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춘추 기획대담 | 인물탐구 3월호
바이올리니스트 안용구 선생
서구식 바이올린 교육의 새바람을 일으킨 선구자
한국 현악 교육의 큰 축을 담당하면서 대형 연주자들을 길러 낸 바이올리니스트 안용구(1928. 2. 18 ~ 2013. 8. 14) 선생은 함경도 원산에서 태어나 고열로 인한 소아마비를 앓게 되면서 소극적인 유년 시절을 보내던 중, 외삼촌의 권유로 우연히 감상하게 된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을 듣고 클래식 음악에 매료되어 바이올린을 처음 시작하였다. 그러나 부친의 반대로 인해 독학으로 바이올린을 익혀 서울대 음대의 전신인 경성음악전문학교의 첫 입학생이 된 선생은 독일, 오스트리아 등지에서 유학하다 한국 전쟁이 끝난 뒤 1959년부터 서울대 음대의 교수가 되었으며, 이후 KBS 교향악단, 서울시립교향악단의 악장으로 활약하기도 하였다.
또한 안용구현악합주단과 현악 3중주단·4중주단을 결성해 실내악을 보급하는 데에도 힘쓴 바 있는 선생은 1968년 미국 피바디 음대의 초청을 받아 이민을 떠났고, 2002년 퇴직하였다.
작곡가 윤이상 선생과 친분을 맺으면서 ‘제2차 4월의 봄 인민예술축전’등에 참석하는 등 북한을 방문해 음악으로서 하나 되고자 하였던 안용구 선생은 이 밖에도 자신의 77년 음악 인생과 고향을 그리는 마음을 담은 회고록 『한 마리 새가 되어』(2004)를 펴냈다.
일시: 2014년 2월 5일(수) 오전 10시 30분
장소: (주)코스모스악기 10층
진행: 이용일(한국음악교육협회 명예회장)
패널: 김민(서울바로크합주단 음악감독, 서울대 음대 명예교수)
이종협(전 중앙대 음대 교수, 협 스트링 앙상블 음악감독)
박은성(전 코리안심포니 상임 지휘자, 전 한양대 음대 교수)
김선희(충남대 음대 교수, 서울바로크합주단 단원)
안용구 선생의 성장 과정 및 음악의 출발
이용일_ 이번 3월호 음악춘추 인물탐구에서는 바이올리니스트 안용구 선생님을 재조명해 보고자 합니다. 사실 미국에서 운명을 달리하신 음악가분들은 국내의 제자들과 연결이 잘 닿지 않아 좌담회 진행이 어렵기도 한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 선생님께서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바이올린 주자라고 여겨지기에 오늘의 자리를 마련해 보았습니다.
많은 분들께서 알고 계시듯이 안용구 선생님께서는 한국 바이올린 교육에 있어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신 분으로, 소천하시기 전까지 한국에서 계셨다면 우리가 더 많은 도움을 받았을 텐데 미국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셨기에 한편으로는 아쉬운 마음이 듭니다.
하지만 긴 타지 생활을 하셨음에도 여러 방면에서 조국을 위해 애써주시고, 남북통일이라는 대단한 뜻을 일찍이 품으셨던 분이었기 때문에 오늘 어떠한 이야기가 나올 것인지 기대가 됩니다. 그럼 먼저 안용구 선생님의 성장 과정과 음악의 출발에 대해서 말씀해 주시지요.
김민_ 저희 제자들은 그 부분에 대해서 선생님께 자세한 이야기는 직접 듣지 못하였지만, 제가 알고 있는 바로는 안 선생님께서 형제분들이 많이 계셨는데, 그 중에서도 형님이신 안용팔 선생님께서는 가업을 이어 마산에서 의사 생활을 하셨습니다.
또한 안용팔 선생님께서 안용구 선생님을 많이 보듬어 주셨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그 어려웠던 혼란 속에서 가족 중 그나마 경제적으로 안정되어 있었던 형님께서 몸이 조금 불편하셨던 안용구 선생님을 살뜰히 챙겨주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용일_ 한 번은 미국 국무성에 초청 방문을 가게 되었을 때, 제가 직접 요청하여 안용구 선생님을 만나 뵌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안 선생님께서는 저를 데리러 직접 워싱턴까지 나오셨고, 거처로 최고급 호텔이 예약되어 있다고 말씀드리니, “그러지 말고 우리집으로 가자.”라고 하셔서 댁을 방문하게 되었지요. 그렇게 선생님 댁에서 신세를 지게 되어 담소를 나누던 중 제가 “안용구 선생님께서는 형제가 아홉이십니까?”라고 물으니 한참을 웃으시면서, “사실은 아버지께서 내 이름을 안용환이라 지으셨는데, 호적계에서 형이 용팔이니 이 아이는 용구라며 그렇게 잘못 신고가 되었다.”고 직접 말씀해 주시더라고요(웃음).
지금 시대에서는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그 시절에는 이러한 웃지 못할 해프닝이 있기도 하였습니다.
박은성_ 이렇게 시간이 많이 흐르고 나니 직접 전해 들었던 이야기들도 자세히 기억이 나지를 않네요. 대신 안 선생님께서 남기신 자서전 『한 마리 새가 되어』(2004)를 통해 그분에 대해서 자세히 알아보고 업적을 돌이켜 볼 수는 있겠습니다.
안용구 선생과의 첫 만남
이용일_ 이종협 선생님께서는 언제 처음 안용구 선생님을 만나 뵈었나요?
이종협_ 대학교 1학년에 입학하던 1962년, 안 선생님을 레슨 선생님으로 배정 받으면서 처음 뵙게 되었지요.
박은성_ 저 또한 안용구 선생님을 대학교 1학년 때 뵙고 나서부터 계속해서 인연을 쌓았습니다.
이용일_ 그렇다면 오랜 시간을 함께 해오신 김민, 김선희 선생님께서는 언제 처음 스승을 만나게 되셨나요?
김민_ 네. 제가 초등학생이었던 1951년에는 한국 동란으로 부산에서 피란 중이었는데요. 그 때 정희석 선생님의 소개로 안용구 선생님께 레슨을 가게 되면서 첫 만남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안 선생님께서 워낙 바쁘시다 보니 수업은 4, 5번을 채 받지 못하였고, 유학을 떠나시게 되셨지요.
시간이 흐른 후 1960년에 유럽에서 귀국하신 뒤 서울대 음대 교수가 되셨는데, 그 때 저를 비롯한 서순정, 노정숙, 윤정랑 선생님 등이 서울에서의 첫 제자들일 것입니다. 물론 이외에도 군에서 제대하면서 복학한 후 제자가 되신 백운창, 손용찬 선생님 등 많은 분들이 계시지요.
김선희_ 저는 유치원 때부터 안 선생님을 가까이 뵈어 오면서 성장하였습니다. 이준우 선생님의 소개로 안용구 선생님과 인연이 닿게 되었고, 저희 집에도 선생님께서 자주 놀러 오셨지요. 또 저는 안용구 선생님의 첫 아드님 돌잔치에도 참석했을 정도로 돈독한 관계를 오랫동안 유지하였습니다.
김민_ 김선희 선생님은 물론 저희보다 훨씬 후배이지만, 가까이에서 안용구 선생님과 오랜 시간을 함께 하였던 제자로, 안 선생님께서도 굉장히 아껴주셨습니다.
이용일_ 저도 이를 느꼈던 것이, 안용구 선생님 추모 좌담회를 열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하자마자 두말없이 “네, 제가 나가야지요.”라고 대답하더라고요. 이렇게 기쁘게 기다렸듯이 나서주시는 제자의 적극적인 모습을 보자니 김선희 선생님이 안 선생님께 얼마나 많은 사랑을 받았는지 짐작이 됩니다.
안용구 선생의 음악세계
이용일_ 이번에는 안용구 선생님의 음악세계에 대해서 이야기 나누어 볼까 합니다. 이에 대해 김민 선생님부터 말씀해 주시지요.
김민_ 저는 안 선생님의 여러 업적 중에서도 안용구현악합주단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이 합주단은 미국 정부의 지원으로 서울대에서 교편을 잡으신 데이비드 샤피로 교수님과 안 선생님 함께 의기투합해 창단하게 되었는데요. 사실 그 때 안용구현악합주단에 대한 말들이 많았습니다. 당시는 음악을 공부한다는 것 자체도 힘든 시대였는데, 대학 교수이자 KBS교향악단의 악장을 맡으시는 분이 자신의 이름을 합주단 명칭으로 만들어 내놓으니 많은 사람들이 생소해 하면서 비판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그 때는 누군가의 이름을 따서 연주단의 이름을 짓는다는 것은 생각지도 못했기 때문에 그러한 부분에서 안용구현악합주단이 최초로 이를 개척하였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아마 안 선생님께서는 유럽을 비롯한 외국의 경우, 이렇게 연주자의 이름을 딴 실내악단을 쉽게 볼 수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부분에서 이를 착안하신 것이 아닌가 생각되고요.
그렇게 서울대 제자들을 주축으로 한 안용구현악합주단이 창단되면서 광주, 부산, 전주 등으로 연주 투어를 다니며 활발한 활동을 이어 가게 되었고, 2년여 동안 무대에 올랐습니다. 여기 계신 이종협 선생님께서도 그 때 함께 하셨지요?
이종협_ 네. 당시 안용구현악합주단에는 비올리스트가 김용윤 선생 한 명 뿐이었기 때문에 비올라 주자가 더 필요하다 보니 브리튼의 「Simple Symphony」 비올라 파트를 안 선생님께서 직접 제게 끝까지 선생님의 비올라로 레슨을 해주셨고, 일주일 후에 연주 투어를 하기도 하였습니다.
박은성_ 제가 기억하는 안용구 선생님은 훌륭한 바이올리니스트이자 교육자이시면서 음악에 상당히 조예가 깊으셨다는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실내악 음악에 남다른 관심을 보이셨지요. 앞서 말씀하신 데이비드 샤프로 교수님과 함께 안용구현악합주단을 창단하신 것은 매우 역사적인 일입니다. 이는 한국 최초의 수준급 연주단으로서, 약 2년 정도 활발한 연주 활동을 펼쳤습니다. 활동 기간이 그다지 길지 않은 것은 지휘를 맡으셨던 데이비드 샤피로 교수님께서 한국을 떠나시면서 연주가 중지되었기 때문이며, 사실 안용구 선생님께서 지휘봉을 잡으셔도 무관하였는데, 바이올린 연주에 집중하길 원하셨습니다.
이용일_ 안 선생님께서 미국에 거주하실 때 당신의 집을 새로 지으셨다고 해서 방문하여 구경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의 솔직한 제 느낌으로는 비능률적인 집이라고 생각해 제 의견을 있는 그대로 말씀드렸더니, 벌컥 화를 내시면서 당신의 집에 대한 자부심을 드러내시더라고요. 당시 안 선생님 댁은 무대와 같은 구조로 설계되어 지어졌었는데, 이는 오직 실내악 연습을 위함이었고, 이러한 점을 통해 선생님께서 진정으로 실내악 음악을 사랑하셨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어렸을 때부터 함께 하신 김선희 선생님은 스승이신 안용구 선생님의 음악세계를 어떻게 보시나요?
김선희_ 사실 안 선생님께서 활발히 활동하실 때 저는 너무 어려서 감히 선생님의 음악을 평가하기에는 송구스럽고, 많은 분들께서 잘 아시겠지만 국내에서는 교향악단에 오랜 시간 동안 굳건히 자리를 지켜주시고, 후에는 피바디 음대에서 후학 양성에 최선을 다하셨기 때문에 음악계와 교육계 모두에서 인정할 만한 음악가이셨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김민_ 네, 맞습니다. 바이올린 교육계의 대부 중 한 분이시지요. 1960년대에는 바이올린 연주자 중 안용구 선생님을 거치지 않은 분들이 없을 정도로 선생님께 많은 바이올리니스트들이 영향을 받았습니다.
특히 안 선생님께서는 유럽에서 훌륭한 여러 스승들을 사사하시면서 터득한 서양식 바이올린 교육을 국내에 체계적으로 뿌리 내릴 수 있도록 많은 힘을 쏟으셨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실내악 음악을 굉장히 사랑하셨는데, 김용윤, 조년자 선생님과 함께 3중주 연주를 정기적으로 가지며 다양한 레퍼토리를 선보이기도 하셨습니다.
이종협_ 그리고 칼 플레시 바이올린 스케일을 처음으로 국내에 도입하신 분도 안용구 선생님이시지요.
이용일_ 그럼 주제에서 살짝 벗어나지만 제 기억으로는 최영우 선생님과 안용구 선생님과의 관계에서 오해가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그렇다면 혹시 이와 관련해서 설명을 해주실 분이 계실까요?
김민_ 제가 대학에 들어갈 때만 해도 연주자 인력이 부족하다 보니 임원식 선생님의 부름에 대학생 신분으로 KBS 교향악단에 나갈 수 있었지요. 그 때 안용구 선생님께서 교향악단의 악장을 맡고 계셨는데, 사실 그전까지는 쭉 최영우 선생님께서 악장으로 계셨었지요. 그런데 악장의 자리가 바뀐 계기가 임원식 선생님께서 유럽의 더블 악장 시스템을 직접 보신 후 한국에도 이러한 제도들이 마련되면 좋겠다 생각하셔서 시행한 것이었는데, 제도적으로 준비가 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본래 임 선생님의 뜻은 최영우 선생님을 해임시킨다는 것이 아니라 두 명의 악장이 서로 의견을 나누고 일을 분담하는 시스템을 원하셨던 것이었겠지만, 정리가 되지 않은 상황 속에서 그 뜻을 명확히 이해되지 않은 단원들에게는 오해를 사기도 하여 최영우 선생님께서 그러한 분위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자리를 떠나시게 되신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렇게 되다 보니 안용구 선생님의 뜻과 다르게 시스템이 움직이게 되었고, 곤혹을 치르게 되시는 일도 종종 있었습니다.
이용일_ 당시 두 분 선생님들의 제자들도 같이 분개를 했었지요. 이러한 이야기들은 과거 음악계에서 매끄럽지 못하게 지나갔던 역사적인 한 부분이며, 두 분 모두 정말 훌륭한 선생님들이셨지만 음악계의 발전을 꾀하려는 노력이 자칫 잘못하면 퇴보의 길로 들어설 수 있다는 뜻에서 후학들도 이를 기억하여 같은 실수를 범하는 일을 없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조심스럽지만 꼭 이 부분을 짚고 넘어가고 싶었습니다.
김민_ 최영우 선생님께서도 음악계에 여러 좋은 영향을 미치시고, 훌륭한 제자들도 많이 길러 내셨는데, 안용구 선생님께서 오신 후 악장건으로 시작해 오해가 쌓였던 것이지요.
안용구 선생의 교육관
이용일_ 이종협 선생님께서 앞에서 칼 플레시 바이올린 스케일을 안 선생님께서 국내에 처음으로 도입하셨다고 언급하셨는데요. 이를 비롯한 안 선생님의 교육적인 행적을 되짚어보는 시간을 가져보도록 하겠습니다. 다른 선생님들께 레슨을 받을 때와 차이점이 있던가요?
이종협_ 당시 보통의 레슨이라 하면 선생님이 학생과 함께 바이올린을 키면서 진행되는 경우가 흔해서 수업 때 많은 의지가 되었는데, 대학에 들어가 안 선생님께 처음 레슨을 받으려 찾아뵈니 아무 말씀 없이 그저 “해봐.”라고 하셔서 속으로 적잖이 당황했었습니다. 물론 이러한 방식은 선생님들에 따라 조심씩 다르긴 하였지만, 의존적으로 레슨을 받다가 혼자서 연주해 보이려니 난감했었지요. 그러나 그러한 레슨 방식으로 계속해서 가르침을 받다보니 점점 익숙해지면서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김민_ 처음 칼 플레시 바이올린 스케일을 접했을 때는 모두가 생소했었어요. 아무래도 모든 조성을 다루게 되다 보니 힘들었었지만, 음악의 기본적인 부분을 이 덕분에 잘 다져나갈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물론 스케일과 에튀드가 다양해졌지만, 당시에는 칼 플레시 바이올린 스케일이 혁신적인 바이올린 기초 교육으로 평가받으면서 채택되었습니다.
이종협_ 안용구 선생님께서는 고전적인 레퍼토리를 좋아하셔서 레슨 때 바흐의 작품 등을 자주 다루었었지요. 그리고 예전 악보에는 홀수 핑거링을 많이 사용하도록 하였는데, 안 선생님께서는 짝수 핑거링도 많이 사용하셔서 처음에는 어색하고 많이 어려웠지만, 후에는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이용일_ 안 선생님께서는 자상하시면서도 엄격한 선생님으로 기억되는데요.
이종협_ 조곤조곤 이야기하는 스타일이고, 그 중에는 곧 살이 되고 뼈가 되는 좋은 말씀이 많았었습니다.
정리_이은정 기자 / 사진_김문기 부장
- 기사의 일부만 수록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음악춘추 2014년 3월호의 기사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
진행: 이용일(한국음악교육협회 명예회장)
김민(서울바로크합주단 음악감독, 서울대 음대 명예교수)
이종협(전 중앙대 음대 교수, 협 스트링 앙상블 음악감독)
박은성(전 코리안심포니 상임 지휘자, 전 한양대 음대 교수)
김선희(충남대 음대 교수, 서울바로크합주단 단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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