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음악춘추

예술의전당 이사장 유인촌 / 음악춘추 2012년 4월호

언제나 푸른바다~ 2012. 3. 30. 1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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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우가 만난 이 달의 아티스트Ⅰ
 예술의전당 이사장 유인촌


봉사하는 자리이지만 예술인들을 위한 일에 작은 힘 보탤 것

“인생은 한 편의 드라마다.”라는 말을 종종 듣게 된다. 마치 드라마처럼 굴곡으로 점철되는 것이 인생이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 이 사람 유인촌. 연극인으로 출발하여 예술행정 전반을 책임 맡는 문화부의 수장을 역임하는 등 그 역시 변화무쌍한 삶을 영위하고 있다. 예술에 대한 확고한 신념과 가치관으로 매진하여 국민적 사랑과 관심의 대상으로 성공한 연기자다. 아울러 이의 연장선상에서 공직을 연이어 수행해 오고 있다. 어떤 직책을 담당함에 있어 공과(功過)가 없는 사람은 존재할 수 없다. 불완전한 인간적 한계 때문이다. 인간 유인촌의 삶, 예술철학 그리고 자신의 책무에 따른 사명감을 파악하기 위해 예술의전당을 찾았다. 그는 대담장소로 이사장실보다 공공장소인 커피숍을 선호했다.

 

박경우_ 먼저 이사장님의 출생, 성장과정 등 환경적으로 어떠한 여건이었는지 간략하게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유인촌_ 당시 전란(戰亂) 후 환경적으로 모두가 그러했듯, 저의 집안 역시 넉넉하거나 부유하지는 않았지만, 자유분방했었지요. 그리고 가장 영향을 많이 받은 것은 큰형님입니다. 큰형님은 고려대 국문과에 재학하시며 연극반 활동을 하셨으니까요. 어릴 적 기억에 많이 남는 것은 형님이 활동하시던 연극반에 가서 연습하는 것을 자주 보았던 것입니다. 당시는 중앙대, 동국대 등 각 대학에 연극영화과가 없던 시절로 주로 서울대 물리대 연극반, 치대 연극반, 고대 연극반 등 각 대학의 극예술연구회를 중심으로 연극 활동이 진행되어 왔는데, 그분들을 선구자라고 봐야지죠. 이러한 배경으로 자연스럽게 저는 문학, 연극, 영화, 음악, 미술을 접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둘째 형님은 신흥대학(경희대의 전신)에서 트롬본을 전공하셨고, 아버님께서는 한 분야에 전문가는 아니었지만 사진, 글, 그림 등 다방면에 소질이 있는 분이셨기에 집에 있던 책 또한 예술관련 책들이 주류였습니다. 이 같은 환경을 통해 저도 모르게 습득된 것이 많지 않았나 싶네요.

 

박경우_ 지금 말씀해 주신 부분들이 다음 질문과도 연관됩니다만, 어떻게 연극계에 입문하게 되셨습니까?


유인촌_ 가장 큰 계기는 교회에서 연극을 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 당시 교회에 다니지는 않았지만, 친구가 추수감사절 관련 연극을 함께 하자고 제안하였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 때였죠. 친구는 저의 형이 연극반을 하니 그에 대해 많이 알지 않겠느냐고 생각한 것이겠죠. 이것이 계기가 되어 생전 해보지 않은 연출도 하고, 극본도 쓰고, 연기도 하게 되었습니다. <돌아온 탕아>라는 극을 올렸는데, 성도들의 반응이 생각보다 뜨거웠습니다. 이러한 첫 경험이 마음에 남고,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은 것이지요. 이런 연유로 “이것이 내 길인가 보다”라는 생각으로 완전히 연극에 몰입하게 되었습니다. 명동예술극장을 수도 없이 드나들고, 삶의 경험이 필요한 것처럼 생각되어 제주도로 무전여행도 떠나고 하니까 집에서 많이 걱정을 하셨지요. 그 가운데서도 큰 형님이 가장 많이 야단치고 말리셨어요. 그런데도 제가 굽히지 않고 계속 쫓아다니니까 형님께서는 대학을 들어가면 연극을 하게 해주겠다고 하시더군요. 재수를 해서 결국 1년 뒤 중앙대에 입학하였습니다.
그렇게 대학에 입학한 후 연극과 방송을 병행하였고, 시간이 흘러 1995년에 극단을 만들고 1999년에 극장을 지으면서 대중매체에서 순수예술로 돌아간다는 선언을 하고 다시 연극계로 방향을 전환했습니다. 1995년은 제가 일을 한참 할 때이고, 꽤 인기도 많았을 때임에도 이런 결정을 내린 것은, 그 당시에는 “힘 있을 때 그만 둬야지 힘마저 없어지면 연극도 못할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출연하던 〈전원일기〉만 빼고 그 외의 출연 요청은 단호히 거절하며 오직 연극에만 전념하였습니다.

 

박경우_ 이사장님께서 서울문화재단 대표, 문화체육관광부장관, 대통령 문화특별보좌관등의 공직생활 동안 책임자로 재임하며 각 시기마다 특별히 주안했던 사항은 무엇인지요?


유인촌_ 2004년에 서울문화재단 대표를 맡게 되었는데, 그 당시 조직을 처음 만든 것이었습니다. 서울이란 대도시에 문화관련 전담기관 조차 없다는 것이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하여, 이명박 대통령님께서 시장으로 재임하실 때 이를 전문적으로 다룰 수 있는 조직으로 만들어진 것이 서울문화재단입니다.

 

박경우_ 이 같은 안을 이사장님께서 요청하신 것인가요?


유인촌_ 아닙니다. 당시 시에서 이미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고, 그것이 잘 이뤄질 수 있도록 책임을 맡겨 준 것이지요. 문화정책이라는 것은 폭넓게 이야기하면 “국민들의 삶의 질을 어떻게 향상시킬 것인가”라는 목표를 전제로 정책을 수립해 나갔습니다.

 

박경우_ 어떤 정책을 펴든지 모든 단체를 만족시킬 수 있는 방안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유인촌_ 지금도 제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그래서 문화관광체육부로 왔을 때에도 일관성 있게 진행하였습니다. 또한 극장마다 각 단체의 연습실, 공연장소, 사무실을 제공하는 상주(常駐)제도를 시행했고, 또한 지원정책도 선택과 집중으로 바꿔 파격적으로 시행하였습니다.

 

박경우_ 그 결과 현 예술의전당도 각 단체들이 상주단체로 운영되고 있는 것인가요?


유인촌_ 예술의전당뿐만 아니라 그 외 각 구청에 있는 문화예술회관에도 상주단체가 들어가 있고, 극장 용, 호암아트홀까지도 지금은 없어졌지만 단체를 연결해 주었습니다. 각 단체들이 극장에서 마음껏 작품을 발표할 수 있도록 시행한 것입니다. 또한 선택과 집중에 의해 수혜 받는 단체가 줄어 선정되지 못한 단체들에게는 끊임없이 도전해서 심의에 통과만 하면 확실한 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좁은 문을 열어놓은 것이죠. 특히 연혁이 짧은 단체에게는 설립 이후 3년간은 지원혜택을 주지 않았습니다. 금방 출몰(出沒)하면 안 되니까 자생력을 보이고, 그 다음부터 지원 받을 수 있도록 조건을 만든 것입니다. 즉, 젊은 예술가들은 난관을 극복해 내기를 바라는 의도였습니다.

 

박경우_ 지원정책은 수혜대상이 제각기이며, 이의 운영 및 관리상 어려움이 많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실제로 어떤 상황들이 발생했는지요?


유인촌_ 문제가 많이 발생했죠. 결국은 돈이 잘못 유용되기도 하고, 한두 단체가 독식하기도하는 등 부작용이 많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지원은 하되 간섭은 하지 말자는 방침을 지속적으로 시행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상황에 따라 지원방식을 계속 바뀌어야 합니다. 선택과 집중 방식도 좋은 것 같지만 결국은 거듭 도태되는 수많은 사람들은 감당이 안 되는 심각한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겠지요. 그렇기 때문에 계속적으로 패자부활전을 시도해야 합니다. 끊임없이 지원해서 떨어진 사람이 또 도전해서 결국 해내고요. 이러한 목적에서 직접지원에서 간접지원, 사전지원에서 사후지원으로 전환했습니다. 그만큼 혜택의 폭을 넓히겠다는 것이었지요. 간접지원이란 돈을 직접 주지 않고 사람을 지원해 주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오페라를 올릴 때 합창단을 지원해 주는 것입니다. 오페라단에게 돈을 주어서 그 돈을 나누게 하지 않고 합창단에게 직접 돈을 주는 것이죠. 또는 오케스트라를, 아니면 대관료를 받지 않고 극장을 지원해 주거나 이런 식으로 지원을 하는 방식입니다. 지금은 아마 또다시 환원되었을 것 같습니다. 사후지원도 하나의 패자부활전인데, 지원을 못 받은 팀이 자신들끼리 노력해서 무대에 올렸는데, 그 결과 훌륭한 작품으로 평가된다면 1년 뒤 그들의 전 제작비를 지원해 주는 방식입니다. 그러면 이들은 그간 지원이 없어 고생했겠지만 연말 평가에서 우수한 성적을 받는다면 후속 작품을 보다 나은 여건에서 이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원정책은 책임자가 확실한 소명의식을 가지지 않으면 안 된다고 판단했습니다. 제가 현장에 있던 사람이고 상세한 내막을 알기 때문에 도전한 것이죠. 주무 부서에 책임은 내가 질 것이니 염려 말고 진행하라며 강행했습니다. 이렇지 않으면 학연 때문에, 지연에 밀렸다며 지원 받지 못한 사람들에게서 말이 많이 나오는 것이거든요. 그래서 문화예술위원에 책임심의관제를 두게 되었습니다. 이전까지는 심사위원을 외부 교수라든지, 그 계통의 전문가를 불러서 심사를 맡겼었습니다. 그 결과 일부 심사위원들이 학연 및 인맥 등 연관되는 단체들 위주로 선정하다 보니 매번 시끄럽게 된 것이죠. 지원 받지 못한 단체에서 항의를 하면 담당자들은 전문가들이 심사한 것이기 때문에 자신들은 모르는 일이라고 발뺌했단 말입니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고 판단되어 문화예술위원회 직원이 직접심사를 맡으라고 요구했습니다. 외부 사람들을 배제시키고 전문적으로 심사만 하는 사람을 두되, 대신 만약 문제가 발생하면 책임을 지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아마 직원들이 부담스러워 자신들은 보조로 참여하고 심의관을 새로 선발하였을 것입니다. 현재 얼마나 잘 진행되는지는 모르지만, 이 제도가 오래도록 지속되면 분명히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 책임의식이 생기기 때문에 더 공정해지겠지요. 각 분야에 있는 예술가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작업을 하는지 심의관들은 현장을 쫓아다니며 전모를 파악하고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바꾸게 된 동기는 영국의 전문 심의관의 영향입니다. 우리나라가 이 같은 지원 정책에 대한 문제들이 많이 발생하여 물어봤더니, 그들 역시 지원신청을 받아서 심사한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항의를 하지 않느냐고 했더니, 항의를 왜 하냐는 거예요. 그래서 심사는 누가 하냐고 했더니, 자신이 직접 한다고 하더군요. 자신은 평생 심의관으로 전력해 왔기 때문에 자신만큼 전문가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시계를 보더니 지금 이 시간에 어떤 음악가는 어느 거리의 호프집에서 맥주를 마시고 있을 것이라고 얘기를 하는 겁니다. 우리 예술위원회도 지원을 담당하는 조직은 책임감을 가지고 해야지, 자꾸 남에게 넘겨서 될 문제가 아닙니다.

 

박경우_ 적합성 여부를 심의하는 것은 전문성을 요하는 분야이며, 편향되지 않게 심사되어야 마땅하겠지요. 소중한 국민의 세금으로 조성된 예산이니까요. 전 장관으로 재임하실 때 산하단체였던 예술의전당 이사장 직책을 어떤 마음에서 수락하셨는지요?


유인촌_ 이사장이라는 존재에 대해서 일반인들은 잘 모를 것입니다. 주로 예술의전당 이사장이 곧 대표라고 생각을 하니까요. 아마 장관이 임명하는 사장처럼 경영을 하는 자리였다면 수락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산하기관장인데 장관을 지낸 사람이 부임하면 여러 사람이 불편할 테니까요. 하지만 이사장 자리는 비상임에 무보수이고, 경영에 절대 관여하는 자리가 아닙니다. 예산, 결산 내지는 이사회에서 주관할 수 있는 부분만 담당하는 자리이기 때문에 명예가 있는 봉사 직이라 말할 수 있겠지요. 업무추진비라는 명목으로 180만원 정도 주어진다고 되어 있는 것 같은데, 그 돈 또한 받지 않을 것입니다. 이는 소액이지만 예술가들에게 도움이 되는 쪽으로 돌려주라고 할 생각입니다.

 

박경우_ 마치 실권을 거머쥔 대표 직에 임명된 것처럼 비춰지기도 했었는데요.


유인촌_ 이사장으로 임명되었다 하면 대부분 잘 모르니까요. 일부에서 저를 두고 왈가왈부하니 화제가 된 것인데, 그분들은 속사정을 잘 모를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무조건 비판하고 공격하는구나. 조금만 들여다보면 그게 아닌데.”라는 생각도 했었습니다. 제가 장관시절 두 사람을 해임한 것을 두고, 이사장 임기가 3년인데 저의 행보를 두고 보자고 말씀하시는 분이 있는 것으로 압니다. 실상은, 그 당시는 새 정부가 들어서서 모든 정책도 그에 따라서 바뀌고, 많은 부분이 새롭게 변해서 제가 그분들에게 정중히 도와주시겠냐고 여쭤봤습니다. 도와주시겠다면 힘을 합쳐서 헤쳐나가고, 만약 도와주지 않으실 거라면 자리를 비켜주는 것이 좋겠다고 했지요. 그랬더니 자리도 못 비키겠지만, 도와줄 수도 없다고 하시더군요. 10개월을 설득했습니다. 근 1년을 허송세월을 한 것입니다. 국민의 세금으로 일하는 사람이 바뀐 정책에 따라오지 않는다면 하는 수 없었던 것이지요. 저도 마찬가지 입장입니다. 정부가 바뀌어 나와 전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그 이전에 서로 뜻이 같아서 함께 신명나게 일할 수 있으면 함께 하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저도 사임할 것입니다. 이것은 당연한 것이라 생각해요. 내가 이념을 바꿔 함께 하겠다는 데도 해임한다면 문제가 있지만, 내가 바꿀 수 없는 상황이 된다면 언제든 자리를 내줄 것입니다. 먼 후일에 은퇴하였을 때 하고 싶은 일은 공연장 로비에서 프로그램을 나눠주고 자리를 안내해 주는 자원봉사를 꼭 할 것입니다. 이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어요. 그것이 행복이라고 생각합니다.

 

박경우_ 이사진을 대표하는 직책이시니, 예술의전당이 향후 어떤 지향적 발전을 염두에 둬야 한다고 생각하시는지요?


유인촌_ 예술의전당은 지어놓고 처음엔 고생을 많이 했는데, 언제부터인가 자립하라는 주문이 들어오고 법인으로 독립되어 성공한 모델이 되었습니다. 지금 자급률이 80% 정도라니, 예술 공간으로 어떻게 자립을 할 수 있는지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만큼 전당에 있는 직원들이나 경영진이 많은 노력을 한 것이겠지요. 그런데 이렇게 되면서 정부에서는 예산을 계속 줄여 나간 것입니다. 현재 책정된 예산은 국립오페라단, 발레단 보다 더 적게 받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렇게 되면 나머지는 표를 팔고, 커피도 팔고, 부가적인 요소들로 자립도를 높혀 온 것으로 생각합니다. 물론 성공을 했지만, 어쨌든 예술의전당은 국가에서 지었기에 공공의 의미를 훨씬 더 많이 가져야 합니다. 현재 유명한 해외 오케스트라의 공연티켓이 고가일 경우 40만원까지도 하고, 저렴한 것조차 10만원 정도 하는데 이것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관례는 바뀌어야 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박경우_ 원래 출발은 예술인이었고, 현재는 예술행정가로 그간 몸담아왔던 환경적 문제점을 피부로 느끼고 그것을 정책적으로 결정하는 역할을 수행하셨는데, 각각의 위치에서 처했던 자신을 어떻게 회고하시는지요?


유인촌_ 제 자신을 되돌아보면 잃어버린 것이 많습니다. 제가 해야 할 일은 따로 있는데, 그 일은 거의 못하고 행정인이 되어 버렸으니까요. 그런 후회를 극단을 만들었을 때 했고, 극장을 지었을 때 했고, 서울문화재단의 대표를 했을 때, 장관을 끝내고 나서도 했습니다. 다 비슷한 이유인데, 극단을 만들었을 때도 하고 싶은 작품을 마음껏 해야겠단 생각이었는데, 대표가 되고 나니 정작 연기는 못 하고 단원들 뒷바라지만 하게 되었고, 극장을 지어놓곤 결국 공간의 운영을 더 걱정하게 되었죠. 무대에 서는 배우로서 잃은 것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행정적인 일을 하면서는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큰 보람은 있었지요. 현장을 바꿔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박경우_ 문화예술정책의 중요한 기틀을 정립했으니 큰 보람으로 긍지와 자부심도 가질 수 있겠지만, 한편 말 못 할 어려움이 많으셨을 것 같은데, 어떻게 극복하였고 또한 극복해 나가려 하시는지요?


유인촌_ 저는 성격적으로 외곬수입니다. 오히려 무대에 서거나 배우로서는 폭이 넓은 편이지만, 행정적인 일을 할 때는 원칙에서 벗어나거나 양보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잡음도 많이 생기곤 했지만, 이후에도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조금 더 나이가 먹고 이런 일을 그만해도 될 때가 되면 제자리로 돌아가야지요. 후배도 많이 도와주고, 배우로서 해야 할 일이 많으니까요.
 
박경우_ 지금까지 이사장님께서는 어떤 신념으로 삶을 살아 오셨는지요?


유인촌_ 가능하면 거짓으로 살지 말자는 것입니다. 그런 버릇은 연극을 했기 때문에 생긴 것 같습니다. 연극은 허구이고 꾸민 이야기인데 그 속에서 진실을 찾는다고 매일 고민했거든요. 그래서 항상 진실을 찾아 연기했기 때문에 여태껏 무대에서 거짓말을 한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실생활은 그와 다를 때가 많지 않습니까? 가능하면 거짓되게 살지 말자고 다짐합니다. 다만 솔직하고 거리낌없이 모두 표현하니 이리저리 부딪히고 힘든 점들이 많이 생기는데 고쳐지지는 않는군요(웃음).

 

박경우_ 외람된 질문일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정치에 대한 관심이 있으신지요?


유인촌_ 뭔가 제 역할이 필요하다고 판단될 때 하겠지만, 제 일을 다 접고 그것만을 쫓아서 할 생각은 없습니다. 현실적으로 그간의 여러 경험을 통해 예술계에 이바지할 제 역할이 주어진다면 진출해야겠지요. 하지만 인위적으로 만들 생각은 없습니다. 만약 정치를 하게 된다면 현장에 있던 사람으로서 그들을 대표하는 역할인데, 먹칠을 하면 안 된다는 신념입니다. 그리고 이왕 하는 것이라면 배짱으로 멋있게 해야겠죠? 
 
야외촬영 시, 예술의전당 앞 광장은 꽃샘추위와 세찬 골바람으로 몸을 움츠리게 만들었고 머리마저 흩날렸다. 그러나 예술적 열망을 서로 교감할 수 있어 마음은 그 어느 때보다 뜨거웠다.


글·박경우(음악평론가) 사진· 김문기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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