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대담 / 인물탐구
한국의 오페라에 모든 열정을 쏟은
소프라노 김봉임 선생
음악가로서의 외길을 흔들림 없이 걸어 온 소프라노 김봉임 선생은 1936년 태어났으며, 고2때, 서울대학교 콩쿠르에서 입상하였다. 서울대학교에서 공부한 후, 경희대 음대 대학원을 졸업한 김봉임 선생은 도독하여 잘츠부르크 모차르테움 리드과에서 수학한 뒤 경희대 음대 교수로 부임하여 탁월한 지도력으로 학생들을 지도해왔다.
또한 1975년 사단법인 서울오페라단을 창단, 제1회 오페라 토스카 공연을 시작으로 한국에서 39년이라는 가장 긴 역사를 가진 민간오페라단으로써 지금까지 45회의 정기공연을 올렸다. 한국 최초로 춘향전(현제명 작곡)을 미국 대도시 (워싱톤, 시카고, 샌프란시스코, 디트로이트, 뉴욕)에서 공연하여 국위선양 하였으며, 특히 1993년에는 한국, 이탈리아, 튀니지 3국이 합작으로 튀니지에서 공연한 리골레토는 전 유럽의 극장 관계자들과 매스컴에서 호평을 받았다. 특히 2005년에는 2003상암경기장에서 성공리에 공연했던 장예모 감독의 실외 푸치니 투란도트공연의 감동을 세종문화회관에서 재공연하여 오페라역사상 이전에도 시도가 없었던 14회 장기공연으로 유치하여 한국오페라사의 역사에 길이 남을 공연으로 기록되고 있다. 이처럼 김봉임 선생은 2012년 6월1일~3일까지 제3회 대한민국오페라페스티벌에서 45회 라트라비아타공연을 77세 고령의 연세에도 불구하고 그의 모든 열정을 무대에서 쏟으시고 과로로 인해 2012년6월19일 중환자실에 입원하였다. 2012년 8월6일에 그가 가장 사랑했던 무대와 음악과도 작별하게 되었다. 그는 G.Puccini의「Tosca」,「Madame Butterfly」, G. Verdi의「La Traviata」,「Aida」, 현제명의「대 춘향전」등 여러 오페라를 해왔고, 세계평화대상 등 여러 음악상, 옥관문화훈장을 수상하였다. 1975년부터 서울오페라단 이사장이였던 그는 2004년부터 2011년까지 한국 민간오페라단 총연합회회장으로 활동하였다. 또한 그는 뮤지컬 「아, 코리아」를 창작한 바가 있다.
일시: 2015년 1월 7일(수) 오전 10시 30분
장소: (주)코스모스 악기 10층
진행: 이용일(한국음악교육협회 명예회장)
패널: 박성원(연세대 명예교수)
박수길(한양대 명예교수)
임웅균(한예종 교수)
정미애(피아니스트.서울오페라단음악코치,한예종겸임출강)
김홍석(아들, 성악가. 서울오페라단 단장)
1. 김봉임 선생의 성장 과정 및 음악의 출발
2. 김봉임 선생의 첫 만남
3. 김봉임 선생의 음악세계
4. 김봉임 선생이 국내 음악계에 끼친 영향
이용일
오늘 음악춘추 ‘인물탐구’에서는 서울오페라단 단장 소프라노 김봉임 교수님을 회고 하는 시간을 가져보려고 합니다. 그럼 먼저 아드님인 김홍석 선생님이 김봉임 교수님의 성장과정에 대해서 말씀해 주시지요.
김홍석
저의 외할아버지께서는 의사셨습니다. 때문에 어머님께서는 부유한 환경에서 좋은 것을 보고 자라시고 그래서 클래식에 일찍 눈을 뜨셨던 것 같습니다.
이용일
김봉임 교수님의 형제관계는 어떻게 되시나요? 그 중에 음악하신 분은 김봉임 교수님 한 분이셨나요?
김홍석
어머님 형제는 6남매이십니다. 음악은 어머님과 외삼촌이 하셨습니다. 외삼촌 자녀들도 전부 음악을 하였고요. 작년에는 이모님들을 뵈러 부산에 갔었습니다. 연세가 80이 넘으셨는데도 모여서 얘기하시다가 노래를 부르시는데 흥을 기본으로 자기고 계신 것 같았습니다. 놀랄 정도로요. 외갓집이 음악적으로는 타고 났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이용일
그럼 부산에서 누구한테 음악을 배워서 서울대학에 왔는지 아시는지요.
임웅균
저는 김봉임 교수님과 대화 할 때 누구한테 음악을 배웠는지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6·25때 김봉임 교수님이 피아노를 너무 배우고 싶어 하시던 와중에 옆집으로 피아니스트가 이사 왔다고 했었습니다. 그래서 김봉임 교수님의 집에 있는 피아노로 그 피아니스트한테 피아노를 배웠다고 들었습니다.
이용일
김봉임 교수님은 유복한 가정에서 자랐기 때문에 나중에 음악활동을 하면서도 여유롭게 하신 것 같습니다. 박수길 선생님은 처음 만나 신게 언제인지 궁금합니다.
박수길
김봉임 교수님은 제가 미국에서 유학 할 때 뉴욕으로 연수여행을 오셨습니다. 그때 미국의 뉴욕에서는 한국일보에서 추천한 미국 순회 교포들을 위한 한국가곡의 밤을 했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오셨고 그 중에 김봉임 교수님도 계셨습니다. 그때 처음 뵈었습니다. 그러면서 김봉임 교수님과 인연이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제가 귀국하고 「나비부인(Madam Butterfly)」에 출현하면서 선생님과 처음으로 음악적인 교류도 가지게 되었습니다.
박성원
저는 서울오페라단이 창단되기 전에 중·고등학교 동창회에 가게 되었는데 그때 처음 뵜었고 그때부터 알게 되었습니다.
정미애
저는 제가 대학을 졸업하던 해에 김봉임 교수님을 처음 뵜었습니다. 저의 학교 모교은사이시기도 하셨습니다. 아까 박수길 선생님이
김봉임
교수님과 오페라 「나비부인(Madam Butterfly)」 공연을 같이 했다고 하셨는데요. 저도 선생님과 하는 첫 작품이었습니다.
임웅균
저는 1991년도에 김봉임 교수님이 오페라 「리골레토」를 같이 하자고 오셔서 그때 처음 뵜었습니다. 그 당시 용산에 사무실이 있을 때 그 작품에 처음 합류했었습니다. 지금도 기억나는건 누가 소리 좋다하면 무조건 만나는 분이셨습니다.
이용일
그렇다면 좀 더 깊이 들어가 서울오페라단 창단에 대해서 먼저 박성원 선생님이 말씀해주시면 좋겠네요.
박성원
서울오페라단 창단할 때 이름 짓는 거 가지고 고민을 많이 하셨습니다. 지금의 서울오페라단이 창단되기 전에 현제명 선생님이 서울대학 출신으로만 오페라 공연을 한다고 해서 먼저 서울오페라단을 창단하셨었습니다. 그러다 중간에 현제명 선생님이 돌아가시고 서울오페라단이 없어졌습니다. 그러던 중 김봉임 교수님이 ‘나도 서울대학출신이니까 서울오페라단을 이어받아 창단하고 싶다’고 하셨고 그 당시 현제명 선생님이 창단하고 쭉 공연 할 때부터 함께 하셨던 분들에게 양해를 구해서 서울오페라단을 다시 새롭게 창단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현제명 선생님이 창단했을 때에는 서울대학교출신 중심으로 공연을 한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김봉임 교수님은 서울대학교출신만 뽑을 순 없다고 이름만 서울오페라로 하셨습니다. 그래서 젊은 성악가들을 많이 데뷔 시키셨고 그렇게 김봉임 교수님이 새롭게 창단하셨습니다. 또한 국민들이 오페라를 보고 즐기며 참여할 수 있고 생활화 할 수 있는 음악으로 만들어 공연하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어떻게 보면 현제명 선생님의 서울오페라단을 이어 받아 하셨기에 서울오페라단이 한국 오페라계의 역사라 할 수 있습니다.
이용일
그렇다면 임웅균 교수님은 그 당시 학생이었지만 그 때 어떠한 느낌을 받았는지요.
임웅균
저는 제가 대학교 2학년 때 돈 카를로 공연을 했던 게 지금도 기억나는데 김봉임 교수님은 경희대학교 교수셨습니다. 그 당시에 큰 거목이시니까 학생입장에서는 멋있는 단체가 하나 있구나라고 생각했던 게 제 머릿속에 기억 납니다.
박성원
김봉임 교수님과는 선후배관계고 나이차이도 별로 나지 않아 항상 같이 만나서 의논한 후 창단공연을 했습니다. 김봉임 교수님은 오페라를 좀 더 사실적으로 만들려고 세트장과 의상을 똑같이 준비하여 공연했습니다. 관객이 보고 즐길 수 있는 오페라를 위해 많이 노력 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오페라 「나비부인(Madam Butterfly)」할 때에도 일본에서 기생 옷을 전부 빌려와서 공연을 했었습니다. 그때 당시 큰 잇슈가 되어 공연 일주일전에 매진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김봉임 교수님이 오페라단에 많이 서시고 노력하셔서 오늘날의 오페라로 역사의 맥을 이어갈 수 있었고 발전되지 않았나 생각이 듭니다.
이용일
그러니까 큰일을 하는 사람은 밑그림을 그리고 자기 예지로 판단하여 추진력 있게 가는데 아마 김봉임 교수님도 그런 쪽에 타고나셨던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박성원 선생님이 김봉임 교수님과 일하면서 기억에 남는 일화를 전해주시지요.
박성원
오페라 공연을 할 때에 성악 하는 후배들과 제자들이 출현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한 오페라 공연 한번 할 때 예산이 많이 듭니다. 그래서 출연료를 될 수 있으면 좀 더 적게 주려고 하는데 김봉임 교수님은 젊은 성악가들에게 더 잘하라고 격려하시며 더 주셨습니다. 누구든지 잘 나갈 때에는 적게 주면 싫고 자존심 상하잖아요. 작은 오페라여도 금액에 따라 성악가들의 자존심이 상하는 경우가 굉장히 많기도 했는데 한번은 제가 지휘자와 문제가 생겼었는데 김봉임 교수님은 제가 자존심 상하는게 싫으셨는지 저에게 와서 말씀하셨습니다. ‘지휘자 바꿀게’ 그래서 지휘자 바꾼 적도 있습니다. 후배들의 자존심을 굉장히 신경 쓰시고 자존심을 세워주는 그런 일을 선생님은 서슴치 않게 하셨던 것 같습니다.
이용일
정미애 선생님은 김봉임 교수님과 일을 할때 어떠했는지요. 오페라도 반주하셨지요. 얼마나 엄했는지요.
정미애
연습시작부터 끝날 때까지 엄하셨어요. 공연시작준비부터 공연이 끝나는 순간까지 김봉임 교수님께서 정말 한순간도 그 연습실에 안 계셨던 적이 없으셨어요. 김봉임 교수님은 노래하시는 분들에게 가서 격려해주시고 저희같이 어린 사람들, 피아노를 치거나 그 옆에 많은 스텝들에게 엄마처럼 챙겨주셨습니다. 그래서 저희가 지금도 늘 모이면 하는 말이 안보면 보고 싶은 분이라고 얘기 합니다. 정말로 그 어려웠을 때 저희 경희대 학생들에게 기초를 주시고 그래서 지금은 다 성공해서 자기자리매김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용일
우리가 김봉임 교수님의 한국 성악계의 가장 큰 업적이 오페라의 활성화라고 할 수 습니다. 말하자면 누구나 이해할 수 있고 자유롭게 공연을 할 수 있는 오페라를 만들었다는 것인데요. 마지막으로 김봉임 교수님께서 국내 음악계에 끼친 영향에 대해서 이야기 나누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박성원
오페라의 역사를 보니까 서울오페라단이 13번째로 창단이 되었더라고요. 그 당시 다른 오페라단들은 4회, 5회 공연이 다 없어지고 있었는데 김자경오페라단하고 서울오페라단만이 살아계실 때까지 계속 공연을 했었습니다. 김자경 선생님이 먼저 시작하셨으니까 더 많은 오페라공연을 하셨고 서울오페라단도 김봉임 교수님이 살아 계실 때까지 쭉 오페라 공연을 하셨으니까 40회에서 50회 이정도로 하신 것 같습니다. 이거는 굉장히 대단한 거고 그래서 일생을 오페라를 위해서 본인을 바쳤다. 이렇게 얘기 할 수 있는 거고요. 대단한 거라고 생각합니다. .
이용일
결국 지금까지 얘기해서 얻은 것은 우리나라 오페라를 활성화시키는데 김자경 선생님과 김봉임 교수님이 안 계셨더라면 국립이라는 갇혀진 곳에서 못 나왔을 텐데 말이죠. 그래서 그 당시 공연하겠다고 활동하는 것 자체가 엄청난 파급효과를 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오페라가 활성화되게 노력하는 자체가 예술 활동이 아닌가 싶습니다. 선생님들은 더 하실 말씀이 있는지요.
정미애
제가 지금 오페라 쪽에서 반주를 하고 있고 몸을 담고 있었던게 한 27년 된 것 같습니다. 처음시작을 김봉임 교수님과 같이 했는데요. 여기 계시는 선생님들께는 너무 죄송한데 그래도 이 시간을 함께 하면서 이렇게 제마음속이랑 기억 속에 남아있는 것들을 말하게 되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그리고 항상 김봉임 교수님께서 어떠한 일을 하셨을 때에는 늘 축제 같았습니다. 서울이 들썩이고 있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었습니다. 그러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셨고 저희처럼 자라나고 있는 꿈나무한테도 큰 미래와 꿈을 주셨습니다. 제가 김봉임 교수님과 마지막작품도 같이 했었고 함께 공연하며 김봉임 교수님을 오랜 시간 뵀었지만 지금도 계속 후회로 남는 것 중에 하나가 있습니다. ‘아 이게 마지막이다 선생님이랑’ 그렇게 생각하면서 마지막 작품 춘의를 했는데요. 정말 마지막이 된 거에요. 그래서 그게 김봉임 교수님께 너무 죄송하고 제가 평생을 마음에 가져갈 짐처럼 느껴지는게 죄송할 따름입니다.
이용일
이제 정리 하기 전에 아드님 김홍석 선생님이 서울오페라단 단장으로 취임했는데 거기에 대한 각오는 어떻게 되어있나요?
김홍석
사실 저는 지금 사명감이라는 마음가짐뿐입니다. 오늘 어머님에 대한 많은 분들의 이야기를 들으니까 제가 진짜 더 사명감이 생겼습니다. 이유가 없겠구나. 큰 결심을 했고 더더욱 열심히 운영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어머님과 오늘 오신 여러분이 저에게는 또 대선배님들이신데 그 선배님들이 오랜 시간동안 어머님과 함께 협력해서 같이 해주셨으니까 오늘날 어머님이 계신 거고 이렇게 오늘 이야기로도 나올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여러 선배님들이 그만큼 노력을 해주셨으니까요. 또한 저에게는 목표가 있습니다. 어머님이 서울오페라단을 창단하신지 올해 40주년인데 제가 서울오페라단2기 40주년 목표로 80주년공연까지 운영하고 100주년 발판을 만들어 후대에 남기고 싶습니다. 어머님이 평생 동안 서울 오페라단을 하신이유가 있다고 생각하고, 사명감을 가지고 열심히 하다보면 꼭 이루리라 생각합니다.
이용일
박성원 선생님은 새로운 단장을 위해 도와 줄 일이 뭐가 있는지요.
박성원 아드님인 김홍석 선생님이 앞으로 어떻게 하는지 보면서 우리가 도울 수 있으면 발 벗고 도와줄 겁니다. 서울오페라단이 계속 이어져서 공연을 할 수 있도록 돕는 일. 그런거죠.
정리_김수현 기자 / 사진_김문기 부장
- 기사의 일부만 수록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음악춘추 2015년 2월호의 기사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
<김문기의 포토랜드>
소프라노 故 김봉임 선생
진행: 이용일(한국음악교육협회 명예회장)
박성원(연세대 명예교수)
박수길(한양대 명예교수)
임웅균(한예종 교수)
정미애(피아니스트.서울오페라단음악코치,한예종겸임출강)
김홍석(아들, 성악가. 서울오페라단 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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