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음악춘추

인물탐구 - 성악가 겸 작곡가 하대응 선생 / 음악춘추 2013년 5월호

언제나 푸른바다~ 2013. 5. 22. 19:07
300x250

음악춘추 기획대담 | 인물탐구 5월호

대구음악계 발전 이끈
성악가 겸 작곡가 하대응 선생

 

강원도 홍천에서 출생한 성악가 겸 작곡가 하대응 선생(1914∼1983)은 휘문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 동양음악학교(현, 동경음악대학)에 입학해 바이올린을 전공하였으나 교수의 권유로 성악으로 전과하였다.
선생은 1936년 일본 매일신문사 주최 제5회 전 일본 음악 콩쿠르 성악부문에서 「오! 파라다이스」를 불러 1등 없는 2등에 입상하였고, 이는 당시 한국인에게는 수상의 기회를 주지 않았던 일본에서 그의 음악 실력을 인정받은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선생은 졸업 직후인 1937년 동경 히비야 공회당에서 열린 차이코프스키의 오페라 「예프게니 오네긴」에 주역으로 출연하였으며, 베버의 오페라 「마탄의 사수」에서도 주역을 맡은 바 있다. 귀국하여서는 서울 부민관에서 첫 독창회를 가졌고, 성남중학교 및 동성중학교에서 음악교사로 후학양성을 시작하였으며, 이후 자리를 옮겨 10여년 동안 서울 계성여중 고 음악교사로 재직하였다. 그리고 6·25 전쟁이 발발하자 대구로 피난을 간 선생은 1951∼1953년까지 남산여고에서 음악교사로 교편을 잡기도 했다. 지휘자로서 그는 1939∼1952년까지 서울가톨릭합창단을 지휘하였는데, 당시 파이프오르간을 연주하면서 합창 지휘까지 가능한 것은 독보적이었으며, 편곡능력도 뛰어나 다양한 음악적 시도를 통해 당시 한국 교회음악에 큰 바람을 일으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54년 효성여대에 음악과 교수로 부임해 1980년 퇴임하기까지 교육자로서의 모범을 보였던 하대응 선생은 1955년 대구음악가협회 초대회장, 1959년 경북예술단체 총연합회의 발족을 시작으로 1962년 초대 한국음협 경북지부장, 1962년 대구방송관현악단 창립 자문위원 등을 겸임하기도 했다. 선생이 남긴 작품으로는 『하대응 가곡집』(1963), 『산』(1973) 등의 작곡집과 「천주공경가」, 「못잊어」, 「그리움」 등의 곡이 있다. 그러한 공로로 1965년 경북문화상, 1975년 향토음악공로상, 1978년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훈해 그의 업적을 인정받을 수 있었고, 마지막 여생은 미국 오하이오 주에서 마무리하였다.

 

일시: 2013년 4월 16일(화)
장소: 대구문화예술회관 관장실
진행: 이용일 (한국음악교육협회 명예회장)
패널: 임우상 (계명대 명예교수)
     남세진 (대구교육대 명예교수)
     김귀자 (경북대 명예교수, 영남오페라단 단장)
     박말순 (영남대 명예교수)
     하재광 (아진이멕스 대표)

 

하대응 선생의 성장 과정 및 음악의 출발

 

이용일_ 이번 5월호 음악춘추 인물탐구에서는 대구의 음악발전에 크게 공헌하신 하대응 선생님을 다루게 되었습니다. 뒤늦게 이 자리를 마련하게 된 것은 작고하신 순서나 공로 순으로 마련되는 것이 아니므로 양해해 주시기 바라고, 선생님께서 운명을 달리하셨던 5월에 맞춰 잡지가 발간되므로 그분의 노고를 다시 한 번 기억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럼 먼저 아드님이신 하재광 사장님을 통해 하대응 선생님께서 수많은 업적을 남기시기까지 어떤 성장과정을 거치셨는지 들어보겠습니다.

 

하재광_ 네. 저희 아버님께서는 강원도 홍천 태생으로 휘문보통고등학교에서 수학하던 중  음악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바이올린을 공부함은 물론 악대에도 참여하셨습니다. 그 후 큰 뜻을 품고 일본 동양음악학교로 유학을 떠나셨는데, 그 곳 교수님께서 목소리에 대한 칭찬과 성악으로 전과할 것을 권유해 전공을 바꿔 졸업하셨습니다. 또한 아버님께서 졸업할 때 즈음 당시 손기정 선생님이 마라톤대회에서 1등을 거머쥐시자 주변의 한국인 동료들도 그렇고 저희 아버님도 도전정신이 생겨 콩쿠르에 나가 보자 하여 제5회 전 일본 음악콩쿠르 성악부문에서 「오! 파라다이스」로 1등 없는 2등이라는 성적을 거두셨습니다. 당시 일본 정서상 한국인에게 절대로 1등은 주지 않았기 때문에 사실 1등과 매한가지였고, 그렇게 일본에서 유학을 마치신 후 2편의 오페라에 주연으로 참여하셨습니다. 그리고 한국으로 돌아오셔는 명동성당에서 합창지휘를 맡으셨는데, 여러 선생님들께서 우리나라 종교음악의 발전을 도모하던 중 젊은 음악인 가운데 일본에서 인정받았던 저희 아버님이 특별히 눈에 띄어 발탁된 것이라고 들었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아마 그 시절에 처음 혼성합창단을 조직하여 사회의 저항이 있더라도 밀고 나가셔서 음악을 통해 사회에 맞선 선구자적인 역할을 하셨다고 보여집니다.

 

이용일_ 하대응 선생님께서는 어떠한 가정환경에서 자라셨나요?

 

하재광_ 할아버님께서는 홍천에서 농사를 지으셨고, 아버님의 큰 형님께서는 경영계통 공부를 하셨지만 일찍 작고하셨습니다. 그리고 위로 두 분의 누님이 계셨습니다.

 

이용일_ 혹시 하사장님 할아버지께서 부친의 음악에 관심이 많으셨나요?

 

하재광_ 유감스럽게도 할아버님께서는 옛날 분이셔서 음악을 즐겨하시거나 하진 않으셨지만 아버님이 워낙 음악에 두각을 나타내셨기에 풍족하진 않았지만 공부를 할 수 있을 만한 지원은 해주셨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용일_ 이 외에 하대응 선생님의 성장배경에 관해 아시는 분이 있으신지요?

 

남세진_ 하선생님께서는 중학교 1학년 때 바이올린을 처음 접하셨고, 정식으로 레슨을 받으신 것은 고등학교 때부터였습니다. 일본으로 건너가셔서는 예비과에서 바이올린을 전공으로 하셨지만, 가창시간에 노래하시는 하선생님의 목소리를 일본의 교수님께서 듣고는 성악을 전공하는 것이 좋겠다 하셔서 본과에 올라가서는 성악으로 전과하셨습니다. 그후 쭉 성악을  공부하셨는데, 학생오페라 「마탄의 사수」의 주역으로 발탁이 되신 바 있고,  늘 수석의 자리를 놓치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일본 동경에서 주연하신 「예프게니 오네긴」도 상당히 많은 관심을 모았고요.
그리고 흔히 하대응 선생님께서 전 일본 음악콩쿠르에서 1등 없는 2등을 하셨다고 알려져 있는데요. 다른 기록에는 선생님의 스승님과 함께 출전하여 1등은 선생님의 스승님, 2등은 하대응 선생님, 이렇게 수상하였다고 되어 있더라고요.

 

이용일_ 1등이던 아니던 간에 당시 한국인으로서 일본에서 개최된 음악콩쿠르에서의 수상은 자랑스럽고 참으로 대단한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시절 바이올린으로 유학을 가신 것 자체가 수준급의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는 것인데, 그 때 교수님이 이를 그만두고 성악의 길로 바꾸길 권유했다는 것은 그 만큼 하대응 선생님의 목소리가 훌륭했다는 것이지요. 또한 제가 듣기로는 사모님께서도 이러한 선생님 못지않은 목소리를 가지시고, 음악에 조예가 깊으셨다고 들었는데요?

 

하재광_ 저희 어머님께서는 황해도 해주 출신으로 서울 진명여고를 다니셨고, 이화여대에서 잠깐 공부하셨다가 일본 음악학교에서 유학하시던 중 아버님을 만나셨습니다. 아버님은 테너, 어머님은 소프라노이셨는데요. 아버님의 후배 분들이 “선생님 현역 때보다 사모님의 발성이 더 좋으셨다(웃음)”라고 농담으로 이야기도 하고, 아버님의 학교 제자들이 저희 집을 방문할 때면 어머님께 노래 한 번만 불러보시라고 할 정도였습니다.
또한 어머님께서는 1년 반 정도 국영 중앙방송 라디오에서 어린이교실 MC도 하셨는데, 당시 어린이들을 상대로 쉬운 서양음악을 불러주고 간혹 가곡도 불러서 전국의 어머니들이 무척 좋아하여 인기가 제법 있었지만, 출산으로 인하여 중단하셨습니다.

 

정리_이은정 기자 / 사진_김문기 부장

 

- 기사의 일부만 수록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음악춘추 2013년 5월호의 기사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

 

 

 

진행: 이용일 (한국음악교육협회 명예회장)

 

 하재광 (아진이멕스 대표)

 

  박말순 (영남대 명예교수)

 

김귀자 (경북대 명예교수, 영남오페라단 단장)

 

  남세진 (대구교육대 명예교수)

 

임우상 (계명대 명예교수)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