_ 글쎄요. 저는 남편이 자신의 역량을 최대한으로 발휘하고자 노력하였고, 그 방법이 옳았다고 생각해요. 박성완 선생님께서 외국에서 공부하고 오셨을 때 저희 집 베란다에서 두 분이 대화하시던 모습이 늘 기억에 남아 있는데요. 박성완 선생님께서 외국에 나가 새로운 것을 공부하고 오셨으니 본인이 부족한 것을 제자이자 후배임에도 불구하고 스스럼없이 묻고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보고, 남편이 돈이나 명예를 쫓는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었지요.
오영종_ 이건 여담이지만, 선생님께서는 담배는 많이 피우셨지만 약주는 즐겨하지 않으셨는데, 사모님께서 유학을 가셨을 때 외로우셨는지 저에게 전화하셔서 술 먹자는 이야기도 많이 하셨어요(웃음).
이용일_ 임 선생이 위암으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는데, 암은 유전자가 내재되어 있으면 발병이 불가피하겠지만 아마 스트레스를 발산시키지 못하는 성격도 병을 키우는데 일부 역할을 하였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김희영_ 항상 말없이 실천하는 분이셨으니 아마 마음에는 고여있는 상처들이 많았겠지요. 그래도 참으로 감사한 것은 본인이 하고 싶었던 일들을 후회 없이 하고 가신 것입니다. 학교에서, 연주자로서 그리고 교회에서도 맡은 바 사명을 다 하셨다고 생각합니다.
이용일_ 네. 이런 프로그램이 만들어진 이상 친구라서 이라기보다 말없이 실천하는 임종명이라는 사람을 꼭 한 번 다루고 싶었습니다. 이번 좌담회를 통해서 대구 음악가들에게 희망을 주고, 특히 관악계가 활성화되는데 원동력이 되었다고 이야기를 해주시니 저 또한 임 선생이 매우 보람된 삶을 살았다는 생각이 들고, 선생을 조명하게 된 의의를 크게 느낍니다. 바쁘신 가운데 멀리까지 찾아와 주시고 뜻 깊은 자리에 함께 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정리_박진하 기자 사진_김문기 부장 사진제공_김희영
김희영(국립 안동대 명예교수)
임우상(계명대 명예교수)
박성완(부산대 교수, 경상북도립교향악단 상임지휘자)
오영종(대구예대 교수)
이용일(한국음악교육협회 명예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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