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음악춘추

합창지휘자 나영수 / 음악춘추 2012년 4월호 표지인물

언제나 푸른바다~ 2012. 4. 6. 1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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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창지휘자 나영수
개척정신으로 일궈온 합창의 길

 

“국립합창단의 초대 단장으로 임한 때 저는 씨를 뿌리는 역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제 생전에 꽃도 보고 열매까지 딸 수 있었으니 저는 참으로 행복한 지휘자라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우리나라가 전문합창 강국이 되었다는 사실에 너무나 감개무량하기도 하고요.”
우리나라 최초의 전문합창단인 국립합창단의 초대 단장을 시작으로 3대, 7대 단장 및 예술감독을 지내는 한편, 다양한 합창단을 이끌고, 합창 단체들의 초대 회장을 역임하며 한양대 음대 교수와 울산대 석좌교수로 후학을 양성하는 등 우리나라 합창 음악계의 선구자이자 산증인으로 합창계를 이끌어 온 나영수 선생. 1963년 서울민속가무단의 지휘자로 활동하기 시작해 지난 해 6월 국립합창단의 7대 예술감독으로 임기를 마치기까지 반세기 동안 오로지 합창과 함께 해 왔다. 선생은 국립합창단을 떠난 후에도 지난해 9월 광주, 11월 대전, 12월 쏠리스트앙상블, 올해 2월 서울, 3월 부산시립합창단을 객원 지휘하는 등 여전히 많은 이들의 사랑과 관심 속에서 합창 음악의 감동을 전하고 있다.  

 

국립합창단과 함께 걸어 길
1973년 국립합창단 창단의 주역인 나영수 선생은 초대 단장(1973년∼1982년)으로 9년 8개월, 제3대 단장(1985년∼1992년)으로 7년 11개월, 제7대 예술감독(2008년∼2011년)으로 3년, 총 21년의 세월을 국립합창단과 함께 했다.
“2008년 세 번째로 국립합창단의 단장 직을 맡게 될 당시 제가 다시 이 단체를 이끌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후배 지휘자들의 길을 열어주진 못할 망정 가로막으면 안 되기에 여러 번 사양하기도 했고요. 단장이 되는 것은 개인적으로 영광이면서도 국립합창단을 떠난 지 15년이 되었고, 나이 많은 저에게 또 다시 맡긴다는 것에 ‘국내에 합창 지휘자가 이렇게 부족한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선생은 제7대 단장이 되었을 때 ‘국립합창단은 지휘자 양성의 도장, 창작 합창곡의 산실’이 되어야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우선 가능한 자신의 지휘 무대는 줄이고, 해외유학파인 총 10명의 부지휘자를 영입, 6개월씩 국립합창단과의 공동 작업을 통해 데뷔시키고 5명의 중견 지휘자도 초청해 객원지휘의 기회를 주었다. 또한 평생 주력해 온 일인 한국 창작 합창곡 개발을 위해 3년 동안 3개의 대작 칸타타, 그리고 100곡의 소품을 만들었고, 5권의 악보를 출판해 전국에 배포했다. 이에 더해 선생의 임기 동안 국립합창단은 합창 음악의 본고장인 유럽의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스위스 등지의 여러 도시를 방문, 네 번의 해외 순회 연주를 통해 합창으로 국위 선양을 하기도 했다.


현재 국내에는 시에서 운영하는 전문합창단인 시립합창단이 전국에 60개 있다. 최초의 시립합창단인 부산시립합창단이 1972년에 아마추어로 시작되었고, 1973년 국내 최초의 전문 직업합창단인 국립합창단이 창단된 이후 시마다 시립합창단이 생겨난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 대한민국 합창계의 이러한 상황에 서양 음악의 본고장인 유럽과 미국의 합창음악계도 부러워한다. 하지만 지금의 영광과 비교했을 때 너무나도 초라했던 과거 합창단의 모습 역시 존재한다. 합창이 음악 예술 분야의 중요한 한 부분이라고 여기지 않았고, 그저 아마추어가 하는 것이라 생각되던 시절이 있었던 것이다.
이에 더해 나영수 선생은 사실 국립합창단도 오늘날과 같이 콘서트 위주의 공연을 하고 한국 합창의 발전을 도모하기 위해 창단된 것이 아니라며 국립합창단의 창단 비화(秘話)에 대해 들려주기도 했다. 1973년 창단된 국립합창단은 1974년 사라질 위기에 처해 국립가무단의 소속으로 명맥을 이어가다가 그해 7월 창단 연주회를 가졌고, 1975년 1월 1일 문화공보부 소속 국립극장 산하의 8번째 정식 단체가 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창단 연주회를 갖게 되었지만 국립합창단이 대한민국 최초의 프로 합창단인 만큼 어떤 레퍼토리를 선보이면 좋을지 고민을 했습니다. 그래서 국립합창단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최초의 전문 합창단이므로 한국 작곡가의 합창곡만으로 레퍼토리를 정해야겠다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당시 창작 합창곡이 많지 않았고 예술성도 부족했기 때문에 프로그램을 구성하는데 애를 먹었습니다.”
하지만 그 결과는 매우 성공적이었다. 당시 국립극장에서 이틀간 공연했는데 객석은 만석이었고, 많은 관객들이 표가 없어 발길을 돌려야만 했던 것이다. 그리고 한국 작곡가들의 응원은 물론, 평론가들의 호평도 받을 수 있었다. 

 

그 누구도 가지 않은 길을 개척하다
그러나 나영수 선생은 국립합창단이 정식으로 창단되었다고 해서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국립합창단도 그랬지만 당시 많은 합창단들이 필요에 의해 창단되었다가 해체되는 악순환이 거듭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생은 합창단 역시 음악계에 필요한 존재이고, 교향악단, 발레단처럼 직업 전문 예술 단체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 애썼는데, 그 과정은 말로 형언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당시 국립합창단은 국립가무단, 국립오페라단, 국립교향악단, 등의 합창을 도맡아 참여해도 공연 횟수가 많지 않아 지방 순회 연주를 비롯해 찾아가는 음악회 등을 개최하며 국립합창단 존재의 이유를 만들어 나갔다.
“전문 합창단을 운영해 본 경험이 저는 물론 국내 음악계의 그 누구도 없었고, 공무원들 역시 없었기 때문에 국립합창단의 기틀을 다져나가는 과정은 험난했습니다. 그리고 더욱 저를 힘들게 했던 것은 ‘합창은 아마추어가 하는 것’이란 대중들의 인식이었습니다. 합창을 하는데 왜 월급을 주느냐는 것이었지요. 그래서 초대 단장일 당시에는 어떻게든 국립합창단을 존속시켜야 한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유일한 프로 합창단으로 활동하는 것에 외로움을 느낀 선생은 국립합창단과 전국 순회 연주를 다닐 때 그 곳의 시장 또는 공무원을 만나면 합창단을 만들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하곤 했고, 선생의 바람처럼 전국 곳곳에서 시립합창단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래서 선생이 국립합창단에서 두 번째 임기를 시작했을 무렵에는 전국에 시립합창단이 열 개 넘게 활동하고 있었던 터라 경쟁 체제가 되었다. 시립합창단은 ‘시민’을 위한 것이지만 국립합창단은 국가에 소속된 유일한 합창단으로서 ‘국적’있는 합창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 나영수 선생은 창작 합창곡의 발굴에 지대한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래서 대학생 작품 발표회를 비롯해 크고 작은 창작곡만 500여 곡 발표했으며, 네 개의 창작 칸타타를 무대에 올렸다. 이 때 선보인 칸타타는 우리 역사의 아픔에서 억울했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백제 최후의 명장을 노래한 「계백」, 외적에게 포로로 잡혀가 몸 버리고 돌아온 여인네들의 애환을 그린 「환향녀」, 6·25 전쟁으로 억울하게 죽은 남북의 두 젊은 남녀의 영혼결혼을 통해 그 넋을 위로하고자 한 「죽은 자와 산 자들을 위한 진혼곡」, 동학 100주년을 기념해 억울했던 민초들을 위로하는 「들의 노래」이다.
그리고 2008년 생각지도 못하게 국립합창단을 세 번째로 이끌게 된 것은 선생에게도 좀 어이없는 일이었다고 한다. 그만큼 국내에 유능한 합창 지휘자가 부족하다는 것은 큰 문제였던 것이다. 그래서 앞서 말했듯이 15명의 지휘자를 무대에 세웠고, 2008년∼2011년 임기 동안에는 100곡의 합창 소곡과 세 편의 대작 칸타타를 발표했다. 이 3년 동안에는 호걸도 영웅도 아니지만 역경을 이겨내고 주위에 밝은 등불이 된 이들의 이야기를 칸타타로 만들기로 하여, 장애를 극복하고 아름다운 동시를 썼던 서덕출을 노래한 「푸른 편지」, 제주의 기근에서 많은 생명을 구해냈던 만덕할망을 주인공으로 한 「만덕할망」, 오늘 그 마지막으로 평생을 나환우들을 위해 헌신했던 이경재 신부를 기리기 위한 「라자로의 노래」를 선보였다.
그 밖에도 선생은 성남시립합창단을 1년 반 동안 이끌면서 대학생 작품 발표회를 개최하고 「유민의 노래」라는 칸타타를 발표했으며, 2000년부터 2006년까지 울산시립합창단의 지휘자로 재직하는 동안에도 지역의 특색을 담은 칸타타 「울산 내 사랑」, 「외솔의 노래」와 울산의 노래 64곡 등 악보집을 제작, 보급했다. 

 

합창은 내 운명
나영수 선생은 누누이 이야기해 왔다. 자신은 합창 지휘를 전공하지도 않았고, 유학파도 아니며 오로지 현장 경험만을 통해 오늘에 이른 사람이라고.
1938년생인 나영수 선생의 본래 고향은 함경북도 회령이고, 출생지는 만주 목간당이라는 곳이다. 당시 대동아전쟁이 발발하자 만주의 분위기도 흉흉해서 4살 때 부모님과 함께 고향인 회령으로 왔고, 그 곳에서 해방을 맞이했다. 그리고 6 25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가족이 모두 대구로 내려와 선생은 경북중학교에 입학했으나 전쟁 통에 피란을 다니느라 제대로 학업을 잇지 못해 중학교 2학년을 두 번 다니게 되었다. 두 번째 2학년이 되었을 때 첫 수업은 음악이었고 담당 교사는 피아니스트 김종환 선생이었다. 그 음악 선생님과의 만남은 나영수 선생을 음악이란 길로 이끄는 시작점이 되었다.


“음악 선생님께서 노래 한 곡을 가르쳐 주시고는 제일 앞에 앉아 있는 노래 잘한다는 반 친구에게 노래를 불러보라고 시키셨는데 그 친구가 끝까지 노래를 하지 않아 선생님의 얼굴이 붉어질 정도로 당황해 하셨습니다. 그래서 수업이 끝난 후 그 친구에게 ‘네가 얼마나 노래를 잘하는지 모르겠지만 선생님이 간곡하게 부탁하시는데 그래서 되겠냐’라고 말하자 그 친구들이 ‘그러면 다음 시간에 네가 노래해라’라고 놀리더군요. 다음 음악 시간에 선생님께서 또 그 친구에게 노래를 불러보라고 하자 그 친구는 또 하지 않았고 반 친구들은 저를 가리키며 노래를 시키라고 했어요. 그래서 결국 제가 노래를 하자 선생님께서 앞으로 성악 공부를 해 보라며 칭찬해 주셨습니다.”
이후 경북고등학교에 진학한 선생은 2학년 때 합창 반장을 했고, 음악 선생님 손에 이끌려 참여한 서울대 음대 콩쿠르에서 1등 없는 2등을 차지하기도 했다. 사실 성악을 전공할 생각은 없었지만 생각지 못하게 서울대 음대에 진학, 1학년이었던 1958년에 창단된 KBS 합창단에서 베이스 단원으로 3년간 활동하며 등록금을 해결했다. 그리고 졸업 후에는 갓 창단된 예그린악단으로 옮겨 2년 동안 또 합창단원 생활을 했다.


이렇게 프로 합창단의 단원으로 활동하던 선생을 합창지휘자라는 길로 인도한 우연한 사건이 1963년 일어난다.
“그 해에 예그린악단은 해체되고 서울민속가무단이 창단되었는데, 저를 어떻게 알았는지 수소문 끝에 찾아내서 ‘지휘’해달라는 요청을 했습니다. 당시 저는 합창 지휘자가 되겠다는 생각은 털끝만치도 없었는데 엉겁결에 지휘자가 된 것이지요. 그런데 나중에 생각해보니 군 출신이었던 당시 서울민속가무단의 사무국장님은 군대에서 소대장이 소대를 지휘하듯 저에게 합창단을 관리하란 의미에서 지휘하라고 하신 것 같더라고요(웃음).”


어찌되었건 지휘를 시작한 나영수 선생은 피아노도 없는 현장에서 노래를 가르치며 하루하루 지휘법을 체득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얼마 되지 않아 지원이 끊겨 서울민속가무단은 사라지게 되었고, 해체되었다가 그 즈음 다시 생긴 예그린악단에서 선생의 지휘를 필요로 했다. 그리고 계속해서 라디오 서울, MBC 합창단 등 여러 합창단에서 선생에게 지휘를 맡김에 따라 지휘 경험이 쌓였다. 당시 지휘를 전공한 사람이 없는 상황에서 나영수 선생은 젊지만 지휘 경험이 풍부한 존재로 여겨졌고, 그렇게 다목적합창단인 국립합창단의 초대 단장의 자리에까지 오를 수 있었다. 국내에서 직업 합창단 지휘자 제1호가 된 것이다.
하지만 선생은 전공하지 않아서 겪은 어려움에 대해 이렇게 토로했다.
“창단 초창기에 국립합창단이 지방 순회공연을 할 때면 외국노래는 알아들을 수 없으니 우리말로 불러 달라는 요구가 많았습니다. 라틴어, 독일어, 이탈리아어, 프랑스어, 영어 등 다양한 언어로 된 작품을 번역하느라 늘 사전을 찾는 것이 일이었지요. 그리고 지휘를 제대로 지휘공부를 했더라면 바로 알 수 있는 것들을 10년이 걸려 알게 된 것도 많이 있었습니다.”
덧붙여 선생은 “나 혼자 좋은 노래를 부르는 것도 어려운데 제각기 다른 소리, 다른 마음을 가진 수십 명의 사람을 하나로 만드는 것도 어디 쉬운 일이냐”고 말했다. 그래서 합창 지휘를 공부하고 싶다는 학생이 있으면 대단한 각오 없이는 시작하지 말라고 만류했었다고.


우연찮게 중2 음악 시간에 노래 한 번 부르고, “합창단을 지휘하시오”라는 말에 진짜로 합창 지휘자가 된 선생은 “합창이라는 것이 평생의 업이 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는데 이 길에 들어서 모든 것이 처음이라 가시밭길을 걷기도 했지만, 어떤 노력으로 이 길을 개척했다기 보다는 도와주고 이끌어 주신 분들 덕분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고 겸손하게 말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훌륭한 합창 지휘자라는 말보다는, 그저 우리나라 합창계를 위해 애쓴 사람으로 기억되면 좋겠습니다.”
 
합창계의 발전을 위하여
『위지동이전(魏志東夷傳)』에 쓰여 있는 ‘우리 민족은 가무음곡(歌舞音曲)을 좋아하고 즐기는 민족’이라는 내용을 예로 든 나영수 선생은 오늘날 국내 합창단과 성악가들의 눈부신 활약을 보면 “한국 사람에게는 노래를 잘하는 DNA가 있는 것 같다”고 이야기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나라의 합창음악이 짧은 기간에 급속히 발전하다 보니 극복해야 할 문제들도 생겼다며 합창계의 문제점을 진단했다.


“풍토, 풍습 특히 말이 달라지면서 노래도 달라지기 마련인데, 우리 노래 중에는 우리말보다는 서양말에 더 어울릴 법한 노래도 많이 만들어졌었고, 또 그런 노래에 너무나 익숙해져 버려서 우리 노래 표현 역시 우리말답지 않은 잘못된 경우도 많았습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우리말과 우리 정서에 어울리는 노래가 더 많이 창작되어야겠고, 또 우리 노래를 부를 때도 잘 아는 우리말이라고 너무 쉽게 생각하지 말고 외국 노래를 부를 때보다도 더 깊이 연구하여 우리말의 아름다움과 정서를 살려내야 할 것입니다.”
선생은 외국 노래보다 한국 노래를 부르기가 더 어렵다는 말을 성악가들끼리는 자주 하곤 한다며, 우리 노래를 어떻게 불러야 더 바르고 잘 부르는 것일까 하는 문제는 노래를 하는 사람이나 합창지휘자나 늘 고민해야 할 과제라고 덧붙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좋은 합창 지휘자가 많이 배출되어야 함을 강조했다. 합창단의 발전에는 좋은 단원, 좋은 환경, 좋은 작품도 필요하지만 지휘자의 역할이 절대적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지휘자가 되기 위해서는 한두 해 공부해서 되는 것이 아니고 무엇보다도 지휘 경험이 중요한 것이므로 국내의 실력 있는 신인 지휘자들이 보다 많이 발굴되어 그들이 무대에 설 수 있는 기회가 많아지길 바란다는 이야기를 했다.
인터뷰를 통해 흥미진진하게 들은 나영수 선생 개인의 역사는 곧 국내 합창계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살아있는 역사인 선생의 발자취 중 일부만을 글로 주워섬긴 것 같아 아쉬움이 남지만 국립합창단 퇴임 때 선생이 한 인사말을 옮기며 마무리해 본다.


“힘겨울 때도 많았었지만 주위의 도움이 커서 버틸 수 있었고, 또 앞에 섰었기 때문에 모진 바람도 먼저 맞았지만 그보다는 영광이 훨씬 더 많았기에 저는 참으로 행복한 지휘자였습니다. 감사합니다.”

 

글·배주영 기자/ 사진·김문기 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