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탐구
한국 관악계의 거장
관악지도자 김종석 선생
교육자로서의 외길을 흔들림 없이 걸어 온 김종석 선생은 1961년 29세의 젊은 나이로 성남고(서울 대방동 소재) 음악교사로 부임한 후 탁월한 지도력으로 성남고 밴드를 1963년 경희대 주최 전국 음악경연대회 우승, 1964년 한양대 주최 전국 음악경연대회 우승, 한국일보 주최 전국 음악경연대회를 1회부터 5년 연속 우승 등 전국에서 열린 관악 경연대회를 모두 석권하게 했다. 또한 1974년에는 NHK 방송국 초청으로 일본에서 열린 제1회 동경 세계 관악제에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성남고등학교 밴드부가 세계의 음악계와 어깨를 나란히 공연하는 영광을 누리기도 하였다. 김종석 선생은 학생들에게 음악보다 인간에 대한 교육을 먼저 강조하였고, 음악 활동 또한 전문적인 음악가 양성에 중심을 두며 교육하여 당시 전국 음악경연대회인 합창제, 브라스밴드 경연대회에 우승을 이끌어 1989년 타계하기 전까지 성남고에 29년을 봉직하면서 성남고를 전국의 관악 명문고등학교로 만들었다.
진행 이용일(한국음악교육협회 명예회장)
패널 김기준(서울시립교향악단 Senior 회장)
이형근(영남대 겸임교수, 지휘자)
이기균(경성대 교수, 지휘자)
이한돈(강원대 명예교수, 지휘자)
김종석 선생의 성장과정 및 음악의 출발
이용일_ 이번 음악춘추 8월 호에서는 한국 관악의 기초를 닦아 관악 발전에 힘쓰신 서울 성남고등학교의 김종석 선생님을 회고하는 시간을 가져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먼저 김종석 선생님의 고향은 어디신지요?
김기준_ 대전이 고향이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이형근_ 대전의 모 공업고등학교 교사로 열악한 환경의 관악부를 지도하여 전국대회에 우승하는 등 능력이 알려져 성남고등학교에서 스카우트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김기준_ 사실은 김종석 선생님께서 대학에 취직할 기회가 여러 번 있었습니다. 경희대에서도 강사로 초청했다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이용일_ 김종석 선생님께서도 해군 군악대에 계셨죠?
김기준_ 네, 해군군악대에서 교육과정도 수료하시는 등 그 부분에 있어서 탁월한 분이셨습니다. 과거에는 군악대 동문 중에 선생님의 지도를 받아서 작곡과에 진학하는 경우도 있었고요.
이용일_ 박동욱 선생님께 물어보니 김종석 선생님은 해군군악대에서 열심히 하셨고, 그 곳에서 기초를 닦으셨다고 말씀하시더라고요.
김기준_ 해군군악대의 교육과정에 대해서는 저희는 잘 모르지만 김종석 선생님은 음악 교육에 있어서는 지극히 탁월하신 분이셨습니다.
이용일_ 김종석 선생님의 성장과정에 대해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이기균_ 과거 성남고등학교의 밴드는 전통이 있었습니다. 당시 밴드부원들은 김종석 선생님을 아주 어렵게 대했어요. 함부로 학벌이나 자라온 이야기는 물어보지도 못했지요. 하지만 제가 아는 성장과정이라고 하면 김 선생님께서 처음에 선교사님께 악기를 배웠다고 들었어요. 악기를 선교사님께 배운 후 해군군악대에서 기초를 확립하고 경희대 공대에 다니시다가 중퇴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김 선생님은 자신이 받은 사랑만큼 주위 사람들에게 많은 사랑을 베푸셨습니다. 이것이 선생님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형근_ 그 때 중퇴이유가 악보와 연관이 있는데, 6·25 전쟁이 일어나자 귀중한 악보들을 김종석 선생님이 짊어지고 어딘가에 안전하게 보관했다고 하더라고요. 선생님이 아니었으면 악보가 다 없어졌을 텐데… 아마 선생님이 그 문제로 중퇴하셨다고 알고 있습니다.
이용일_ 오래 전에 성남고를 졸업한 사람들 가운데 김종석이라는 이름 석자를 모르는 사람은 없는 것 같습니다. 저는 과거서부터 성남고 출신들을 많이 만나왔는데 항상 밴드부에 관한 이야기가 화제의 중심이었습니다.
이형근_ 관악기 연주가들은 ‘한국 관악운동은 대방동에서부터 시작됐다’고 인정합니다. 즉, 서울 영등포구 대방동에 위치한 성남고등학교의 김종석 선생님이 관악지도 교사로 재직하시면서 뛰어난 관악기 전공 연주자를 길러낸 것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김기준_ 학생들이 중심이 된 것이 아니라 성인들로 구성된 한국교향취주악단으로 시작을 하셨는데, 제가 대학교 1학년 때인 1968년도라고 기억됩니다. 당시 서현석, 김정수 선생님 등이 모여서 한국교향취주악단을 만드셨습니다.
이용일_ 그 때 당시 1급 최고 연주자들과 같이 했다는 것은 그만큼 김종석 선생님이 신망을 받고 지도력이 있었다는 말씀이시죠
김종석 선생의 성남고등학교 시절 및 교육관
이용일_ 김종석 선생님의 성남고등학교 시절은 관악 하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음악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대단한 존재였는데, 성남고등학교 밴드는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이기균_ 성남고등학교 밴드부는 1945년도에 창단됐어요. 김 선생님은 돌아가시기 전까지 29년을 성남고등학교에 재직하셨어요. 그러니까 1960년에 성남고등학교에 오셨지요. 제가 고1 때 선생님이 47세였거든요. 그러니까 저와 30살 차이였음을 기억합니다.
이용일_ 그럼 학교에서 밴드부에 대한 지원은 충분했었나요?
김기준_ 당시 학교 측에서는 전폭적인 지원을 해주었습니다.
이기균_ 한때 저와 일을 같이 한 성남고등학교 밴드부 졸업생이신 김수길 선생님이라는 분이 계시는데, 이분께 들은 이야기로는 김종석 선생님이 대전에서 무작정 서울로 올라오셨을 때 처음에는 배문고등학교에서 스카우트를 제의하셨다고 합니다. 그 소문을 들은 당시 성남고등학교 김석원 이사장님께서 인재를 놓쳐서는 안 된다고 하셔서 성남고등학교 음악선생님으로 모셔 가셨어요. 그렇기 때문에 밴드부에 전폭적으로 지원을 해주신 거로 알고 있습니다.
김기준_ 지원에 대한 문제는 그러한 각도로도 보는 것은 좋지만, 김 선생님이 학교에 오시기 전의 악기 보유 상태는 다른 학교와 비교를 해봐도 그렇게 좋지는 않았습니다. 김종석 선생님이 오시고 난 다음에 학교에서 전폭적으로 지원을 해줬는데, 일례로 당시 팀파니를 보유하고 있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었습니다. 합동연주도 많이 했고, 그 당시 김석원 이사장님이 학교운영을 완전히 장악하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저 같은 경우도 학교에서 장학금을 받고 기숙사에서 생활을 했거든요. 제가 재주도 별로 없었는데 김종석 선생님이 인정을 해주셨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이용일_ 그러니까 김석원이라는 큰그릇이 사람을 알아본 거죠. 아무리 뛰어나도 주위에서 알아보지 못하면 소용없는 것 아닙니까. 결국에는 훌륭한 결과물이 나왔으니까요. 지금 생각하면 김종석 선생님은 그 당시 꼭 필요한 인물이었던 것 같습니다. 어둡고 암울한 시기였음에도 뛰어난 업적을 남길 수 있게 된 것 중의 하나는 제자들이 끝까지 따라주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김기준_ 한 가지 더 말씀드리자면, 현재 성남고등학교는 가족 직계가 이사장 직을 맡고 계시는데 한 번은 제가 그분들과 교향악 축제에 간 적이 있어요. 박은성 지휘자가 지휘를 하던 날이었는데, 뒤풀이에서 지휘자님이 딱 한 마디 하시더라고요. “우리나라 교향악계를 변화시킨 학교가 성남고이고, 그 중심이 바로 김종석 선생님이시다”라고요. 그 때 박은성 선생님이 하시는 말씀을 듣고 내심 수긍했습니다.
이용일_ 김종석 선생님이 일반 음악 수업에도 들어가셨나요?
이기균_ 그렇습니다. 그런데 당시 저희는 밴드부라고 표현하지 않고 취주악, 음악반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근데 저도 학교에서 강의를 하면서 가끔 김종석 선생님에 대한 자랑을 늘어놓곤 하는데, 당시에는 음악부원뿐만 아니라 일반 학생들도 존경을 했어요.
김기준_ 성남고등학교가 야구도 잘하는 학교잖아요. 당시 성남고등학교의 야구 응원은 볼거리가 참 많았습니다. 전교생을 모아놓고 야구 응원을 지도하는 부분이 있었는데, 김종석 선생님께서 지도를 하셔서 그런지 학생들은 다른 선생님의 지시보다 더 잘 따랐습니다.
이용일_ 김종석 선생님이 지금 교사로 재직하고 계신다고 하더라도 요즘 아이들은 입시를 준비한다고 해서 아마 밴드부 활동은 거의 하지 못할 거라고 봅니다. 몇십 년 사이에 세상이 참 많이 바뀌었죠. 당시 선후배 사이는 어땠나요?
이형근_ 당시 저희들은 성남중고관악부가 대한민국 최고라는 자부심과 합주라는 공동작업을 통해 음악으로 교감하며 긴밀한 유대관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특히 서울대 음대를 비롯한 주요 음악대학 콩쿠르를 석권하며 장학생으로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선배들에 대한 존경심도 대단했습니다. 물론 모두가 김종석 선생님의 탁월한 지도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김기준_ 제가 기억나는 것이, 성남고등학교는 영등포에 가까운 대방동에 소재하고 있었는데, 당시 사실은 그 지역에서 손꼽히는 우수한 학교였습니다. 그렇지만 일부 학생은 질이 많이 안 좋았어요. 밴드부에도 그런 껄렁한 학생이 몇 있었지만, 김 선생님께서 완전히 정리하셨습니다. 저는 그런 학생들이 거의 정리될 무렵 성남중학교에 입학했어요. 그런데 고등학교 2, 3학년 선배들을 보면 할아버지 같았어요. 옆에 가면 담배냄새가 나고… 그런 선배들은 선생님이 지도하는 것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고, 음대에 진학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김 선생님은 그들에게 음악을 제대로 가르쳐서 음대, 군악대를 보낼 생각이었지만 껄렁한 선배들은 선생님이 젊으셔서 반항하며 덤비기까지 했습니다. 한 번은 선생님께서 폭력을 쓰지 않고 말로써 “밴드부를 그만 둘래, 나랑 겨뤄서 결판을 낼래.” 하는 장면을 목격할 수 있었습니다. 그 후 밴드부원은 성적이 좋지 않으면 될 수 없었어요. 당시 성남고 밴드부 학생들은 연세대 작곡과, 서울대 성악과에도 많이 들어갔던 걸로 기억합니다.
이기균_ 김종석 선생님 별명이 면도칼이었습니다. 그 정도로 무서우시고 엄하셨습니다. 특히 김종석 선생님께서는 학생의 적성을 잘 파악하신 후 진로를 조언해 주셨지요. 일례로 김수길 선생님이 밴드부에 트럼펫으로 들어왔는데 목소리가 좋다고 성악으로 가라고 권유하셨어요. 그래서 성악 전공으로 서울대에 입학했습니다.
이용일_ 한 번은 김종석 선생님 댁에 놀러간 적이 있었는데, 기억에 남는 것은 두 번째 만남에서 김 선생님이 “내가 성남고에서 할 일은 다 끝난 것 같다.”라고 하시는 거예요. 왜 그런가 하니, 그 때 돈 있는 학생들이 개인레슨을 받으면서 관악을 시작한 거예요. 김 선생님께서 “이제 학교에서 돈 안 내고 배우는 아이들은 대학을 못 가겠다.”라고 걱정을 하셨어요. 제가 그래서 “선생님은 이 문제를 어떻게 타결하시렵니까?” 라고 물으니 “내가 어떤 짓을 해도 안 될 것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형근_ 그 때 학생들은 그냥 음악이 좋아서, 음악에 미친 듯이 밤을 새며 악기연습을 했고, 또한 음악을 몸으로 느끼던 시절이었지요, 사실 당시에는 입시를 위한 개인레슨 개념이 잘 정립되어 있지 않던 시절이라 대부분 가난한 학생들을 위해 선생님께서 대학입시에 필요한 과목인 시창과 청음은 물론 전공악기까지도 돈 한 푼 받지 않고 가르치셨습니다. 요즘은 부유한 부모를 둔 학생들이 좋은 선생을 골라 충분한 레슨을 받고 또 음대진학이 졸업 후 음악단체 취업이라는 상관관계까지 전제가 되는 것 같아 격세지감을 느끼지요.
이용일_ 음악은 정말 좋아하는 사람이 해야 되는데, 우리 사회가 황금만능주위로 빠지면서 안타깝게 변화된 것 같아요. 이형근 선생님이 저에게 감동을 주는 이야기를 해주셨는데 다시 한 번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이형근_ 대구에서 올라온 저에게 감사하게도 선생님께서 당신이 기거하시던 작은 사택의 방 하나를 방세 한 푼 없이 서울대 음대 입학할 때까지 살 수 있게 저를 받아주셨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염치가 없는 놈이었지만, 그런 저를 김 선생님께서는 참 많이 사랑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김 선생님 돌아가신 장례식 때의 일이 생각납니다. 놀랍게도 수백 명의 제자들과 음악인들이 밤을 새웠는데, 갑자기 얼굴도 모르는 한 친구가 들어와 영정 앞에서 펑펑 우는 거예요. 한참 울고 난 그에게 ‘관악부는 아닌 것 같은데...’ 하고 물어봤어요. 그 친구 이야기가 자신이 성남고 3학년 때 독사 별명을 가진 유명한 교련선생님에게 부당하게 구타당하다 저항한 죄로 퇴학당하게 되자 전후 사정을 파악한 선생님께서 그 학생을 저희들도 모르게 명목상 관악부에 넣어 무사히 졸업하게 해주었다고 합니다. 당시는 김 선생님이 지도하는 관악부 일에 대해서는 다른 선생님들도 함부로 하지 못했습니다. 어쩌면 망칠 수도 있었던 그 학생의 중요한 청년시기를 선생님께서 바로 잡아 주신 거지요
이용일_ 밴드부에서 활동할 때 선생님이 연주하게 한 곡은 무엇인가요?
김기준_ 「무도회 권유」, 「핀란디아」, 「헝가리 랩소디」같은 곡이었습니다. 놀라운 것은 제가 평생 살면서 그 때 음악을 다 배운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헝가리 랩소디」를 제가 고3 때 연주했는데, 장2도를 끝까지 맞추게 하시는 거예요. 그게 될 때까지 연습하게 하시더라고요. 3화음 맞추는 건 말할 것도 없고요. 사실 대학교 들어가서도 장2도에 대한 재미를 느끼기 어려웠는데, 성남고등학교 밴드부를 통해 음정에 대한 걸 많이 배웠습니다.
이형근_ 「이탈리아 기상곡」「탄호이저 서곡」같은 곡은 사실 관악기로 연주하기가 무척 어렵습니다. 지휘도 쉽지 않은데 김 선생님께서는 더구나 어린 학생들을 훈련시켜 거의 완벽하게 만드셨으니까요.
김기준_ 마지막 부분이 16분음표라 한 음표 당 9개를 불어야 되니까 정말로 힘이 드는 일인데, 그게 될 때까지 연습시키셨어요.
이형근_ 이를테면 어려운 부분 연습 할 때는 한번 연습에 성냥개피 하나씩, 수백 개들이 큰 성냥통이 다른 통에 다 옮겨지면 다시 원위치 될 때까지 시키는 식이었지요. 지독했습니다.
김기준_ 그 때 오케스트라처럼 하려면 100여 명이 필요한 상황에서 밴드부 전체가 30명 정도였는데, 그렇게 많은 인원이 아닙니다. 그 적은 인원을 가지고 다 만들어 내셨습니다.
이용일_ 마음에 들지 않으면 회초리를 들지 않으셨나요?
김기준_ 연습시키는 걸 싫어하는 선배들이 있었어요. 그러면 앞에서 말씀드렸다시피 “네가 나가던지 주먹으로 겨뤄서 지면 할 거냐. 그냥 나가라, 훼방 놓지 말고.” 라고 말로 해결하셨어요. 그렇게 연습을 중요하게 생각하셨습니다.
이용일_ 외부에서 본 김종석 선생님은 어떠했는지 이한돈 선생님께서 말씀해 주시지요?
이한돈_ 저는 김 선생님이 관악기 부문에서 보기 드문 음악인이라고 생각합니다. 1959년에 처음으로 전국적인 관악제가 열렸었어요. 그 때 저는 육·해·공군을 비롯해 시립교향악단이 연주하는 관악소리에 매료되어 음악을 시작했습니다. 그 당시 고등학교에서 밴드부를 운영하는데는 문제가 많았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김종석 선생님이 계셨던 성남고등학교를 비롯해 덕수상업고등학교에는 그런 문제가 전혀 없었습니다. 그것이 김 선생님을 존경하게 된 계기가 된 것 같습니다.
이용일_ 그렇다면 성남고등학교의 일본연주는 어떻게 해서 성사된 것인지요?
김기준_ 저는 일본 연주에는 참여를 못했는데, 당시 일본에는 야마하 제작사가 있었고, 국가적으로 관악을 지원하고 있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김 선생님이 일어에 능통하시고 JBA 회장님과 친하셨어요. 그런 이유로 일본에서의 연주가 성사된 것입니다.
이용일_ 초창기 음악가들이 대개 그렇듯이 그분들은 대부분 일본 잡지를 통해 신지식을 습득했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일본을 거치지 않고 직접 서구와 교류하니까 우리 음악이 일본과 달라졌다고 봅니다. 혹시 그 외에 재미있는 이야기 있다면 해주시겠습니까?
이한돈_ 그 당시 많은 분들이 각 학교에서 밴드를 지도하고 계셨었는데, 외부에서 봤을 때 김 선생님이 스승으로서 제일 잘 운영하셨다 걸 알 수 있었습니다. 교육적인 분야에서 김종석 선생님의 지도력이 굉장히 뛰어났다고 봅니다.
이기균_ 당시 성남고등학교 밴드부에서는 매년 4, 5명씩 서울대에 들어갔습니다.
김기준_ 우리가 서울대 음대에서 관악 합주를 할 때 보면 반은 성남 출신이었어요(웃음).
이기균_ 또 김 선생님께서 강조했던 것이 인간적인 면에 대한 것이었어요. “음악을 잘하기보다 인간이 먼저 되라.” 고 하셨어요. 그 때는 그 말이 생소했습니다. 음악만 잘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인간적인 면을 매우 강조하셨으니까요. 그리고 지금도 잊지 못하는 것은 음악실에 ‘실훈’이라는 액자가 걸려 있었는데, 그 내용은 “음악은 기도다(Musik Ist Gebet)”였습니다. 김종석 선생님께서 직접 독일어로 쓰셨지요. 세월이 지나고 보니까 저도 신앙인으로서 여러 가지를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기도할 때는 부르짖어 표현하기도 하고, 대화를 하며 표현하는데, 선생님이 쓰신 그 말 안에 함축된 의미는 어마어마한 것이었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성남고등학교 밴드부를 거쳐간 사람들 모두는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김기준_ 격세지감이랄까요. 우리는 학교를 같이 다닌 적이 없는데, 그 때까지 계속 됐군요. 김 선생님은 변함이 없으셨네요.
이기균_ 선배들에게 그런 이야기를 하면 “우리 때도 그랬다.” 다들 이러는 거예요. 선생님께서는 음악을 형식적으로 가르쳐 주신 게 아니라 일관성 있게 인간성을 강조하면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직접 악기를 불어 시범을 보이시면 저희는 보통 성냥개비 400개가 다른 통에 다 옮겨질 때까지 한 부분을 연습했습니다.
이용일_ 오늘 저는 “음악은 기도다.”라는 실훈을 듣고 머리를 망치로 얻어맞은 기분이 듭니다. 김 선생님은 정말 대단한 교육자이셨다는 걸 새삼 깨닫게 됩니다.
김기준_ 김 선생님께는 학교에 절친한 친구 분들이 계셨어요. 그 중 한 분이 국어 선생님이셨는데 이 선생님은 참 점잖으셨지요. 장례식 때 그 선생님이 추모사를 읽으며 강조하신 게, 평소 김 선생님을 절대 못 따라 갔다는 말씀이었습니다. 김 선생님은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술도 안 하시고, 말도 허투루 절대 안 하시는 분이셨습니다. 저는 김 선생님의 영향으로 지금도 후배에게 말을 잘 못 놓습니다. 선생님이 그러셨거든요.
이기균_ 하나만 더 말씀드리면 사람이 부조리 같은 게 없지 않아 있잖아요. 제가 콩쿠르에 참가하면서 선생님께 레슨을 받았는데, 감사한 마음으로 추석 때 사택에 사과 한 상자를 들고 갔어요. 그런데 얼마나 야단을 맞았는지 모릅니다. 저는 선생님께 두 번을 그렇게 혼났어요. 정말 청렴하신 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형근_ 저도 그랬던 기억이 나네요.
정리_장정윤 기자 / 사진_김문기 부장
- 기사의 일부만 수록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음악춘추 2014년 8월호의 기사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
이용일(한국음악교육협회 명예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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