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음악춘추

기획대담 - 지휘계의 2세대 선두두자 지휘자 김만복 선생 / 음악춘추 2015년 6월호

언제나 푸른바다~ 2015. 12. 2. 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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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춘추 기획대담 | 인물탐구 6월호
지휘계의 2세대 선두두자 지휘자 김만복 선생

 

지휘자 김만복은 1925년 6월 25일 경북 대구출생으로 서울대학교 음악대학에서 작곡을 전공하였다. 미국으로 건너가 캘리포니아 대학교에 입학하면서 전공을 지휘로 바꾸었으며 버클리 음악대학원 과정까지 공부하고 1960년 석사학위를 받았다. 1959년부터 2년간 미국 오클랜드 교향악단 부지휘자로 데뷔하면서 지휘자로서의 역량을 길렀고 1961년 귀국하여 서울시립교향악단의 상임 지휘자로 취임하였다. 1970년 서울시향의 상임 지휘자에서 사임한 그는 세종대학 음악과 교수로 후진들의 교육에 힘을 기울여 왔고, 1974년부터는 숙명여자대학교 음악대학에서 교편을 잡았다. 1983년 KBS 교향악단의 총감독 자리를 맡았었으며 그의 활동 공적에 대해 독일 연방 공화국의 국가 문화 훈장, 대한민국 국민훈장 동백장 등을 수상한 바 있다.

 

일시: 2015년 4월 29일(수) 오전 10시 30분
장소: 코스모스 악기사 7층
진행: 이용일(한국음악교육협회 명예회장)
패널: 이상만(음악평론가, 국제델픽위원회 명예위원)
        백운창(전 숙명여대 음대 교수)     
        이종일(한국교향악단 지휘자)
           
1. 김만복 선생의 성장 과정 및 음악의 출발
2. 김만복 선생과의 첫 만남
3. 김만복 선생의 음악세계
4. 김만복 선생의 교육관
5. 김만복 선생이 국내음악계에 끼친 영향

 

이용일_오늘은 지휘자 김만복 선생님을 재조명하는 대담을 시작하겠습니다. 생전에 김만복 선생님은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음악적으로도 탁월한 지휘자였습니다. 우리나라 서울시향 상임지휘자, KBS교향악단 총감독, 숙명여대 교수도 하셨던 우리나라의 보배였습니다. 항상 밝게 사시면서 주위의 분위기를 잡는 선생님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이상만 선생님, 김만복 선생님의 가족관계에 대해 알고계신 것이 있다면 말씀해주세요.

 

이상만_가족관계는 잘 모릅니다. 어렸을 때부터 김만복 선생님은 기독교 가문에서 자랐고 고등학교는 계성고등학교를 나오셨습니다. 유명한 음악가 현제명씨, 박태준씨, 박태원(박태준의 형)씨도 전부 계성고등학교 출신이여서 계성고등학교는 음악의 명문학교라고 일컬어지고 있습니다. 김만복 선생님은 계성고등학교 밴드부에서 트롬본을 불었습니다. 그리고 서울대학교에 입학하여 그 당시 우리나라 최초의 교향악단인 고려교향악단에서 트롬본연주자로 활약하고 있었습니다.

 

이용일_그럼 김만복 선생님은 서울대에 작곡과가 아니라 기악과로 들어가신 건가요?

 

이상만_전공은 트롬본이 아니라 작곡이었습니다. 어쨌든 작곡과 2회 졸업생으로 졸업을 했으니까요.

 

이용일_쉽게 말해서 요즘말로 부전공으로 트롬본을 하신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김만복 선생님은 기독교 과정에서 자랐고, 계성고등학교 출신인데 계성고등학교를 선교사들이 운영했기 때문에 음악활동이 자유로워 많은 음악가들이 배출된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럼 그 당시에 트롬본은 누구에게 배웠나요?

 

이상만_이우성라는 분께 배운 걸로 알고 있습니다. 서울시 취주악단 단장이셨고 서울대학교의 전신인 경성전문학교의 교수로 재직하고 있었습니다.

 

이용일_대구에서 기초공사를 하여 서울로 상경하고, 전공은 작곡으로 하고 부전공으로 트롬본을 하신 것 같네요. 백운창 선생님은 언제 처음 뵈었나요.

 

백운창_1961년도 제가 서울시향에 있을 때 그때 처음 만나 뵈었죠.

 

이종일_처음 뵌 것은 제가 1961년도 서울대학교에 입학할 때 서울시향의 지휘자 김만복 선생님이 사직공원에서 첫 연습을 했을 때였습니다.

 

이상만_제가 학교 다닐 적에 고려교향악단 연주회에 가보면 제일 키 큰사람이 트롬본을 불고 있어서 눈에 띄었는데 그때 처음 본거지요. 당시에 가까이 지내지는 않았습니다. 김만복 선생님은 6.25이후에 우리나라 사람으로서는 최초로 UC버클리에 유학을 갔습니다. 외국에 가서 지휘를 제대로 공부하였는데 물론 그 전에 임원식 선생님이 1940년대에 줄리아드에 가서 지휘를 공부했지만 석사학위를 받은 것은 김만복 선생님이 처음입니다. 한국으로 돌아오자마자 서울시향의 지휘자가 되셨지요. 그때 당시 30대 후반이었는데 혜성같이 지휘를 전공한 사람이 나타나고 또 5.16군사정변이후에 대구, 경북사람들이 실권을 잡았을 때니까 자연스럽게 서울시향의 지휘자로 오게 된 것 같습니다. 서울시향이 굉장히 중요한 교향악단이기도 하고요.   

 

이종일_그 전에 김생려 선생님, 임원식 선생님 원로 지휘자들이 계셨지만 정식으로 학문을 배운 사람으로는 김만복 선생님이 처음이었습니다.

 

이용일_김만복 선생님의 음악세계가 연결되는데요. 서울시향에서 지휘자로서 지휘할 때에는 어땠나요.

 

백운창_우선 김만복 선생님은 단원들과 두루두루 잘 지내려고 하셨습니다. 아주 인간적이셨죠. 돈에 대해서 욕심이 없고 테크닉을 제대로 공부하신 분이셨습니다. 70년대까지 지휘를 하셨는데 제가 계명대학교로 가게 되면서 그때 헤어지게 되었습니다. 

 

이상만_또한 어떻게 보면 그 당시 아주 혁명적인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아까 백 선생님도 말씀하셨지만 그 당시에 많이 연주하던 작품들 말고 새로운 작품들을 소개하셨습니다.  월턴이라던가 힌데미트, 코플란드, 바버 등의 작품을 소개하셨는데 그 당시에 김생려 선생님은 브람스정도, KBS교향악단의 임원식 선생님은 하이든, 모차르트, 차이코프스키정도까지 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나라 교향악단의 레퍼토리를 혁신한 것은 김만복 선생님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작품들이고 익숙지 않은 곡들이었기 때문에 아무래도 단원들은 조금 불만스러운 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간에 10년 가까이 서울시향을 음악적, 행정적으로 안정될 수 있게 다져놓은 것은 틀림없습니다.

 

이용일_결국 국내 지휘계에 혁신을 일으킨 거죠. 그렇다면 서울시향에서 지휘하실 때 우리나라에서 안하던 레퍼토리를 많이 하셨다는 건가요.

 

백운창_곡들도 우리나라에서는 하지 않던 것들을 했습니다. 당시 저는 바이올린을 했는데 새로운 곡들을 하니 좋았지요. 김만복 선생님은 미국에서 배운 곡들로 그러니까 우리가 해보지 못했던 곡들을 했었으니까요. 모차르트, 베토벤 하던 것만 하다가 새로운 걸 하니까 새롭기도 하였고요.

 

이종일_저는 KBS교향악단에 있었으니까 직접 지휘를 받아본 적은 없습니다. 1963년 제가 서울대학교에 다닐 때 김만복 선생님께 지휘법을 배운 적은 있습니다. 지휘는 직접 안 받아 봤지만 김만복 선생님께서 지휘하시는 건 연주회에서 많이 보았습니다.

 

이상만_김만복 선생님이 원체 체격이 크시고 또 굉장히 열정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서울시향 소리를 키운 건 사실입니다. 소리가 옛날 보다는 훨씬 커졌으니까요. 그래서 서울시향 단원들의 호응도도 상당히 높았고 많이 발전시켰고요.


 

이용일_김만복 선생님이 지휘를 하실 때 키가 조금 더 작았으면 그림이 좋았을 거예요. 워낙에 키가 크시니니까요.

 

이종일_키가 크신데다가 지휘하시면서 뛰기까지 하셨으니까 열정이 대단하셨죠.

 

이용일_그러니까 김생려 선생님, 임원식 선생님은 일본의 문화권에서 배운 것을 했고, 김만복 선생님은 미국에서 새로운 것을 배우고 와서 우리나라에 새로운 레퍼토리를 알린 공이 있다는 거죠. 이제 교육관에 대해서 말해볼까 합니다. 김만복 선생님은 숙명여대에서 어떠셨나요.

 

이상만_KBS교향악단의 지휘자에 대한 좋지 않은 일이 있어서 단원들이 불만을 가지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래서 KBS교향악단 지휘자가 떠나게 되었는데 그러한 상황에서 서울시향도 영향을 받았습니다. ‘서울시향의 지휘자 김만복 선생님도 오래했으니까 다른 지휘자로 바꿔보자’ 이런 분위기로 인해 그만두시게 되고 서울시향을 그만둘 때에 상당한 명성이 쌓여있었을 때였으니 세종대학교의 전신인 수도여자사범대학에서 김만복 선생님을 모셔가려 했습니다. 수도여자사범대학의 설립자 주영하씨는 음악에 대해서 조예가 깊었습니다. 그래서 김만복 선생님은 ‘수도여자사범대학에 오케스트라를 만들어보자’ 하는 그런 마음이 있어서 수도여자사범대학으로 갔는데 그게 쉽게 되지 않으니까 더 큰 학교인 숙명여대에서 유업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종일_1983년에 정년임박 하셨을 때 KBS교향악단의 운영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오셔서 있다가 KBS교향악단 감독대행으로 들어오셨죠. 처음에 감독대행으로 있으시다가 후임감독을 안 뽑으니까 결국 몇 년 후에 총감독이 되셨습니다. 1963년 제가 대학교 4학년 때 김만복 선생님께 지휘법을 2년 동안 배우면서 제자가 되었지요. 우리나라에는 지휘과가 없으니까 지휘자는 제자가 없잖아요. 그래서 저는 제가 김만복 선생님 제자이고 김만복 선생님은 제 스승이라고 생각합니다. 김만복 선생님의 영향으로 지휘를 하게 된 이유도 있습니다.

 

이상만_김만복 선생님이 어렸을 때부터 기독교 교육을 받았고 젊은 나이에 일찍 명문대학교를 가고, 서부에서는 UC버클리가 굉장히 명문대입니다. 젊었을 때 명문대학교의 대학원도 갔기 때문에 미국식 교육에 굉장히 영향을 많이 받았지요. 그리고 김만복 선생님은 거드름을 피우지 않고 정직했습니다. 남을 배려하는 생활태도가 굉장히 몸에 배어있기도 했습니다. ‘키 큰사람이 싱겁다’는 속담이 있었는데 우리들이 볼 적에 는 속담대로였지요. 이런 면이 있어서 대인관계에서는 굉장히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부인이 의사였기 때문에 생활걱정을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돈, 명예, 권력을 탐하는 법이 전혀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런 점에서는 인격적으로 상당히 좋은 표본을 보여줬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용일_아마 김만복 선생님이 기독교집안에서 자랐기 때문에 거의 그렇게 성격이 형성된 거죠. 말씀한 것이 전부 예수 잘 믿는 기독교 사람의 표본이거든요. 그러니까 미국에 가서 본 것보다는 이미 모든 행동들이 기독교에 젖어 있었기 때문에 그랬을 거라 생각이 듭니다. 이종일 선생님은 김만복 선생님께 지휘를 배울 때 어떤 생각이 들었나요.

 

이종일_김만복 선생님께서 지휘법을 가르치시는데 완전히 음악분석이었습니다. 김만복 선생님이 미국에서 배우고 공부한 노트를 가지고 오셔서 이론을 완전히 음악분석처럼 가르치셨습니다. 대학교에서 3학년, 4학년이 한반에서 모두 같이 배웠기 때문에 A학점을 받은 사람이 3명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철저하게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에 김만복 선생님은 아주 신사이고 멋쟁이고 인기가 대단하셨습니다. 제가 졸업하고 김만복 선생님과는 헤어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1983년도에 KBS가 여의도로 갔을 때 김만복 선생님께서 KBS교향악단 총감독으로 오셨는데 그때다시 만나 뵙게 되었습니다. KBS교향악단 총감독으로는 꽤 오래 계셨지요.

 

이용일_재밌는 일화 있으면 말씀해주세요.

 

이종일_KBS교향악단 총감독 시절에 김만복 선생님이 환갑이셨어요. 그래서 선물을 해드리려고 했더니 소리치시는 겁니다. 김만복 선생님께서 환갑인거 말하지 말라고, 안 그러면 다른 사람들이 김만복 선생님의 나이를 알게 되니까요. 그래서 아무것도 못하고 넘어갔던 기억이 납니다. 맨날 초창기에는 KBS교향악단이 회의하면 골치 아픈 일이 항상 많았거든요. 하지만 회의하면서 김만복 선생님은 겉으로 표현을 안 하셨습니다. 그게 선생님의 성품이셨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하여튼 제가 볼 때 김만복 선생님은 신사이세요.

 

상만_김만복 선생님이 유머가 있어서 굉장히 우스개소리를 잘합니다. 그 당시에 유머의 대가는 류덕희 선생님과 최인찬 선생님이었는데 김만복씨도 상당히 유머가 있어서 많은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줬습니다. 사실 김만복 선생님은 일생을 지휘를 하며 살고 싶어 하셨는데 KBS교향악단 총감독으로 가게 되고서는 지휘를 못하게 되셨지요. 그러니까 손과 발을 묶어 놓은 거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김만복 선생님은 할 수 없이 지휘봉을 잡을 수 없으셨죠.

 

이종일_그렇습니다. 김만복 선생님은 지휘를 하고 싶어 하셨습니다. 교향악단에서 총감독겸 상임지휘자를 할 수 있게 했었는데 문제가 있다면서 분리를 시켰단 말이죠. 총감독이 오케스트라만 가지고 있는게 아니라 다른 부분에서도 지휘를 해야 하니까 모든 것을 혼자 통솔하고 지휘할 수가 없다면서요.

 

이상만_김만복 선생님은 한두 번은 지휘했지만 지휘봉을 안주고 못하게 되니까 그렇게 행복하지가 않았습니다. 그리고 또 김만복 선생님이 행정에 굉장히 능한 사람도 아니였습니다. 하지만 김 선생님이 KBS교향악단에 있을 때 분란을 일으키지 않고 무난하게 넘어간 것도 성품의 영향이 큰 것 같습니다.

 

이종일_김만복 선생님께 지휘법을 배울 때와 모스크바에서 지휘법을 배울 때 방식이 달랐습니다. 모스크바에서는 실기 위주로 배웠는데 김만복 선생님은 이론 위주였으니까요. 미국에서 배웠던 방법대로 가르쳐주신 거죠.

 

이상만_김 선생님은 철저하게 미국식 교육에 입각하여 가르친 사람입니다. 그래서 굉장히 실용주의적인 교육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존경하던 사람이 존 듀이라는 교육 철학자였는데 이런 사람들의 교육관을 몸에 지니고 있었고 이론과 실제가 병합해야 한다는 말을 하기도 했었습니다. 김만복 선생님의 교육관이 투철했기 때문에 숙명여대로 가셨고 그곳에서 정년퇴임한 것도 그런 이유라 생각합니다.

 

이용일_좌우지간 일본의 영향을 받은 지휘자 1세대에서 벗어나서 새로운 음악공부를 한 분이 2세대라고 할 수 있죠. 김만복 선생님은 2세대의 선두주자라고 봐야겠죠. 그래서 지휘를 공부해야 한다는 어떠한 길을 열어 주셨고 그분으로 하여금 새롭고 많은 레퍼토리가 나옴으로써 우리나라 오케스트라가 크게 발전했다고 봅니다. 그래도 제가 느끼기엔 상당기간 김만복 선생님만큼 레퍼토리를 넓힌 지휘자가 없었습니다. 일찍이 우리에게 새로움을 안겨주신 선생님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상만_김만복 선생님이 활동할 적에 저는 동아일보에서 글을 쓰고 있을 시기였습니다. 김만복 선생님을 나름대로 띄어드리려 했지요. 그래서 점차 김만복 선생님이 저에 대한 신뢰감이 생기게 되면서 개인적으로는 굉장히 가깝게 지냈습니다. 또 하나는 김만복 선생님이 지휘를 독점하려는 욕심이 없었습니다. 비교적 많은 객원지휘자들한테 자리를 주고 외국 사람들도 많이 데려다 지휘를 많이 시키고 그런 일면 같은 것들이 있었습니다.

 

이종일_한국 지휘계에서 볼 때 우리가 대부라고 칭할 수 있는 우리나라 초대지휘자가 김생려 선생님, 임원식 선생님 아닙니까. 김만복 선생님은 바로 밑의 세대로서 정식으로 지휘를 공부한 지휘자이고 실제로 활동한 것보다는 실질적으로 가르친게 더 많으셨죠. 그러니까 이론적으로 지휘의 바탕을 만들어놓은 첫 지휘자이시죠.

 

정리_ 김수현 기자 / 사진_ 김문기 부장

기사의 일부만 수록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음악춘추 2015년 6월호의 기사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

 

<김문기의 포토랜드>

 

 

 

 

진행: 이용일(한국음악교육협회 명예회장)

 

백운창(전 숙명여대 음대 교수) 

이상만(음악평론가, 국제델픽위원회 명예위원)

 

이종일(한국교향악단 지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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