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음악춘추

소프라노 박천주 / 음악춘추 2014년 7월호

언제나 푸른바다~ 2014. 9. 7. 1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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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셜 인터뷰
소프라노 박천주

‘오직 노래에 취해 정신없이 살다가 나이라는 덧에 고향을 찾았지요’

성악을 시작하게 된 동기, 그리고 학창시절

저는 서울 태생으로, 초등학교 시절인 1958년 전국 어린이 노래 경연대회에 처음 나가 최우수대상을 받으면서 성악가가 되겠다는 꿈을 가졌습니다. 그 꿈은 정신여자 중·고등학교를 다니는 동안에도 변함이 없었지요. 생각해 보면 어린 시절에 있었던 자그마한 하나의 계기가 한평생 영향을 끼친 것이지요. 그런 점에서 저는 어린 예술가들을 고무시키는 콩쿠르가 우리 사회에서 얼마나 중요한지를 새삼 느끼곤 합니다.
대학 시절에도 예술가로서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 가는데 아주 중요한 경험을 하였습니다. 그것은 성악가가 단순히 서양예술의 전도사 같은 역할을 하는데 만족할 수 없다는 인식을 하게 된 것입니다. 제가 다니던 서울대학교 음악대학은 성악과, 작곡과, 기악과 그리고 국악과를 묶어 하나의 클래스로 운영하였었습니다. 자연스럽게 작곡과 친구들의 꿈은 무엇이고, 국악과 학우들은 무엇을 지향하고 고민하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또한 매주 한 번씩 그들과 음악회를 하면서 작곡가들이 추구하는 이 시대의 음악에 대해 공감할 수 있었고, 지금은 모두 무형문화재급의 국악인이 된 친구들의 연주를 통하여 오늘날 한국을 대표하는 중요한 국악을 두루 섭렵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경험들이 뒤에 캐나다로 유학하여 현대음악이나 종족음악(Ethno-music) 등의 다양한 음악을 접하는데 아주 자연스러울 수 있었습니다.

유학 시절과 성악가로서의 활동 상황

지금은 유학이 아주 보편화되었지만, 제가 유학을 떠나던 1971년대에는 상당히 어려운 일이었어요. 예술로서 세계와 소통할 수 있는 새로운 영역에 진입한다는 생각에 부푼 꿈을 품고 처음 외국 대학의 문을 두드린 곳이 캐나다의 로열 콘서바토리(Royal Conservatory)였습니다. 그리고 토론토 대학과 대학원에서 수학을 하였지요. 그 때는 서양음악이기에 동양인으로서 무언가 그들보다 한 수 아래에서 배워야 한다는 심리적 위축감이 있었던 것도 숨길 수 없는 사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여 공부를 하면서, 또 그들 못지않은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더욱이 캐나다 전국 최우수 성악가 대회에서 동양인 성악가로선 최초로 최우수 4(best 4)인 안에 선정되었으며, 이듬해 퀘벡심포니와 연주할 기회가 주어졌어요. 또한 캐나다 국영방송인 CBC 주최의 신인성악가 발굴 콘서트 투어에 발탁되고 아트 내셔널 프로그램(Art national program)에 여러 차례 초대되었지요. 또 토론토 음악축제에서 1등을 하는 등 캐리어를 쌓아가며 그런 느낌들을 하나 둘씩 지울 수 있었습니다. 내친김에 유럽으로 떠나 오스트리아의 잘츠부르크와 빈, 스페인의 바르셀로나, 이탈리아의 시에나에서 수학을 하였습니다. 그 때 시에나 두오모 연주회에 단독 소프라노로 관현악단과 협연할 기회를 가질 수 있었고, 비발디의 「글로리아」에서 제1 소프라노를 맡았고,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에서 연주할 수 있었지요.

 

기억에 남는 스승이나 음악가

유럽유학 시절에는 스스로 생각해도 억척스럽다 할 정도로 많은 마스터 클래스에 참여하여 훌륭한 교수님들을 만나는 것이 커다란 즐거움이었습니다. 자랑삼아 이 기회에 열거를 해 본다면 Re Koster(파리), D. Ferro(뉴욕), H. Greco(뉴욕), R. Streich(독일), S. Jurinac(빈), P. Schilawsky(잘츠부르크), M. Tyler(멕시코), M. Evans, M. Albano(토론토), E. Schwarzkopf(스위스) 교수님 등인데요. 왜 이렇게 장황하게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이런 많은 국가에서 배출한 유명 교수님들을 통해 저의 음악이 어느 한 지역의 음악에 치우치지 않는 새로운 세계를 찾을 수 있었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 그러는 것입니다. 서양음악이라 통틀어 치부해 버리기 쉽지만, 사실 성악가들은 나름대로 어느 나라 출신이냐에 따라 성악의 특성을 어딘가 달리하게 마련입니다. 여기에는 글로벌 시대라 하는 오늘날과 소통할 수 있는 예술적 시대정신이 있습니다. 저는 이런 분들의 가르침 때문에 낯설지 않게 글로벌한 음악적 영역을 나름대로 새롭게 개척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이러한 많은 선생님들과 만나는 과정에서 저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도 받을 수 있어 즐거웠고요.“맑고 밝게 구르는 듯한 음색이며, 잘 닦여진 폭 넓은 음역으로 찌를 듯 높은 콜로라투라의 야성미 짙은 매력의 성악가”, “다양한 음악들을 완전히 소화하여 표출하는 매혹적인 기교를 갖춘 성악가”, “완숙한 예술인”, “결코 잊혀질 수 없는 성악가”, “매우 어려운 음악들을 청중과 진정한 대화로 이끄는 음악성과 감정이 풍부한 성악가”, “청중의 심원한 마음을 움직일 줄 아는 매우 아름다움 음성의 소유자”, “기립박수는 그의 진가를 대변하고 있었다” 등의 과분한 찬사가 바로 이러한 기회에 저명한 분들로부터 받은 저에 대한 평가였습니다.

캐나다로 이민간 사연과 캐나다에서의 음악활동

대부분의 성악가들과는 달리 이탈리아나 미국을 찾지 않고 캐나다를 택한 이유는 캐나다 연방정부에서 학비와 생활비 전액을 보장해 주는 풀 그랜드(Full Grand)를 받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캐나다와의 인연을 맺게 된 계기는 공부하는데 경제적 어려움을 겪지 않는 환경을 쫓은 것이지만, 여러 은사님들께서 캐나다에 정착할 것을 원하시기도 했고요. “진정한 내추럴 보이스(Natural voice)로 매우 재능 있는 성악가”로 평가해 주시던 당시 토론토 음대 학장님이셨던 시아마가(Dr. Ciamaga) 박사님과 제스너(Md. Jessner) 주임교수님, 크라우스(Md. Krauss) 교수님, 에반스(Evans) 교수님 등의 도움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캐나다에 살게 된 것이 벌써 43년이나 되었네요. 토론토 대학을 수석졸업하면서 토론토 음악대학 부속 왕립음악원의 교수직을 임명받아 교육자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고, 한국에도 일시 귀국하여 중앙대 음대와 추계예대에서 후진양성에 힘을 쏟았고, 현재는 캐나다 음악교육전문가단체인 ORMTA와 CFMTA의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또한 콘서트 싱어를 고수하면서 독창회를 비롯한 연주활동도 꽤 많이 하여 성악가로 기반을 닦을 수 있었습니다. 유수 관현악단과의 협연을 비롯하여 제가 몸담고 있는 캐나다 한인사회의 음악회까지 수많은 무대에서 다양한 노래들을 부르며 저의 꿈을 실현하는 시간들을 보냈습니다.
그 당시 연주와 관련된 에피소드 하나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이탈리아의 현대음악 작곡가 루이지 달라피콜라(Luigi Dallapiccola, 1904-1975)가 스페인 시로 작곡한 4곡의 가곡을 불렀는데, 절대음정을 자랑하는 한 캐나다의 소프라노 가수가 제 노래의 음정이 이상하였다고 평하는 것이었어요. 아무리 소리가 출중하다 하여도 음정이 정확하지 않고서는 대가의 반열에 들 수 없는 것이지요. 그런데 음정이 틀렸다는 소리를 듣다니. 하지만 저는 빙그레 웃을 수밖에 없었어요. 그 소프라노 가수는 달라피콜라의 원곡에 1/4온음 미분음(微分音)이 나온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었지요. 이야기 초입에 말씀드린 것처럼 저는 한국의 대학에서 공부할 때 이미 작곡과 친구들과 국악과 친구들을 통하여 현대음악의 다양한 기법들을 이해함은 물론, 국악에서 자연스럽고도 다양한 미분음을 익히고 있었으니까요. 음정은 사실 무한대의 영역인데, 그 중 우리는 피아노처럼 평균율로 고정된 음들만 구사할 수 있다든지, 부분적 순정율을 사용하는 정도의 음감을 일반적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시대의 다양한 음악에서 다양한 음정이 쓰이고 있다는 사실을 그녀는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연주가로서 바쁜 일정을 소화하고 있던 그 시기에도 저는 배움의 길을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전설적인 소프라노 엘리자베스 슈바르츠코프(1915-2006)와 인연을 맺을 수 있었던 시기도 바로 이 때였습니다. 그분은 젊었을 때 연주활동을 많이 한 관계로 후진양성에 신경을 쓰지 못하는 형편이었습니다. 만년에 들어서야 가끔 마스터 클래스를 열었는데, 그 때마다 전세계에서 수백 명의 성악가들이 운집하였었습니다. 제가 그녀의 클래스에 신청했을 때에도 세계 각국의 성악가 300여 명이 모여 경합을 벌였습니다. 저도 그 틈에 몇 곡의 오페라 아리아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가곡 「해탈(Befreit)」을 불렀습니다. 그분의 반응이 어떨지 사실 초조함까지 갖고 기다리고 있던 제에게 슈바르츠 선생님은 내가 부른 가곡의 이름을 따서 ‘베프라이트 걸(Befreit girl)’이라는 별명으로 호칭하시며 나를 다음 모차르테리움 정기연주자로 지목해 주셨습니다. 이는 분명 영광이었다고 해야겠지만 그보다 더 나를 감동하게 한 것은, 그분의 당시 연세가 70세의 고령이심에도 불구하고 시범으로 불러 주시는 노래였습니다. 그야말로 그분에게 나이는 정말 숫자에 불과할 뿐 그 아름답고 고귀한 목소리로 쩌렁쩌렁 노래를 들을 수 있다는 게 큰 축복이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순간이었습니다.

한국의 성악을 바라보는 생각이나 조언

제가 좀 자랑 같은 이야기를 많이 하였습니다만, 사실 저는 세계 각국의 크고 작은 다양한 무대에서 활약하는 많은 한국출신의 성악가들 중 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유럽이나 미국에 한국출신의 성악가들이 없다면 연주계의 판도가 달라질 것이라는 말은 이제 통설처럼 되었습니다. 한국 성악가들이 세계에 우뚝 서 있다는 것이 자랑스럽습니다. 이것은 우리 한국인들의 성악적 자질이 세계 어느 민족보다 뛰어나다는 말도 되고, 한국의 성악 교육이 또한 세계적이라 할 수도 있으며, 한국의 성악이 세계시장을 이끌어 갈 역량과 환경을 갖추고 있다는 말도 됩니다. 하지만 성악을 포함한 모든 문화 수준이 한국의 전반적인 국력과 비례한다고 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성악도 한국은 물론 세계라는 거대한 조직체 속에서 이에 작용하고 움직여 나가는 하나의 톱니바퀴라 할 수 있으니까요.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라는 말이 있는 것으로 압니다. 역설적으로 말하면 가장 세계적인 것이 가장 한국적인 것도 될 수 있지요. 그런 이유에서 자랑스러운 한국의 성악계가 한 가지 더 해결해야 할 과제라는 것을 말씀드린다면, 한국의 작곡가를 포함한 세계 각국의 작곡가들과 동반 성장을 하여야 할 것입니다. 문화라는 것은 과거의 콘텐츠에 안주할 수만은 없습니다. 진정한 이 시대의 음악인이 되기 위해서는 이 시대 음악을 추구하는 이 시대의 작곡가들과 이 시대의 연주가가 함께 호흡하고 같이 책임져야 한다는 마음가짐이 한국 연주가들에게 필요하다고 봅니다.


이번 한국 방문을 통해 있었던 이야기나 만남

오직 노래에 취해 정신없이 살다가 나이라는 덧이 고향을 찾게 하였어요. 내가 아는 모든 사람들이 각자의 길에서 나름대로 열심히 살고 있으며, 또한 훈훈한 인정을 잃지 않고 있었음에 고마웠습니다. 또 나의 삶의 흔적이 담겨있는 독창회 실황 음반 〈Soprano Cheon Ju Park-Kim in Recital〉은 꽤 큰 호응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또 많은 격려와 찬사를 보태주어서 흐뭇한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몇 개의 리뷰를 소개하면서 인터뷰를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Absolutely amazing.”
“My soul resonates with your power and passion.”
“Many heart will forever be grateful.”
“I am speechless, you are my soprano hero.”
“My whole being was touched...body, mind and soul”
“Such beautiful perfection.”
“What a wonder and awe.”
“Magnificent and glorious voices soaring above both power and lilting.”
“The degree of musical and technical control was impressive throughout.”

 

사진_김문기 부장

<김문기의 포토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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