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음악춘추

음악춘추 기획대담-작곡가 김정길 선생 / 음악춘추 2012년 5월호

언제나 푸른바다~ 2012. 5. 2. 0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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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춘추 기획대담│인물탐구 5월호
작곡가 김정길 선생


실용음악, 기능음악 발전에 앞장(청중과 소통에 앞장)

서울 영등포구 양평동에서 태어난 작곡가 김정길 선생(1933년 1월 28일~2012년 3월 17일)은 기독교적인 기틀 아래 음악을 비롯하여 미술, 문학, 체육 등에 뛰어난 능력을 가졌던 부친의 영향을 받으며 성장했다. 양정중학교에 입학한 선생은 피아노 레슨을 받기 시작하였으며, 밴드부에서 트럼펫 주자로 활동을 하게 되었으나 한국 전쟁이 발발하게 되자 17세의 나이로 해군 군악대에 입대를 하였다. 그곳에서 지금의 음악대학과 같이 전문적인 음악 실기와 이론교육을 받게 되고, 이를 바탕으로 1958년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작곡과에 입학, 김세형 선생과 김성태 선생에게 작곡을 사사했다. 그리고 1962년 졸업 작품인 「바이올린과 클라리넷 그리고 피아노를 위한 3중주곡」이 조선일보 신인 음악회 연주곡으로 선정되어 작곡가로서 공식 데뷔무대를 갖게 되었다.


그 후 1970년 독일의  Staatliche Hochschule f?r Musik in Hannover로 유학을 떠나기 전까지 KBS, MBC TV에서 음악 해설 및 진행자로 활동하였으며, 이화여고의 음악 교사로도 재직했다. 1972년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뒤로는 서울예고 음악과장, 이화여대, 숙명여대, 한양대, 서울대에 출강했고, 1983년부터 1999년까지 서울대 음대 작곡과 교수로 재직했다.


그리고 창악회 회장, 아시아작곡가연맹 부회장, 사단법인 한국작곡가협회 이사장, ISCM 회원, 한국청년음악연맹 이사, 예술의전당 운영위원, 세종문화회관 자문위원, 대전 엑스포 개회식 음악감독, 1997년 무주?전주 동계유니버시아드 경기대회 문화식전 음악 전문위원, 서울 정도 600주년 기념 행사 음악감독, KBS 교향악단 운영위원장, 문화비전 2000 추진위원 등으로도 활동한 바 있다.


작품으로는 「세 개의 플루트와 타악기를 위한 곡」, 「두 개의 오보에와 오블리가트를 위한 작은 노래」, 「피아노 독주곡 Hausdorff Spatium」, 「바이올린 무반주 독주곡 초립동」, 「8명의 주자를 위한 추초문」, 「피아노 조곡 고풍」, 「튜바4중주 얼레짓」, 「15인의 플루트 주자를 위한 근원현상」, 오페라 「백록담」 등이 있다. 한국영화평론가협회 음악상, 한국연극영화예술상 음악상, 국민훈장 동백장 등을 받았다.

일시: 2012년 4월 5일
장소: (주)코스모스악기
진행: 이용일(한국음악교육협회 명예회장)
패널: 백병동(작곡가, 서울대 음대 명예교수)
     최승준(작곡가, 숙명여대 음대 명예교수)
     정승재(작곡가, 상명대 음대 교수)
     박준영(작곡가, 경희대 음대 교수)
     김진수(작곡가, 건국대 음악교육과 교수)


김정길 선생의 성장과정과 음악의 출발

 

이용일 - 세상을 떠난 음악가들의 생애와 업적을 기리고자 시작된 월간 음악춘추의 인물탐구 난은 후대에 좋은 자료로 전해질 것이라 생각합니다. 먼저 바쁘신 가운데 뜻깊은 자리에 참석해 주신 백병동 교수님 이하 모든 분들에게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이번 5월호 인물탐구에서는 지난 3월 세상을 떠난 김정길 선생님에 대해 말씀을 나눠보고자 합니다. 김정길 선생님은 좋은 작곡가, 훌륭한 교육자이셨지요. 말년에 건강이 나빠 고생을 많이 하셨는데요. 건강하셨더라면 더 좋은 작품, 원숙한 작품들이 많이 나왔을 텐데, 그렇게되지 못해 아쉽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오랜 시간 병마와 싸우는 와중에도 굴하지 않고 계속해서 작품활동을 해나가신 그분의 음악에 대한 열정만큼은 강인하였다고 생각됩니다. 먼저 김정길 선생님이 어떤 성장과정을 겪었는지 아시는 대로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김진수 - 김정길 선생님은 부친의 뛰어난 예술적 기질을 이어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따님께 듣기로는 김정길 선생님의 부친께서는 음악, 미술, 문학 등 다양한 분야에 뛰어난 재능을 가지신 분이셨고, 3형제 중 장남인 김정길 선생님께서 그러한 능력을 가장 많이 물려받으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돈과 명예에 연연하지 않고 오로지 음악과 교육에만 전념하셨던 김정길 선생님의 신념 또한 부친의 영향을 받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이용일 - 네. 김정길 선생님께서 어떻게 음악을 시작하게 되셨는지 정확한 정황은 알 수 없으나 아마도 이렇게 타고난 재능이 있었고, 또 군악대에 입대하게 되면서 전문적으로 음악교육을 받게 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김정길 선생님이 음악을 공부한 과정이 조금 남다른데요. 이에 대해 백병동 선생님께서 당시 시대 상황을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백병동 - 네. 김정길 선생뿐만 아니라 우리 세대의 음악가들이 음악을 접하고, 공부한 과정은 현재와는 매우 다르지요. 우리 세대는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남?북 간의 전쟁 등 험난한 과정을 거쳤고, 이어 4.19, 5.16 혁명의 소용돌이에 휩싸이며 태어날 때부터 청년기까지 안정되지 않는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한 마디로 사춘기를 엉망으로 보냈지요. 이처럼 복잡한 세상 속에서 우리 세대의 입학이라는 것은 현재의 시스템처럼 누구에게 사사를 받고, 화성학, 청음 등을 배워가며 공부할 수 있었던 상황은 아니었습니다. 저 역시도 입시 공부를 따로 했던 기억은 없고요. 하지만 지금 생각하면 장점으로 작용한 것이 그로 인해 독학능력을 기를 수 있었지 않았나 싶습니다. 따라서 그 당시에는 음악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주로 일본 서적에 의존하여야 했는데요. 이는 일제강점기 36년 간 일본이 우리나라에서 득세를 하다가 마침내 쫓겨났지만 거기서 유품들이 많이 쏟아져 나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당시 음악을 공부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모로이 사부로(일본 작곡가)가 쓴 기능 화성학과 순수 대위법이라는 것을 기억할 것입니다.

 

이용일 - 네. 맞습니다. 우리 세대의 바이블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것들이 우리나라 음악을 많이 발전시켰지요.
 
백병동 - 그리고 일본의 『음악 예술』이라는 잡지에는 새로운 정보가 가득했었는데요. 리듬론, 쇤베르크, 스트라빈스키 등에 관한 것도 처음으로 그 잡지에서 접하기도 하였습니다. 또 잡지의 가장 뒤편에는 새로운 악보가 부록으로 실려 있었는데, 우리가 배운 화성, 리듬은 없고 생전 처음 보는 기법들로 작곡된 일본 음악가의 작품을 보고 경악하곤 했었습니다. 당시 동기였던 강석희, 송해섭 선생과 함께 USIS(미국 공보원)에서 『음악 예술』에서 실려있던 곡을 감상하기 위해 많은 애를 썼던 것이 기억나네요.

 

김정길 선생과의 첫 만남

 

이용일 - 저 또한 백병동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일본의 『음악 예술』이란 잡지를 기억하는데요. 한국에 들어온 잡지의 양이 일본의 한 도, 한 현의 소비량만큼 되었다고 하니까, 엄청난 양이었지요. 그렇다면 여기 계신 선생님들께서는 어떻게 김정길 선생님과 처음 인연을 맺게 되셨나요?

 

백병동 - 김정길 선생은 군악대를 거치고 늦은 나이에 서울대에 입학하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대학교 3학년 때 군대에 다녀온 후 복학을 하여 김정길 선생님을 처음 만나게 되었습니다. 제가 9회이니까 김정길 선생이 14, 15회 정도 될 것이라 생각이 되네요. 복학생과 신입생의 관계였으니 김정길 선생에게 저는 감히 말도 걸 수 없는 하늘같은 선배였지요(웃음). 그런데 지금까지 저는 김정길 선생과 나이가 같다고 알고 있었는데 오늘 자료를 보니 한 살 위였네요. 당시 김정길 선생이 학생회장을 했었는데, 사람이 넉살이 좋아서 학생회장이라며 복학한 사람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인사하더라고요. 보통이 아니라고 생각했지요(웃음). 그 때부터 친해지게 되어 이후에는 하노버악파로 불릴 정도로 같이 활동을 많이 했습니다.

 

최승준 - 저는 1984년도 9월경 창악회 행사를 준비할 때 선생님을 처음 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또한 이후 선생님께서 창악회 회장을 4년 동안 역임하실 때 제가 총무부장을 맡았었고, 또한 작곡가협회 이사장으로 계실 때 저는 사무총장으로서 3년 동안 직접적으로 선생님과 함께 지내는 시간이 꽤 많았습니다. 선생님께서 창악회장을 1990년부터 1993년까지 맡아서 하셨는데, 당시 창악회와 작곡계의 여러 가지 활성화를 위해서 애를 쓰셨습니다. 이전까지 LP판으로 나오던 작품집을 다른 작곡단체보다 먼저 CD로 전환해서 제작하기도 하셨고, 러시아와의 작품교류도 활성화시키는 등의 변화를 많이 추구하셨습니다. 또한 회원록에 50명 정도 밖에 되지 않았던 회원 수를 2배 이상 받아들이시며, 국내 활동도 내실을 기하면서 활성화되게 하셨습니다. 

 

이용일 - 김정길 선생님은 친화력이 있는 분이라 단체를 이끄는데 큰 도움이 되었으리라 봅니다. 다음으로 박준영 선생님께서는 어떻게 김정길 선생님과 만나게 되셨나요.

 

박준영 - 저는 1986년도에 서울대에 입학하여 처음 김정길 선생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때 악보를 그리는 음악의 가장 기초부터 선생님께 배웠으니 음악을 김정길 선생님을 통해서 접했다고 할 수 있죠. 김정길 선생님께서는 음악이 사회와 어떻게 연결이 되는지에 대한 관심이 굉장히 많으셨고, 어떻게 하면 가치창출을 할 수 있는지, 사회에 효용이 되는 음악을 만들 수 있는지에 대해서 깊이 고민하고 강조하셨습니다. 실제로 올림픽 관련음악을 쓰신다든지, 여타의 영화 음악 등을 통해서 대중하고 맞닥뜨릴 수 있는 음악을 만드시는 활동을 많이 하셨고, 그런 영향을 제자들에게도 많이 끼치셨던 것 같습니다.

 

정승재 - 저는 선생님께 처음 가르침을 받은 것이 서울예술고등학교 1학년 때였습니다. 지금도 기억에 남는 선생님의 모습은 제자들에게 서슴없이 말씀하시고, 친근하게 대하셨던 부분들입니다. 한 번은 무더운 토요일에 수업이 끝나고 예고에서 레슨을 받는데, 선생님께서 강사 휴게실로 저를 부르시더니, 선생님이 어렸을 때는 귀한 손님 올 때나 대접하는 것이었다며 설탕물을 한 사발을 주시더라고요. 또한 말씀하시는 것도 위엄보다는 소탈하셨으며, 잘못한 일이 있으면 창문에 매달려있게 하시는 등 유머러스한 부분도 많으셨지요(웃음).

 

김진수 - 네. 하지만 선생님께서는 늘 소탈하셨지만 원하시는 것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예를 들어 "정은 너희들이 하는 거야. 하지만 나는 이랬으면 좋겠어." 고 하시곤 했지요(웃음). 또한 제가 기억하는 선생님은 늘 기다려주시는 분이셨다는 것입니다. 누구나 대학에 들어와 곡을 쓰다 보면 현대 음악의 갈등부터 시작하는데요. 저 역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제가 대학교 4학년 때, "이제 네가 곡을 좀 알기 시작하는 것 같아."라고 하시면서 "이제껏 헤매더니만…"이라고 덧붙이시더군요. 그 말씀을 듣고 이제껏 헤매는 나를 참고 기다려 주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대학을 졸업하면서 작곡을 그만두고 지휘를 하겠다고 말씀을 드렸을 때, "네가 작곡한 지휘할 수 있는 작곡가로 성장하기를 바란다"는 선생님의 말씀도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김정길 선생의 음악세계

 

이용일 - 사실 김정길 선생님은 자기 주장을 은근히 하면서도 절대 드러내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분의 음악도 그렇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그럼 이어서 김정길 선생님의 작품경향에 대해서 특징적인 것들을 이야기해 보면 어떨까요.

 

백병동 - 강석희 선생과 저와 김정길 선생이 함께 하노버에서 공부했는데, 제 생각에는 한 스승 밑에서 나타난 결과가 모두 다르다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다르다는 것이 결국 각자가 곡을 통해 말하고자 했던 부분일 것이니까요. 김정길 선생의 경우는 항상 청중을 생각을 했고, 강석희 선생은 창의력을, 저는 감성을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특히 김정길 선생의 곡은 동료입장에서 들을 때 거부감이 들지 않습니다.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소리를 만드는 과정에서 악기를 강요한다던가, 생각을 강요한다던가, 또한 음 소재를 나열하는 것보다는 청중에게 다가가는 짜임새를 항상 생각했다는 것이지요. 그것은 현대음악이 보급되기 시작하는 시기에 상당히 중요한 부분이라 생각합니다. 청중 없는 음악회는 무의미한 것이니까요.

 

정승재 - 네. 그리고 김정길 선생님의 음악이 대중과 잘 소통되었던 또 다른 이유는 텍스트가 분명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음악의 부분 부분에서 의도하신 음악의 목적들이 굉장히 뚜렷했기 때문에 듣는 이로 하여금 작곡자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을 분명하게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저희 제자들에게도 항상 짜임새가 분명해야 한다는 말씀을 강조하셨지요.

 

최승준 - 네. 두 분의 말씀에 너무도 공감하는 바입니다. 김정길 선생님의 음악은 전체적인 음악 자체가 난해하기보다 오히려 상당히 듣기에 쉬운 편이지요. 열 번을 들어야 느낌이 오는 음악도 있고, 어떤 음악은 처음 듣는데도 음악이 진행되는 동시에 감동이 오는 음악도 있는데, 김정길 선생님의 작품은 간결하여 초연작품도 이해하기 쉽게 흘러갔으며, 그러면서도 항상 새로움을 추구하시는 경향이 있으셨습니다.
이러한 간결함은 선생님의  ‘대악필이’라는 음악관에서부터 시작했다고 생각합니다. ‘대악필이’란  ‘큰 음악은 반드시 그 곡절이 간결하다’는 유교적 음악관입니다. 이를 바탕으로 선생님의 작품을 보면 전체적으로 군더더기가 없습니다. 음표 하나, 쉼표 하나라도 버릴 것이 없이 필요한 것만 가지고 작품을 구성하셨다고 말씀드릴 수 있지요. 악기를 쓰실 때에도 그 악기의 최대의 효과가 나도록 쓰셨다는 것을 들으면 금방 알 수 있으실 거라 생각합니다. 특히 이질적인 악기들이 모여 있을 때 각 악기가 뽐낼 수 있는 음역대를 가장 효과적으로 사용하시는 작곡가이셨지요.

 

이용일 - 새로움을 추구해서 틀을 만들기도 어렵지만, 기존의 질서를 가지고 거기서 발전시키면서 자신의 개성을 섞어서 귀에 거슬리지 않게 창작해 내는 것도 매우 어려운 작업이지요.

 

백병동 - 네. 그리고 일반에 공표되지 않은 사실이 한 가지 있는데요. 박용구 선생이 MBC방송문화협회 회장으로 재직할 때 우리나라 각 행사에 맞는 음악을 작곡가에게 위촉한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 김정길 선생은 어린이날을 맡았는데, 그 때 선생의 첫 오케스트라 곡이 탄생되었습니다. 저와 막역한 사이였던 김정길 선생은 제가 오케스트라 곡으로 데뷔한 것을 부러워하곤 했었던 터라 오케스트라 곡을 어떻게 써야 할지에 대한 고민을 털어놓곤 했었지요. 그렇게 많은 고민 속에 동요를 삽입한 오케스트라 곡을 완성하였는데, 브람스의 「대학축전 서곡」처럼 너무나 듣기 좋고 재미있는 곡이었습니다. 비록 방송국에서 한 번의 시연 후에 사장시켰던 안타까운 곡이나, 처음 쓰는 오케스트라 곡임에도 불구하고 음악이 전혀 무리 없이 진행되었고, 음색 표현 또한 너무나 아름다웠기에 선생의 진면목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지요.

 

최승준 - 그리고 저는 언젠가 김정길 선생님과 가곡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기억이 있는데요. 그 때 선생님께서는 시가 어렵게만 느껴지고 느낌이 오지 않아 가곡에 손을 대기 힘들다고 토로하시곤 하셨습니다. 이 자리에 계신 제자 분들도 잘 아시겠지만, 선생님의 작품 리스트에는 가곡이 별로 없고, 저는 단체 활동을 하면서 선생님과 늘 붙어 다니다시피 했지만, 84년도 이후에는 작품발표회에서도 가곡을 발표하는 현장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선생님께서 가곡이야기를 자주 꺼내신 것을 보면 가곡에 대한 애정을 항상 가지고 계셨다고 생각합니다.

 

백병동 - 네. 김정길 선생은 가곡에 대한 애정도 상당히 많았다고 기억합니다. 보통 성악가분들이 김정길 선생의 곡에는 가곡이 없다는 생각으로 연주곡으로 선택하지 않는데요. 김정길 선생의 가곡을 들어보면 그의 순수한 서정이 그대로 묻어나고, 매우 아름답다는 것을 알 수 있으실 것입니다.

 

박준영 - 저는 선생님이 창출하고자 하신 한국적인 음악에 대한 관심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여러 작곡가 선생님들이 자신의 방식으로 한국 전통음악을 다루어오셨는데요. 김정길 선생님은 특히 우리 전통의 미를 가능한 한 살리면서 재료를 다루지 않으셨나 생각합니다. 저도 독일에서 유학 생활을 하면서 독일 작곡가들은 전통을 어떻게 생각하는 가를 공부해 왔는데, 그들도 전통을 함부로 훼손하는 것을 싫어하고, 전통의 형태를 그대로 보존하기를 원하더라고요. 작곡가들이 작곡을 할 때 전통을 어떻게 하면 내 것으로 만들 수 있을지 욕심을 부릴 수 있는데, 김정길 선생님은 욕심을 부리지 않으시고 "우리 미학을 어떻게 하면 그대로 살릴 수 있을까"는 태도를 지니고 계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전통적인 재료를 다루는 태도는 다른 작곡가가 흉내내기 힘든 점이 아닐까요.

 

정승재 - 네. 저도 요즘에 그러한 고민을 많이 하게 되었는데, 창작 국악 작품을 보면 국악이 갖고 있는 본질적인 혼이나 정신이 사라지고 외세의 기법이 파고들어 정작 우리의 정신이 빠져있는 작품이 많이 나오고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하지만 선생님의 작품을 보면 우리의 정신을 잘 계승하면서도 연주 형식상에서는 파격적인 개념들도 엿볼 수 있지요. 국악의 현대화를 잘 보여주셨고, 시대에 걸맞는 국악다운 국악을 작곡하지 않으셨나 생각합니다.

 

김진수 - 레슨을 해주시면서도 가장 많이 강조하셨던 것이 오서독스(orthodox)하게 쓰라는 것이었습니다. 늘 전통적인 틀을 잊지 말라고 강조하시곤 하셨지요. 그리고 김정길 선생님게서 어떤 악기를 쓰건, 어떤 형식을 쓰건 간에 가장 관심있게 말씀하셨던 것이 '즐거움'이었습니다. 이점은 앞서 백병동 선생님께서 항상 청중을 생각하고 곡을 쓰셨다고 하신 말씀과 일맥상통하는 것 같은데요. 예를 들어 「튜바 4중주 얼레짓」을 작곡하시고도 가장 먼저 말씀하셨던 것이 "조그마한 애들이 이렇게 큰 튜바 4대를 가지고 나와서 앉아있으면 재밌지 않겠어"라는 것이었어요(웃음). 연주자들을 세팅할 때에도 선생님께서 영화, 미술 등에 다양한 감각들을 가지고 계셨기 때문이지 청중이 봤을 때 "재밌다', 예쁘네'는 감각이 느껴지게 하셨던 것 같습니다. 이러한 부분은 선생님의 유머러스한 심성과도 관련이 있겠지요.

 

이용일 - 네. 맞습니다. 저보다는 나이가 위였는데, 항상 선배님이라고 칭했지, 이 교수라고 부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경우를 엄격히 지켜가면서도 익살스럽게 대하곤 했지요. 그렇다면 만약 김정길 선생님이 병상에 계시지 않고 건강하셨더라면 어떠한 작품이 나왔을까 궁금한데요.

 

백병동 - 극과 극으로 생각이 되네요. 김정길 선생은 정말 오랜 시간 병마에 시달렸습니다. 하지만 통화를 할 때나 가끔 음악회에 모습을 드러낼 때에도 약한 모습을 보인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몇 년 전에 음악춘추에 인터뷰에 실린 그의 쇠약해진 사진을 보고 충격을 받아 전화를 했더니, "나는 절반을 살아. 사는 날은 평소와 똑같이 살지만, 그 중 반은 죽어 살지."라고 말하더군요. 그렇게 극과 극을 오고가는 와중에 오페라 「백록담」을 만들어 내었습니다. 하지만 편안한 과정에서 그러한 작품이 나올 수 있었을까 생각합니다. 건강한 상태에서 계속 생활했다면 아마 듣기에 편안할 수 있는 다른 경향의 곡이 나왔겠지요. 그렇지만 어떤 면에서는 잡곡을 많이 쓰지 않았을까요(웃음). 육신의 고통은 아파 보지 않은 사람은 상상할 수 없겠지만, 김정길 선생은 그렇게 강한 의지를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작곡가에게 있어 축복받은 것은 죽을 때까지 작품 활동을 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하였지요.

 

최승준 - 건강하셨다면 자연스럽게 장년이 노년이 되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변화는 있겠지요. 하지만 제 생각에는 극단적인 변화를 가져왔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 노련미나 완숙미는 더해 졌겠지만요.

 

박준영 - 네. 그리고 어쨌든 작곡가는 본인의 변화를 통해서 사실성 있게 곡을 쓰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아마도 선생님은 더욱 간결해지고, 경쾌해지고, 유쾌해지지 않으셨을까 생각합니다.

 

김진수 - 저 또한 선생님께서는 늘 정제미를 말씀하셨기 때문에 아마 더 간단해지셨을 거란 생각을 해봅니다. 소리와 소리와의 공간을 중요시 여기셨기 때문에 연륜이 더해지면서 더 정제되지 않으셨을까요.   

 

정승재 - 저는 건강하셨다면 오페라 한 곡을 더 쓰셨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최승준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가곡에 대한 미련이 「백록담」으로 터져 나왔듯이 말이지요. 「백록담」은 주로 제주도에서 공연이 되었는데, 선생님께서는 백록담에 대한 애정도 각별하셔서 많은 수정작업을 거치셨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백병동 - 그렇게 생각해 본다면 아마 국악곡도 한 곡 더 쓰지 않으셨을까요. 김정길 선생님은 「추초문」이 희대했기 때문에 이를 능가하는 아이디어를 내어야 한다는 고민을 많이 하였고, 그래서 국악곡을 쓰는 것을 두려워하였습니다. 아마 건강했더라면 이것을 극복하여 국악을 좀 더 새로운 방향으로 접근한 작품이 나왔을 것입니다.

 

이용일 - 저 또한 그렇게 생각합니다. 제가 김정길 선생님의 작품 가운데 가장 높이 평가하는 것이 「8주자를 위한 추초문」입니다. 「추초문」은 8개의 우리나라 전통악기로 구성되어 국악기의 속성을 빈틈없이 파악하며 대비, 변화, 기복, 조화를 고루 갖춘 곡입니다. 또한 아이디어는 작곡가가 추구하는 세계, 표현하고 싶은 내용을 잘 찾아갔다고 보는데요. 얼마 전에 콘트라베이스로 오케스트라를 만들어서 진행되었던 대한민국음악제에서 일본 콘트라베이스 주자가 「아리랑」을 편곡하여 연주하였는데, 지금까지 들어본 「아리랑」 중에 가장 역동적으로 만들어 내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아마 김정길 선생님이 건강하셨더라면 이러한 작품을 만들지 않으셨을까요.

 

최승준 - 여러분들의 말씀을 듣다 보니 뮤지컬 작품을 하나 쓰셨을 거라는 생각도 드네요. 현재 뮤지컬 붐이 일고 있는데요. 언젠가 사석에서 대부분의 뮤지컬 음악들이 토막토막 노래에 코드만 입혀진 것을 보고,"본때를 보여줄 겸 뮤지컬을 써야겠어."라고 말씀하신 기억이 납니다(웃음).  

 

김정길 선생이 국내 음악계에 끼친 영향

 

이용일 - 가능한 얘기라는 생각이 듭니다. 김정길 선생님은 그만큼 하고 싶은 것이 많으셨지요. 그렇다면 다음으로 김정길 선생님이 한국 음악계에 남긴 업적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백병동 - 저는 한 마디로 어려운 현대 음악도 즐거울 수 있다는 효시를 보여준 것이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정승재 - 저는 앞서 계속 이야기해 온 한국의 정서를 현대적으로 승화시킨 선생님의 어법이 가장 큰 업적이 아닌가 싶습니다. 국악이 시대정신만을 반영하고 우리의 혼을 잘 담아내지 못하는 현 시대에서 「추초문」같은 작품을 통해 작곡가들에게 경각심을 이끌어 내었다고 생각합니다.

 

최승준 - 네. 그리고 순수한 음악 쪽에서의 작품 활동도 활발히 하셨지만, 실용 음악계 쪽에서도 많은 본보기를 보이신 것도 선생님의 업적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실용 음악이 전문적으로 종사하는 사람들에게만 맡겨놓으면 이론적인 바닥이 흔들리기에 발전이 안 되고 지지부진하기가 쉬운데, 김정길 선생님과 같이 이론 쪽에서 굵직하신 분의 관여는 큰 영향을 끼치게 되지요. 다시 말해, 김정길 선생님은 상업성만을 추구하는 우리 나라의 대중음악이 예술적인 면을 갖추기를 원하셨던 것이라 생각됩니다. 

 

이용일 - 네. 김정길 선생님은 실용음악, 기능음악의 고른 발전에 앞장서 오셨지요. 박준영 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박준영- 대가들의 음악은 한 마디만 들어도 이것이 누구의 작품인지 알 수 있는데요. 김정길 선생님의 음악 또한 부분적으로 들어도 선생님의 음악이라는 것을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이 음악계에 남기신 하나의 업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만큼 본인의 정체성에 대한 생각이 확고하셨다는 것이겠지요. 또한 작곡가 협회가 제대로 굴러갈 수 있도록 후배들에게 남겨주신 사회적인 측면도 있고요. 이렇듯 음악적으로 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 많은 역할을 하셨다고 생각합니다.

 

김진수 - 네. 선생님께서는 학생회장을 하실 때 댄스파티를 열기도 하셨고, 많은 학생들을 이끌고 MT를 다녀오시기도 하시고요. 그러한 선생님 특유의 친화력, 포용력으로 여러 협회장 일을 하시면서 그 단체를 발전시켜 온 것이 커다란 업적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한 마디로 김정길 선생님이 어느 조직의 장을 맡으시면 조직이 불지펴지는 힘이 생겼지요. 그리고 선생님께서는 음협 회장에도 출마하신 적이 있으신데요. 만약에 김정길 선생님이 음협 회장을 하셨다면 조심스럽지만 음악계가 어떤 방향으로 발전했을까 하는 기대감을 내비쳐 봅니다. 지금 음악계에 선생님과 같은 인물이 한 분 더 계신다면 우리가 겪고 있는 아쉬움들이 조금은 덜해지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해봅니다. 

 

이용일  - 김진수 선생님의 말씀대로 그분의 삶은 어느 조직에 들어가든지 조직을 활력이 넘치고 밝게 만들어주는 역할을 하셨지요.

 

최승준 - 네. 항상 분위기를 밝게 만들어 주시고, 어떤 자리에서든지 자연스럽게 구심점을 이루는 위치에 가 있으셨습니다. 선생님의 장례식장에 해군 군악대에서 함께 하셨던 동료 분들이 오셨는데, 연로하심에도 불구하고 선생님의 입관예배에 불러드릴 곡을 2시간도 넘게 연습하고 계셨고, 가족, 친척뿐 아니라 많은 분들이 진심어린 애도의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며 선생님께서 생전에 사람들을 어떻게 대해 오셨는지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백병동 - 저는 우리 또래에서 한상우 선생, 신경욱 선생, 김정길 선생이 떠나는 모습을 보며 20세기 인간들은 어느덧 과거로 돌아가고 ??정말 21세기가 도래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만 한 가지 바람은 21세기에 나오는 작품들은 우리가 했던 것을 넘어서는 곡이 나와 새로운 형식을 구축했으면 한다는 것입니다. 죽은 사람을 추모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각성이 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이용일 - 네. 지금까지 한국 음악계의 흐름을 선도한 김정길 선생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습니다. 바쁘신 와중에 참석해 주셔서 감사드리고, 앞으로도 더 많은 곳에서 선생님의 작품을 접할 수 있기를 기대해 봅니다. 장시간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정리 : 박진하 기자  사진: 김문기 부장

 

 

 이용일(한국음악교육협회 명예회장)

 백병동(작곡가, 서울대 음대 명예교수)

 최승준(작곡가, 숙명여대 음대 명예교수)

 박준영(작곡가, 경희대 음대 교수)

 정승재(작곡가, 상명대 음대 교수)

 김진수(작곡가, 건국대 음악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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