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음악춘추

바이올리니스트 김광군 / 음악춘추 2012년 8월호

언제나 푸른바다~ 2012. 8. 1. 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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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올리니스트 김광군
겸허한 자세로 마주하는 음악

 

“어느덧 50대 하고도 중반이 되니 무대에서 편안한 느낌을 주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제 나이가 이제는 젊었을 때의 화려함이나 과장, 경직보다는 여유를 풍길 나이잖아요. 그런 것이 묻어 나는 독주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바이올리니스트 김광군과 인터뷰로 만난 것은 이번이 네 번째이다. 독주회를 갖는다는 소식으로 만난 그와 인터뷰를 진행하다 보니 예전에 나눴던 대화가 하나 둘씩 떠올랐다. 그 때도 그는 무대에서 편안한 느낌의 연주를 하고 싶다고 말했던 것이다. 하지만 편안한 느낌의 연주는 둘째치고 나이가 들수록 더 불편하고 어려워지는 듯하다며 웃는 그는, 바이올린이란 악기는 잘 하기 힘든 어려운 악기이기 때문에 더 매력적이라고 말한다. 특유의 겸손 화법이랄까, 따뜻한 냉소랄까. 평범하지 않은 매력을 지닌 바이올리니스트 김광군. 그의 이야기를 지면에 옮겨 본다.

 

연륜이 묻어나는 편안한 무대
김광군의 바이올린 독주회가 9월 4일 오후 8시 예술의전당 리사이틀홀에서 모차르트의 「소나타 마단조 K.304」, 바흐의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 제1번 사단조 BWV1001」, 베토벤의 「로망스」, 생상의 「서주와 론도 카프리치오소 작품28」을 프로그램으로 하여 개최된다.
이번 무대에서 바이올린 명곡들만 선보일 그는, 특히 몇 년 전부터 독주회에서 바흐의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와 파르티타」를 한 곡씩 독주회 프로그램에 포함시켜 왔다. 그가 바흐의 이 작품을 계속 연주하는 것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다.
“몇 년 전 목 디스크가 생겨 오른손으로 하던 양치질을 왼손으로 하고, 전화기도 못 들 정도로 심했습니다. 그래서 한방, 양방 등 좋다는 병원은 모두 가 봤지만 차도가 없었고, 의사 선생님도 더 이상 방법이 없으니 ‘기도하라’는 말뿐이었어요. 일상 생활에서 겪는 불편함은 감수할 수 있었지만 바이올린의 활을 드는 것조차 불가능했기 때문에 이렇게 연주자로서의 생명이 끝나는가 싶어 겁이 났지요. 하지만 아내의 헌신적인 간호와 기도 덕분에 연주를 할 수 있을 정도로 좋아졌습니다.”
물론 이제는 적지 않은 나이이다 보니 젊었을 때만큼의 연주 기량을 보여줄 수 없고, 연습도 오래하지 못하지만 그는 다시 바이올린을 할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고 있다. 그 때부터 아내가 좋아하는 바흐의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와 파르티타」를 독주회 때마다 한 곡씩 연주하기로 약속했다는 김광군은 “솔직히 말하면 피하고 싶은 곡(웃음)”이라며 속내를 털어 놓았다. ‘무반주’, 그리고 ‘바흐’라는 것이 연주자들에게는 매우 거대한 산과도 같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이번 프로그램 중에서 그가 가장 신경쓰는 작품 역시 바흐이다. “연주하고 또 해봐도 훌륭하고 위대한 작품”이라며, 피아노 없이 바이올린만으로 최고의 소리, 바이올린이 가진 모든 소리를 구사할 수 있는 곡으로, 고난도의 테크닉과 활 기술이 필요하다고 소개한다.


이번 작품들은 바이올린 명곡인 동시에 바이올린을 공부하는 학생이라면 중·고등학생 시절 익히는 곡들이다. 김광군 역시 어렸을 때 공부한 곡들이지만 독주회에서 연주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고등학교 때 출전한 중앙 콩쿠르에서 처음 접한 바흐의 소나타, 그리고 바이올린을 공부하다 보면 중학생 때 배우고 싶어지는 생상의 작품, 그리고 예원학교 3학년 때 도전한 한국일보 콩쿠르의 예선곡이었던 베토벤의 「로망스」. 벌써 40여 년 전의 만남이지만, 새로운 작품을 배운다는 설렘, 그리고 콩쿠르 우승의 기쁨 역시 안겨줬던 곡들이다.
“음정, 박자, 리듬 등 악보대로 연주하는 것이 모든 연주자의 꿈이라고 할 수 있지요. 특히 바이올린은 평생 음정과의 싸움입니다. 작곡가는 연주자가 그 음을 맞게 낼 것이라는 생각으로 작곡했을 텐데 연주자가 틀린 음을 내면 미안하잖아요(웃음). 완벽까지는 아니더라도 악보에 써 있는 대로 한 번만이라도 연주하는 무대가 되면 좋겠습니다.”
김광군은 2년 전 독주회에서 처음으로 호흡을 맞췄던 피아니스트 민경식과 다시금 함께 무대에 오른다. 그는 민경식이 15년 후배이지만 독주회를 준비하며 오히려 자신이 음악적으로 많은 도움을 받을 정도로 뛰어난 음악성을 지닌 피아니스트라고 소개했다.

 

음악으로 이어지는 사제지간의 정, ‘리히트 캄머 앙상블’
1988년 가천대(구 경원대)에 관현악과가 처음 개설되었고, 김광군은 유학을 마치고 갓 귀국했던 1989년부터 가천대에서 학생들을 지도하기 시작했다. 그는 올해부터 학과장으로 학과의 일들을 돌보고 있다.
가천대 관현악과에서는 해마다 정기 연주회를 열고 있으며, 현악 합주, 관악 합주 등을 비롯해 플루트, 클라리넷, 트롬본 등 악기별로 재학생과 졸업생, 교·강사가 함께 하는 앙상블 팀도 활동하고 있다. 특히 오는 9월에는 10여 명의 색소폰 전공 학생과 교·강사로 구성된 색소폰 연주팀이 첫 정기 연주회를 갖는다.
“저희 과에는 인문계 출신의 학생도 꽤 있는데, 이 학생들은 아무래도 예고 출신 학생들에 비해 오케스트라 경험이 부족하지요. 그래서 학교 오케스트라나 실내악 등을 통해 앙상블 경험을 많이 쌓도록 독려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연습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지요. 연습만큼은 거짓말을 하지 않으니까요. 음악적인 것도 중요하지만 제가 워낙 음정, 박자에 민감해 학생들에게도 음정, 스케일 연습을 강조합니다.”
그는 가천대의 교수로 재직하기 시작했을 무렵 현악 합주에서 만났던 학생들과 ‘리히트 캄머 앙상블’을 창단해 리더로 이끌고 있다. 가천대 음대 관현악과가 배출해 낸 전문 연주자들로 구성된 이 연주 단체는 지난 2008년 3월 창단 연주회를 가진 이래 꾸준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모인 첫날부터 최소한 세 시간 반 이상씩 매주 주말에 모여 연습했습니다. 추석 명절 때도 모였고, 네 마디를 갖고 40∼50번씩 연습하기도 했어요. 단원들이 삼십대이고, 오케스트라 단원, 타 전문 연주 단체 멤버, 대학 강사 등으로 활동하고 있지만 사제지간으로 만난 사이라 이러한 연습이 가능했지요. 함께 연습, 연주할 때 단원들은 학생이었던 이십대, 저는 삼십대로 돌아간 느낌입니다. 시간가는 줄 모르고 정말 즐겁게 연주했었기에 저도, 단원도 창단 당시의 열정을 잊지 못하지요.”
그는 솔로 연습도 재밌지만 특히 현악의 네 파트가 어우러져 화성을 맞춰 가는 과정의 즐거움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고 말한다. 연주의 즐거움보다 그 과정에서 느끼는 즐거움이 더 크다는 것이다.
그들은 올해 잠시 재충전의 시간을 갖고, 내년 4월에 정기 연주회로 다시 청중과 만날 예정이다. 그리고 김광군의 모차르트 바이올린 협주곡 전곡 연주회에서 함께 할 계획으로, 두 번에 걸쳐 진행될 전곡 연주의 첫 번째 무대는 내년 9월에 마련된다. 

 

‘나는 바이올리니스트이다’
김광군은 막내 외삼촌의 손에 이끌려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바이올린을 시작했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막내 외삼촌이 집안 어른들의 반대로 바이올린을 전공하지 못했고, 그것이 한이 되어 막무가내로 첫 조카인 나에게 바이올린을 배우게 한 것”이다.
한마디로 외삼촌의 대리 만족을 위해 바이올린 잡게 되었지만, 그의 꿈은 어머니처럼 의사가 되는 것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지금도 병원에서 가운 입은 의사들을 보면 부럽다는 그이다.
그는 초등학교 4학년 때 서울예고 오케스트라와 협연했었으며, 6학년 때는 이화·경향 콩쿠르에서 1위를 차지하는 등 일찍이 실력을 인정받았지만 바이올린을 더 이상하고 싶지 않아 콩쿠르가 있었던 9월 이후로 악기를 그만두었다. 그리고 부친의 사업으로 인해 부산으로 내려와 인문계 중학교에 재학 중이던 그는 반년 만에 다시금 바이올린의 길로 이끌리게 된다.
“4월 초였는데, 은사님이셨던 고 배병호 선생님께서 국립교향악단의 연주 차 부산에 오셔서 잠시 저희 집에 방문하셨다가 제가 바이올린을 그만뒀다는 이야기를 들으시고는 당장 서울로 와서 다시 악기를 시작하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2주 만에 악기를 들고 서울에 왔고, 독일에서 유학하시고 막 귀국한 지 1주일 된 고 이종숙 선생님 앞에서 엉겁결에 연주를 한 후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한 달 후인 5월 1일부터 예원학교에 편입을 해 다시 바이올린을 시작했다. 하지만 다시 인문계 중학교에 가겠다고 떼쓰며 연습도 하지 않고 의사가 되겠다는 그를 보며 스승인 고 이종숙 선생은 그의 부모에게 예고에 보내지 말라고 할 정도였다. 하지만 아버지의 강요로 서울예고에 진학했고, 대학에서 바이올린을 전공하면서도 의사의 꿈을 이루지 못한 것이 후회스럽다는 그는, 솔직히 말해 열심히 공부했다 해도 의사는 못됐을 거 같다며 웃었다.
그는 바이올린에게서 벗어나려 했지만 바이올린이 그를 놔주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억지로(?) 바이올린을 전공한 학생이라고 하기엔 그의 재능이 너무나 특별했기 때문이 아닐까.
바이올리니스트 김광군은 예원학교와 서울예고를 거쳐 서울대 음대, 독일 쾰른 음대, 스위스 베른 국립음악원을 졸업했다. 한국일보 콩쿠르, 중앙일보 콩쿠르에서 1위를 차지했으며, 일본 NHK Hall, Hongkong City Hall 및 독일, 영국, 룩셈부르크, 스위스 등 유럽에서 협연, 독주 및 실내악 연주를 가졌고, 국내외 유명 교향악단과 다수의 협연 무대를 가졌다. 그리고 서울챔버, 바로크 앙상블, KBS 교향악단, 독일 본 교향악단 단원을 역임하기도 했다.
그에게는 서울대 음대 2학년 재학 시절이었던 1980년 세종문화회관에서 가졌던 독주회가 특별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사실 그렇게 바이올린을 멀리하고 싶어했던 그가 어떻게 대학생 신분으로 세종문화회관에서 독주회를 가질 수 있었는지 의아했는데, 여기에도 숨은 이야기가 있었다.


“그러지 않아도 연습하기 싫어했기 때문에 대학교에 진학하자마자 악기를 케이스에 넣고 보지도 않았어요. 그러자 이종숙 선생님께서 저에게는 묻지도 않고 어머니와 상의하신 후 세종문화회관을 대관하신 거예요. 사실 그런 곳에서 학생이 독주회를 할 수 없는데 말이지요. 그래서 정말 마지못해 연습하고 무대에 섰는데, 많은 분들께서 연주에 대해 칭찬을 해주셨던 기억이 납니다. 그래서 저에게는 그 독주회가 일종의 터닝 포인트처럼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습니다.”
이런 그의 이야기만 들으면 그가 마치 음악, 바이올린을 싫어하는 것처럼 들릴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과거에 바이올린을 그만 두고 싶어했던 것은 다른 사람들 앞에서 연주하는 것에서 부담을 느끼는 성격이었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을 듯하다.
“다른 분들은 그렇지 않으시겠지만, 젊은 시절 저는 매일 보는 사람, 어제 같이 술 마신 친구, 혼을 낸 학생 앞에서 연주한다는 사실이 불편하더라고요. 하지만 지금 생각하면 부모님과 은사님께 참 감사하지요. 제가 늦게 철들었어요(웃음). 40대가 지나고 나니 음악만큼 좋은 것도 없고, 학생들을 지도하는 것에서 큰 보람을 느낍니다. ”

여담이지만, 그는 애견가이다. 어렸을 때 마당이 있는 집에서 살며 개를 여러 마리 키웠던 그는 개집에서 잘 정도로 개를 좋아했고, 애견 사랑은 계속 이어져, 몇 년 전부터 유기견들을 데려와서 돌보는가 하면, 유기견 보호소에서 봉사도 하고 있다.
“정년 퇴직 후 유기견 보호소를 운영하는 것이 꿈입니다. 지금 집에서도 개를 세 마리 키우고 있어요. 유기견들을 한두 달 보호한 후 새 보금자리를 찾아주는 일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서울 근교의 마당 있는 집에서 유기견들을 돌보는 것이 꿈입니다. 제가 사람을 돌볼 재목은 못되지만 개에게 봉사하는 것만큼은 즐겁고 기쁩니다(웃음). 말년에 체력만 허락된다면 꼭 하고 싶습니다.”

 

글_배주영 기자 / 사진_김문기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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