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음악춘추

인물탐구 - 성악가 테너 김금환 선생 / 음악춘추 2013년 6월호

언제나 푸른바다~ 2013. 6. 20. 1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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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춘추 기획대담 | 인물탐구

대구 오페라계의 발전 초석 다진
성악가 테너 김금환 선생

 

평안북도 신의주에서 출생한 테너 김금환 선생(1919∼2002)은 1962년부터 2002년 작고하기까지 국립오페라단 단원이자 국립극장 종신단원으로 활동했다. 한국 정상급 테너로서 1959년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를 시작으로 많은 작품에 출연하였으며, 후지와라 오페라단·니끼카이 오페라단의 단원으로서 국내와 일본에서 최고의 가수로 호평 받으며 오페라의 주역을 도맡기도 했다.
늦은 나이에 일본으로 유학해 1970년 동경예술대학 대학원 오페라과를 졸업한 선생은 1971년 영남대 교수로 부임하였고, 같은 해 대구오페라협회를 창설, 초대 회장을 지냈으며, 1973년에는 대구 성악인들의 본격적인 오페라 운동의 시발점이 된 대구 최초의 오페라 「토스카」를 연출했다. 선생은 이후 영남오페라단을 창단해 많은 오페라 작품을 연출하여 대구가 오페라의 메카로 부상하는 주춧돌을 놓았다.

 

일시: 2013년 4월 16일(화)
장소: 대구문화예술회관 관장실
진행: 이용일 (한국음악교육협회 명예회장)
패널: 임우상 (계명대 명예교수)
     김귀자 (경북대 명예교수, 영남오페라단 단장)
     손정희 (경북대 외래교수, 오페라21세기 단장)
     조덕성 (전, 혜천대 음악과 교수)
     김지철 (김금환 선생의 자(子))
     김신준 (김금환 선생의 손자·현, 해군 진기사군악대 상병, 피아니스트)

 

김금환 선생의 성장 과정 및 음악의 출발

 

이용일_ 음악춘추의 6월호 인물탐구 난에서는 당대 최고의 성악가였다고 감히 말할 수 있는 김금환 선생님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어 볼까 합니다. 김금환 선생님께서는 좋은 연주로 대구를 넘어 서울, 나아가 해외에서까지 호평을 받으셨습니다. 특히 오늘의 대구 오페라계가 있기까지 선생님의 공로는 지대하다 하겠습니다.
그럼 먼저 아드님이신 김지철 씨께서 아버님의 성장 과정에 대해 말씀해 주시지요.

 

김지철_ 네. 저희 아버님께서는 평안북도 신의주 출생으로 6·25 전쟁이 발발하자 형제분들 중 유일하게 월남하셔서 피난 생활을 하셨고, 남한에서 자리를 잡으시는 동안에도 경제적으로 그리 넉넉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러함에도 아버님께서 사랑으로 저희들을 길러주셔서 자식들 모두 큰 사고 없이 잘 성장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용일_ 혹시 김지철 씨의 할아버님께서도 음악을 좋아하셨나요? 아니면 김금환 선생님께서 음악을 하시는데에 다른 가족력이 있으신가요?

 

김지철_ 저희 할아버님께서는 일찍 돌아가셨고, 수녀님이셨던 고모님께서는 음악, 그 중에서도 성악과 피아노에 두각을 나타내셨으며, 음악경연대회에 나가서 입상도 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현재는 고모님께서 북한에 계셔서(생사 미상) 더 이상 소식을 듣지 못하고 있고요. 그리고 가족 중 유일하게 음악을 전공하시고 수녀님으로 계시는 저희 누님께서는 영남대, 이화여대 대학원에서 피아노를 공부하셨습니다.

 

이용일_ 김금환 선생님 집안에 음악의 흐름이 있었던 것 같네요.

 

손정희_ 네. 그 흐름에 따라서 김금환 선생님의 친손자인 김신준 군도 피아노를 전공하고 있습니다. 현재는 유학을 마치고 군복무 중이지요.

 

이용일_ 김금환 선생님께서는 늦은 나이에 유학을 가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손정희_ 다소 늦은 시기였지만 1969년도 즈음에 동경예술대학 대학원 오페라과로 유학을 떠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유학을 가셔서는 콩쿠르 입상과 더불어 일본 동북지방 일대 순회공연과 오페라, 독창회 등 많은 연주활동을 하셨습니다.

 

이용일_ 혹시 김금환 선생님께서 어느 대학에서 공부하셨는지 알고 계신 분이 있으신지요?

 

손정희_ 김선생님께서는 서라벌예술대학을 나오셨습니다. 현재의 중앙대이지요. 서울대에서공부하다가 그만두시고 서라벌예술대학을 다니셨다고 들었습니다.

 

김귀자_ 제가 유학을 하던 시기였던 1979년도에 김금환 선생님께서도 음악을 공부하기 위해 잘츠부르크로 오셨었습니다. 김선생님은 그 곳에서 공부를 하시면서 틈틈이 연주도 하셨는데, 특히 잘츠부르크 라히 방송국 주최로 한 독주회에서는 한국 가곡만으로 프로그램을 선정해 성공적으로 공연을 마치셨고, 그 연주실황이 현지에 방송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당시 모차르테움 국립음악원에서 함께 유학하며 성당 다락방에 나란히 살았던 임혜연 선생이 김선생님 독창회의 반주를 맡았기 때문에 자주 저희들 집에 오셨는데, 그 때마다 저는 김선생님께 한국음식으로 차려진 식사를 대접했습니다(웃음). 제가 선생님께 해드릴 것이 그것밖에 없었기 때문에 정성을 다해 한국 음식을 요리 했었는데, 그 때마다 선생님께서는 한국사람은 고춧가루를 먹어야 힘이 난다 하시며 제가 만든 음식을 좋아해 주셨던 기억이 지금 말씀드리다 보니 새삼 생각나네요.

 

김금환 선생과의 첫 만남

 

이용일_ 김금환 선생님께서는 훌륭한 목소리를 지닌 명테너이셨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들은 그러한 스승과의 첫 만남을 어떻게 기억하시는지 궁금하네요.

 

조덕성_ 1970년도에 김금환 선생님께서 대전감리교 신학대학(목원대)의 주최로 열린 음악회에 초청을 받아 오셔서 여러 선생님들과 함께 가을 대음악회에 출연하셨었습니다. 그 때 저는 군복무를 마치고 막 대학교 1학년에 재학 중이었고, 김천애 교수님께서 저를 김금환 선생님께 소개시켜 주셨습니다.
저녁 음악회라고 하면 대개 낮에 리허설을 하잖아요. 선생님께서는 그 시간에 저를 불러내셔서는 “노래 한 번 해보라”고 말씀하셨고, 제 노래를 들으신 후 칭찬을 하시면서 “내년에 내가 영남대에 가게 되니까 영남대로 와라”고 하셔서 선생님을 따라 영남대에 편입을 했습니다. 어찌 보면 제가 선생님의 ‘1호 제자’라고 볼 수 있겠네요.
또한 그 시기는 김금환 선생님의 전성기라 할 수 있는데요. 쉼 없는 오페라 출연은 물론, 주역을 도맡아 하셨죠. 그리고 공연이 잡혀있더라도 학교수업은 빼먹지 않으셨습니다. 그 예로 수 목 금요일은 영남대에서 수업을 하시고, 금요일 오후 늦은 시간이 되어서야 서울에 가시곤 하셨습니다.

 

임우상_ 네, 맞습니다. 대구오페라협회를 조직할 당시 김금환 선생님께서는 초대 회장이셨고, 이점희·하대응·이기홍 선생님을 고문으로 모시면서 제가 사무국장으로 있었습니다. 그 때 저는 경북여고에 재직 중이었고요. 한 번은 제가 김금환 선생님과 함께 ‘아리아의 밤’을 기획하여 무대에 올렸는데 그 공연은 앉을 자리도 없이 성공적으로 끝났습니다. 청중은 주로 학생들이었고, 계성학교의 강당이 3천 석이었음에도 티켓을 4천여 장을 팔아서 난리가 났었죠. 그것이 계기가 되어 오페라 「토스카」도 기획하였고, 후에 영남오페라단도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조덕성_ 대구오페라협회가 「토스카」를 공연했을 당시 저는 대학교 4학년에 재학 중이었고, 스폴레타 역을 맡았었습니다.
저는 학생이었기 때문에 선생님들께서 오시기 전에 먼저 준비를 완벽히 해놓고, 끝나면 항상 모두 치우고 가야 했었습니다. 안 그러면 불호령이 떨어졌으니까요.
그렇게 힘들게 공연을 준비하면서 저는 비록 한 장면만 출연하였어도 버스를 타면 괜시리 자랑스러워 「토스카」 악보를 일부로 보이게 들고 탔던 기억이 납니다. 그 때의 공연이 아마 대구에서 처음으로 「토스카」를 선보였던 무대였던 것 같습니다.

 

이용일_ 다른 선생님들께서도 김금환 선생님과의 첫 만남, 또는 기억에 남는 일화를 말씀해주시지요.

 

김귀자_ 여기에서 이렇게 김금환 선생님에 대한 추억을 나누다 보니 선생님과 제가 가깝게 지냈던 시기를 앞서 말씀드린 잘츠부르크에서의 유학 때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네요.
그리고 제가 유학하고 돌아온 1984년도에 김선생님께서 영남오페라단을 창설하셨는데, 저는 1985년에 무대에 올린 오페라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에 출연하였습니다. 그 때부터 몇 년을 선생님과 같이 활동하였고, 10년 후에는 제가 김선생님 다음으로 영남오페라단을 이끌게 되었습니다.

 

손정희_ 제가 김금환 선생님을 처음 뵙게 된 시기는 선생님께서 정년을 몇 년 앞두고 오스트리아에 갔다 오셨을 때로 기억합니다. 사실 저는 그 때 김금환 선생님께서 그렇게 대단하신 분인지 몰랐어요. 하지만 후에 선생님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후 그분의 대단함을 비로소 알게 되었고, 마침 김금환 선생님께 가르침 받을 수 있게 되었을 때는 너무나 기뻤습니다. 비록 처음에는 선생님의 명성을 몰라 대단치 않게 생각했었지만 학교에 대가가 계신다는 소문의 주인공이 나의 선생님이라고 생각하니 정말로 행복했었고요.
추억으로 남은 선생님의 생전 모습을 돌이켜보면 스타 성악가로서 유명하시면서 키도 크셨고, 멋진 분이셨습니다. 저는 학업을 마친 후 선생님께서 퇴임하시고 영남오페라단을 창단하실 때까지 줄곧 곁에서 모시며 함께 하였습니다.

 

김금환 선생의 음악세계

 

이용일_ 화제를 돌려 김금환 선생님의 음악세계에 대해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조덕성_ 김선생님의 음악의 깊이를 제자로서 감히 말씀드리기는 힘들고, 제게 김선생님은  굉장히 큰 존재이셨습니다. 대한민국 대표 오페라 가수이시면서 또한 연기력이 매우 뛰어나셨잖아요. 그래서 모든 면에서 봤을 때 위대한 성악가였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손정희_ 김금환 선생님께서는 저희가 감히 쳐다 볼 수도 없었던 분이셨지요. 특히 오페라를 많이 사랑하셨고, 그 오페라 속에 가수가 지녀야 할 덕목을 제자들에게 아낌없이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 중에서도 연기에 대해서는 철저하면서 확고한 신념을 지니셔서 저희가 선생님께 오페라 교육을 받을 때에는 발동작 하나까지 세심하게 지도해 주셨습니다.

 

이용일_ 당시 우리나라에는 전문 오페라 연출자가 드물었고, 그렇기에 엉성한 부분도 상당히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열악한 상황 속에서 오페라를 개척하고자 하셨으니 고생도 많으셨겠습니다.

 

임우상_ 한 번은 선생님께서 제가 만든 가곡 「윤사월」을 부르신 적이 있었는데, 그 때 “아, 정말 선생님께서는 노래에 대해 정열적이시면서 대단하고 멋지신 분이시구나!”라고 느꼈습니다.

 

조덕성_ 네, 맞습니다. 음악적 사고가 확고하시면서 후진들에게는 엄격하신 분이셨죠. 주위에서 어떻게 이야기를 하던지 간에 당신만의 음악세계가 확고하셨고, 그러한 것들을 후학들에게 전수하고자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러한 선생님만의 철저함으로 당시 한국 최고의 테너가 되실 수 있었고, 어느 누구도 선생님의 흠을 잡을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이용일_ 그 부분에 대해선 개인적으로 느끼기에, 김금환 선생님께서 전쟁 때 월남하셔서 도움 받을 수 있는 곳도 없이 홀로 이겨내셨기에 그러한 면에서 얼마나 자기관리가 확실하셨을지 짐작이 갑니다. 특히 원로가 되어서도 무대에 서셨던 것을 보면 목소리 관리도 쉽지 않으셨을 터인데요. 김지철 씨께서는 아들로서 아버님의 음악을 어떻게 보시는지요?

 

김지철_ 저는 테너이신 아버님의 노래를 들을 기회가 자주 있었습니다. 테너가 높은 음역대의 노래를 부르잖아요. 그래서 저는 아버님의 공연을 보러 가면 속으로 ‘끊어지면 어쩌지?’라며 불안해했습니다(웃음). 특히 오페라나 ‘가곡의 밤’등을 할 때면 고음이 올라갈 때 관람하는 입장에서 조마조마했었지요.

 

김귀자_ 제가 김금환 선생님을 모시면서 옆에서 느낀 바로는, 선생님의 음악에 대한 열정은 말로는 부족할 정도이고, 그 중에서도 특히 오페라를 너무나 사랑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좋아하시는 오페라를 함에 있어 절대로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 하셨던 것이, 오페라를 제작하다 보면 부족한 것들이 많기 때문에 후원해 주시는 분들께 도움을 요청 드릴 전화 한 통이라도 돌릴 법한데, 자존심이 강하셔서인지 절대로 그러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손재주가 좋으셔서 밤새도록 직접 소품을 다 만드셨는데, 작게는 등장인물들의 모자부터 프로그램 디자인까지 손수 만드셔서 가지고 오셨습니다.

 

손정희_ 네, 맞습니다. 김선생님께서는 미술에도 조예가 깊으셨습니다. 지금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림도 잘 그리셔서 과자 박스에 물감을 칠해 무대세트에 조형물로 만들어 쓰셨습니다. 그러한 모습을 보고 제자들 모두가 놀라워했었지요. 한 번은 제가 대학교 3학년일 때였는데, 돈을 주시면서 “「아이다」에 쓰일 방패 50개를 만들어 와라”라고 하시며 제작하는 방법까지 세세히 가르쳐 주셨습니다. 지금 학생들이라면 불평도 할 법하겠지만, 저는 너무나 기쁜 마음으로 밤새도록 오페라에 쓰일 방패를 만들어 갔었지요. 당시는 제가 만든 소품이 공연에 쓰인다는 것도 재미있었지만, 선생님께서 뭐든 시켜만 주시면 좋아했었습니다. 그것은 곧 김금환 선생님께서 저를 믿으신다는 증거였기에 선생님의 모든 심부름이 감사했었지요. 

 

정리_이은정 기자 / 사진_김문기 부장

 

- 기사의 일부만 수록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음악춘추 2013년 6월호의 기사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

 

진행: 이용일 (한국음악교육협회 명예회장)

 

 김귀자 (경북대 명예교수, 영남오페라단 단장)

 

김지철 (김금환 선생의 자(子))

 

손정희 (경북대 외래교수, 오페라21세기 단장)

 

임우상 (계명대 명예교수)

 

 김신준 (김금환 선생의 손자·현, 해군 진기사군악대 상병, 피아니스트)

 

조덕성 (전, 혜천대 음악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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