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춘추 기획대담 | 인물탐구 5월호
수도피아노사 박중규 회장
국내 최초로 피아노를 제작 보급하여 대중화에 기여
초창기 국내 악기 시장을 선도해 온 수도피아노사는 박중규 회장(1925. 12. 15 ∼ 1991. 9. 28)이 1961년에 창립한 회사로, 1960년대 국내 최대 악기 제조업체였다.
피아노와 기타를 생산하여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도 공급했던 수도피아노사의 박중규 회장은 그 공로를 인정받아 제1, 2회 봉황대상, 대통령 산업포장상, 무역박람회 회장 표창을 받은 바 있다.
특히 수도피아노사는 국내 판매에 있어서 최초로 은행적금식 월부판매를 실시해 소비층이 보다 쉽게 피아노를 구입할 수 있는 길을 터놓았으며, 프랑스의 MUS 켄그로사와 피아노 장기수출 계약(벤쉬라인 피아노)을 맺어 국내 처음으로 프랑스에 피아노를 수출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더불어 박중규 회장은 이에 안주하지 않고, 질적으로 우수한 피아노 제조를 위해 일본의 쾨니히 피아노사와 기술 제휴를 맺고, 연차적으로 기술자를 초청하여 우수한 피아노 생산에 심혈을 기울이기도 했다.
그러나 1972년 무리한 사업 확장으로 인해 부도를 맞은 수도피아노사는 결국 파산했고, 이어 당시 마케팅을 담당했던 현 (주)콜택 박영호 회장(박중규 회장의 아들)이 1973년 기타 제조사로 새롭게 사업을 시작하여 오늘날 세계 최대의 기타 메이커로 자리 잡았다.
일시: 2014년 3월 26일(수) 오후 1시
장소: (주)코스모스악기 10층
진행: 이용일(한국음악교육협회 명예회장)
패널: 김형주(한국음악평론가협의회 회장)
최영섭(한국작곡가회 명예회장)
민명술((주)코스모스악기 회장)
박용성((주)코스모스악기 전무)
박영호((주)콜택 회장)
박중규 회장의 성장 과정
이용일_ 지금까지 음악춘추 인물탐구 난에서는 주로 한국 클래식 음악 발전에 공헌하신 음악가분들을 모셨는데요. 이번 호에서는 특별히 한국 클래식 음악이 막 성장할 시기에 피아노를 제작·공급하여 여느 원로음악가 못지않게 공로가 크신 수도피아노사의 박중규 회장님을 선정해 보았습니다.
초창기 피아노 제작에 있어 선구적인 면모를 보여 주신 박 회장님께서는 우리의 음악 문화의 가장 기본적인 부분을 해결해 주신 것과 마찬가지라고 보여지므로 다양한 이야기가 나올 것이라 기대됩니다. 그렇다면 아드님이신 박영호 회장님께서 부친의 성장과정에 대해서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박영호_ 저희 아버지께서는 심장마비로 갑자기 세상을 떠나시기 전까지 자서전 출간을 준비하셨었는데요. 안타깝게도 도중에 중단되고 말았습니다. 저희 가족들은 가끔 아버지께서 생전에 자서전을 위해 정리해 놓으신 노트를 보며 아버지를 추억하곤 합니다. 아버지께서는 1925년 경상남도 합천군에서 4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나셨으며, 할아버지께서는 열심히 농사를 지으시는 농사꾼으로 자수성가하셨고, 그 자손들은 넉넉한 환경에서 유년시절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당시 아버지께서는 중학교 2학년 재학 중 교사 임용시험에 합격하여 교육자로 사회에 첫발을 디디셨지요. 그러다가 1951년 대구 수창국민학교에서의 교직생활을 마감하신 후 대구에서 풍금(오르간) 소매 및 수리가게를 시작으로 사업가로 변신하셨습니다. 그 악기사업이 번창하면서, 더 큰 꿈을 안으신 아버지께서는 1954년 서울 종로 2가에 수도피아노사라는 간판을 걸고 쉼멜, 사우탈, 이바하 등 독일 피아노를 수입하여 한국의 음악도와 지망생들에게 수준 높은 피아노를 적절한 가격으로 공급하셨습니다.
이용일_ 박중규 회장님께서는 어떻게 해서 악기사업에 발을 들여놓게 되셨는지 무척 궁금하네요.
박영호_ 아버지께서는 6·25 전쟁으로 인한 어려움 속에서도 묵묵히 교직 생활을 이어 가시면서 악기 수리업을 하는 학부형과 친분을 쌓았고, 그분과 자주 왕래를 하다 악기 수리 기술을 자연스럽게 익히셨다고 합니다. 당시 교사의 수입은 그리 넉넉하지 않았기에 이러한 기술을 배워보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에 교직 생활을 하시면서 틈틈이 악기 수리업을 하는 학부형의 일을 도우며 풍금(오르간)의 간단한 수리 기술을 배우셨습니다.
그렇게 악기 수리법을 익히시다가 이제는 혼자서 일을 해도 괜찮을 것 같다고 판단하신 아버지께서는 과감히 교사 직을 그만 두고 악기 수리를 업으로 삼으셨습니다. 또 그와 동시에 풍금을 싸게 구입해서 수리한 후 팔기도 하였고, 더불어 외할아버지의 사업장 옆에 작은 가게를 얻어 축음기 및 여러 악기를 진열해 놓으면서 악기 사업을 시작하시게 됩니다. 그 때가 1951년으로 알고 있는데, 당시 아버지의 나이는 26살이셨던 것 같네요. 그 사업이 점차 번창하여 대구 중심가로 점포를 옮기셨고, 대구에서는 한계가 있다고 느끼신 아버지께서는 1954년에 사업을 큰 규모로 진행하기 위하여 서울로 올라오셨습니다.
박용성_ 저희 집안에서 음악 관련 분야의 종사자로는 박중규 회장님 밖에 없으셨습니다. 다른 형제분들은 사업을 하시거나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셨지요.
이용일_ 여기까지만 간략히 들어보아도 박중규 회장님께서는 굉장한 실력자라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은 상상할 수 도 없는 중학교 2학년 때 교사 임용시험에 합격하셨다는 대단한 이력을 가지셨고, 또 악기에 대한 관심과 열정으로 음악계에 선구자적인 역할을 하신 것 같습니다.
박중규 회장과의 첫 만남
이용일_ 이 자리에 계신 선생님들께서는 박중규 회장님과 어떻게 인연이 닿게 되셨나요?
김형주_ 워낙 오래 전이다 보니 정확한 동기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 때 박중규 회장님과는 자주 만남을 가졌었고, 사업적인 여러 의견을 나누었습니다.
최영섭_ 제가 박중규 회장님을 처음 알게 된 것은 1960년대 후반으로 기억됩니다. 저는 그때 한 피아노사의 제안으로 피아노계에 발을 들여놓았지요. 그렇게 매일 출근을 할 때면 입이 떡 벌어지는 외관의 수도피아노사가 항상 눈에 띄었고, 저는 30m 근방에 있던 악기사에서 근무를 하였습니다. 가끔 박중규 회장님을 만나 뵙게 되면 반갑게 인사를 나눴던 추억이 새록새록 나네요. 그리고 아드님이신 박영호 회장님을 오늘의 자리를 통해 유심히 뵙고 보니 아버님을 참 많이 닮으셔서 또 한 번 그 시절이 떠오릅니다.
이용일_ 민명술 회장님께서는 박중규 회장님과의 첫 만남을 어떻게 기억하고 계시는지요?
민명술_ 제가 박중규 회장님을 처음 뵙게 된 것은 명동에 위치한 한국악기사의 사장님께서 세상을 떠나시자 수도피아노사가 이를 인수하면서 자연스럽게 제가 수도피아노사의 소속이 되어서였습니다. 그렇게 해서 박 회장님을 13년간 모시게 되었지요. 곁에서 오랫동안 지켜본 박중규 회장님께서는 업무에 있어서는 욕심이 많으셨고, 직원들에게는 참으로 인자하신 분이었습니다.
그리고 질적으로 우수한 피아노의 국내 제조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시급한 문제가 기술 도입이었기에 새로운 브랜드 개발을 위해 일본 쾨니히 피아노사의 기술자들을 초빙해 작업에 박차를 가하였는데, 이러한 과정들이 결코 쉽지는 않았습니다. 경쟁 업체들에서도 이를 추진하려 부단히도 애를 썼었었지만 박중규 회장님께서 좋은 조건으로 기술자들을 대우해 주셔서 값싸고 질 좋은 피아노를 만들 수 있었습니다. 그 결과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었던 피아노 수출을 성사시킬 수 있게 되었지요. 이후에는 기타도 지속적으로 만들어 수출하였고요. 그렇게 열정적인 훌륭한 경영자로 인해 직원들도 많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특히 박중규 회장님의 확고부동(確固不動)한 신념은 현재까지 제가 코스모스악기를 운
영함에 있어 큰 지침이 되고 있습니다.
박중규 회장의 창업 배경
이용일_ 당시 우리나라는 먹고 사는 근본적인 문제도 해결이 되지 않을 만큼 삶이 각박했던 시절이었기에 피아노를 보급함에 있어 박중규 회장님께서는 많은 어려움을 겪으셨으리라 짐작됩니다.
박영호_ 1960년대 우리나라의 외환사정이 힘들어지자 정부에서는 이에 대한 대책으로 사치품의 수입을 전면 금지시키게 되는데, 이에 피아노를 사치품목에 포함시킴으로써 국내에 외국산 피아노 보급이 중단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께서는 성수동에 2,000평 남짓의 공장 부지를 마련해 피아노 제조 공장을 마련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재일교포가 운영하던 일본의 중견 피아노사와 협약을 맺고 일본인 기술자 네 분을 국내로 초빙하여 6개월간 한국 근로자들에게 피아노 제작에 관련된 기술을 전수시키도록 하였습니다. 그 결과 피아노의 주요 부품을 수입하여 피아노를 제작·판매한 지 6개월이 채 안 되어서 순수 국내 기술로 피아노 제작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물론 요즘은 대기업에서 다양한 제품들을 생산하여 수출하고 있지만, 당시로서는 이보다 더 획기적인 도전이었습니다.
김형주_ 음악을 함에 있어서 물론 여러 가지 분야가 있지만 필수적인 요소는 단연 악기와 악보일 것입니다. 그렇기에 음악에서 절대적인 부분의 한 축이라고 볼 수 있는 악기의 제작에 박 회장님께서 선구자적인 역할을 하셨다는 것은 음악사적으로도 꼭 기록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피아노 제작 역사는 6·25전쟁의 영향으로 인해 일본을 비롯한 선진국들에 비해 한참 뒤쳐져 있는 상황이었고, 해방 직후만 하더라도 서울 장안에 피아노를 소유한 가정을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었지요. 한 마디로 악기 분야에 있어서 황무지였을 때 박중규 회장님께서는 부속품을 수입해 조립과 수리부터 시작하셨습니다. 박 회장님을 통해 피아노가 이렇게 보급되지 않았다면 어떻게 우리나라의 음악이 오늘날과 같은 수준에 이르게 될 수 있었겠습니까?
이용일_ 사치품으로서의 피아노 수입이 금지되었다는 것은 더 이상 음악을 하지 말라는 것과 다름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국내 기술로 피아노를 직접 제작하셨다는 것은 우리 음악계가 멈추지 않고 발전될 수 있도록 그 길을 열어주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에 대해서 최영섭 선생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최영섭_ 우리나라 음악계가 전세계에 알려지게 된 데에 그 원동력을 제공하신 분이 바로 박중규 회장님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우선 박 회장님께서는 수도피아노사를 운영하시면서 경영자로서 희생하고자 하는 정신으로 무장한 분이셨습니다. 특히 음악계에 계신 선생님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서 많은 후원을 하셨는데, 팜플렛에 ‘수도피아노사’라는 이름 한 줄만 나올지언정 음악회에 도움을 주심에 큰 보람을 느끼셨지요. 그 당시 경제적으로 여러모로 열악했던 음악계에 지원을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사실 겉모습은 큰 악기사였지만 사업을 함에 있어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으셨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어쨌든 우선적으로 어려운 음악인들을 도와주자는 희생정신이 있으신 분이었고, 한 번도 얼굴에서 피곤한 기색을 표현하신 적이 없으셨어요. 라이벌 관계였던 악기사 사장님과도 길에서 만나면 웃으면서 대화를 나누셨고,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고자 하셨습니다. 그러한 올바른 경쟁 구도로 인해 더욱 양 사가 발전할 수 있게 되었던 것 같고요.
박중규 회장의 경영관
이용일_ 오랜 시간 동안 박중규 회장님을 모셔오신 후 현재 직접 악기사를 운영하시고 계시는 민명술 회장님께서는 과거 박 회장님의 회사 운영에 대한 모습을 어떻게 보시는지요?
민명술_ 당시 박중규 회장님께서는 회사를 운영함에 있어 여러 가지로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예를 들자면 이전에 이야기 나온 것처럼 피아노가 사치품으로 분류되면서 세금도 무척 비쌌고, 피아노를 만들기 위해서는 특수한 자재들이 필요하기에 당시에는 일본에 많이 의존을 했었습니다. 그래서 그러한 부분들을 국내에서 해결하기 위해 말할 수 없는 고생을 감당하셨습니다. 그렇기에 개인적으로도 제가 너무나 존경하는 분이라고 말씀드리고 싶고, 무엇보다 음악계의 눈부신 발전을 좀 더 지켜보지 못하시고 일찍 타계하셨다는 것이 무척 안타깝습니다. 그리고 박중규 회장님의 슬하에는 일곱 형제분이 계시는데, 박영호 회장님을 비롯한 자제분들이 모두 훌륭한 부친의 영향을 받아 승승장구하시면서 못 다한 부친의 뜻을 이어가시는 모습을 보면 제가 다 뿌듯한 마음입니다.
이용일_ 아무래도 민 회장님께서 이 자리에 계시다 보니 곤란할 수도 있겠지만, 박중규 회장님과 민명술 회장님을 비교해 보자면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것 같네요. 박용성 전무님께서 이에 대해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박용성_ 두 회장님 모두 외골수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이전 박중규 회장님께서는 절대 곁눈질을 하지 않으셨던 분이었지요. 오로지 악기, 특히 피아노만 바라보셨던 외골수로서 악기의 발전을 위해서 항상 앞서가셨습니다. 그러다 보니 피아노 제작에 있어 공장을 짓기 전부터 기술자들도 없는 와중에 가정집에서 조립을 하며 시작하게 되셨겠지요. 또한 피아노 제작 이외에도 피아노 콩쿠르도 수회 개최하셨고, 피아니스트 한동은 선생님을 초청해 두 번의 연주회를 열기도 하셨습니다. 더불어 1964년에는 『음악세계』 잘지를 간행하는 등 악기 제작만이 아닌 음악계의 전반적인 발전에 도움을 주고자 노력하셨습니다.
김형주_ 박중규 회장님께서는 한 마디로 장사꾼 같지 않은 문화적인 분이셨지만, 장차 어떻게 회사를 이끌어 가겠다는 목표는 높으셨습니다. 이는 당시에 클래식 음악 전문 잡지가 없었기 때문에 잡지를 하나 발간해 보는 것이 어떠하겠냐는 저의 권유를 흔쾌히 수락하셨던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지요. 사실 그 때 잡지 사업으로 돈을 번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기에 적자를 볼 수 있음에도 이를 강행하셨다는 점은 그분이 새로운 것을 개척하겠다는 의지가 크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잡지는 1년 만에 폐간되었지만 안 될 것이 뻔한 일을 시작하겠다고 나서는 것은 보통 사람들에겐 여간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입니다.
또한 중요한 음악관련 행사에는 꼭 참석하셨고, 후원을 마다하지 않으셨던 점은 우리 초창기 음악계에 큰 도움이 되었다고 여겨집니다.
최영섭_ 박중규 회장님을 떠올리면 칭찬해야 할 점들이 우선적으로 떠오르네요. 아마 박 회장님의 성실성과 밀고 나가는 사업가의 면모를 그분을 가까이에서 모셨던 민 회장님을 비롯한 많은 분들이 계승하여 현재까지 음악계의 발전에 밑거름이 되어 주고 계십니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과도 우의를 돈독히 나누셔서 박 회장님을 따르는 분들이 많으셨다는 것은 그분의 인품이 어떠하였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민명술_ 네, 맞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박 회장님께서 사업에 어려움이 생겼을 때 2, 3개월 가량만이라도 버티고 계셨다면 우리나라 피아노계의 판도가 완전히 달라졌을 것입니다. 사실 부득이하게 회사를 접게 된 원인인 부도난 금액도 그다지 많지도 않았거든요. 조금은 배짱도 부려보고, 주위의 도움도 청해 보고 하셔서 버텨냈더라면 좋았을 텐데 그것이 못내 안타깝습니다. 부도 후 한 달도 안 되어 파산조치가 내려졌고, 당신의 성격상 남들에게 피해를 입히게 되는 것을 염려하셔서 그러한 부분들을 이겨내지 못하시고 쉽사리 접으셨다는 것이 지금까지 마음 한 켠에 아쉬움으로 남아 있습니다.
김형주_ 박중규 회장님께서는 장사꾼 마인드로 사업을 하지 않으셨지요. 어떻게 보면 인간적으로 너무 선하시고 모질지 못하셨다고나 할까요?
민명술_ 더욱 안타까운 것이 수도피아노사는 부평에 13,000평 규모의 큰 공장이 있었고, 그 곳에서 많은 수량의 기타를 생산하였는데요. 그 때 공장에 쌓아 두었던 악기들만 잘 처분하였더라도 빚을 다 갚았을 것입니다.
이용일_ 일전에 박용성 전무님을 통해 그 공장에 매우 큰 불이 났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었는데요. 이에 대한 설명 부탁드립니다.
박용성_ 네. 수도피아노사는 피아노를 제작하는 제1공장, 기타를 생산하던 제2공장이 있었습니다. 그 때 수출을 앞둔 기타들을 마당에 가득 쌓아두었었는데 그 전에 불이 난 것이지요. 워낙 큰 화재였다 보니 한 대의 기타도 건지지 못하고 전부 불에 타 버렸습니다. 당시에는 요즘과 같은 화재 보험도 없다 보니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안 좋은 일들이 연달아 생기면서 부도로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정리_이은정 기자 / 사진_김문기 부장
- 기사의 일부만 수록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음악춘추 2014년 5월호의 기사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
진행: 이용일(한국음악교육협회 명예회장)
김형주(한국음악평론가협의회 회장)
최영섭(한국작곡가회 명예회장)
민명술(주)코스모스악기 회장
박용성(주)코스모스악기 전무
박영호(주)콜택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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