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니스트 이경희 선생
서울에서 태어난 피아니스트 이경희(1916. 8. 5~2004. 12. 29) 선생은 유치원부터 미션계통에 다닌 관계로 자연히 음악행사나 무용 연극에 참여하게 되었고, 아현국민학교에 들어가7서 오르간을 공부하였다. 이후 이화여학교에 입학하여 본격적으로 피아노를 배운 선생은 이화여자전문학교 음악과(1938년)와 연구과(대학원과정, 1940년)를 마쳤다. 졸업 후에는 제1회 조선일보사 주최 신인연주회 출연, 계정식 바이올린 독주회 반주, 이인선 독창회 반주를 비롯해 많은 연주 무대에 올랐고, 계정식·김생려·안성교·김태현 선생으로 구성된 현악4중주단과 함께 중국 만주·신경·봉천·하얼빈 등지를 순회하는 연주회를 가지기도 하였다. 연주활동과 병행하여 이화여자고등학교 교사를 거쳐 이화여자대학교 조교수로서 학생들을 가르친 이경희 선생은 6.25전쟁으로 폐허가 된 서울을 떠나 1953년 대구로 피난 온 후 남산여고에서 교편을 잡는 한편 미군부대 오르가니스트로 활동했다. 1955년 효성여자대학교(현 대구가톨릭대)에 출강하다가 1956년 교수로 임명받고 1982년 정년퇴임 때까지 수많은 후학들을 양성해 낸 선생은 1970년 도미하여 오클랜드 홀리네임스 음악대학 대학원에서 수학하기도 했다.
교육에 대한 열정 못지않게 연주에 대한 열정도 높아 다수의 독주회, 협연 및 실내악 활동 이외에 회갑 독주회, 칠순 연주회, 팔순 독주회, 대구시향과의 협연 등 85세까지 연주활동을 이어오며 후학들에게 연주자로서의 모범을 보인 이경희 선생은 제5회 경북문화상, 국민훈장(목련장), 문교부 장관상(연공상)을 수상한 바 있다.
일시: 2012년 6월 8일(금)
장소: 계명대학교 음악·공연예술대학 학장실
진행: 이용일(한국음악교육협회 명예회장)
패널: 윤진영(대구가톨릭대 명예교수)
김화자(대구가톨릭대 명예교수)
임우상(계명대 명예교수)
신희원(계명대 교수)
김회영(대구가톨릭대 학장)
이경희 선생의 성장 과정 및 음악의 출발
이용일_ 이번 7월 호에서는 대구 피아노 음악계 발전에 초석이 되신 이경희 선생님에 대한 좌담회를 갖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윤진영 선생님께서 어머니의 성장과정에 대해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윤진영_ 저희 외할아버지께서는 과거에 등과하셨던 유교 학자이셨습니다. 당시 여자에게는 교육을 시키지 않는 사회분위기였음에도 불구하고 외할아버지께서는 어머니의 큰언니, 즉 저의 큰이모님을 서울에 있는 좋은 국민학교에 입학시키셨다고 합니다. 졸업을 하실 때 일본인 교장선생님이 큰이모님을 뛰어난 인재라 여기셔서 일본으로 데리고 가서 교육시키고 싶다고 말씀하셨는데, 그 당시에도 외할아버지께서는 일본으로 보내겠다고 하셨답니다. 그렇지만 친척 어르신들이 보내지 말라고 데모를 하다시피 해서 결국 유학은 좌절되었지만요. 그리고 저희 어머니께서는 어린 시절 아현동에 거주하셨고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 이화여자전문학교까지 미국 선교사분들 밑에서 교육을 받으셨습니다. 피아노를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하신 것은 1930년 이화여학교에 입학하신 뒤입니다. 당시 아현국민학교 교장선생님으로 계시던 미국인 헬(Hell) 선생님께서 뉴잉글랜드 콘서바토리를 졸업하고 이화여전 강사로 재직 중이셨던 우드(Wood) 선생님을 소개해 주시면서이지요. 어머니의 큰언니 또한 이화여전에서 피아노를 전공하기도 하셔서 그 영향도 많이 받으신 것 같습니다. 우드 선생님은 어머니께서 평생의 은인으로 여겼던 분이십니다. 6·25전쟁이 발발하여 대구로 피난을 갔을 때도 먹을 것, 입을 것을 소포로 보내주시곤 하셨지요. 또한 어머니께서 대구 피난 후 남산여고에서 교사로 재직하시며 미군부대에 오르가니스트로도 활동하셨고, 친분을 나누던 하임쇼트(Heimsoth) 목사님이라는 분이 피아노가 없어서 애태우는 어머니를 보시고 일본에서 피아노를 구입하여 보내주기도 하셨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또 이 피아노를 대구 문화장으로 옮겨서 대구에서 첫 독주회를 사긴 기억도 납니다.
이경희 선생과의 첫 만남
이용일_ 네. 그럼 김화자 선생님께서는 이경희 선생님과 언제 처음 만나게 되셨나요?
김화자_ 저는 고등학교 3학년 때 처음 만나 뵙게 되어 대학에 들어가서까지 계속 이경희 선생님께 배웠습니다. 대학원 진학으로 서울에서 보낸 2년을 제외하고는 선생님께서 정년퇴임하시기 전까지 교직생활도 함께 하였으니 제 인생의 대부분의 시간을 선생님과 같이 했다고 말할 수 있지요. 그렇기에 선생님으로 생각하기보다 어머니라 생각할 정도로 피아노뿐만이 아니라 말씀하시는 것, 가르치시는 방법, 성품 등 모든 것을 배우게 되었고 또 배우고 싶었습니다. 기억에 남는 것은 선생님께서 운동을 좋아하셔서 몸이 굉장히 유연하셨는데요. 교직 생활을 하시다가도 잠시 시간이 나면 제자들을 불러서 요가를 시키시곤 하셨는데, 저희가 선생님의 유연함을 따라갈 수가 없었지요. 그렇게 잠깐의 시간도 허투루 보내지 않으시는 분이셨습니다.
신희원_ 지금은 많은 피아니스트들이 요가가 몸에 무리도 안 주고, 근육을 풀어주어 좋다는 것을 알지만, 당시는 요가가 생소할 때였는데, 그렇게 본다면 이경희 선생님은 피아노에서만 선구자가 아니시고 사상적으로도 시대를 앞서가셨던 것 같습니다. 저는 중학교 3학년 때부터 고등학교 3학년 때까지 선생님께 배웠습니다. 그 때는 대구에서 전문적으로 피아노를 치는 분이 안 계셨기 때문에 이경희 선생님이 계심으로써 대구에서 피아노를 배우고자 한 학생들이 전문적, 학문적으로 좋은 교육을 받을 수 있었지요. 대구가 피아노 음악분야에서 오늘날의 좋은 성과를 가져올 수 있었던 기반을 다지셨다고 생각합니다.
이용일_ 그렇다면 이경희 선생님께서 대구로 내려오시게 된 동기는 무엇인가요?
임우상_ 제가 알기로는 6·25전쟁이 일어나자 이경희 선생님과 하대응 선생님이 대구로 피난오시면서 정착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1953년 효성여자대학에 음악과가 만들어지면서 이경희 선생님, 하대응 선생님이 함께 음악과를 이끌어 오셨지요. 저는 이경희 선생님께서 대구 피아노 음악계의 발전에 가장 선구자적인 역할을 하셨다고 보는데요. 물론 그 이전에 김종환 선생님께서 큰 역할을 하고 하셨지만, 김종환 선생님은 대구사범대학 심상과에서 일본 분에게 배우셨고, 이경희 선생님은 이화여전에서 본격적으로 공부하셨으니 그 역량은 실로 대단하셨지요.
이용일_ 이경희 선생님께서는 6·25전쟁 중에 부군과도 헤어지게 되셨는데요.
윤진영_ 네. 제가 여섯 살 때 피난을 오며 아버지와 헤어지시고 홀로 저희 두 자매를 키워오셨습니다. 영문학자였던 아버지는 연희전문대(현 연세대) 교수이셨는데요. 어릴 때 헤어진 제 기억 속의 아버지는 항상 서재에서 책을 읽거나 공부를 하셨던 단편적인 모습들만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와 가까웠던 분들에게 듣기로는 시나 노랫말을 쓰는 것을 매우 즐기셨고, 사람들을 모아 연극이나 시낭송을 자주 해주셨다고 합니다. 대구에 피난 오기 전 이화여대 조교수로 재직하셨던 어머니는 대구에 사시면서 장롱도 정식으로 안 살 만큼 서울로 돌아가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계셨어요. 하지만 이런저런 상황으로 한 해 두 해 넘기다 보니 대구에 정착을 하게 되었지요. 나중에 미국에서 목사로 계시는 사촌오빠를 통해 알게 된 사실이지만, 아버지께서는 전쟁 중 이미 세상을 떠나셨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당시에는 가끔씩 아버지가 김일성 대학에 교수로 있는데 연락 못받았냐고 추궁을 당하기도 하고, 아무튼 어머니 혼자 감당하시기 힘든 일이 참 많이 있었지요. 어머니의 연세가 70세쯤 되었을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것을 아셨는데, 그 일로 점점 우울증이 오셔서 한때 고생을 하기도 하셨어요. 그 이후에 다시 쾌차하시고는 더욱 연주에만 몰두하셨지요.
이용일_ 당시 전쟁으로 인해 온 국민이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받았지요. 이경희 선생님께서도 이러한 고통을 극복하기 위해 음악생활에 더욱 몰두하셨다는 생각이 드네요. 이경희 선생님께서는 초기 효성여자대학 때부터 1982년 정년퇴임하실 때까지 봉직하셨는데요. 김회영 선생님께서 대구가톨릭대학교가 개교하여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변화과정에 대해 간략하게 말씀해 주시지요.
김회영_ 네. 대구가톨릭대학교 1952년 효성여자초급대학으로 개교(문학과, 음악과, 가정과) 하였으며, 1953년 4년제 효성여자대학교로 승격되었습니다. 또한 1980년에는 효성여자대학교가 종합대학(1981년 3월 초대총장 전석재 신부 취임)으로 발전하였으며, 1994년 재단법인 대구구 천주교회 유지재단 효성여자대학교와 학교법인 선목학원 대구가톨릭대학교가 학교법인 선목학원 대구효성가톨릭대학교로 통합되었으며, 2000년 5월 대구효성가톨릭대학교가 대구가톨릭대학교로(음악대학 : 성악과, 피아노과, 관현악과, 작곡과, 종교음악과) 교명을 바꾸었습니다. 2012년 현재는 음악대학 성악과, 피아노과, 관현악과, 작곡과, 그리고 각 전공분야별 일반대학원 석사과정, 음악대학원 석사과정, 교육대학원(음악교육전공) 및 음악학 박사과정(Ph.D in Music) 등으로 변화 했습니다.
이용일_ 그럼 김회영 선생님께서는 언제 이경희 선생님을 처음 뵙게 되셨나요?
김회영_ 저는 10년 전 울산에서 동서 한마음 문화예술축제가 개최되었을 때 처음 뵙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선생님의 연세가 80세 정도 되셨을 텐데, 모든 곡을 암보를 하여 치시는 것에 놀랐습니다. 그리고 음악회가 끝나고 한동일 교수님과 옛날이야기를 하시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았는데, 기억력도 너무 좋으시고 50대 교수님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한마디로 전공은 달라도 선생님의 행동 하나하나에서 배울 만한 점이 많았던 걸로 기억합니다.
이경희 선생의 음악세계
이용일_ 조심스러운 말씀이지만, 예전에 지방대학 가운데서도 효성여자대학교 피아노과 만큼은 서울대학교 피아노과와 견줄 만하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물론 당시에는 돈을 주고 레슨을 받기보다 음악에 흥미를 가진 학생들이 대학에 입학하는 형태였기 때문에 대학 간에 큰 편차가 없었지요. 그렇기 때문에 피아니스트 이경희라는 좋은 선생님이 재직한 효성여대 피아노과가 더욱 발전했던 것이라고도 생각이 됩니다. 그렇다면 이경희 선생님의 음악세계는 어떠했다고 보시나요?
윤진영_ 현대음악까지는 아니지만 그 당시로서는 생소한 라벨, 드뷔시 이후의 곡들도 많이 연주하셨지요.
이용일_ 이경희 선생님께서는 오케스트라 협연은 많이 안 하셨나요?
윤진영_ 어머니께서는 오케스트라와의 협연보다는 반주로 협연을 많이 하셨지요. 특별히 오케스트라와의 협연 중에 기억에 남는 일은 대구시향 30주년 기념음악회입니다. 대구시향에서 창단 연주회를 지휘했던 이기홍 선생님과 그 날 협연했던 협연자를 모시고 당시 연주했던 리스트의 「헝가리안 판타지」로 다시 연주회를 가졌으면 한다고 어머니께 부탁해 왔어요. 당시 협연자는 어머니의 제자였지요. 사연인즉, 그분이 살고 있는 미국으로 연락을 하니까, 이미 피아노를 안 친 지가 오래되어 칠 수가 없다고 하자, 대구시향 측에서는 어머니에게 연주를 해달라고 요청을 하였지요. 당시가 79세였는데, 「헝가리안 광시곡」을 가르친 적은 있지만 연주한 적은 없으셨는데도 연습하셔서 연주회를 가지셨어요. 한번은 언니와 당시 찍어놓은 영상을 보면서 어머니가 고령이셨음에도 걸음걸이가 우리보다 낫다고 이야기한 적도 있었습니다. 대구시향 몇몇 단원들은 어머니를 반주하면서 감격해서 눈물이 났다고 하더라고요.
신희원_ 제가 선생님께 배울 때 효성여대 피아노과의 졸업 연주회나 정기 연주회의 프로그램을 늘 챙겨 주셨어요. 당시에는 음악회도 많이 없어서 프로그램을 주실 때마다 빠짐없이 갔는데, 어린 마음에도 감동이었던 것이 6∼7명이나 되는 학생들의 모두 다른 협주곡을 선생님이 전부 반주하셨던 모습입니다. 한복을 입으시고 치시던 모습, 제자를 배려한 선생님의 마음에 굉장히 큰 감명을 받아 나도 나중에 선생님처럼 훌륭한 피아니스트가 되어 대학에서 제자들에게 꼭 저렇게 할 것이라고 마음먹기도 했지요.
윤진영_ 서울에도 반주하는 피아니스트가 별로 없어서 계정식, 김천애, 김생려 선생님 등 서울에서 열리는 연주회의 반주도 어머니가 도맡아하셨습니다. 한번은 대구에서 성악하시는 분이 독창회를 하는데 반주자가 못 오게 되었다며, 당황해 하면서 어머니에게 오셨지요. 당시 어머니는 그 음악회에 가려고 준비 중이셨는데, 그래서 갑자기 반주를 하게 된 적도 있었습니다.
김화자_ 그러면서도 독주는 독주대로 거르지 않으셨으니 본인이 연습을 얼마나 많이 하셨을지 짐작이 가지요. 그랬기 때문에 고희, 팔순 독주회도 가지실 수 있었던 것이라 생각합니다. 젊었을 때부터 계속 연습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이지요.
이용일_ 그렇죠. 나이 들어서는 새로운 곡을 암기하는 것이 힘들기 때문에 젊었을 때 외워놓고, 공부해 놓지 않으면 연주하기 힘들지요. 젊어서 열심히 하지 않은 사람은 나이 들어서 절대로 연주를 계속 할 수가 없다는 것을 지금 공부하는 학생들도 염두에 두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드네요. 얼마 전에 음악교육신문사 콩쿠르 시상식에 가서 시상하면서 아이들에게 “연습에 있어서 만큼은 바보가 되어라”는 말을 하였는데요. 이경희 선생님께서도 다른 사람에게 오로지 피아노에만 빠져서 바보같이 보였을 수도 있었겠지만, 그것이 어쩌면 가장 현명하신 자세였다는 생각이 드네요.
윤진영_ 또 그것을 당신께서 너무나도 즐기셨고, 피아노 치는 순간을 가장 행복해 하셨어요. 그 시대 여성으로서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일로 평생을 보내는 것이 쉽지 않은데, 어머니는 복이 참 많으신 분이시지요. 또한 어머니가 학교에 재직할 당시에는 학장님이 신부님이셔서인지 학교의 분위기가 매우 가족적이고, 학장님께서도 학교 외의 일들에도 크게 뒷받침해 주셨다고 합니다. 때문에 어머니께서도 수많은 연주활동을 할 수 있으셨지, 요즘 시대 같았으면 그렇게 전폭적인 지지를 받기 힘드셨겠지요.
김화자_ 그리고 선생님이 퇴임하시고 난 뒤에도 1년에 한 번 스승의 날에는 꼭 찾아뵈었지요. 그러면 선생님께서는 저희를 앉혀놓고 꼭 연주를 하셨는데, 그 때까지도 늘 암보해서 치시니까 정말 존경하는 마음이 가득했지요.
윤진영_ 제가 한번은 어머니께 어떻게 그렇게 암보해서 연주를 하시냐고 여쭤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어머니께서는 과거 미국인 선생님이 레슨하실 때 항상 암보를 시키셨고, 그것이 몸에 배여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특히 어머니는 굉장히 부지런 하셨는데요. 매일 아침부터 피아노 앞에 앉으셔서 2시간이 넘도록 암보로 모든 레퍼토리들을 치기도 하시고, 주무시기 전에는 꼭 피아노 주법 책을 읽으셨지요. 아침식사 때는 항상 일본음악방송이나 LP레코드판으로 음악을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이용일_ 우리나라를 세계에 알린 윤이상 선생님도 어떻게 따지면 일본의 《음악예술》이라는 잡지의 부록에 실린 현대음악 악보로 공부한 것이지요. 예전에는 대중가요 작곡가들도 다 일본 멜로디를 모방하여 작곡했으니까요. 일본은 독일에서 온 사람들에게서 직접 배워 교육 과정이 굉장히 엄격하고 체계적인 데 반해 우리나라는 어떻게 보면 뒤죽박죽이었다고 할 수 있는데요. 요즘에는 오히려 엄격한 체제 안에 가두지 않은 뒤죽박죽 교육이 세계적인 음악가를 낳을 수 있었던 기반이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다면 특히 이경희 선생님이 좋아한 작곡가는 누구였던 것 같습니까?
신희원_ 한쪽으로 편향되지 않고 다양하게 치셨고, 그렇기 때문에 제자로써 좋은 점도 많았지요.
윤진영_ 어머니께서 생전에 바흐, 베토벤, 쇼팽, 맥도웰을 좋아하신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으세요. 쇼팽의 곡들로 엮은 연주회를 개최하는 것이 작은 소망이라는 말씀도 하셨고요.
이경희 선생의 교육관
이용일_ 이경희 선생님의 피아노 레슨 방법은 어떠하셨나요.
김화자_ 어떤 곡을 연습해 오라고 요구하셨지만 절대 선생님 주관대로 곡을 해석하지는 않으셨고, 저희가 악보를 연습해 가면 조언해 주시는 방식이셨지요. 꾸지람 한 번, 큰소리 한 번 낸 적이 없을 정도로 전혀 엄격하지 않으셨고, 학생들마다의 차이점을 일일이 파악하여 교육해 주셨다고 기억합니다.
이용일_ 아무래도 미국의 선교사 밑에서 배우시고, 미국에서 공부도 하셨기 때문에 더욱 열린교육을 하실 수 있으셨을 거라는 생각이듭니다. 흉보면서 배운다고 자신이 주위에서 보고 배운 것을 그대로 따라가는 경향이 있는데, 아마 이경희 선생님은 어렸을 때부터 주변의 민주적인 것을 많이 보고 자라셨기 때문에 그것이 자연스럽게 습득되신 것 같습니다.
신희원_ 김화자 선생님께서는 대학생 때 교육을 받으셔서 그렇지 않았던 것 같은데, 저에게는 엄격하신 선생님으로 기억에 남는 일도 있는데요. 중학교 때는 한 곡을 어느 정도 치고 넘어가야 재미가 있는데, 선생님께서는 한 곡을 정확하게 안 쳐온다고 야단치셔서 한 달 반 넘게 정신 바짝 차리고 연습을 해간 적이 있기도 합니다. 그만큼 기초는 엄격하게 가르치셨고, 또 학생에 따라 다르게 가르치기도 하신 듯합니다(웃음).
이용일_ 레슨을 받으면서 또 다른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는 없으신가요.
신희원_ 제가 또 기억에 남는 것은 레슨을 받고 있는데, 선생님 댁 이웃집에서 시끄럽다고 항의해 온 적이 있었어요. 저녁이었는데 당시에는 방음벽도 없었잖아요. 담 너머로 남자 목소리가 들리면서 선생님이 이웃 사람에게 죄송하다고 쩔쩔매는 모습을 보고 괜히 마음이 아팠던 적이 있고요. 또 전화기가 드물었던 시기여서 생긴 일도 있었는데요. 저희 집이 대명동이어서 선생님 댁까지 걸어서 한 시간이 걸렸어요. 버스도 없어서 걸어 다녔는데, 그렇게 레슨을 가면 일하시는 아주머니가 선생님이 갑자기 일이 생기셔서 레슨을 못하게 되었다고 하실 때가 가끔 있었어요. 그럴 땐 연습을 못해서 좋을 때도 있었지만요(웃음). 언젠가 한번은 그런 상황이 2주 연달아 생겨서 속상한 마음에 일하는 아주머니한테 볼멘 소리로 어디가셨냐고 여쭤봤더니 큰따님 때문에 급히 서울에 가셨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어머니로서의 그런 면도 있으시구나라는 생각이 들어서 저 혼자 용서해 드린 일도 있고요(웃음). 대학에 진학할 때 제가 서울에 안 가고 대구에 남기로 결정해서 선생님께서는 효성여대로 오라고 하셨는데, 여중 여고를 나온 저는 개인적으로 남녀공학이었던 계명대에 가고 싶었고, 계명대로 진학하게 되어서 언제나 선생님을 만나면 죄송한 마음이 들기도 하였습니다.
이경희 선생이 국내 음악계에 끼친 영향
이용일_ 이경희 선생님 제자 분 중 국내외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많은 피아니스트가 있는데 소개하여주셨으면 합니다.
김회영_ 제가 아는 바로는 백혜선 선생님, 변화경 선생님, 김춘명 선생님 등 우리나라의 손꼽히는 피아니스트들이 이경희 선생님께 배우셨고, 또한 박숙희, 김화자, 김진숙, 장정순(대구가톨릭대) 강중수, 이은숙(경북대) 이청행, 신희원(계명대) 추승옥,유은숙(영남대) 김지연(대구산업정보대), 신명식(대구예술대) 등 대구에 계시는 전현직 교수 분들 거의 대부분이 선생님의 제자이시지요.
이용일_ 정말 대단한 분들이 많으신데요. 이런 분들이 어렸을 때부터 훌륭한 선생님을 만나서 좋은 음악가가 될 수 있었다는 증거가 되는데, 현재는 가치관이 달라져서 대학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교수들은 손을 댈 수가 없게 되었지요. 예를 들어 지금 이경희 선생님이 교수를 하신다면 어린 학생들은 누구 하나 가르치지 못하고 대학생들만 가르쳐야 한다는 것인데, 그랬다면 백혜선, 변화경 선생과 같은 훌륭한 피아니스트가 나올 수 있었겠어요? 이것은 교육적인 모순이라고도 생각이 듭니다. 즉, 교수 레슨을 부정적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어떠한 방법으로 시정되어야 하는지를 고려해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서울에는 영재음악원이 있지만, 이제 대구 지역에도 영재음악원을 만들자는 목소리를 크게 내주었으면 하는 바람도 있는데요.
임우상_ 지금은 대구교육청에서 영재음악학교를 만들어서 몇 년 동안 진행하고 있습니다. 오디션을 봐서 무료로 레슨을 하고, 오케스트라도 만들고, 합창단도 만들어서 하고는 있습니다. 교육청에서 하기 때문에 고등학교까지 교수에게 레슨을 받을 수 있긴 하지만 문화부 소속으로 해야지 제대로 이루어지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는 합니다.
윤진영_ 대구의 당시 김영욱 중등교육과장님과 채우기 음악장학사님께서 어려운 여건가운데 많은 노력을 하셔서 영재음악학교를 만들었고 다른 도시에서도 견학(벤치마킹)을 온다고 들었습니다.
이용일_ 점진적으로 대구, 광주, 부산 등 거점도시를 중심으로 과거의 교육제도가 없어진 대신 이러한 보완책이 나와야 합니다. 교육청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교육청을 관리하는 사람들이 공교육에는 박사지만 예술교육을 내다보는 비전이 없는 사람들이거든요. 음악계에 대한 안목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이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이번 기회에 대구에서 국립영재음악원을 만들자는 운동을 했으면 합니다.
임우상_ 좋은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지방에 국립 예술기관이라고는 부산에 국립국악원이 하나 있을 뿐 그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대구는 어떤 점에서 부산보다 음악이 앞서가는데, 대구에 국립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끼면서도 이루지 못했다는 것에 대해 선배로서 후배들에게 미안한 마음입니다.
이용일_ 김회영 학장님께 현재 서울에 있는 영재음악원을 보시고 대구지역에 알맞은 점들을 가져오고 또 보완해서 추진해 보시기를 제안합니다. 백혜선 선생과 같은 피아니스트의 어린 시절을 통해 당위성을 가지고 조기부터 재능 있는 아이들을 발탁해서 레슨시키고, 훌륭한 피아니스트로 키워서 지역의 발전에도 이바지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김회영_ 국비를 지원 받는 영재교육원을 이번 기회에 이용일 교수님의 제안을 바탕으로 추진을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용일_ 이경희 선생님이 우리 사회에 끼친 영향은 위에 말씀하셨던 것과 같이 세계적으로 유명한 피아니스트를 배출한 것도 있지만, 그 외에 선생님의 우리나라 음악계에 끼친 영향은 무엇이 있을까요.
김회영_ 저는 이경희 선생님은 많이 못 뵈었지만, 대구가톨릭대에 와서 김화자 선생님을 보면서 어쩜 저렇게 능력과 성품이 훌륭하실까 생각하곤 했는데, 오늘 와서 보니 이경희 선생님께 이어받으셨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대구가톨릭대 피아노과 학생들이 훌륭한 성품의 교수님들 밑에서 배울 수 있게 하셨다는 것 또한 이경희 선생님의 업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신희원_ 이경희 선생님의 따뜻한 마음을 진실되게 느낀 적이 있는데요. 제가 어려서 철이 없었을 때, 선생님께서 대봉동 한옥집에 사셨는데 참 아담하고 정갈한 집이었어요. 신발을 벗고 올라가면 대청마루였고, 오른쪽이 피아노 방이었는데, 어느 날 하루는 대청마루에 올라가니까 보이는 곳에 홍시가 수북이 쌓여있는 거예요. 그 당시에는 홍시가 귀할 때여서 신기하고 먹고 싶었는지 어린 마음에 그 앞에서 제가 계속 보고 있었나봐요. 선생님이 저쪽 방에서 그 모습을 보시고는 같이 먹자고 하시더라고요. 굉장히 무섭다고 생각했던 선생님이 그런 말씀을 하셔서 놀라기도 했고, 정말로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하나의 일화이지만 선생님께서는 맛있는 것이 있으면 꼭 제자들을 부르시곤 하셨는데 어린 마음에 그것이 너무나도 좋았지요(웃음).
이용일_ 그런데 궁금한 것이 큰따님이신 윤진희 선생님은 피아노를 공부하셨는데, 윤진영 선생님은 왜 피아노를 안 치시고 바이올린을 공부하셨나요.
윤진영_ 어릴 때는 언니(윤진희, 재독 피아니스트)가 바이올린을 하고 제가 피아노를 쳤지요. 우연히 언니를 따라서 바이올린을 하다가 그게 전공이 되었어요(웃음). 어머니께서는 어릴 때부터 바이올린을 시키고 싶어 하셨고요. 지금은 제 자녀들도 바이올린을 하는데, 어머니가 살아 계실 때는 3대가 꾸미는 가족 음악회도 열곤 했었지요. 또한 서거 1주기 때 제자들과 가족들이 합동으로 추모음악회를 가졌었지요.
이용일_ 피아노를 전공하시는 분들은 본인들이 워낙 힘드니까 바이올린이 조금 쉽다고 생각하시는지 바이올린을 많이 시키시더라고요(웃음). 악기대로 성격이 형성되는데, 일반적으로 피아노를 치는 분들이 인내심이 강해요. 여러 가지로 생각해 봤을 때 음악이 성격형성에 큰 영향을 주는데, 좋은 선생님 밑에서 배운 피아니스트는 좋은 성격이 형성될 것이라는 가설을 세워봅니다. 다른 말씀 또 있으신가요.
임우상_ 이용일 교수님께서 음악춘추에서 돌아가신 선배 음악가들의 좌담회를 한다는 것이 너무 좋아서 다 읽어보고 있는데,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은 출판사나 연구소에서 음악사전과 비슷한, 즉 인명사전이 없다는 것입니다.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만든 음악사전이 있기는 하나 작곡이 중심이고 연주가에 대한 정보는 많이 없어요. 고매한 연주가 분들이 활동을 많이 했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체계적인 기록을 남기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악기별로 체계적으로 구분된 인명사전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져왔습니다. 그래서 대구에는 원로 음악가회를 만들었었는데, 당시 그 모임에 이경희 선생님이 연세가 가장 많았습니다. 그래서 회장님을 하시라고 권하였는데, 거절하셔서 이기홍 선생님이 초대회장을 2번하셨고, 그 다음으로 김종환 선생님이 맡으셨었지요. 그 때 활동한 것이 대구 음악 반세기 원로들의 증언이라는 타이틀로 원로 음악가 분들에게 본인이 활동한 것을 간략하게 듣고 녹음하여 기록을 남기는 일이었습니다. 그것이 곧 대구음악의 역사이니까요. 그래서 두 달에 한 번씩 진행을 했는데, 일곱 분 정도 하고 못하게 되었지요. 이경희 선생님은 후에 건강이 나빠지셔서 모임에는 잘 참석하지 못하시고, 후에 저희가 선생님 댁에 직접 방문해서 선생님의 살아왔던 이야기를 듣고 녹음하였고, 그 자료는 아직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게 원로들의 증언들을 모으려고 애를 써왔는데, 결론적으로 훌륭한 선배 음악가들의 인명사전이 있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이용일_ 네. 우리가 이렇게 훌륭한 건물, 편안한 시설에서 공부하고 연주할 수 있는 것은 역경 속에서도 음악 활동을 계속 이어오신 이경희 선생님과 같은 선대 음악가들의 공인데, 지금 우리는 너무 감사할 줄 모르고 지내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 좌담회를 통해 이경희 선생님의 음악에 대한 열정과 사랑을 다시 한 번 느낄 수 자리가 된 것 같아 기쁩니다. 바쁘신 와중에도 자리에 참석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리. 박진하 기자 / 사진. 김문기 부장
이용일(한국음악교육협회 명예회장)
임우상(계명대 명예교수)
김회영(대구가톨릭대 학장)
신희원(계명대 교수)
윤진영(대구가톨릭대 명예교수)
대구 계명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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