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음악춘추

음악춘추 인물탐구 - 바리톤 황병덕 선생 / 음악춘추 2013년 7월호

언제나 푸른바다~ 2013. 7. 21. 2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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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춘추 기획대담

선비의 마인드로 불꽃 서정을 노래한
바리톤 황병덕 선생

 

평양에서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난 황병덕 선생(1920∼2012)은 어렸을 때부터 음악에 재능을 보이면서 음악에 심취했다. 그러나 당시 건축설계사였던 부친의 요구에 따라 평양에 있는 공업학교에 진학한 선생은, 음악에 미련을 못버리고 그 후 부모님 몰래 일본으로 건너가 동양음악학교 성악과에 정식으로 입학하였다. 일본 마이니치 신문사와 NHK 주최의 콩쿠르 등에 연이어 입상하게 되면서 부친을 설득하였고, 동양음악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하라노부코오페라연구소에서 오페라 전반에 대해 많은 것을 배우기도 했다.
하라노부코의 각별한 관심과 그의 추천으로 황병덕 선생은 후지하라오페라단에 입단해 본격적인 오페라 무대 생활을 시작하려는 찰나, 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접어들면서 사회가 더욱 불안해지자 평양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귀국 후 안주공립중학교 음악교사로 재직하며 안주에서 광복을 맞았으며, 1946년에는 평양으로 돌아와 평양고보에서 음악교사로 활동했다. 하지만 공산당의 지시에 잘 따르지 않는다는 이유로 파면을 당하게 되었고, 이 때 뜻이 맞는 음악인 4명과 함께 평남예술공작대를 조직하여, 평양을 순회하면서 연주회를 개최하는 등 큰 인기를 얻게 되자 공산세력이 긴장하며 급기야 해산 명령을 내려 선생은 1947년 월남하였다.
서울에 온 황병덕 선생은 성신여고에서 음악선생으로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였으며, 1948년 테너 이인선이 만든 국제오페라사가 한국 최초로 무대에 올린 베르디의 오페라 「춘희」에 출연하게 되었다. 한국전쟁 이후에는 이인범, 오화섭, 김기령 선생과 함께 한국오페라단을 창단, 첫 작품으로 「토스카」를 공연하였는데, 특히 베르디의 오페라 「오텔로」 공연 때는 ‘이아고’ 역을 맡은 선생의 열연을 보고 감격한 미국인 음악가 제임스 웨이드가 1970년 오페라 「순교자」를 작곡하면서 주인공 ‘신목사’역을 황병덕 선생으로 정하고, 그의 음역에 맞추어 오페라를 완성함으로써 열연하게 된다.
또한 1955년 연세대에 종교음악과가 개설되면서 연세대 교수로 자리를 옮긴 후 기독교에 귀의했고, 1985년 정년으로 물러날 때까지 음대 학장 직을 역임하는 등 많은 제자들을 길러냈다.

 

일시: 2013년 6월 13일(목) 10시 30분
장소: 코스모스 악기 10층
진행: 이용일 (한국음악교육협회 명예회장)
패널: 임웅균(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 교수)
     최현수(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 교수)
     박수길(전 한양대 음대 학장)
     박세원(서울대 음대 명예교수)
     황성엽(전 호서대 예체능대 학장)

 

황병덕 선생과의 첫 만남


이용일_ 지난 해 4월, 한국 음악계의 발전을 위해 애쓰시고 많은 업적을 남기신 황병덕 선생님께서 타계하셨습니다. 오늘 자리하신 선생님들께서는 그간 황병덕 선생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어 오신 분들이므로 황 선생님의 생전의 모습 및 이루신 업적과 대중에게 알려지지 않은 일들에 대해 자세히 전해 주실 수 있을 것이라 믿습니다. 황병덕 선생님께서 한국 음악계에 기여하신 일들을 후대 음악인들에게 알릴 수 있도록 좋은 말씀 부탁드리며, 또한 이는 근대 음악사에 귀중한 자료가 될 것입니다. 그럼 먼저 황 선생님의 아드님이신 황성엽 선생님께서 부친과의 추억을 풀어내 주시지요.

 

황성엽_ 저희 아버지께서는 평소 자기관리를 철저히 하시면서 평생을 노래에만 전념하셨습니다. 지금도 기억나는 것이 제가 대학교 2학년 때였는데, 막 등교하려고 문을 나서는데, 갑자기 창문을 여시더니 “혹시 데모를 하다 붙잡히게 되더라도 비굴하게는 굴지 마라”고 하시는 것 이였습니다. 항상 제게 그렇게 말씀하실 정도로 정의로운 분이셨고, 그릇된 일은 절대 하질 않으셨습니다. 또 당시에는 피아노 전공 학생들이 군대에 가지 않는 일이 종종 있어 아버지께 제 군대문제를 상의 드리니, “너에게 신체적인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니 군대는 꼭 가야 한다”고 말씀하시면서 다른 생각은 버리라며 호되게 야단을 치셨습니다(웃음). 지금 생각해 보면 자식들에게 언제나 올바른 방향을 제시해 주셨던 것 같습니다.

 

이용일_ 그렇다면 부친의 형제분들 중 황병덕 선생님께서만 음악을 하셨나요?

 

황성엽_ 네, 그렇습니다.

 

박수길_ 황병덕 선생님의 동생 분께서는 수학선생님으로 교직에 계셨습니다. 제가 이를 알고 있는 이유는 노래를 배워야겠다 생각하였을 때 제 친구가 수학선생님이셨던 황 선생님의 동생 분과 인연이 있어서 그분의 소개로 황병덕 선생님을 만나게 되면서 음악을 시작했기 때문이지요.

 

이용일_ 황병덕 선생님께서는 자식들에게 엄한 아버지이셨나요?

 

황성엽_ 제가 맏이다 보니 자식들 중 유독 아버지를 어려워했는데, 이는 저희들을 엄하게 키우셨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제가 피아노를 전공하며 아버지와 함께 연주를 여러 번 가지면서 음악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나누었지요. 그 때마다 느낄 수 있었던 아버지의 음악세계를 간단하게 말씀드리면 ‘자연스러움과 순수함’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한 번은 제가 어렸을 때 그런 말씀을 해주셨어요. 아버지께서 일본에서 공부하실 때 고음을 내려면 얼굴이 시뻘겋게 될 정도로 힘드셨대요. 그 다음부터는 억지로 고음을 내려 하지 않으셨고, 나중에는 자연스럽게 발성이 잡혀서 크게 힘을 들이지 않고도 고음을 내실 수 있었다고 말씀하시더라고요.
그 이야기를 증명해 주시듯이, 집에서 테너 제자분이 레슨을 받을 때는 날카로우면서도 멀리 퍼지는 그러한 청량한 고음을 내주셨습니다. 그러면 저는 속으로 “아, 저게 아버지께서 억지로 소리를 내는 것이 아니라 자연적으로 내시는 소리구나”라고 느꼈고, 그 이후에도 제게 음악적으로 많은 조언을 해주셨는데, 한마디로 “음악은 자연스럽고 꾸밈이 없어야 한다”였습니다.

 

이용일_ 그렇다면 황병덕 선생님과의 첫 만남은 어떠하셨는지 박수길 선생님께서 말씀해 주십시오.

 

박수길_ 처음 대담에 참석해 달라는 요청을 받고는 황병덕 선생님께 오랫동안 가르침을 받았던 제자가 아니었기에 잠시 고민을 하였지만, 이내 다시 돌이켜보니 저의 음악의 출발을 황 선생님께서 만들어 주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기에 이렇게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저는 처음부터 음대에 진학할 생각이 없었고, 사관학교 입시에 떨어지다 보니 친구들의 권유로 노래를 해야겠다 마음먹었습니다. 그 때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여러 인맥을 거쳐 황병덕 선생님과 연줄이 닿게 되었고, 제 첫 스승님이 되셨지요.
그렇게 황 선생님 댁을 찾아가 소리 테스트를 받고, 입시가 한 달여 남았을 때라 4번의 레슨 후 운이 좋게 연세대 음대에 들어 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입학은 되었는데, 등록금이 없어 등록 마감일까지 도저히 돈을 구할 여력이 안 되서 황 선생님을 찾아뵙고 사정상 입학을 포기해야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자 황병덕 선생님께서는 “비록 음대에서 전체 2등으로 장학금은 못 받게 되었지만, 네가 성악과에서 1등이다. 포기하지 말고 도와줄 테니 나와 갈 곳이 있다.”라고 하시며 총장님과 교무처장님을 차례로 함께 찾아뵈었고, 무려 한 달이나 입학금 납부 연기를 받았습니다. 이는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니었고, 저에 대한 믿음이 있으셨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한 달이 지나서도 등록금을 마련하지 못해 결국 포기하게 되었지만, 그 때의 감사함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이용일_ 사제간의 연을 맺은 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가능성 있는 제자를 위해 그렇게까지 힘써주신 것으로 보아 황병덕 선생님께서는 참다운 스승이셨다고 보여집니다.
비록 가까이에서 모시진 못했지만, 멀리서 보더라도 뚝심이 있는 올곧은 분이셨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박세원 선생님께서 황 선생님에 대해 떠오르는 일이 있다면 전해 주시지요.

 

박세원_ 그 당시 황병덕 선생님께서는 여러 장르를 넘나들면서 활동하셨던 몇 안 되는 바리톤 중 한 분이셨고, 테너만큼의 고음을 내셨던 바리톤으로서 음역이 굉장히 넓으셨으며, 발성에 대한 연구를 끊임없이 한 분이셨습니다.
그리고 지인을 통해 전해 듣기로는 연주 후 뒤풀이에는 절대로 참석을 안 하시는 분으로 유명하셨다고 하고, 더불어 술과 담배 등 건강을 해치는 것에는 절대 가까이 하지 않으셨다고 하더라고요.
요즘은 스트레스와 더불어 자신의 컨디션을 조절하지 못하는 연주자가 많은 것이 사실인데, 황 선생님께서는 철저히 당신의 건강, 즉 성악가로서의 몸 상태를 최상으로 관리하셨습니다.
유럽의 경우, 매니저들이 가수들을 철저히 관리하는 경우가 많은데, 황병덕 선생님께서는 이를 몸소 실천해 보이셨지요.

 

이용일_ 아마도 철두철미하게 배운 일본에서의 기본 교육이 황병덕 선생님의 성격과 잘 맞았기 때문에 이를 고수하셨다고 봅니다.
당시 일본에서는 한국사람을 보면 무조건 성악을 하느냐고 물었을 정도로 그만큼 한국사람들의 목소리가 좋았고, 실력 또한 인정해 주었다고 선생님들께 들었습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황 선생님께서는 일본에서 특별히 대우받았던 성악가 중 한 분이 아니셨을까 개인적으로 추측해 봅니다.
그렇다면 황 선생님의 가르침을 계승해 오고 계시는 임웅균 선생님과 최현수 선생님께서는 스승이신 황병덕 선생님과 어떻게 처음 만나 뵙게 되셨나요?

 

임웅균_ 네. 어릴 때 제 꿈은 사실 성악가가 아니라 검사가 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어머니의 권유와 학생회장을 하면서 정치와 관련된 일들에 회의감을 느끼게 되어 노래를 하고자 결심하였습니다. 그래서 고등학교 때 음악선생님이셨던 이도식 선생님을 찾아가 제 노래를 들려 드렸더니 저를 당신의 스승님을 소개해 주셨고, 그 때 처음 황병덕 선생님을 뵙게 되었습니다.
또한 지금까지 감사한 것은 황 선생님께서 “미래가 기대되는 테너가 내 제자가 되었구나”라며, 저를 제자로 흔쾌히 맞아 주셔서 많은 분들이 저를 달리 바라보셨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황병덕 선생님의 마음 씀씀이는 한마디로 선비이셨고, 제자로서 이러한 가르침을 받아 제가 한 단계 더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최현수_ 저는 주변에 음악을 하시는 분이 아무도 계시지 않아 독학으로 노래를 공부하였고, 특히 라디오가 선생님 역할을 대신해 주었습니다. 황병덕 선생님을 비롯한 훌륭한 성악가들의 노래를 들으며 꿈을 키우고 음악도 배울 수 있었기 때문이지요.
한 번은 우연히 연세대에서 열린 음악회에 가게 되었고, 그 때 멀리서 뵈었던 황 선생님의 모습은 베레모를 쓰셨는데 꼭 철학자, 혹은 미술가 같기도 할 정도로 멋진 풍채였고, 그렇게 뵙고 나서는 마음속에 “나중에 나도 저렇게 멋진 성악가가 되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선생님과의 첫 만남이라고 하면 죄송스런 부분도 있는데요. 처음 대학에 들어가서 희망하는 선생님을 적어야 할 때 너무도 황병덕 선생님의 이름을 쓰고 싶었지만 어린 마음에 “나도 다른 선배들처럼 그분의 음악을 따라하려고만 하면 어쩌지?”라는 생각에 모든 지망을 김청자 선생님으로 기입하였습니다. 그래서 결국 김청자 선생님께 레슨을 받게 되었는데, 제게 거신 기대가 크셔서 요구하시는 것들이 많아 버겁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고, 4번의 수업을 끝으로 성악을 포기하려고 마음먹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독학으로 공부했기에 그러한 기대들이 너무나 힘들었기 때문입니다. 그 때 마침 이를 지켜보시던 황병덕 선생님께서는 저를 불러내셔서 “진작에 나를 찾았다면 좋았을 텐데 왜 그랬느냐? 나는 다른 제자들에게 내 노래를 따라하게 강요한 적이 없다. 그들이 그냥 따라했을 뿐이다”라며 저를 받아주셨습니다.

 

황병덕 선생의 음악세계


이용일_ 오래 전 일이지만 제가 오케스트라 지휘자로서 황병덕 선생님과 함께 하는 무대를 지휘했을 때 선생님께서는 다른 분들처럼 말씀이 유연하지 않으시면서 꼭 남의 연주를 대하듯이 당신의 음악적 표현을 간결하게 요구하셨고, 그 카리스마에 특히 신경이 쓰였던 것도 생각나네요.
그리고 막상 연주가 시작되면 감정에 치우쳐 노래하는 다른 여타의 성악가들과 다르게 저와 약속한 것은 반드시 지키시면서 노래를 하셨지요. 그러한 황 선생님의 확고한 면모는 아직까지도 제 기억 한 켠에 남아 있습니다.
이어서 이번에는 황병덕 선생님의 음악세계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어볼까 합니다.

 

박수길_ 황병덕 선생님께서는 우리나라 바리톤으로서는 가히 독보적인 존재이셨습니다. 제가 고등학생 때 황 선생님께서 출연하신 오페라 「오텔로」, 「토스카」 등을 감상하면서 선생님의 노래에 크게 감탄했었고, 바리톤이셨음에도 불구하고 고음이나, 그 소리 자체가 너무도 미성이셔서 지금 생각해 보면 테너 같은 색깔을 구사한 바리톤이시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박세원_ 네, 맞습니다. 얼마 전 황병덕 선생님의 팔순 때 녹음되었던 테이프를 우연히 듣게 되었는데, 목 상태가 그 연세에도 놀라운 탄력을 유지하면서 고음, 특히 정확했던 음정으로  80대 노인 목소리 같지 않은 훌륭한 발성을 구사하셨습니다. 또한 최강의 바리톤으로서 그 자리를 굳건히 지키신 것은 황병덕 선생님의 철저한 자기관리 덕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요즘은 타고난 좋은 자질을 갖고 있더라도 자기관리가 부족해 이를 발휘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은 반면, 황 선생님께서는 “성악가는 몸이 악기다”라는 철칙을 몸소 지키시면서 당신의 목소리를 통해 이를 증명해 보이셨습니다.

 

최현수_ 황병덕 선생님께서는 여러 오페라에 출연하셨음에도 너무 오페라에만 치중하지 않으시고. 리트도 열심히 공부하시는 등 음악적인 밸런스를 잘 맞추실 줄 아는 분이셨습니다.
더불어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청초한 느낌의 음악을 구사하시면서 제게 밸런스를 잘 잡으란 말씀을 자주 해주셨는데, 이러한 조언들은 제 음악인생에 큰 자양분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국립극장에서 열렸던 황 선생님의 환갑 공연은 지금까지 잊을 수 없는 무대이고, 성악가로서 그 연세에 산뜻하게 노래하셨다는 것 자체로만 보아도 대단하신 성악가셨습니다.
그 후 황병덕 선생님의 팔순 독창회 때는 저도 참여를 했는데요. 아직도 불가사의한 것이 낮에 있었던 리허설 때부터 목을 굉장히 많이 쓰셨음에도 본 공연 때는 저희보다 더 짱짱하게 노래를 부르셨고, 2년 뒤 국회의사당에서 저와 함께 공연하셨을 때에도 컨디션이 안 좋다 하셔서 내심 걱정이 되었는데, 제 걱정이 무색하게 너무나 멋지게 무대를 마치셨습니다.
알고 보니 당시 황 선생님께서는 등산을 하다가 길을 잃어 무려 6시간을 헤매시고 나서 기력이 약해지신 채로 무대에 오르셨던 것이었는데, 예상과 다르게 너무나 좋은 무대를 보여주셔서 제가 “다음에도 좋은 공연을 위해서 계속 길을 헤매셔야겠다”고 농담을 던지기도 하였지요(웃음). 늘 강조하셨던 말씀이 음악가, 특히 성악가는 꾸준히 운동을 해야 한다고 하셨는데, 선생님께서는 등산도 꾸준히 다니시는 등 이를 실천하시며 건강한 모습을 오랫동안 보여주셨습니다.  

 

정리_이은정 기자 / 사진_김문기 부장

 

 

- 기사의 일부만 수록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음악춘추 2013년 7월호의 기사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

 

박수길(전 한양대 음대 학장)

 

 

이용일 (한국음악교육협회 명예회장)

 

 박세원(서울대 음대 명예교수)

 

황성엽(전 호서대 예체능대 학장)

 

 

임웅균(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 교수)

 

최현수(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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